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나미아미타불 (1)
곤륜파.
과거, 구파일방이라 불리었던 중원무림의 중심 중 하나였던 세력이다.
그렇다. 하나‘였던’.
정마대전이 치러지고 백 년이 흐른 지금, 곤륜파는 이미 멸문하여 그 잔재만이 남아 있었다.
백 년 전의 패도천마가 직접 곤륜파의 뿌리를 뽑았고, 전쟁의 후유증을 감당하지 못한 구파일방은 그 일부만이 이름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당시의 구파일방 중, 여전히 그 성세를 과시하는 것은 다섯.
화산, 무당, 소림, 아미, 당문.
현재에 이르러, 오대거파(五大巨派)라고 불리우는 무리였다.
개방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기는 했지만, 다른 다섯만큼 세력이 강성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는 개방이 몰락해서가 아니다.
개방은 도리어 그 어떤 문파보다도 당시의 전력을 온존하고 있었다.
개방은 도리어 전쟁에서 한발 물러나 방관하는 형태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구파일방이 오대거파가 되는 과정에서 일방이 빠진 것은, 오히려 그 이유 탓이었다.
전쟁에서 물러났기에.
전선에서 싸워, 중원 전체가 적대하는 가장 큰 악을 물리쳤다는 명분을 얻지 못했다.
다른 남은 다섯은 날아오르는데, 혼자만 땅을 지킨다면 도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나아가, 과거 구파일방과 나란히 하던 무림세가들의 입지가 줄어든 것 또한 그 이유였다.
남궁, 제갈, 황보…….
식솔들을 우선했기에, 승산 없어 보이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무신과 천마의 동귀어진, 그리고 마교 내부에서 일어난 내분으로 인한 자멸.
그 와중에 사천의 당문만이 전쟁에 참여하였고, 지금의 거파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아무튼, 곤륜은 그때 거의 멸문하여 이제는 이름만 남아 있는 약소 문파 처지일 터였다.
하지만 곤란한 것은, 그럼에도 곤륜의 이름은 남아 있다는 것.
마교가 대놓고 곤륜의 땅을 밟으면, 그들을 도우러 올 정파의 세력이 수백 개는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마교는, 그들과 전면전을 벌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하지 못했다.
“다음은 서녕인가.”
“이미 전서구를 띄워 두었습니다. 며칠 내로 답신이 오겠지요.”
“어차피 뻔할 대답을 뭣 하러?”
“그래도 절차라는 게 있으니까요.”
어차피 올 만한 답은 정해져 있었다.
당장은 천마지회라는 명분으로 움직였지만, 기실 윗분들은 그것은 아무래도 좋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마교의 교주?
그것도 일단 마교가 멀쩡히 남아 있어야 정하든 말든 하는 것 아닌가.
사마신교라는 눈에 확연히 보이는 적이 존재하는 이상, 태연하게 서열놀음이나 하고 있을 여유는 없다.
그러니 뭐… 일단 그곳으로 가 보기는 해야만 했다.
청유백은 지도를 살피며 물었다.
“서녕 근처에 남은 지부는 있나?”
“없습니다. 옛날에는 있었다는 것 같은데… 세력권에서 밀려난 지 좀 되었죠.”
청유백의 기억으로는, 자신이 전생에 살아 있을 적에는 청해가 마교의 영역이었고, 당연히 서녕에도 지부가 있었다.
하지만 뭐 지금의 마교가 이 꼴이 났으니, 오히려 그게 남아 있으면 이상할 것 같기는 했다.
“그럼 가장 가까운 병력은?”
“합밀의 부대가 있긴 합니다만, 큰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습니다. 적가에게 이권이 있는 장소긴 해도… 합밀도 상당히 외곽이라 그리 많은 병력이 있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오로목제에서 끌고 갈 수도 없을 테고.”
“그렇습니다.”
결국, 이렇다 할 병력을 끌고 오려면 마교 본산에서 데려와야만 한다는 소리다.
사마신교 놈들이 그곳에서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아내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상황이 너무 나빴다.
놈들의 계획을 알게 된다고 한들, 마교 본산에서 서녕까지 고수들을 보내는 데에만 거진 한 달.
한 달이면, 눈치를 채고 행적을 숨기든 일을 마무리하든 간에 충분한 시간인 것이다.
그렇다고 다 무시하고 서녕에서 난장을 피우자니, 곤륜파의 눈치가 보이고…….
문득, 청유백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쳐들어가는 것도 괜찮지 않나?”
“쳐들어간다고요?”
