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179화 (179/200)

제179화. 이선(異線), 청련 (4)

“당신을 두고 제가 직접 가란 말씀이십니까? 어찌 그런 말씀을!”

후산의 얼굴이 순간 찌푸려졌지만, 품에 안은 채로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후산은 시타를 내려놓은 뒤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

그리고, 방금 한 그 말이 그저 툭 내뱉듯 쉬이 내던진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당신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후산.”

“…….”

후산은 말을 잇지 못했다.

결연한 눈빛의 시타와 시선을 마주한 후산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후산은 지거광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곧 발바닥에 힘을 집중시켰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좀 빠르다 싶은 괴이들이 그를 막아서려 했지만, 후산은 놈들의 머리를 짓밟으며 허공을 날았다.

지난번 청유백과 달리던 중에도 전력으로 달리던 것이 아니었는지, 지금의 속도는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였다.

“크르…….”

괴이들은 곧 후산을 쫓는 것을 포기했다.

청유백을 죽이라는 명령을 우선하는 것인지, 혹은 저것을 쫓지 못한다는 것을 인지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눈앞의 괴이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문득, 시타가 물어왔다.

청유백이 팔을 들어 그녀를 뒤로 감추고, 몰려드는 괴이들의 목을 베어내는 와중이었다.

“소협, 저것들이 뭔지, 아시나요?”

“조금은.”

급박하게 내뱉은 대꾸일 뿐이었다.

알긴 뭘 알겠는가.

당장 눈으로 보고 파악한 사실 외에는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여전히 오른손에 쥐고 있는 이 부채 조각을 맞추어 보면 무언가 알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럴 겨를은 없었다.

시타의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

장막에 가려진, 현실 너머의 것을 보고 있었다.

다 문드러져 부스러진 몸이 아닌, 여전히 몸부림치는 영혼이 그녀의 눈에 비쳤다.

“저런 건… 있어서는 안 돼요. 영생도 뭣도 아닌, 그저 저주일 뿐일 텐데.”

“뭔가 보이나?”

검을 휘두르며 대꾸했다.

그의 옆에서는 청률이 가까스로 다른 괴이들의 검격을 막아내며 반격하고 있었고, 묵태곤은 그저 막아내기에 급급한 채였다.

“……혼이 없어요.”

“혼이 없다고?”

“아니, 조금 달라요…. 저건… 변질되었어요. 의지 없이, 그저 고통받으면서… 강제하는 대로 본능을 움직일 뿐인 기계 장치…….”

시타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자신의 말을 한 번 수정했지만, 다시 한번 그것을 부정하며 청유백을 올려다보았다.

“그래요. 혼, 없다고 말해도 전혀 틀린 건 아니에요. 저것들, 이지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저 몸 안에 영혼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거군. 그런지?”

“일단은… 그래요. 하지만 의미는 없을 거예요…….”

“지금은 그거면 충분해.”

청유백은 왼손을 휘저어 몰려오는 괴이 무리를 양단했다.

본능적으로 목을 방어하는지라 일격에 즉살시키는 것은 무리였지만, 대체로 보호가 허술한 팔과 다리 한두 짝을 잘라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소협, 뭔가 계획, 있으신가요?”

“안타깝지만 없다.”

당장 눈앞에서 청명휘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찢겨나간 살도 전부 붙은 채로, 이제는 정말 만전이라 말할 수 있는 상태였다.

청유백은 피 섞인 침을 삼켜내며 의문을 뇌까렸다.

‘천화, 저것들의 영혼을 흡수할 수는 없나?’

지금의 천화에게는 녹련의 힘이 있었다.

낙무열의 영혼을 온전히 흡수했으니, 활용도에 차이가 있더라도 분명 그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숙련도가 낮아 전투에 활용할 정도의 물리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지만, 타인의 영혼에 개입하는 것이라면.

이미, 천화와 청유백이 해오던 일이 아니던가.

하지만 천화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렵겠구나. 하나나 둘 정도라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이것들 전부는 도저히 무리니라.]

눈앞에 보이는 숫자는 어림잡아도 기백.

그럴싸한 움직임을 보이는 특이 괴이들은 청명휘를 포함하여 고작 열 남짓이었다만, 열이라고 해도 흡수하는 것은 이미 어려웠다.

[흡수하려 한다 해도 놈들을 완벽하게 무력화한 뒤여야만 하니라. 최소한, 목을 쳐야만 하겠지.]

‘그게 어려운 거다만…….’

청유백은 혀를 찼다.

이렇게 되면 정말로 계획이 없다.

