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0화. 들키지 않으면 범죄가 아니다 (5)
─서걱.
찬연한 백색의 광채와 함께, 청률의 검이 위에서 아래로 저항 없이 그어 내려졌다.
금속과 금속의 마찰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부드럽게, 마치 명검이 두부를 가르듯이 스쳐 내려갔다.
한순간 침묵이 좌중을 지배했고, 무료와 지루함만을 머금고 있던 진행원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세, 세상에!”
청률의 검이 마지막 종점에 다다랐을 때, 만년한철 덩어리의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상흔이 남아 있었다.
덩어리의 표면을 차지한 몇몇 흠집들과는 그 크기부터가 상이한 상흔.
어쩌면, 두려워하지 말고 조금 더 깊게 베었다면 아예 반으로 갈라졌을지도 모를 정도로 깔끔한 상흔이었다.
“무, 무슨… 저게 된다고?”
“중원의 후기지수 중 저런 자가 있었던가…?”
“허어, 청명하기 그지없는 검기로다. 분명 고명한 문파의 대제자일 터”
그것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제각각의 반응을 보였지만, 하나같이 놀랍다는 표현임은 다르지 않았다.
혹자에게는 오늘 밤 주루에서의 술안주가 될 것이며, 혹자에게는 자신을 채찍질할 우상이 되었을 것이다.
청률의 움직임은 그만큼 이상적이었고, 그는 씰룩이는 입꼬리를 억지로 억누른 채로 납검했다.
그리고는, 이 예선을 주관하던 사내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떻지? 합격인가?”
“그, 그, 그러믄요. 그렇고 말굽쇼. 여기, 이, 이걸 받으십쇼, 대협.”
청률은 사내가 내민 동패(銅牌) 하나를 받아 들었다.
산과 구름이 양각된, 주먹만 한 크기의 동패였다.
아랫부분에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덕령합, 그리고 십육(十六)이라는 숫자였다.
감독관이 말을 이었다.
“그것을 지니고 서녕으로 가시면 됩니다요.”
“다른 절차는 없나? 가령 서명이라든가.”
청률은 동패의 앞뒤를 살피며 그리 물었지만, 그것에는 양각된 문양 외에 다른 여백은 존재하지 않았다.
감독관의 태도를 보면 달리 서류를 줄 것 같지도 않았으므로, 누가 이것을 서녕으로 가져가든 간에 주인을 알아보지는 못할 것이었다.
“오직 그것만이 참가와 통과의 증거입니다. 다른 건 없습죠.”
“그러다 도둑질이라도 당하면?”
“그러면… 그 도둑도 어지간한 고수라는 소리겠지요. 그 또한 문제는 없지 않겠습니까?”
“과연.”
어차피 강한 이를 뽑는 대회.
강도를 당해 패를 빼앗긴다면 강도가 더 강하다는 소리겠고, 도둑질을 당한다면 애초부터 그만큼 강하지 않았다는 소리일 터.
청률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의 관심 어린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청률은 절로 으쓱이는 어깨를 참으며 청유백에게로 몸을 돌렸다…….
─한편.
“……저건?”
청률을 지켜보던 수십의 사람들 중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렸다.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크기의 작은 목소리였으나, 그의 바로 옆에 있는 사제에게는 들렸는지 그의 사제가 의아해하며 물어왔다.
“운표 사형,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잘못 본 모양이야.”
청률은 곧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인파 너머로 사라졌기에 다시 확인할 기회는 없었다.
그래, 분명 잘못 본 것일 테다.
운표와 그의 사제는 굳이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대신 잘못 본 것이 분명하다고, 운표는 그리 되뇔 뿐이었다.
사제는 활기차게 웃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저 청년, 훌륭한 검기였습니다. 햐, 대단하던데요?”
“그랬었지. …일단, 볼 만한 것은 다 본 것 같구나. 이만 움직일까.”
“따르겠습니다. 사형.”
운표는 미심쩍은 의구심을 가슴 속 한편에 묻어두며 자리를 떴다.
구태여 확인해 보기에는 너무나도 허황된 의구심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래된 기억이었으며, 오래된 물건이고, 이곳에서 나타날 이유가 없는 물건이었으니 말이다.
매화 자수가 수놓아진 소매를 나부끼며, 두 사내는 인파 너머로 사라졌다.
* * *
청률은, 솔직히 탐이 났다.
‘백월(白月)…이라고 했던가.’
아직 자신에 손에 쥐여진, 아직 청유백에게 돌려주지 않은 이 검이 너무나도 탐났다.