“몰래 움직이려고 하니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지. 대놓고 움직이면 일정을 크게 아낄 수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마교 본산에서 정예 고수를 몇 추려, 정면으로 서녕에 진입한다.
마두들 정도의 실력자들이 내력을 아끼지 않고 밤낮으로 달린다면, 천산에서 서녕까지 대략 보름 정도.
본산의 병력을 움직일 수 없는 이유는 곤륜파의 눈치가 보여서였다.
허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상황이라면 어떠할까.
청유백은 말을 이었다.
“곤륜파 본산과 서녕은 상당히 떨어져 있으니, 며칠 만에 해결하고 나오면 놈들이 알아채 봐야 별 수도 못 쓰겠지.”
서녕은 물론 곤륜파의 영역이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 어느 때라도 곤륜파가 무력 개입을 할 수 있는 가까운 위치여서가 아니라, 곤륜파에 대한 존중의 의미에서 지니는 ‘영역’이었다.
곤륜파가 존재하는 청해의 가장 큰 성도가 바로 서녕이었으니까.
그런 존중의 의미였으니, 서녕과 곤륜파 본산은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곤륜산에서 서녕까지, 관도를 타고 걷는다면 한 달.
고수가 지름길을 내달린다면…
아마 이레 정도일 것이다.
청유백의 계산으로는, 마교의 본대가 도착하고 이레 정도라면 충분히 사마신교를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백소하는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난색을 표했다.
“그것이… 좀 곤란합니다.”
“왜지?”
“지금의 곤륜파는 곤륜산에 위치하지 않습니다.”
“……?”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지?
청유백은 계속해 보라며 고개를 까딱였다.
곤륜파가 곤륜산에 없으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문파들의 무슨 무슨 파, 하는 것이 그냥 지들 꼴리는 대로 짓는 것이 아니다.
머무는 산, 본산이 되는 영산(寧山)의 이름을 따 짓는 것이다.
그것은 곧 그 산의 이름이 지닌 상징성을 계승하는 것이며, 동시에 근방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맹호파니 청룡파니 하는, 시정잡배들이 제 놈들 얼대로 지어놓은 이름과는 근간의 인식부터가 다른 이름인 것이었다.
하지만, 백소하는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현 곤륜파의 본거지는 서녕입니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차라리 소림사 땡중이 성호를 그으며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외치고 다닌다는 말을 믿겠다.
곤륜산을 버리고 서녕에 자리 잡은 문파가 곤륜파냐? 서녕파지.
그리고 무엇보다, 곤륜파는 도가 문파 아니던가?
속세를 떠난 도사들은 다 뒤졌나?
“말코도사들이 드디어 미친 거냐?”
“나도 어이가 없다고는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웃기지도 않는군,”
하긴 백 년이나 지났으니, 신선이 되기 위한 수행 같은 것은 유행이 지났을지도 모른다.
종교적 도의라는 것이 유행을 타는 것인지는 처음 알았다만, 말코도사 놈들이 산에서 내려와 도시에 내려앉았다 하니 뭐 그것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지금의 곤륜파는 과거의 허명에 기댄 시정잡배 무리일 뿐입니다. 그토록 칭송받던, 우리의 걸림돌이 되던 곤륜파는 이제 없지요.”
“그럼 무시하면 되지 않나. 그리 썩어빠진 놈들을 제압하는 게 어려울 것 같지도 않은데.”
본산을 버리고 도시로 기어나온 놈들에게 제대로 된 정신머리가 박혀있을 턱이 없다.
하지만, 백소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 허명이 위험한 겁니다. 중원은 지나치게 넓지 않습니까.”
중원은 넓고, 하루에 천리를 가는 소문이라도 중원의 반대편에는 차마 닿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곤륜의 현재는 몰락했지만, 그러한 사실 자체를 모르는 이 또한 아직 많다.
“곤륜의 현 상황을 눈으로 본 이들은 그들을 혐오할지도 모르겠지만, 현재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곤륜의 과거란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곤륜은 여전히 과거의 영웅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의 곤륜은, 영웅의 후예일 뿐이고.
그 후예가 어떻든, 영웅의 이름은 여전히 빛나는 채였다.
“그리고, 설령 곤륜을 혐오한다고 해도 다른 이들이 곤륜을 무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도 하고요.”
곤륜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명예라는 깃발 아래 굳건히 서 있다.
그것을 마교가 무너뜨리려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천하의 모두가 몰려들어 그 명예의 편린을 주워 먹고자 할 것이다.
지금의 곤륜은 쓰레기라도, 과거의 명성만큼은 여전히 찬란하니까.
