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계승되는 의지 (3)
‘…여긴 어디지?’
어둠 속에서 한 줄기의 빛이 반짝였다.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빛이었지만, 그럼에도 낙무열은 자신의 시야를 가린 빛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것은 기억이었다.
낙무열이 무심코 물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자, 그 붉은 눈의 여인이 만들어낸 이적으로 보였다.
낙무열은 본능적으로 위기를 직감했다.
저것은 위험했고, 저것에 휘말리면 두 번 다시는 자아를 찾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거부할 수는 없다.
빛은 다가오고 있었다.
이 무량한 어둠 속에서 도망칠 장소는 존재하지 않았고, 빛은 언젠가 자신에게 다다를 터였다.
그리고 낙무열은 그제야, 청유백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머릿속으로 들여보냈는지 깨달았다.
‘……그래, 믿는 구석이 있었는가.’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청유백이 미쳤다고 자신을 머릿속으로 들여보내 줄 리가 없었다.
멍청하고 어리숙한 청년이라고 무시하기에는, 이미 보았던 청유백의 일면들이 두려울 정도였거늘.
헌데 어찌 일순간 그리도 무시했단 말인가.
낙무열은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 그리고 느낀 것은 한 순간이라도 저항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붉은 눈의 여인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것은, 아니, 그 분은 대체….’
천마혼이라는 것은 대대로 교주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 비전이었다.
심지어 천류하는 후계를 남기지 못하고 객사했으니─ 어쩌면, 그 비전을 아는 이가 청유백 외에는 없을지도 모른다.
낙무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여인이, 차마 사람이 아닌 것만 같은 섬찟한 여인이 어떠한 존재인지 낙무열은 모른다.
그저, 한 사람의 심상세계를 집어삼킬 만큼 막대한 존재감을 지닐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너무나도 두려웠다.
어떻게 그런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낙무열은 무릎을 꿇고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순간에 방대한 정보의 폭우가 뇌리를 쓸어갔다.
그리고 빛줄기는 완벽하게 낙무열을 집어삼켰고──
“이… 이 몸, 이… 기억? 아니야. 그럴 수는, 그럴 수는 없을진대….”
낙무열은 두 번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
* * *
청유백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교아의 시체가 보였다.
놈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낙무열의 기척 또한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둑해지고 있는 하늘과, 언덕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귓가를 스쳐갈 뿐, 다른 어떤 소음도 신경을 어지럽히지 않았다.
청유백이 교아의 시체로 손을 뻗을 즈음, 그것은 이미 서서히 재로 변하여 흩어지고 있었다.
“끝인가.”
낙무열은 사라졌다.
자신의 머릿속, 자신의 상단전에서 일어난 일이니 완전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강신을 통하여 낙무열을 흡수했고, 이미 그곳을 차지하고 있던 천화에 의해 완벽하게 소멸당했다.
‘영혼이라는 것을 영원히 제거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는 일이지만.’
최소한, 청유백은 지금은 낙무열이 죽어 사라졌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완전히 바스러진 잿더미 사이에서 청유백은 부채 조각을 집어 들었다.
‘이것으로 네 개째.’
오로목제로 온 목적이 이 조각을 찾기 위해서는 아니었지만, 어차피 이것을 찾는 일은 마교의 목적과 일맥상통했다.
청유백 자신은 천화의 비밀에 다가가고, 공교롭게도 그 비밀은 사마신교와 닿아 있으니.
이 조각을 쫓는 것이 곧 사마신교를 쫓는 것이 되리라.
무엇보다, 사마신교의 육련이라는 놈들이 이것을 지니고 있었으니, 이 조각이 있는 곳은 그들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이고 말이다.
청유백은 등을 돌려 걷다, 문득 천화를 향해 물었다.
“천화.”
“으음?”
“너, 대체 뭐냐?”
이제 와 물어보는 것도 이상한 질문이기는 했다.
어쩌면, 더 일찍 물었어야 할 내용일지도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대꾸해 오기는 했지만, 과연 그것이 지금도 그러할까.