이 검을 뽑아 단 한 번 휘둘렀을 때, 지금껏 겪지 못한 경지를 몸으로 체현한 것만 같았다.
그때의 감각이 아직도 이 손끝에 머물러 있었다.
이 검과 함께라면, 영원한 벽같이 느껴졌던 자신의 형님과 아버지조차도 뛰어넘을 수 있을 듯 보였다….
…그런데.
‘…뭐지?’
다시금 손잡이에 손을 올려도, 방금과 같은 감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낮의 꿈이었던가?
잠깐 있었던 기적이었던가?
어찌 된 일인지 방금 전과는 다르게 검이 자신을 밀어내는 것만 같았다.
‘……으음.’
아니면, 형으로서 아우의 물건을 탐낸 대가일지도 모른다.
청률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감각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 것은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결국 돌려줘야 하는 물건이다.
게다가.
‘명검은 명검이고, 어차피 이건 마검이야. 방금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나와는 맞지 않는다.’
청률이 익힌 것은 마공이 아니라 선공이었고, 그것이 현 마교의 선택이었다.
마교는 인력난에 시달렸고, 과거의 패도적인 마공보다는 비교적 안정적인 무공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만들어 낸 것이 청가의 태청심공이고, 청률은 그 시험대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처지에 불만은 없었다.
자신의 실력은 다른 동년배와 겨루어도 충분히 훌륭하다 할 정도는 되었고, 여지껏 모자람이 없었으니까.
심지어, 오늘 더욱 높은 경지를 향한 편린까지도 보았으니 불만이 있을 턱이 없다.
어째서인지 방금 전과 같은 기적적인 감각은 사라진 이후였지만, 계속 이 검을 쥐고 있다고 하여 뭔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어차피 한 번 해낸 일이다.’
검이 바뀌었다 하여, 다시 해내지 못할 이유가 무어 있겠는가.
청률은 곧 청유백에게 검을 돌려주며 말을 덧붙였다.
“엄청나구나. 검묘에서 보았을 때에는 이런 검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역시, 내 안목이 모자랐던 것이겠지. 수련이 더욱 필요하겠어.”
“……? 그러시던가요.”
청유백은 대충 대꾸하며 백월검을 받아 들었다.
아마 청률은 끝까지 알아채지 못할 것이었다.
검기는 청유백의 이기어검이었고, 몸을 감싸던 감각은 천화의 신력이었다는 사실을.
천화는 그 사실에 조금 미안해하고 있었지만, 청유백의 계속되는 타박에 결국 타협하고 말았다.
뭐 어떤가?
강해지는 방법도, 감각도 알았으니 결국은 상부상조인 셈이다.
…라고, 청유백이 계속해서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후산이 끼어들어 호탕하게 웃었다.
“핫핫핫! 명검이니 신검이니 하는 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소! 형제여, 나를 보시오! 그런 것 없이도 어쨌든 잘 되지 않소!”
“하하, 그렇겠지요?”
“물론이오. 결국 전부 그대의 실력 아니겠소! 나처럼 말이오!”
말마따나 청률의 다음 차례에 도전한 그는 시험을 멋들어지게 통과해 보였다.
그의 무기는 허리춤에 찬 기묘하게 생긴 곡도였는데, 아무래도 서역의 검인 듯했다.
경공만큼이나 빼어난 실력.
자연히 청유백의 경계 또한 짙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만을 지을 뿐이었다.
문득 묵태곤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열일곱이라… 생각보다 적지 않냐?”
열일곱.
후산이 받은 동패에 적힌 숫자였다.
청률이 받은 것에 적힌 숫자가 열여섯이었으니, 아마 예선 합격자의 숫자가 분명할 것이다.
청률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뭘, 시험이 어려운 거지. 내가 쉽게 하니까 쉬워 보이지?”
“아니… 여기 모인 무인들 숫자를 보라고. 수백 명은 넘을걸? 그리고 일찌감치 실패하고 떠난 무인도 그만큼 있을 거 아냐. 그런데 고작 열일곱은 너무 적지 않아?”
“그건 그렇겠다만…….”
끄응.
청률도 마냥 ‘내가 잘난 것이다’라고 소리칠 수는 없었다.
결국 저것은 고수의 숫자였다.
만년한철을 베어내는 정도의 검기를 뽑아낼 수 있는 고수.
어중이떠중이들은 전부 걸러내고, 만년한철을 베어낼 수 있는 실력자들만 모은 것이 열일곱이라는 소리란 말이다.
…하지만 확실히, 그 숫자가 많이 적기는 한 것 같았다.
