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들키지 않으면 범죄가 아니다 (2)
청유백의 질문에, 사내는 피식 웃으며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예끼, 그야 당연히 그 배후에 있을 세력 때문이 아니겠는가.”
“배후…?”
“그래. 배후. 어떤 상단인지, 어떤 명가인지는 모르지만… 곤륜 뒤에 어마무시한 자본가가 있다는 소문이 자자해.”
“흥미롭군요.”
사실, 당연한 일이기는 할 테다.
곤륜은 이미 백 년 전에 청유백 자신이 직접 기둥뿌리까지 뽑아 놨던 문파였고, 지금의 마교보다 상황이 열악하면 열악했지 결코 낫지는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상황에서 곤륜이 저토록 거대한 대회를 열어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아니, 뭔가를 얻기 이전에…….’
열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물리적으로, 그리고 금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내는 말을 이었다.
“그 배후가 뭘 원하는지는 몰라도… 그만한 대회를 열었으면 당연히 참가자들에게 원하는 게 있겠지!”
“아, 그건 나도 들어 보았다네. 보통은 뭐 호위 무사로 고용하거나 한다던데!”
“클클클, 그럴지도 모르지. 설마 한 명만 필요하지는 않을 테고, 좀 잘 비비다 보면 우리에게도 떡 몇 개쯤은 떨어지지 않겠는가?”
“오호라!”
청유백으로서는 뭐가 상품으로 나오든 그닥 관심도 없을 따름이었다만, 적당히 맞장구는 쳐 주었다.
하지만 청유백의 옆에 앉은 또 다른 사내는 썩 동의하지 않는지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그런 것보다는 좀 더 낭만적인 이야기나 믿으려오. 햐, 천하의 무인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상품이라지 않소?”
“어휴, 저런 천치들이나 그 뜬소문을 믿고 몰려드는 거지.”
“혹시 모르잖소? 당신네들도 다 저잣거리에서 주워들은 것뿐이면서.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꼴이로구만.”
“헛 참! 진심으로 조언을 해 줘도 듣지를 않는구먼. 빨리 진행이나 하세. 아무래도 오늘 속옷까지 벗겨먹어 집으로 돌아갈 사람이 하나 생기게 될 것 같으이.”
말하면서도 사내들은 서로 패를 가져가기를 반복했고, 청유백도 말없이 그것에 동참했다.
마작은 꽤 가벼운 노름이었다.
…뭐, 돈이 걸린 시점에서 가볍고 무겁고가 무어 중요하겠느냐마는.
바닥에 내려진 패가 반쯤 사라졌고, 슬슬 누구 한 명은 용을 완성할 때… 즉, 이 판이 끝날 즈음이라고 다들 확신하고 있었다.
청유백의 왼쪽에 앉은 사내가 패를 뽑아들자, 먼저 눈을 번뜩이며 웃었다.
“허허 참. 단목골 작두라고 들어봤는지 모르오?”
“자네야말로 황악골 금라수를 들어봤는지 모르겠군.”
언제나, 도박의 끝은 허세와 가오인 법이었다.
* * *
마작판의 끝은 결국 ‘제발! 한 판만 더 하고 가게! 그 옥반지는 우리 집의 가보야!’, ‘아, 아냐. 이걸로 끝일 리가….’ 정도의 결말로 맺어졌다.
청유백은 두둑해진 지갑을 품에 넣은 채로 시타가 기다리고 있을 이 층으로 향했다.
천화는 멋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가보를 뺏어온 건 너무하지 않으냐?”
“도박으로 인생을 망치다니, 안타까운 일이야.”
그 망친 주범이 네놈인 것 같은데─ 같은 천화의 말은 가뿐하게 무시하고, 청유백은 즐거이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다 내려놓고 쉴 때였다.
고민거리도 많고 할 일도 많다만, 결국은 서녕으로 가야 시작할 수 있는 고민이니 말이다.
문득, 천화가 물었다.
“곤륜제전에 사마신교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아직 추측 아니더냐?”
“추측이지. 추측인데…….”
그냥 단순한 추측만은 아니었다.
하필 곤륜파의 본거지가 서녕에 있고.
하필 사마신교의 물자가 서녕으로 이동하고.
하필 청명휘는 서녕으로 향했다….
지레짐작이 우연으로 몇 번 들어맞을지라도, 그것이 몇 번이고 반복되면 그것은 이미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 일러야만 하는 것이다.
“이만큼 뒤가 구리면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이 있기 마련이지. 정말로, 어떤 방식으로든 말이야.”
“썩 정밀한 방법은 아니구나.”
“어쩔 수 없지. 정보가 없는데.”
지금으로서는 정확한 추리는 불가능했다.
할 수 있는 것은 소거법뿐.
수많은 가능성을 제시하고, 불가능한 것들을 하나하나 제거하여 남는 것을 향해 달리는 일밖에는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야.”
어느덧 청유백은 이 층에 도착했다.
마지막에 그녀가 이쪽 난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을 보았으니, 아마 방은 이 부근일 것이다.