후산이 지거광을 잡아 이 모든 것들이 정지하면 참 좋겠지만, 아마 놈이 죽더라도 이 괴이들은 없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놈이 하는 것은 이 괴이의 ‘지시’.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저 괴이들이 알아서 움직이니, 지거광이 죽더라도 저것들은 남아 있을 것이 뻔했다.

지금 이 순간, 확실한 것은 단지 한 가지였다.

다행인 점이기도 했으며, 이 상황을 타개할 일말의 희망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제는 다시 몸이 붙지는 않는군.”

청유백이 썰어재낀 다른 괴이들은 몸이 양분되고 다리가 잘리자 바닥에서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것은 회복될 만한 기색도, 여지도 보이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료했다.

괴이들에 대한 지시는 지거광이 직접 내려야 할 뿐 아니라, 수복 또한 그가 직접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청명휘의 몸뚱어리도 직접 손을 움직여 수복했지. 수복은 본체에게만 있는 능력인 건가.’

그렇다면 시도해볼 만한 방법들이 있었다.

청유백은 깊게 심호흡했고, 이를 악물며 오른 손목의 고통을 애써 무시했다.

청유백의 검은 되도록 낮게 날아 괴이들의 발목을 쳐내어 시체의 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놈들은 이지가 없어, 그것을 우회하기보다는 무조건 밟고 넘어오기를 택했다.

그 과정에서 파편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그리고 넘어진 채로 발목이 잘려 나가더라도, 놈들은 꿋꿋하게 전진했다.

청유백이 정면에서, 그리고 다른 둘이 측면을 막아내는 형세였다.

“이, 이 개새끼들아아아!!”

“침착해라. 소리 지르지 마! 체력만 낭비할 뿐이라고!”

“너, 너 같으면 이 지랄이 안 나겠냐고! 이게 다 뭔데?!”

놈들이 회복하지 않으니 묵태곤과 청률의 대응에 조금이나마 여유가 생겼다.

잡담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여력이 있다는 의미였다.

퍽 당연한 일이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이후 가까스로 몸을 추슬러 일어나는 놈들을 다시 찔러 죽이는 것은 퍽 쉬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열 명 남짓한 고수 괴이들.

“젠장, 온다!”

─파팟!

그것들은 능숙하게 경공을 발휘하여, 쓰러져 엎어지고 있는 괴이들의 머리와 등을 밟고 뛰어들었다.

동시에 달려든 것은 다섯.

한둘이었다면 청명휘에게 했던 것처럼 공중에 묶어둘 수도 있었겠지만, 이 정도 수라면 어찌할 방법도 없다.

청유백은 두 놈 정도는 옆의 놈들이 처리해 줄 것이라고 믿으며, 괴이 셋 각각에게 검 한 자루를 날려 보내 꿰뚫었다.

“크륵…….”

하지만 검의 속도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물론 느려진 검이라도 도약하여 공중에 뜬 괴이들을 꿰뚫을 수는 있었지만, 단번에 양분하기에는 그 힘이 모자랐다.

검은 놈들의 피육에 박혀 들어갔고, 놈들은 그것을 뽑으려 몸부림치는 듯 보였다.

자신의 가슴팍에 파고든 검병을 붙잡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허나, 청유백은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저 움직임.

부족한 속도의 칼…….

“…….”

청유백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은 그저 직감.

근거도 이유도 모를 단순한 감이었지만, 청유백은 바닥에 쓰러진 괴이의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것 모두가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왼손을 뻗어, 멀리 떨어진 괴이의 검을 공중을 날게 하고.

괴이 놈들의 가슴팍을 꿰뚫은 세 자루의 검을 자신의 주변으로 불러들였다.

동시에 네 자루를 다루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른손을 보호하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부담이 가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청유백은 직감으로 그것을 실행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가슴팍에 검이 꽂혀 들어간 괴이 놈들이 검병을 잡은 모양새가─

‘그건 마치…….’

마치, 검을 뽑으려는 것보다는 검을 묶어 두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과민한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행동에 대한 자기 평가를 내리기도 전에, 다섯 괴이의 너머에서 청명휘가 날아드는 모습이 시야에 스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카아앙!

청유백과 청명휘의 사이를 가로막은 검은 단 한 자루였다.

청유백이 불러들인 괴이의 검.

다른 세 자루의 검은, 각각 괴이들의 손아귀에 붙들려 빠져나오려 몸부림치고 있었다.

예감은 적중했다.