통째로 베는 게 아니라 고작 상처를 내는 정도라면, 꽤 많은 수의 무인이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후산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뭐, 생각보다 천하에는 고수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지. 아니면 우연히 어중이떠중이만 모인 것일지도 모르고!”
“우연히라니, 그게 말이나 되나? 고수들만 노려서 습격이라도 당하는 게 아니고서야…….”
“에이 뭐, 결과가 이런데 뭐 어쩌겠소? 나는 달리 다른 건 생각이 안 나는구려.”
“으음…….”
뭐, 맞는 말이기는 했다.
결과가 이리 나온 것을 어찌 다르게 말할 수 있겠는가.
반대로 말하면 자신이 상당한 실력자라는 말도 되었으니, 알게 모르게 어깨가 올라간 청률은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시타가 청유백에게 물어왔다.
“곧바로 떠나나요?”
“글쎄…….”
일단은 하루를 쉴 계획이었지만, 이목을 지나치게 많이 끌었다.
‘열일곱이라니…….’
그냥저냥 합격자들 사이에 묻어날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합격자 자체로 시선이 너무 끌렸다.
다른 이들이 아무런 일도 문제도 없이 자신들을 내버려 둘 것이라는, 그런 희망차고 평화로운 생각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청유백 일행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멈추시오.”
“뭡니까?”
그 방향을 돌아보자, 그곳에는 관군 여럿이 서 있었다.
그리고 개중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청유백의 앞으로 다가왔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무인이군. 서녕으로 가시오?”
“그렇소만.”
“지금 바로 가오?”
“…그건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왜 물어보시는지 용건부터 밝히는 게 순서 아닌지?”
청유백이 인상을 찡그리며 대꾸하자, 대장은 곧 수긍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 실례. 사과하겠소. 서녕으로 가는 길에 문제가 있어 그렇소. 현재 관의 방침으로, 열 명 이상의 동행만이 관도를 지날 수 있게 하고 있다오.”
묵태곤이 끼어들어 물었다.
“무슨 일이 있길래?”
“……이런 말을 하기 부끄럽소만,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소. 단지… 어떤 무리의 습격이라는 것만 알 뿐이오.”
관도가 관의 소관이라고는 하지만, 중원은 넓고 그 긴 길을 전부 감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연히 구멍은 생기기 마련이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모두 알 수는 없는 것.
하지만, 일행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산적? 그런 것 따위야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데.”
“호환이라도 두려워서 길을 막는 겁니까?”
뭐가 되었든 두려울 게 무엇이겠는가?
만년한철을 벨 수 있는 검수만 둘에, 산에서 뭐가 튀어나오든 귀무곡의 신수들만큼 무섭지는 않을 터였다.
이 자신감은 오만이 아니라 당연한 수순이었다만, 대장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당신네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를 듯 높다는 것은 잘 알고 있소. 이리 말해도 듣는 인간은 열에 한둘 정도밖에 없다는 것이 통탄할 현실이지. 하지만, 두 가지만 들어 주시오.”
대장은 그리 말하며 손가락을 두 개 펴 보였다.
그리고 하나를 접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바라건대, 우리가 그것을 알면서도 당신네들에게 이리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주시오. 이것이 첫째요.”
자신들처럼 말하고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굳이 입으로서 말하지 않아도, 저 귀찮다는 태도는 너무나도 명확하게 그 사실을 전달했다.
“둘째는?”
“둘째는 좀 더 단순한 이야기지.”
대장은 자신의 뒤편, 대기하고 있는 병졸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굳이 나라의 명을 어겨 가면서까지 자존심을 세우고 싶지는 않잖소? 우리가 동행을 부탁하는 셈 칠 테니, 한 번만 굽혀 주시오.”
그 병졸들의 근처에는 청유백 일행과 비슷한 행색의 사람들이 몇몇 모여 있었다.
대충 예닐곱 정도.
각자의 병장기를 몸 어딘가에 지니고 있었고, 내뿜는 기세는 너무도 명료하게 그들이 무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해 주었다.
“서녕까지 호위해 주겠다? ‘호위’라는 말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니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미안하게 됐소. 나라의 명인지라. 나 같은 일개 병졸이 뭘 어찌할 수 있겠소. 거기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가야만 하는 내 심정도 이해해 주시오.”
청유백은 혀를 찼다.
애당초 고민하고는 있었다만, 아무래도 오늘 내로…….
더욱 정확히는, 지금 바로 덕령합을 떠나야만 할 듯 보였으니까.
그러던 사이, 청률은 그 대기 중인 무사들 중 한명과 눈이 마주쳤다.
“아, 아까의 그…….”
소매에 매화 자수가 수놓인 사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