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이선(異線), 청련 (5)
투둑.
단 한 번의 소음 뒤로 바닥에 떨어진 것은 작은 물체였다.
그러나 청명휘의 머리는 아니었다.
그의 기세는 여전히 맹렬했고 날카로웠으며, 무엇보다 ‘머리’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라기에는 너무도 작고 보잘것없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것이 떨어지고 난 이후에도 두 사람의 검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청유백의 머리인가 하면, 그 또한 아니었다.
물론 놈의 검격은 여전히 청유백의 머리 위로 치닫고 있었으며, 찰나가 스쳐간 이후에는 그의 머리를 사정없이 반으로 가를 듯 보였다….
“…….”
…하지만, 그것이 지금은 아니었다.
* * *
한 순간 전, 청유백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일각… 아니, 반각.’
이대로 가다간 마기가 바닥을 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최대한 희망차게 생각해 봤자 일각이었다.
청유백에게 남아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청명휘가 달려드는 순간, 청유백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상황을 타개할 방도와, 눈앞의 적을 척살할 방법을 찾는 결단이었다.
[어찌할 테냐?]
“도박이지.”
다만 달리 무어 할 것이 있을까.
청유백은 이딴 외통수에 몰린 자신이 우스워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기실, 방법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적은 눈앞의 청명휘.
결핍은 마기의 부족.
문제 사항은 지거광에게 저당 잡히고 있는 자신의 오른손.
이 세 가지 사항을 동시에 해결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지 않던가.
그러니, 결단을 내리는 것까지도 단순한 과정이었다.
결정이 있다면 당연히 물이 흐르듯 이어지는 행동도 있는 법.
청유백은 쇄도하는 청명휘의 정면을 맞아 달려들었다.
왼손에 검을 쥐고, 허공에 검 한 자루를 띄운 채로.
‘그래, 어차피 도박이야. 뒤지면 날아가고, 걸어서 이기면 그제야 본전인… 좆같은 도박이지.’
뒈져 버리면 까짓 팔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차피, 이대로 가다간 팔은 박살 나게 되어 있다.
일각 후에는 마기가 바닥을 드러낼 테고, 이 손목을 보호하는 강기도 무너지고 말리라.
뼈는 아주 가루가 되어, 손목이 있었던 흔적 정도나 남을 것이다.
그렇기에 청유백은 생각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단 한 번─ 기회를 만들리라.
‘스스로 자른다.’
아주 깔끔하게, 다시 이어붙일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그 생각과 동시에 절단음이 들려왔다.
청유백의 검이 하늘을 날았고, 그것들이 꿰뚫은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청유백 자신의 손목이었다.
불에 타는 것만 같은 끔찍한 격통이 신경을 내달렸지만, 상관없다.
고통은 삶의 증거다.
여전히 이 감각이 느껴지는 한, 자신의 검이 청명휘의 검보다 느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청명휘의 바로 앞에서 청유백의 손목이 잘려나갔고, 손목을 감싸고 있던 마기는 해방되어 청유백의 검에 담겼다.
그 모양새는 퍽 기괴했다.
청명휘는 괴이들의 등을 밟고 뛰어올라 청유백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고, 청유백은 대뜸 그것에 달려들더니 자신의 손목을 잘랐다.
보기에 심히 멍청한 행위였다.
죽기 직전에 자신의 상처를 늘린 것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변화는 다음 순간에 일어났다.
“크륵…?!”
찰나─
검이 가속했다.
바닥에 떨어진 손목을 신호 삼기라도 하는 듯이, 청유백의 세 자루 검은 동시에 힘을 얻었다.
청명휘의 검과 청유백의 검.
서로의 급소를 향해 찔러들어 가며, 누구의 생명을 먼저 취하는지를 내기하듯 쇄도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청유백의 왼손에 들려 있던 검이었다.
그것은 이제 충분한 속도를 얻어, 날아들던 청명휘의 검과 맞부딪쳐 주인을 보호했다.
