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살아 있는 밤의 습격 (4)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소?”
“좋은 생각이랄 게 있겠습니까.”
허곽은 불만스레 팔짱을 낀 채로 물어왔고, 청유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저 관군 놈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수준의 박봉을 받으며 나라의 개로 사는 놈들이었으니, 그야 윗대가리의 명령을 거부하기 힘든 것도 당연한 일일 테다.
“이해는 합니다. 명령을 따르셔야겠지요.”
“……현장이라는 것이 항상 그런 법이오. 좆 같은 일의 반복이지.”
여기서 퇴각이 최선의 선택임을 모르는 병사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명명백백하다 한들 뭐 어쩌겠는가.
뭣도 모르는 윗대가리들은, 빈손으로 돌아온 수하들이 어디서 설렁설렁 놀다 온 것은 아닌지 의심하곤 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이니 말이다.
‘대체로, 최선은 보통 두 종류밖에 없지.’
끝까지 임무를 수행하든가.
혹은, 임무를 수행하기 전 상태로 현상 유지라도 시켜 놓든가.
하지만 지금은 둘 중 어느 쪽을 택하기도 어려웠고 결국 차악을 택해야만 했다.
청유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간단하게 해결하지요. 위협을 처리했다고 보고하면 안 됩니까?”
“거짓 보고를 하라는 말씀이오?”
“일단 눈앞에 보이는 것들은 죽였다 하면 되지 않습니까. 차후에 어딘가 숨어 있던 놈들이 기어 나왔다 한들, 알 게 뭡니까?”
“으음…….”
허곽은 고민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말은… 된다.
말이야 그럴싸한 방법이었으니, 일단은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딱 거기서 끝이었다.
말만 된다.
지푸라기를 얼기설기 얽어 놓은 것을 집이라고 이르지 않듯, 아무런 논리도 없이 그저 우기는 것을 방법이라고 하지 않는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그리 말해도 결국 책임이 자신에게 향하리라는 사실은 쉬이 알아낼 수 있었다.
천화가 이죽거렸다.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잖느냐.]
‘뭐, 당연히 그렇지.’
하지만 청유백은 확신했다.
그들에게 생각할 시간이 결코 많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아마… 지금.’
그리고 정확하게, 청유백이 속으로 손가락을 세 개 접는 시점.
─쿠웅!
갑작스레 땅을 울리는 소리가 허곽의 고민을 깨뜨려 놓았다.
소리의 원인은 무인 중 한 사람.
대태도를 지닌 험상궂은 무인이었는데, 당초 허곽과 시비가 붙었던 바로 그 사내였다.
사내는 바닥에 쿵 찧은 대태도를 들어올리며, 짜증스레 인상을 찌푸렸다.
“아, 빌어먹을 새끼들… 답답해서 못 들어 주겠군.”
관군들은 기겁하며 한 발짝씩 물러섰고, 청유백은 고개를 돌려 그가 생각대로 움직임에 옅은 웃음을 지었다.
사내는 짜증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냥 싹 죽여 버리고 우리끼리 가자고. 무슨 말이 그리 많아? 느그 사정을 우리가 알아야 하나?”
“아, 아니. 그게 무슨…….”
“느이 사정을 우리가 왜 알아야 하는데? 알 바냐고. 그놈의 잘난 나라님이 이 깊은 첩첩산중에서도 힘이 있을 것 같나?”
“나, 나라의 일이오! 아무리 무림과 관이 불가침이라고 하나, 말을 삼가야 할 거요!”
“말을 삼가는 건 당신네가 하셔야지…….”
무인 사내는 대태도를 뽑아들었고, 관군들도 서로가 지닌 창을 사내에게 겨누었다.
“벼, 별로 현명한 판단이 아닐 거요. 평생을 쫓기며 살고 싶소?”
“내가 느그들을 조졌는지 나라가 알아야 쫓기든 말든 할 것 같지 않은가?”
“……!!”
자연스러운 진행이었다.
해결이 되지 않은 분쟁에 얼토당토않은 해결책으로 끼어들었으니, 성질 급한 무인이라면 당연히 더 빠르고 확실한 방법을 꺼내들 테다.
그리고 다른 무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인지, 곧바로 무기를 뽑지는 않았지만 사내를 막아서지도 않았다.
그저 주변에서 등을 기댄 채 그 꼴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청유백은 시선을 굴렸다.
‘화산파 놈들도… 마찬가지군.’
역시, 정파 놈들이 주장하는 의이니 협이니 하는 것들은 결국 허울 좋은 명분에 불과한 것이다.
판은 완벽하게 굴러가고 있었고, 청유백은 웃으며 다시 한번 끼어들었다.
“자, 자. 굳이 대협의 칼에 더러운 피와 기름을 묻힐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쪽도 충분히 이해했을 테니, 알아서 돌아갈 겁니다.”
무인 사내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대꾸하지는 않았고, 청유백은 허곽을 비롯한 관군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요?”
“…….”
처음의 질문은 권유였다.