그리고 곧장, 마중을 나온 시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놀랍다고 해야 할지, 그녀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추태를 보여 죄송합니다. 그런 생각이셨다면, 나서지 않았을 텐데…….”
“그쪽 나라에서는 사과가 유행하나? 필요 없다.”
필요 없는 과정이다.
마교의 기 센 여자들 사이에서 치이던 청유백의 입장에서는, 도리어 신기하기까지 했다.
만약 적영이었다면, 자기가 나서고 있었는데 왜 끼어들어 웃음거리를 만드느냐고 화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특히나, 시타의 신분을 생각해 보면 더욱이 그러했다.
“아니, 신선하기는 하군. 고귀한 여자가 고개를 쉬이 숙이는 것은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니.”
“고귀하다니, 그 무슨…….”
“표현이 불편했나? 그러면 신분이 높다, 정도로 하지.”
청유백은 확신하고 있었다.
시타는 결코 평민은 아니거니와, 어딘가 거대한 세력의 일인일 터였다.
어쩌면, 그 능력을 보면 마교나 소림같이 거대한 종교 집단의 신녀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시타가 해 주었던 이야기는 평범한 마을이나 나라의 사정이라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으니 말이다.
시타는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닙니다. 저는…….”
“캐물은 생각은 없으니 안심해라. 관심도 없고.”
청유백은 코웃음 치며 말을 이었다.
우연한 만남, 우연한 동행이다.
그녀의 신분이 궁금하기는 하지만, 이 이상 우연이 더해져 거지 같은 사연이라도 듣게 되면 되려 불편해지는 것은 청유백이었다.
지금은 도와줄 여유도, 생각도 없었으니 말이다.
민담 소설의 신파극 같은 사연은 딱 소설로 즐길 때에나 즐거운 법이었다.
“하지만 거지 같은 연기를 계속 보기는 싫으니 한번은 말해두고 싶었다. 할 거면 잘 하던가. 저놈이랑 호칭부터 정리해.”
시타는 무어라 항변을 하려다가, 결국 고개를 축 떨구었다.
면사 너머로도 그녀가 짓는 것이 침울한 표정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아, 그… 네.”
“그럼 슬슬 쉬지. 아, 이건 가져가고.”
청유백은 시타에게 두둑한 돈주머니를 던져 주었다.
청유백의 것은 따로 있었고, 대충 눈대중으로 후산의 주머니에 들어 있었을 법한 양을 담은 것이었다.
하지만 시타는 기겁하며 그것을 밀어내었다.
“이건…. 바, 받을 수 없습니다. 응당, 소협께서 취한 결실입니다.”
“내가 돈이 궁해 보이던가? 그건 좀 서운한데.”
돈이야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고다.
청유백에게 돈이란 딱 그 정도의 물건이었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돈만큼 쉽게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는 물건이 달리 없다는 사실을.
“오늘 일에 대한 성의다. 받아.”
“…정히 그러시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시타는 말은 역시 그렇게 했지만 여비가 걱정이었던 모양이었다.
청유백은 슬쩍 그녀의 뒤로 열린 문틈을 흘겨보았고, 그 너머로 뒷짐 진 채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있는 후산이 보여왔다.
불쌍하기는 했지만, 도박으로 돈 날린 사람의 말로라고 보면 귀여운 수준이니, 뭐.
“그럼 이만. 내일 보지.”
“편히 쉬세요, 소협. 아, 방은 달리 잡았으니 이쪽을 써 주세요.”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시타를 뒤로하고, 청유백은 말없이 방으로 들었다.
긴장이 풀려오고, 쌓여 있던 피로가 한 번에 덮쳐왔다.
식사도 잠도 거르고 달린 것이 장장 사흘이었다.
천화를 깨울 때에는 보름도 버텼지만, 그땐 몸을 그리 움직이지 않았으니 가능했던 일이었다.
“후우…….”
청유백은 그대로 침상에 쓰러졌고, 이불에 머리를 박은 청유백에게 천화가 넌지시 말을 걸었다.
“그걸 돌려주다니, 의외로구나. 너도 드디어 사람의 곤란함에 공감하게 된 게냐?”
“그럴 리가. 당연히 밑 작업이지.”
누가 되었든 간에, 영원한 적은 없고 영원한 동료 역시 없는 법이다.
만에 하나, 그녀가 사마신교와 관련이 된 사실이 있다고 한다면 그 때 다른 선택지를 종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고작 이런 것 하나로 많은 것을 바랄 수는 없겠지만…….’
결국 감이라는 놈의 결과물은 여러 행동이 쌓여서 이루어지는 법이니.
무엇이 되었든 이 만남의 끝이 보이기 전까지는 친분을 쌓아 놓아 나쁠 일은 없을 것이었다.
지금으로선 그녀에게서 어떠한 적의도 느껴지지 않으니, 더욱이 그러했다.
청유백은 곧 의식의 끈을 놓고, 오랜만의 잠에 빠져들었다.
* * *
어느덧, 닷새가 흘렀다.
급할 것 없다는 것이 여유롭게 움직여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었으니, 청유백은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는 최대한 속도를 올려 달렸다.