살기와 본능 가운데서 섞여들어, 단연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

청명휘의 검기와 청유백의 검 사이에 살벌한 불꽃이 튀었고, 청유백이 검날을 눕혀 청명휘의 목을 베려 하자 놈은 한 번 물러났다.

이기어검의 강점이었다.

코등이싸움을 한다면, 팔의 제한이 없는 쪽이 단연 유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청유백은 안도감보다는 아쉬움을 느꼈다.

“…죽이려 했는데.”

[기이하구나. 아까와는 움직임이 확연히 달라. 온전히… 목숨을 보전하려 하는 것 같구나.]

“이유를 따지자면, 주인이 없어서겠지.”

청유백은 깊은 숨을 내쉬며 검을 꼬나쥐었다.

저 괴물 놈들에게 그런 고등한 사고가 가능한지는 모르는 일이다.

수복이 가능한 상황과 가능하지 않은 상황을 구분하여, 최선의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일까?

그저 자신의 ‘의지’만 없을 뿐, 생전의 본능이 온전히 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

마치… 직전의 자신처럼?

청유백은 알 수 없었다.

안다고 해서 무엇이 바뀌랴.

중요한 것은 놈이 태세를 바꾸었다는 것, 그리고 놈들의 수복이 불가능하다는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다리를 베어 멈춘다.

팔을 베어 무력화한다.

목을 베어 죽인다.

언제나 해 오던, 단순한 작업이 아니던가.

청유백은 왼손에 힘을 주었다.

앞으로 팔을 뻗어, 하늘을 보고 그대로 주먹을 쥐었다.

─콰득, 콰드득.

균열의 소리가 들려왔다.

강철이 갈라지고, 불꽃의 원념이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다.

이 소리를 좋아하는 검수는 천하에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당연히, 그 검을 담금질하는 대장장이라면 더욱 그러할 테다.

묵태곤은 순간 본능적으로 등살에 소름이 돋았고, 다음 순간.

─콰장창!

청유백이 불러들인 괴이의 검이 산산이 부서져 폭발했다.

백월이나 홍련 같은 검들과 달리, 담겨지는 마기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파편은, 청유백의 앞에 위치한 수많은 괴이들을 향해 쏟아졌다.

청명휘를 포함하여, 공중에 묶여 있는 괴이들에게 말이다.

일순간 섬광이 스쳐가고, 시야는 다시 온전한 상태로 돌아왔다.

그 광경을 본 청률은 순간 ‘해치웠나!’ 따위의 대사를 내뱉고 싶었다.

하지만 곧 시야에 잡힌 청명휘의 모습을 보자, 소리치기는커녕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한계가 다다른 청유백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그 맞은편에 있는 청명휘는 퍽 온전한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온전하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전신의 옷이 갈가리 찢겨 나가고, 온몸에 강철 조각이 박혀 흉측한 괴질 환자처럼 변한 것을 온전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청명휘는 온전해 보였다.

강철의 조각을 추스르고, 다시금 청유백을 향해 검극을 세우는 모습에는 일말의 주저조차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는 의미도 없다는 건가.”

청유백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놈들은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찢어져도 움직인다.

보호해야 하는 것은 오직 목뿐.

그것 외에는 유의미한 상처가 없어 보였다.

공중에 묶여 있던 괴이들은 목을 방어하지 못해 통째로 목이 뜯겨나간 놈도 보였지만, 청명휘는 아무래도 최소한의 방어는 한 듯 보였다.

“크르르르…….”

청명휘가 검기를 길게 뽑아들었다.

그 본능이, 청유백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그리고 청유백 또한 그 사실을 알았다.

세 자루의 검을 불러들이고, 그중 한 자루를 왼손에 쥐었다.

두 자루의 검이 허공을 부유하고, 그 중 한 자루가 먼저 청명휘를 향해 쇄도했다.

─카앙!

하지만 그것은 의미 없이 궤적을 비껴 치는 일격에 튕겨져 나갔다.

여유가 있었다면 곧바로 다시금 날아들었겠지만, 청유백에게는 남은 힘이 없었다.

튕겨진 검은 무력하게 바닥에 꽂혀질 뿐이었다.

“후우…….”

이 손목의 고통이 지속되는 한, 청유백은 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만큼, 지거광의 힘도 낭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버틸수록 후산이 빠르게 쫓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렇다면… 그때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일각?

그래, 그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청유백은 눈을 질끈 감았다.

파앗, 누군가가 바닥을 박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명휘일 것이었고, 청유백 또한 그 사실을 알았다…….

서걱.

그리고, 단 한 번의 참격 소리가 허공을 장식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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