제181화. 신앙의 대가 (1)
검의 폭풍이 한바탕 지나간 뒤, 가까스로 눈을 뜬 청률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변에 서 있는 괴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발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반죽음 시체들이 몇몇 있기는 했지만, 유의미한 위협이 되지는 못하리라.
그것들을 확인한 이후에 청률의 시선이 곧바로 향한 곳은 당연하게도 청유백이었다.
시타를 감싸 안고 바닥에 꿇어앉은 청유백은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그 아래에는 아직까지도 뚝뚝 흘러내리는 피가 모여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청률의 눈동자가 수축했다.
“저, 저거…! 파, 팔이 잘렸잖아! 유백아! 눈 좀 떠봐라! 유백아!”
“어, 어떻게 하냐?! 지질까?!”
“이렇게 깔끔하게 잘리면 붙일 수 있기는 하겠지만… 도구도 사람도 없어. 살리려면 지져서 피라도 멈추는 게…….”
당황 속에서도 일단은 이성적인 판단을 한 것을 칭찬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들로서 이끌어 낼 수 있는 해결책은 일단 그것뿐이었다.
지혈로 해결될 만한 크기의 상처가 아니었고, 청유백이 기절한 탓에 기맥을 조절할 방법도 없는 이상 당장 목숨을 살릴 방법은 그것뿐으로 보였다.
시타는 머리 위로 전해져 오는 청유백의 몸을 지탱하며 바닥에 옮겨 뉘였다.
그리고 텅 빈 허공과 청률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진정하세요. 괜찮을 것 같아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대로 있으면 당장 목숨이…….”
청률은 말을 온전히 끝맺지 못했다.
이 시체 더미에서 갑자기 혼자 들썩이는 물체가 시야 한구석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손……?”
그것은 홀로 움직이고 있었다.
홀로 외딴 데 떨어져 축 늘어진 청유백의 손이 갑자기 둥실 허공에 떠오르더니, 그대로 천천히 청유백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
“저, 저게 왜 혼자 움직이냐?”
묵태곤은 쫙 소름이 돋은 팔을 애써 쓰다듬었고, 청률은 부릅뜬 눈을 잠시도 감을 수가 없었다.
어떤 특별한 무언가로 연결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바람이 불어 공중에 떴다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위치에 떠 있었다.
마치 귀신이 직접 저것을 들어 청유백에게 옮겨 준다면 저런 모양새가 아닐까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청률과 묵태곤에게는 만사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들고 있는 천화가 보이지 않았다.
천화는 짜증 반, 걱정 반인 표정으로 시타와 시선을 나누었다.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손을 대충 청유백의 옆으로 던져주는 것이었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그것은 청유백의 팔 근처로 떨어졌고, 천화는 그것을 보며 청명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잘 될는지…….”
천화는 미간을 찌푸렸다.
청유백이 아무 생각도 없이 자신의 손을 잘라 버릴 리 없었고, 당연히 뒷일을 해결할 방법 정도는 생각해 두었더랬다.
천화도 그것을 알고 있었으니 걱정 대신 고얀 놈이라며 욕이나 박아 준 것이고 말이다.
그러나 기실, 이것은 반쯤 도박이었다.
잘 되리라 확신할 수 있는 근거도 없었으며, 믿을 수 있는 이유도 없었다.
단지 이것이 차악이었기에 행했을 뿐이었다.
최선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무슨 배부른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
“아가, 조금 떨어지려무나.”
“……!”
시타는 천화의 말에 고개를 냉큼 끄덕이며 청률과 묵태곤이 있는 방향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곧, 천화는 청명휘의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단순한 행위였다.
하지만, 그로써 비롯되는 결과물은 천하의 이치에는 썩 걸맞지 않은 것이었다.
“저건…….”
시타는 그것을 볼 수 있었다.
산산이 갈라진 육체 조각들 사이로, 청색의 기운이 흘러나와 천화에게로 종속되는 모습을.
그리고 그 청색 기운의 뒤로, 맑고 깨끗한 순수한 영혼이 육체의 구속에서 해방되는 모습까지 똑똑히 눈에 담았다.
영혼은 곧 빛으로 화하여 사라졌지만, 청색 기운은 천화에게 스며들어 그녀의 녹색과 섞여들었다.