친절한 제의였고, 선택권은 허곽에게 있었다.
하지만 지금 두 번째 질문은, 협박이다.
곱게 꺼지든가.
여기서 뒤지든가.
당연하게도,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돌아가겠소.”
“잘 생각했습니다.”
곧 관군들은 걸음을 돌려 그들끼리 떠나갔다.
어차피 오래 시간을 끌어봐야 분쟁만 늘어질 뿐이었고, 뾰족한 방법이 생기지도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굳이 이유를 더하자면, 그 괴이들이 언제 다시 쫓아올지 모르는 일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신들을 겁박하는 청년의 목소리가 결코 농담조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 *
“……뭐, 이제 참견쟁이도 없겠다. 우리끼리 말 좀 터 보자고. 거기 후배님, 말 참 잘하시던데.”
지켜만 보던 창을 든 무인 하나가 입을 열었다.
창을 든 무인은 피식 웃으며 청유백을 가리켰고, 청유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작은 재주일 뿐이지요.”
“하핫, 칼잡이 놈들이 제일 익히지 못하는 재주이기도 하고 말이지.”
기실, 어차피 청유백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해도 상황은 똑같이 흘러갔을 것이다.
무인은 결국 화를 냈을 것이고, 관군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애초에 하나뿐이었으니까.
즉, 결과적으로 보면 달라진 것은 없다.
달라진 것은 하나뿐이다.
‘어떻게든 평화롭게 해결해 보려고 한’ 청유백의 모습과, 다른 무인들이 그것을 보았다는 것.
특히나, 시타가 보았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녀에게는 분명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그것을 알 방법은 없고, 정녕 적인지 아군인지도 알 도리가 없다.
그러니 할 수 최선은 최대한 선한 인상을 쌓아 두는 것뿐이었다.
결국, 보여주기식 선동이었다만─
아무래도 그 효과는 퍽 괜찮았는지, 다른 무인들은 청유백에게 의견을 물어왔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 후배님.”
“글쎄요…….”
상황을 정리했으니, 앞으로의 일도 생각해 보라는 의미였다.
어찌 보면 짬 처리였지만, 상황을 주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나쁘지만도 않았다.
“…….”
청유백은 말없이 주변을 돌아보았고, 굳건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무인들의 얼굴을 보았다.
대체로, 전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귀찮음.
번거로움.
짜증남…….
묘하게도, 그들의 얼굴에 위기나 전전긍긍함 따위는 묻어나지 않았다.
서로의 얼굴을 살피고 표정을 드러낼수록 그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모두가 말을 안 하고 있었을 뿐, 전부 같은 생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작 저 정도야…….’
‘…귀찮다만 뭐.’
이곳에 있는 이들은 결국 검기로써 만년한철을 베어낸 무인들, 혹은 그 관계자들뿐.
숫자가 많을 뿐, 돌파만이 목적이라면 그다지 어렵지도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고, 청유백은 모두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어차피 관군 놈들 때문에 모여야만 했던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제 함께할 이유도 없지요.”
“동의하네.”
“하나로 뭉치면 포위당할 위협만 높아지니, 각자 행동합시다. 모두에게 그게 낫지 않겠습니까?”
무인들은 일제히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기실, 모두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애당초 다른 일행들이었고, 혼자 여행하는 이도 있었으며, 그들을 묶어놓던 관군은 이미 떠난 이후였으니.
굳이 청유백의 말을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무인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고, 다른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화산파의 운표가 물었다.
“저 괴이들은 어찌할 건가? 남아 있으면 결국 피해가 생기게 될 텐데.”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청유백이 무어라 입을 열려던 찰나, 대태도를 든 무인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신 대꾸했다.
“저것들이야 뭐… 말마따나 나라에서 알아서 하지 않겠소? 수틀리면 군대라도 보내겠지.”
“하지만…….”
“그럼 당신네들이 어떻게든 해 보시든가. 못 하면 닥치시고.”
“…….”
운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냥 의무감에 한번 꺼내본 말이었을 뿐이다.
당연히 자신이 그것에 휘말리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위선자 같으니.”
무인은 그리 작게 중얼거렸고, 운표는 못 들은 척 고개를 숙였다.
무인들은 곧 각자 숲속을 향해서 흩어졌다.
묶여 있을 이유가 없는 이들이었고, 이제는 그들을 강제로 묶어놓는 것이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후산이 허탈하게 입을 열었다.
“빨리도 흩어지는구려. 조금은 불안할 법도 한데 말이오.”
“밤이 지나기 전에 이 숲을 지나려 하는 거겠지. 어중간하게 야영하는 것은 피해야 할 테니까. 뭐, 그건 아무래도 좋다만…….”
청유백은 대충 대꾸하며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떠나간 지금, 아직 청유백 일행과 함께 남아 있는 두 명에게 냉소를 보냈다.
“그쪽 분들은 안 가십니까?”
“크흠, 그것이…….”
운표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끝을 흐렸다.