녹련에 대한 것을 기억해낸 지금이라면, 그리고 조각을 오분지 일은 모은 지금이라면 대답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천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입모양을 보니 이번에도 ‘모른다’라고 대답하려다가, 잠깐 입을 다물고는 말을 바꾸었다.
“그것이 중하더냐?”
“중요하지.”
“본녀는 천화, 옛 신교의 교주이며, 동시에 지금은 네놈의 동반자니라.”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다.
청유백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하려는 찰나, 천화의 말이 이어졌다.
“즉, 네놈의 적은 아니지. 그것이면 되지 않으냐? 감사하거라. 본녀가 적이었으면 네놈은 이미 명부의 이슬이 되었을 테지!”
“하여간 입만 살아서….”
“본녀를 좀 더 우러를 생각은 없더냐? 죽어버리긴 했지만, 녹련이라는 아이의 반응을 보거라. 본녀는 네 생각보다도 대단한 사람이란 말이다.”
“아무렴 그러시겠지요.”
“허어! 귓등으로도 안 듣는지고.”
“쯧.”
“이제는 혀까지 차!”
청유백은 귀를 후비고는 상큼하게 천화의 말을 씹으며 걸었다.
또 대답하지 않는 게 답답하기는 하지만, 별로 상관은 없다.
그녀의 성정이라면, 정말로 중요한 것이 떠올랐다면 숨기지 못하고 어떻게든 표면으로 드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로 모르겠다는 소리고…….’
조각을 몇 개쯤 더 모으면 대답이 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라…….
긴장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 청유백은,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위기감은 아니었다.
주변에 적은 없었고, 교아나 낙무열은 확실히 죽어 사라졌다.
느낀 것은, 그저 단순한 위화감.
‘목소리가… 선명한데?’
뭔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달랐다.
평소에는 머릿속에서 울려오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바로 귓가에서 말하는 것 같은 기분.
“바보 같은 얼굴이구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게냐?”
…아니, 기분이 아니다.
분명히, 귀 옆에서 말하고 있었다.
청유백은 고개를 돌려 천화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허공에 둥실 떠 있는 소녀였다.
완숙한 여인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은 어린, 붉은 눈의 소녀.
언젠가 심상세계에서 보았던 천화의 모습과 꽤 닮아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그것보다는 십 년은 어린 모습이었다.
고작해야 어깨까지 닿을 머리칼은 하나로 묶어 뒤로 대충 넘기고 있었고, 몸에 걸친 옷은 대놓고 그 크기가 커 마치 남의 옷을 빼앗아 입은 꼴이었다.
“선천진기를 사용한 부작용인가.”
헛것을 다 보네….
하기사, 선인들 대대로 하지 말라 쓰지 말라 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청유백은 정말로 오랜만에 선조의 지혜라는 것이 들어맞는 경험에 경탄하며, 가볍게 두 눈을 짓눌렀다.
그러자, 빠악.
이마에 가벼운 통증이 느껴지며, 짜증스러운 천화의 말이 이어졌다.
“허, 헛것이 아니다! 이 무례한 천치야! 눈을 뜨고 본녀를 보아라!”
“…….”
청유백은 눈을 뜨고 둥실둥실 떠다니는 천화를 바라보았다.
떠다니기는 했지만, 원체 어린 탓에 눈높이는 대강 비슷했다.
“귀신…?”
“어허. 그런 저급한 것들과 비교하면 안 되지.”
아니 대충… 몸 너머가 비쳐 보이고, 공중에 떠다니고, 주변에 이상한 빛무리들이 모이는 걸 보면 얼추 비슷한 것 아닌가?
청유백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본능적으로 대충 무슨 원리인지는 이해했다.
방금까지 대적하던 적, 그 녹련이 사용하던 녹색 기의 채찍과 꽤 비슷한 기운이었다.
아니… 비슷하다기보다는, 완전히 동일한 그것이었다.