약강부터 서녕까지는 관도가 나 있었으니, 그 옆을 따라 직선으로 달리기만 하면 되는 길이었다.
천화가 입을 열었다.
“서녕에 가까워질수록 무인도 많아지는구나. 관도를 걷는 이들 중 반이 무인이라니. 이것도 나름 장관이로다.”
“뭐, 어차피 신경 쓸 일 없다.”
어차피 다 제 갈 길 가는 사람들이고, 청유백의 입장에서는 그들과 엮일 일 자체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들이 사마신교의 사람이라면 또 모르겠으나, 최소한 이 길을 걷고 있는 이들 중 흉흉한 마기를 갈무리하고 있는 이는 없었다.
사마신교도 결국은 마교에서 갈라져 나온 교단.
그 ‘육련’이라는 것들은 각자의 특이한 능력으로 인해 마기를 뿜지 않았지만, 그 밑의 떨거지들은 마교의 무사들과 그닥 다를 것이 없었다.
‘절정의 경지에, 마교로 따지자면 마두 이상의 경지는 되어야 마기를 티 안 나게 숨길 수 있으니…….’
최소한 청유백의 눈에 띄는 무사들은 사마신교와 관련이 없다 보아도 좋을 것이었다.
그 이상의 실력자라도, 천화라면 반드시 간파할 수 있으리라.
“저기 도시가 보이는군. 저게 덕령합(德令哈)이다.”
“신기하네요. 처음 보는 건축 양식이에요.”
“대충은 그렇지. 약강은 서역에 좀 더 가깝고 사막이 근처이니, 온전히 중원의 방식으로 집을 짓지는 않아.”
“오오… 흑색 지붕이라. 그야말로 귀한 광경이구려. 무엇으로 만든 것일는지.”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발걸음은 덕령합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덕령합은 약강보다도 훨씬 많은 인파로 거리가 붐비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덕령합은 오로목제와 합밀에서 이어지는 북쪽의 길과, 약강에서 이어지는 서쪽 길이 합쳐지는 도로에 위치한 도시였다.
당연히, 물류가 흐르는 중심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뭐, 이만큼이나 무인이 넘쳐나는 광경은 분명 이질적이기는 하다만.
청유백은 찌뿌둥한 몸을 뒤틀며 인파 속을 걸었다.
“오랜만의 도시니 좀 낫군. 하루 정도만 쉬고 출발하지.”
“오오. 좋은 생각이오, 형제!”
덕령합은 아름다운 호수가 위치하고, 그곳으로 흐르는 강물이 일품인 도시였다.
주변의 초목도 나름 장관이었으니, 휴양지로는 제격의 장소이리라.
하지만 오래 머물 생각도 여유도 없었다.
이왕 온 김에 하루 정도 쉬었다 가면 좋겠다 생각했을 뿐이고, 그동안 분쟁은 분명히 피하는 것이 상책 중 상책일 것이다.
……다만, 작은 문제가 있다면.
무인이라는 것은 본디 힘자랑하기 좋아하는 족속들이라는 것이고─
그런 이들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는, 반드시 사고가 일어난다는 점이었다.
─툭.
길거리를 지나는 사내와 사내의 어깨가 서로 부딪쳤다.
청유백은 아니었지만, 바로 옆의 사내였기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갔다.
“뭐야?!”
“아, 미안하오.”
“느그 집안에서는 미안하면 뭐든 다 해결됐던 모양이지? 앙?”
“아니, 미안하대도…….”
죽립을 눌러쓴 사내는 곤란한 듯 계속해서 사과했지만, 다른 한쪽은 전혀 만족스럽지 않은지 험악한 인상을 부라리며 그 사내를 밀쳐냈다.
“허 참, 미안하대도… 안 될 사람이구려.”
“큭큭, 어디 귀한 것만 처먹은 공자님이신가? 말 한 번 귀엽게 하는구만. 아가, 사과는 바닥에 머리를 박고 해야지. 어미가 그런 것도 안 가르쳐 주던가?”
“내가 아끼는 동생의 말을 빌리자면, 선호하는 음식이 미음이 아니라면 그런 말은 아끼는 것이 좋소.”
“이 몸이 친히 땅에 박아줄 테니, 다시 한번 생각해 봐라!”
청유백은 그것을 끝으로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다.
어디서든 있는 한량들의 시비와 자존심 싸움일 뿐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빠악!
섬전처럼 뽑혀 나온 죽립 사내의 칼등이 다른 사내의 목울대를 강타했고, 찰나가 지나기 전에 그 사내는 자신의 목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었다.
“켁, 커억…….”
“조금 더 겸손하게 행동하길 바라오. 상처는 곧 나을 테니.”
사내는 검을 갈무리했지만, 격한 움직임 탓에 죽립이 벗겨져 땅에 널브러졌다.
그리고 곧, 죽립은 사람들의 발치에 채여 찌그러져 부서졌다.
그 아래에서 나온 사내의 얼굴에, 청유백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청률?”
네가 왜 거기서 나오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