두 번째로 움직인 것은 청유백의 옆에 떠 있던 검이었다.
그것은 이전과 다른 강력한 칠흑의 검기로 둘러싸여, 단번에 청명휘의 목을 꿰뚫으려 움직였다.
“……!!”
하지만, 불발.
청명휘는 기괴한 각도로 목을 꺾어내며 검을 피해냈다.
산 사람이었다면 저리 목을 꺾은 것만으로도 즉사했을 모양새였지만, 놈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머리가 몸에 붙어만 있으면 되는 듯 보였다.
“…미친놈.”
한 번 부딪친 청유백과 청명휘는 반동으로 석 장씩 밀려났고, 청유백은 다시금 검병을 꼬나쥐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하지만, 청명휘는 그러지 못했다.
─푸욱.
“…키…엑…….”
세 번째로 움직인 것은, 바닥에 꽂혀 있던 검이었다.
가장 처음에 날려 무의미하게 튕겨지고, 바닥에서 힘을 잃은 채 방치되어 있던 그 검이었다.
청명휘는 초점 없는 새하얀 동공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뒤에서 꿰뚫은 검을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빼내어 보려 칼날을 쥐지만, 이미 무의미했다.
“…뒤져라, 괴물 새끼야.”
이미 놈에게 사적인 감정 따위는 없었다.
생사가 오가는 전투에서 일말의 연민을 느낄 정도로 무딘 인간이 아니었고, 그리 될 정도로 깊은 관계도 아니었지 않던가.
청유백은 공허한 오른손 대신 왼손을 주먹 쥐었다.
놈의 몸에 두 자루의 검이 더 박히고, 청명휘는 첫 번째와 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공중에서 붙들려, 몇 조각으로 나누어져 철퍼덕 바닥에 떨어졌다.
[괜찮으냐?]
‘빈말로도 그렇다곤 못하겠군.’
청유백은 자신의 시야가 점점 흐려지고 있음을 명확하게 느꼈다.
고통은 견딜 수 있지만, 생물인 이상 혈액의 부족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낭보도 있었다.
청명휘는 더 이상 되살아나지 않았다.
…아니, 이를 낭보라 불러야 할까?
최소한, 청유백을 바라보는 청명휘의 표정은 그를 부정하고 있었다.
“도, 동생아. 너…….”
“…….”
청유백은 무어라 대꾸할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
기껏해야 앞으로 숨을 다섯 번 정도 내쉴 수 있을까.
‘앞으로 조금.’
흐린 시야 너머로, 아직 수십이 남은 괴이 무리가 스쳐갔다.
이제 빠른 움직임을 보이는 고수 괴이들은 전부 처리하여 청률과 묵태곤의 움직임에도 상당히 여유가 생겼지만, 청유백이 지금 이곳에서 쓰러진다면 퍽 곤란한 상황이 될 터.
위험한 공간에서 무책임하게 쓰러지는 것은 사양이었다.
‘앞으로… 조금만 더.’
청유백은 자신의 몸에 남은 마기를 전부 끌어모았다.
팔을 보호하던 마기도 이제는 사용할 수 있었다.
티끌만 한 마기의 편린까지 전부 긁어모아, 소용돌이치듯 회전시켰다.
향하는 곳은, 주변의 모든 검.
괴이의 숫자만큼 날붙이가 있었고, 그것들은 손을 잃고 몸을 잃은 주인들의 품을 벗어나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청유백의 마기는 팔방으로 쏘아져 나가 땅에 떨어지고 부서진 검들에게 깃들었다.
오래 움직일 수는 없다.
다만 한 순간이면 되었다.
그 모든 칼이 동시에 허공으로 떠올랐다.
반경 십수 장, 떠오른 칼은 수십 자루.
이후, 청유백은 시타를 품에 안아 몸을 숙이고는 목 놓아 외쳤다.
“…숙여!!”
“?!”