“녹련의 힘인가?”
“후후, 놈의 자아는 완벽하게 삼켰느니라. 뭐, 본녀에게는 간단한 일이지.”
천화는 콧대가 높아져서는 잘난 듯 으쓱였다.
녹련을 상단전에 받아들이고, 놈을 천화가 흡수하여 죽였으니.
그 힘은 자연스럽게 천화에게 흘러든 듯 보였다.
…그것으로 대체 어떻게 사람의 몸을 만들고, 유지하고 있는지는 감도 잡히지 않았지만 말이다.
“다른 사람한테도 보이는 건가?”
“그건 아닐 게다. 녹련 놈의 채찍처럼 밀도 높은 구성체가 아니야.”
“…쉽게 말해 주겠나?”
“귀신도 아무나 보는 건 아니지 않느냐?”
아하.
귀에 쏙쏙 박히는 설명이다.
그런데… 그 말인 즉.
“귀신 볼 수 있는 사람은 본다는 얘기네?”
“뭐… 그건 그렇게 되겠지…?”
“그럼, 이대로 도시에 들어가면 어찌 되는 건데?”
“…….”
천화는 대답하지 못했다.
설마 영감(靈感)이 뛰어난 사람이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겠지만, 한 세 명쯤만 귀신이 떠다닌다고 말해도 한바탕 난장이 벌어질 것은 뻔할 것이었으니.
청유백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알지?”
“……알겠다. 조금은 자중하겠느니라.”
히잉.
천화는 눈에 띄게 시무룩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슬금슬금 청유백에게로 다가와, 빨려들듯 그 몸속으로 사라졌다.
“…….”
청유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에는 무슨 말을 하든 씹어 넘기면 그만이었는데, 얼굴을 보고 대화하니 그리 단순히 무시하고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청유백은 뭐라 할 말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툭 던지듯 내뱉었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군. 유사시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되겠지.”
[…후후, 걱정 마라. 본녀 없이 네가 뭘 하겠느냐?]
한 번 정도는 저 허세에 대꾸하지 않아도 괜찮으리라.
청유백은 그냥 한 번 피식 웃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남아 있는 독 기운 덕에 고통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미 단전은 텅 비어 한계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천화는 어느새 ‘아직 도심이 아니니 괜찮지 않느냐’ 같은 핑계를 대며 다시 나와 있었고 말이다.
…그러다가 문득, 청유백의 뇌리에 한 가지 의문이 스쳐갔다.
천화가 녹련의 힘을 흡수하여 저렇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면…….
…결국, 그 힘은 자신의 상단전에 머물러 있다는 소리 아닌가.
잠깐만, 그렇게 되면…….
“그럼 나도 이제 몸을 옮겨 다닐 수 있는 건가?”
“……….”
청유백의 ‘뭔가 엄청난 것을 깨달은 듯한’ 눈빛과 천화의 시선이 마주쳤다.
천화는 벌레 보는 표정으로 청유백을 바라보다가, 이내 표정을 고치고는 물었다.
“왜, 편해 보였느냐?”
“목숨이 두 개인 건 언제나 좋지.”
“흐음… 대답은, 글쎄다…….”
천화는 허공에 거꾸로 매달려 인상을 찌푸렸다.
기억을 되짚어 몇 가지를 확인하고는,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녹련도 실행할 수 있는 재능이 따로 있는지라… 뭐, 이론상 안 될 것은 없다만, 실험해 보겠느냐? 일단은 죽어야겠지만.”
“…….”
“어떠냐. 한다면 본녀가 성심성의껏 도와줄 마음이 있느니라. 당장 심장을 뽑아 보는 것부터 시작할까?”
“일…단은 미뤄두지.”
“왜? 편해 보인다며? 본녀가 열과 성을 다해 죽여 준다니까?”
“…….”
농담이 아닌 것 같아서 무섭다.
청유백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고, 천화는 오로목제의 성벽에 도달할 때까지 청유백의 귓가에서 깐죽거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