시타는 무의식중에 입을 떼었다.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것을 보자마자 그런 질문이 나왔다.
본능적인 호기심이었다.
“그게, 뭐죠?”
“……청련. 본녀의 업 중 하나지.”
천화는 손을 펴고는, 그 위에 작은 청색의 구체를 둥실 띄워냈다.
작디작은, 손톱 크기 정도의 구슬이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 구슬 전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가는 실이 뭉쳐져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게 하나인가…. 모자라구나.”
영혼의 흡수.
그리고 능력의 강탈.
녹련에게 했던 것이기에, 이번에도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멋지게 들어맞아, 이 빌어먹을 목숨을 건 도박에서 승기를 잡은 듯 보였지만.
하지만… 모자랐다.
역시 청련 본체가 아니니만큼 많은 기대는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리라.
천화는 쯧, 하고 혀를 차며 다른 괴이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 상관없는가.’
아직 괴이들은 이렇게도 많다.
그저, 약간의 수고와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동시에 여럿은 불가능하니, 한 번에 하나씩… 그리고 이 구슬을 모아가는 것이다.
몹시도 귀찮은 일이었다.
그리고, 막연히 이리 될 것이라 짐작했기에 청유백을 향한 괘씸한 마음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천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금 그것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 * *
‘흐리다.’
어둡고… 아니, 밝은가?
…….
……….
‘…잘 모르겠다.’
청유백은 흐린 시야에 애써 눈을 끔뻑이며 몸을 움직이려 시도했다.
손을 꺾고, 팔을 휘둘렀으며, 도약하여 다리를 움직였다.
몸은 뜻대로 움직였다.
다만 낯설었으며, 그가 의도한 대로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않을 뿐이었다.
기묘한 감각이다.
청유백은 하늘에 뜬 태양을 보았다.
산등성이에 걸친 구름을 보았고, 높다란 절벽 사이에서 지저귀는 산새들의 무리도 눈에 담았다.
흐린 시야에서도, 아름다운 산천의 모습은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얼마 가지 않아, 청유백은 이 주변의 상황을 인지할 수 있었다.
‘……꿈.’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첫 번째 회귀를 겪은 뒤로 꿈 따위는 꾼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몽롱하고 기묘한 감각은, 분명 오래전 느꼈던 그것이 분명했다.
‘이제는 꿈꾸는 방법까지도 잊었었다고 생각했는데…….’
청유백은 헛웃음을 지었다.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문득, 청유백의 앞에서 그를 이끌고 있던 노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낯선 얼굴이었다.
어디선가 본 적도, 스쳐간 적도 없는 늙은 노인이었다.
그럼에도 어딘가 친숙했다.
알고 있는 사람… 나아가, 가까웠던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청유백이 알 수 없는 감정에 미간을 찌푸릴 무렵, 노인이 청유백에게 물어왔다.
“목아.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스승님.”
‘……?’
청유백 스스로가 대답했지만, 그가 생각한 대답은 아니었다.
몸이 스스로 움직였다.
의지 없이 스스로 그 노인을 따라 걸었고, 그 노인이 묻는 질문에 따박따박 대답했다.
“네 사저를 너무 미워하지 말거라. 다 나름의 사연이 있음이야.”
“알고 있습니다. 다만… 자기 혼자만 잘났다는 듯이 구는 게 싫을 뿐입니다. 모두가 노력하고 있는데요.”
“사람마다 다른 삶의 방식이 있는 것 아니겠느냐. 부끄러워 밀어낼 뿐인 게야.”
“…….”
알 수 없는 문답이었다.
이 노인도, 노인이 말하는 사저라는 자도 청유백으로서는 알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드는 생각은, 이 주변의 지형이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기시감이 든다는 점이었다.
청유백의 입이 다시금 달싹였다.
“스승님,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쏙독새 골짜기. 네 사저가 그곳을 퍽 좋아한다는 것은 알더냐?”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인연은 무릇 관심을 가지는 것부터 시작된단다. 너희는 가족과 마찬가지이니, 서로를 보듬어 주려무나.”
“예…….”
청유백은 그리 대답하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쏙독새 골짜기.
기시감이 드는 이름이었다.
분명 어딘가 들은 적이 있었다.