시선을 굴려 시타를 잠깐씩 흘겨보았고, 이내 말을 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두고 어찌 우리만 훌쩍 떠나겠는가.”
“필요 없습니다만.”
도움이 필요한 자는 개뿔이.
청유백은 당장 놈들의 얼굴을 으깨 놓지 못하는 것이 한이었다.
저 시선만 보아도, 저 허울뿐인 ‘호의’는 시타 개인을 향한 것임이 분명할 테다.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순수하게 아이를 향한 호의인가?’
[부디 그것이길 바라는 게 낫지 않겠느냐? 다른 것이라면, 어느 것이 되든 본녀는 구역질을 참을 자신이 없느니라.]
‘그래, 의니 협이니 하는 놈들이면 그래도 이상하지 않긴 하다만…….’
솔직히, 방해된다.
화산파 놈들 앞에서 마기를 끌어올리며 싸울 수도 없는 노릇 아니던가.
그냥 좀 꺼져 줬으면 하는 게 절실한 바람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시타가 보고 있는 이상 그것도 여의치 않다.
앞으로의 일정에서 그녀의 도움을 받으려면, 악한 인상은 최대한 회피하는 것이 옳았다.
“이보게 후배님.”
청유백이 일그러지려는 미간을 가까스로 관리하던 즈음, 운표가 운을 띄었다.
청유백은 저 개소리를 다 들어줄 만큼 기분이 좋지 못했다.
“주제넘은 참견일지도 모르지만….”
“알고 계시니 다행입니다. 참 많이도 주제넘고 계시거든요. 이제 뒤돌아 꺼져 주시지 않겠습니까?”
“뭐, 뭣?”
“꺼져 달라 말했습니다. 아니, 애써 예의 차리는 것도 힘들군그래.”
죽이는 건 좀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청유백은 손을 쫙 펴 보이며 결국 축객령을 내렸다.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신속하게 모가지 돌리고 그 방향으로 달려라. 다섯 셀 때까지 돌리지 않으면, 내가 손수 돌려 드리지.”
“무, 무림의 후배라고 배려를 봐 주었거늘…! 말을 가려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섯.”
청유백의 손가락 중 하나가 접혔고, 운표는 아랑곳 않으며 언성을 높였다.
“우리가 누군지 아느냐?!”
“넷. 알지. 대 명문 화산파의 제자님들.”
“……!!”
운표와 운우는 순간 흠칫하며 동공이 좁혀졌다.
똑바로 대답하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인지, 혹은 그 대단하신 화산파의 위명에 절어 산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 있던 것이었는지는 청유백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운표가 이를 악물며 대꾸하는 것에서 후자에 가깝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할 뿐이었다.
“네, 네놈이 그걸 알면서도…!”
“셋. 도움은 필요한 사람에게나 베푸는 것이지. 이미 풍족하여 사양하는 자에게 검을 겨누는 것이 화산의 정의인가?”
“…….”
정론이다.
의와 협을 따지는 놈들이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꺼낸 시점에서 말문은 막히게 되어 있었다.
진실로 의와 협을 추구하는 자라면 그릇된 언행을 취하지 않을 것이고, 이 상황에서 말로써 청유백을 압박할 수 있는 자라면 의와 협의 가치는 생각도 않는 이일 것이다.
청유백의 손가락이 다시 한번 접혔다.
“둘.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본데, 진심으로 그냥 닥치는 것을 추천하지.”
“…….”
청유백의 손가락이 또다시 움직일 일은 없었다.
운표는 순간 검집에 올린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듯 보였지만, 최소한의 명예를 알기는 하는 듯했다.
언쟁에서 패배하여 검을 뽑아 드는 것만큼이나 추한 일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겠는가.
이윽고 그들이 떠나가고 잠시 후에, 시타가 청유백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 그런데 소협.”
“뭐지?”
“위험할 것, 같습니다. 당신의 실력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시타는 말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웠고, 청유백은 순간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언행이 지나치게 과했던 것일까.
그만큼 시타의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아까의 그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은 어땠을까 합니다.”
“…이유는?”
“이 숲에 들어온 이들, 모두가 쉬이 생각했을 겁니다…. 분명 그렇겠지요. 당신께서도, 후산도…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요.”
“으음, 걱정 마십시오. 이 후산, 어떤 수를 써서든 목적지에 당도하게 할 테니까 말입니다.”
묵태곤과 청률은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조금 힘들 수도 있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사나이의 가오란 그런 법이었다.
시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실종 이야기가 들린다는 것은, 그들 또한 서녕에 도착하지 못했다는, 그런 뜻일 텐데…….”
서녕에 도착하지 못했다.
서녕에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심지어 그것이 심화되어, 덕령합에까지 미치는 소문이 되었다.
그렇다면, 응당 그 이유가 있어야만 하기 마련이다.
“……모두가 그리 생각했지만, 실상은 달랐다…는 이야기는 아닐는지요.”
그리고, 저 멀리서.
─끄아아아아악!!
그 시타의 말에 호응하듯, 누군가의 비명이 울려 퍼져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