“결국 명분이군.”
“그런 셈이지요.”
청유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좋다.
어차피 어떤 계획을 세워 어떻게 움직이든, 결국은 천산에서 전서구가 돌아와야 결정이 날 것이다.
청유백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을 향했다.
이미 밤은 어둑해져 석양의 붉은 잔재만이 하늘에 조금 남은 시간이었다.
백소하가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풍비박산 난 집안 확인하러.”
* * *
“가주께서 돌아가시다니!”
“사마신교라니, 그들이 어찌 갑자기 가주를 시해한단 말이오!”
“우리 가문과 일말의 상관도 없는 자들이오.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함은…….”
성씨세가는 때 아닌 분쟁으로 열병을 앓고 있었다.
성씨세가라는 거목을 이끌던 가주가 갑작스레 죽은 데다, 납치당한 줄로만 알았던 성시소가 돌아온 것이 겹친 탓이었다.
즉, 분쟁의 이유는 결국 권력.
당장 가문의 어른들은 성여문의 죽음을 겉으로는 슬퍼하고 있었지만, 그 말들에 숨은 속뜻을 보면 결국 가문의 권력은 어찌 나눌까─에 대한 욕망뿐이었다.
“가주께 적자가 없었으니, 가문의 권리는 동생인 성여답과 딸인 시소가 나눠 가지는 것이 옳겠지요.”
“허나 성여답 놈이 보이지 않소. 오른손은 잘려진 채로 방에 버려져 있었고 말이오.”
“으음… 설마 하는 일이지만…….”
이 분쟁을 끝맺지 못하게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성여답의 부재였다.
그는 눈치 빠르게, 상황이 이상해지는 것을 직감하자마자 도망쳤다.
고독으로 인해 고통받던 손은 결국 잘라버린 채였고, 가문의 어른들은 두 가지 경우를 의심해야만 했다.
하나는, 성여답이 사마신교를 끌어들여 성여문을 살해한 경우.
둘은, 사마신교가 성여문을 살해한 것으로 모자라 성여답을 납치한 경우.
“허허, 이리되면 어찌해야겠소?”
“가문의 병사를 풀어 여답이를 찾아야지요. 납치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허나 찾아온다고 한들… 그때의 처리는 어찌할지…….”
물론 그들은 답을 알고 있었다.
이 대화는 전부 허울일 뿐이다.
둘째 경우는 너무 얼토당토않으며, 그간 성여문의 행동거지만 생각해 보아도 어딘가 뒤가 구리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구태여 첫 번째 가능성은 입에 담지 않았다.
성씨세가의 일원이, 어떤 방식이든 간에 세외의 사교와 결탁했다는 사실은 결코 좋은 풍문이 되지 못했다.
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덮고 넘어가는 편이 좋았다.
정확한 진상은 그들 중 그 누구도 모르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가문의 최고 권력자가 죽었고, 고맙게도 대놓고 의심스러운 움직임을 보여주는 녀석이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금상첨화로, 놈은 가주가 죽으면 권력을 가져갔을 것이 분명한 가주의 동생.
때문에, 그간 숨죽이고 있던 가문의 어른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만!”
가만히 듣고 있던 문노가 탁상을 내리치며 언성을 높였다.
“그간 가주님의 행보에 그 누구보다도 몸을 사리신 분들이 이제 와서 무슨 추태입니까.”
“크흠, 내총관. 하지만 지금은….”
“하물며 아가씨께서 위험하실 적에, 아가씨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신 분이 여러분 중 한 분이라도 계시긴 하느냔 말입니다.”
“말을 삼가게, 내총관. 자네가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논제에 발언할 권리는 없어!”
“…….”
문노는 이를 악물며 말한 노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말마따나 할 말은 없었다.
평생을 가문에 헌신했다 한들, 자신은 결국 고용인.
그들에게 험한 말을 할 수도, 이 권력의 행방을 논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차라리 가문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처지라면 마음 편하게 말이라도 할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쯧, 가만히 있게. 차라리 나가서 시소나 돌보게나. 자네가 가문에 헌신한 바는 잘 알지만, 자네가 낄 일이 아니야.”
“그래?”
“……?”
문득, 노인들의 귓가에 전혀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의 중이던 건물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비웃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뚜벅뚜벅 걸어오는 저 사내가 말한 듯 보였다.
“그럼… 내가 알기로 이 집 자식은 하나로 알고 있는데, 걔 없는 자리에서 씨부리는 당신들은 발언할 권리가 있는가?”
청유백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