청률과 묵태곤은 놈들과 대치하다 말고 몸을 날려 엎드렸다.
짙은 살기가 느껴진 탓이었다.
일순간 당황하거나 고민할 수도 있었지만, 턱밑까지 치달은 죽음의 기운은 퍽 냉철한 판단력을 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아아아!!
검의 폭풍이 몰아쳤다.
강철의 신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검이 부서지고 조각났으며, 그 부서진 조각들은 각자의 주인의 품으로 돌아가 사지를 찢어 놓았다.
청유백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는 칼날은 주변에 서 있는 존재를 무차별적으로 찢어발겼다.
그저 단순한 회전이었다.
신묘한 묘리를 담아낼 기력도, 검기를 담아낼 힘도 남아 있지 않았으나…….
그저 그것이면 되었다.
이지 없는 괴물을 상대하는 데에 어찌 묘리가 필요할까.
“끄, 끝인가……?”
청률은 기겁한 눈치로 고개를 들었다.
잠깐의 폭풍이 지나가고, 그 주변에 서 있는 존재는 없었다.
주변에 온갖 종류의 육편이 난무했다.
주변의 풀은 잎사귀를 모조리 잃어 피와 섞인 거름이 되고 있었고, 나무들은 사납게 껍질이 긁혀 흉측한 몰골이 되어 있었다.
청유백이 시타를 안고 꿇어앉은 것은 그 광경을 못 보게 하려 함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참혹한 광경이었다.
청유백에게 꿇어앉은 무릎을 다시 펴 일어설 기운은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지혈할 시간도 없었으니, 여전히 손에서는 대량의 출혈이 이어지고 있었다.
시야가 완전히 암전되기 직전, 청유백은 가까스로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천화.”
“빌어먹을 놈팽이 같으니라고. 본녀는 네 조수가 아니니라.”
청유백은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와 녹색 빛과 함께 부유하는 천화를 보며,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한편, 후산은 지거광을 쫓았다.
시타를 놓고 오는 것이 썩 내키는 일이 아니었지만, 모시는 이의 명령이니만큼 거부할 수도 없었다.
‘신속하게 잡고 돌아가야겠어.’
물론, 청유백이 아무런 계획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청유백, 형제가 어떻게든 해 주긴 하겠지만…….’
고작 며칠이었지만 후산이 그에게 느낀 감정은 퍽 인상적인 것이었다.
냉철하고, 계획적이며, 젊다 못해 어리기까지 한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비관적이다.
항상 최악의 최악을 상정하며, 완벽한 계획이 있기 이전에는 움직이지 않는 사내였다.
최소한, 후산은 그를 그렇게 평가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고, 당장 시타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살아 계셔 주십시오, 아가씨.’
후산은 질풍같이 땅을 박차며 지거광의 바로 뒤까지 따라붙었다.
놈은 청유백과 싸울 때 보이던 기묘한 움직임이 무색하게, 전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지거광이 무리하여 도망치려 하는 낌새가 보였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본격적으로 추격을 시작하고 채 스무 발자국을 더 떼기도 전에, 후산은 지거광의 뒷목을 틀어잡아 붙잡았다.
“이봐, 잠깐…….”
그리고, ─우드득.
놈의 목뼈를 부러뜨려 척살했다.
이방인의 하찮은 변명 따위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전사였고, 임무의 완수를 위해서만 살아가는 이였다.
방해되는 것은 치울 뿐.
거슬리는 것은 배제할 뿐.
그리고, 눈앞의 지거광은 분명히 배제해야 하는 적이었다.
“……끝인가.”
후산은 놈의 뒷목을 붙잡은 채로 질질 끌고 다시 일행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장 돌아간다면, 자신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했고, 그리 실행할 자신이 있었다…….
모든 것은 순조로울 터였다.
약간의 사고가 있었지만 서녕은 코앞이고, 문제되던 것까지 방금 직접 손으로 잡아 죽였으니 걱정거리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허나, 문득.