익숙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다…….
‘아.’
귀무곡(鬼霧谷).
청유백은 그 이름을 떠올렸다.
마교의 서쪽 골짜기에 위치하는 그 저주받은 장소의 이름을 말이다.
분명 천화가 이르기를, 그녀의 때에 그곳을 쏙독새 골짜기라 불렀다 했더랬다.
그곳까지 생각이 닿자,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이상한 꿈이군.’
청유백 자신의 꿈이 아닌 듯 보였다.
꿈보다는 기억.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기억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주변 풍경은 빠르게 변해갔고, 초목과 산새들이 지저귀는 골짜기는 어딘가 건물의 안쪽 풍광으로 변했다.
이번에는 조금 시야가 높았다.
아무래도, 방금 전 보다는 조금 더 나이를 먹은 사내의 몸 같았다.
“…….”
청유백은 눈을 굴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청유백이 본 적 없는 건축이었다.
생소한 가구들이었으며, 처음 보는 건축의 양식이었다.
책상 위에는 난잡하게 어질러진 죽간들이 놓여 있었다.
수십, 수백 개에 이르는 죽간들은 필요에 따라서인지, 혹은 그저 정리가 귀찮아서인지 각자의 자리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죽간들의 한가운데, 이 방의 가장 가운데에는 한 여성이 위치하고 있었다.
청유백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번에도 그의 의지가 아니었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곧 그녀는 청유백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 * *
청유백이 무의식중에 가장 처음으로 느낀 것은 청각이었다.
언제 자신이 꿈에서 깨어났는지도 깨닫지 못했고, 방금까지 보았던 것이 정녕 꿈이었는지도 확신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청유백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까닭은, 시끄럽게 귓가를 때려오는 말다툼 탓이었다.
“괜찮은 게 확실해? 아니, 나는 납득을 못 하겠다니까. 무슨 손이 스스로 날아와서 다시 붙냐?”
“낸들 아냐. 그냥 그러려니 하는 거지. 항상 그랬잖아.”
“이봐 꼬마 아가씨, 말 좀 해 보라고. 뭔가 알 거 아냐?”
“저도 잘은…….”
청률과 묵태곤의 질문에 시타가 곤란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그저 소란스럽다가, 점차 다툼의 내용까지도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거기까지 정신을 차린 다음, 청유백에게 다가오는 것은 오른손의 감각이었다.
꿈틀.
손은 멀쩡히 움직였다.
아무래도 도박은 성공한 듯 보였고, 저들이 싸우는 이유는 천화가 벌인 ‘치료’ 탓인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청유백은 눈을 끔뻑였다.
나뭇잎 사이로 새어오는 석양이 곧 시야에 들어왔고, 천화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왔다.
[정신이 좀 들더냐?]
‘빌어먹게도, 대충은.’
짜증이 치밀 줄 알았는데, 예상 외로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것은 안도감이었다.
청유백은 생각보다도 멀쩡한 자신의 오른손을 보며 쥐었다 폈다 해 보았다.
잘렸던 부분은 실로 깔끔하여, 흉터도 거의 남지 않은 채였다.
“일어났구려, 형제여.”
후산은 청유백의 기상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는 말을 걸어왔다.
다른 확인은 필요 없었다.
서로의 안위를 걱정할 사이도 아니었고, 그런 것을 물을 경황도 없었다.
…각자의 이유로 말이다.
청유백은 곧장 물어왔다.
“놈은?”
“미안하오. 놈이 상정한 것 이상으로 신속했소…. 어느 순간부터 더욱 빨라지더니, 그대로 도망쳤다오.”
“…그런가.”
…….
…….
청유백은 후산과 눈을 마주하며 몇 초 동안 응시했다.
후산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청유백을 바라보았고, 청유백은 곧 고개를 돌려 주변 상황을 파악했다.
심장 박동, 표정, 흘리는 땀까지.
후산은 완벽하게 청유백을 속여 넘겼노라고 확신했다.
자신이, 의도적으로 놈을 보내 주었으리라고는 결코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었다.
심장 박동까지 조절해가며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으니 말이다.
…다만, 후산은 청유백의 귓가에 속삭이는 다른 존재가 있음은 알지 못했다.
[거짓이구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