“잠깐잠깐, 잠깐. 아이고 힘들다…. 여기까지 하자고. 여기까지.”
목뼈가 부러져 죽은 줄 알았던 놈의 목이 다시 세워지더니, 살갑게 웃으며 그리 말을 걸어왔다.
후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랬지, 목이 베어졌어도 살아 있었지… 어떻게 해야 죽는 거지? 갈아 마시면 되는 건가?”
“아이고 이 빡대가리야, 여기까지 하자니까 그러네. 이해를 못 해?”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나는 아가씨의 명령을 따를 뿐이다. 친구여, 너의 처분은 아가씨께서…….”
“그놈의 아가씨!”
지거광이 후산의 말을 자르며 소리쳤다.
목이 붙잡힌 채여서 이러다 할 저항을 할 수 없었지만, 지거광의 태도는 묘하게 당당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이 우둔한 친구야, 내가 뭣 하러 그 자리를 떴는지 이해를 못 하냐?”
“……?”
“아, 형제니 친구니 지껄이는 놈들은 이래서 문제야. 생각을 안 해. 배역을 맡을 때에도 좀 생각을 하라고.”
후산은 이를 갈았다.
이래서 망할 목표물에게 말할 시간을 주지 않고 죽이는 것이다.
아무리 임무에 집중한다고 해도 결국은 보고 들을 수 있는 인간인지라,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되면 임무의 다른 이면에 대해서 의심하게 되고 만다.
후산이 다시 놈의 목을 부러뜨리려 손에 힘을 주려는 찰나, 지거광이 당황하며 일갈했다.
“네놈 임무가 뭔지 잊었나!”
“임무?”
“그래, 임무!”
“아가씨의 명령을 수행하는…….”
“그딴 거 말고! 젠장, 그냥 우리가 데려왔어야 했는데. 무슨 빌어 처먹을 놈의 준비를 한다고…….”
지거광은 욕지거리를 씹어뱉듯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저년을 서녕으로 데려와야지!”
“…….”
순간 후산의 표정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다.
그것은 분노로 보이기도 했고, 의문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그 본질은, 당혹이었다.
후산에게는 임무가 있었다.
자신의 목숨과 바꾸어서라도 완수해야 할, 그의 천명(天命)이었다.
하지만, 놈이 어떻게?
“어찌 아는 거지?”
“이런, 씨발… 어떻게일 것 같은데? 병신 같은 질문도 정도가 있지.”
“…….”
“헛짓거리 하지 말고 네 임무나 수행해라. 하찮은 동료 놀이에 빠져 마을을 잊은 건 아니겠지?”
시타를 서녕으로 데려가는 것.
정확했다.
그것이 후산의 임무였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임무였지만, 그 대가로 약속받은 보상은 결코 적지 않았다.
후산과 시타가 떠나온 마을의 사람들이 족히 십 년은 풍족히 살 법한 금을 약속받았다.
거래의 대상이 누구인지, 대체 왜 시타를 원했는지는 후산으로선 알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일개 무인일 뿐이고, 의사 결정은 마을의 어른들이 할 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사랑하는 딸아이의 목숨을 헛되이 버리게 하는 그른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 믿었다.
…허나 그렇다면, 눈앞의 괴물이 그 ‘거래의 대상’이란 말인가?
“기억해라. 네 역할은 그녀를 서녕으로 데려다 놓는 거야. 상처 하나 없이, 온전하게.”
“…온전하게.”
“그것이 우리의 거래였지 않나. 그렇지?”
후산은 쉬이 대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결코 거짓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후산은 결국 그 손을 놓아야만 했다.
임무를 완수하는 데 그 임무의 보상을 줄 이를 죽여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서녕에 도착하면 놈들과는 헤어져라. 하찮은 형제 놀이 하지 말고. 놈들은 곧 죽여버릴 거니까.”
“…….”
잠시 후, 산의 오솔길에는 착잡한 표정의 후산만이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