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계승되는 의지 (1)
청유백은 우선 한 발짝 물러나며 자세를 다잡았다.
─콰앙!
방금까지 청유백이 서 있던 지면이 움푹 파이며 채찍은 다시금 공격의 목표를 찾아 허공으로 치솟았다.
허나 기이했다.
알 수 없는 초록색 기운으로 만들어진 저것은, 단지 채찍의 형상을 취할 뿐인 듯했다.
‘채찍에 마땅히 보여야 할 흐름이 없어. 허공에서도 자유자재로군.’
마땅히 물체를 타격하고, 채찍을 끌어당기고, 다시금 휘두르는 일련의 흐름이 없다.
차라리 비유하자면 생물의 촉수와도 같은 모양새였다.
허공을 가르다가도 청유백이 방향을 바꾸면 틈 하나 없이 곧장 뒤를 쫓는 바람에, 청유백은 일단 채찍의 사정거리 바깥으로 물러났다.
대략─ 이십 장은 되는 거리.
직선으로 내뻗어 오는 채찍을 검으로 흘려 내치며, 청유백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후…….”
아무리 기세가 좋고, 독의 효과로 고통을 잊는다고는 하지만 결코 만전이라고 할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마기는 여전히 바닥을 치고, 낙무열의 발치에 떨어진 검 하나 통제할 여력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여력이 없는 것이라면 낙무열 또한 마찬가지겠으나, 놈을 보통의 시선으로 재단하면 안 될 터였다.
청유백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죽일 수 없다.’
목뼈가 부러지고, 심장이 날아갔는데도 움직이고 있었다.
전신이 피로 물들고 근육이 가닥가닥 찢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부상일진대, 놈은 전혀 개의치 않고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방금까지만 해도 기이하게 뒤틀려 있던 팔은 어느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지 않은가.
계속해서 이상하게 꺾이는 것을 보면 여전히 뼈는 부러져 있는 모양이었지만, 어쨌든 저것을 일반적인 생물이라고 인식하면 안 될 듯 보였다.
‘목을 베면 죽을까?’
[아마 안 죽을 게다.]
천화가 무심히 대꾸했다.
혹시 몰라 ‘아마’라는 말을 붙였다만, 반쯤은 확신하는 사실이었다.
[저건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영이 몸에 깃들어… 몸을 강제로 움직이는 것에 불과하니라.]
이를테면 꼭두각시다.
조잡한 비유지만, 귀신이 물건을 떨어뜨리고 도깨비불이 허공에 부유하는 것과 같은 원리라 할 수 있으리라.
무림인들 가운데 귀신이라는 것의 존재를 믿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 싶지만, 최소한 청유백은 그 존재를 믿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당장 천화의 존재만 생각해 봐도 될 일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저 움직임의 근간은, 가슴팍에 박힌 부채 조각에서 흘러나오는 짙은 녹색의 기운.
척 봐도 평범한 사바세계의 법칙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다.
천화가 말을 이었다.
[마기도, 선기도 아니다. 무인이 쌓는 내공과는 전혀 다른 것이니라.]
이런 말이 있다.
하단전을 열면 힘을 쌓는다.
중단전을 열면 마음을 연다.
상단전을 열면 신을 받아들인다.
무림인들 사이에서 도는 말이 아닌, 무속인들 사이에서 도는 말이다.
청유백은 무속인들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었지만, 천마혼을 익히며 이런저런 것들을 주워들은 바가 있었다.
내공과 마기는 하단전에 쌓이지만, 신은 상단전에 깃든다.
‘…몸이 바뀌어도 저 부채 조각을 매개로 힘을 전달하는 건가.’
저 힘에 이름을 붙이자면, 영기(靈氣)나 신기(神氣) 따위의 형태가 될 것이다.
솔직히, 이것은 상정 외의 상황이었다.
교아의 몸으로 낙무열이 부활한다고 한들, 한 번 이긴 놈을 두 번 못 이길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저 녹색의 영기까지 더해지게 된다면.
‘……어렵겠군.’
말할 필요도 없이, 강한 상대였다.
천화가 이죽거리며 물었다
[해서, 도망갈 테냐?]
‘그럴 리가.’
어려울 뿐.
불가능하다 말하진 않았다.
떠오르는 방법이 몇 가지 있었다.
청유백은 피 섞인 침을 씹어내듯 뱉으며 천화에게 물었다.
‘너, 독기나 마기는 흡수할 수 있었지. 저건 어떻게 못 하냐?’
[불가능하다. 본녀가 만든 것이라고 한들, 본질이 다르지 않더냐.]
‘그래?’
그건 좀 애석하군.
하지만, 뭐.
‘상관없어.’
청유백은 허리춤에 남은 검 두 자루를 전부 뽑아들었다.
홍련검과 비천검.
적색과 청색의 검신이 반짝이며 빛났다.
그리고 양손에 쥔 그것들을 교차하며 대지를 박차고 낙무열과의 거리를 좁혔다.
이십 장.
마기를 끌어올려 도약하면 찰나가 지나기 전에 목을 딸 수 있는 거리지만, 지금은 그만한 여유가 있지 않았다.
‘마기를 아껴야 한다.’
놈의 한계를 모르는 이상, 비장의 수를 남발할 수는 없었다.
낙무열의 손이 휘저어지며 양팔에서 뻗어 나온 채찍이 청유백을 덮쳤고, 청유백은 허공으로 뛰어올라 채찍을 피했다.
막는 것은 악수다.
채찍을 멀쩡하게 막을 방법도 마땅치 않을뿐더러, 저리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채찍이라면 공격 직전에 궤도를 급격히 꺾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기에 청유백이 택할 수 있는 수단은 회피뿐이었다.
왼쪽과 오른쪽, 양 방향에서 동시에 치고 들어오니, 파고들기 위한 방향은 공중뿐.
하지만 낙무열은 비웃으며 팔을 뻗었다.
“멍청한 선택이오.”
뻗어 나간 채찍은 바닥을 내려치지도 않고, 그대로 허공에서 궤도를 틀어 청유백을 향해 쇄도했다.
공중은 피할 곳이 없다.
낙무열의 비웃음은 그런 의미였다.
평범한 채찍이었다면 바닥을 한 번 치고, 다시금 휘둘러 공격할 때까지 바닥을 디딜 틈이 있었겠지만.
그의 채찍은 그저 형상이 그러할 뿐, 실상은 팔과 손의 연장선과도 같았다.
낙무열의 눈동자가 빛났다.
“검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보니, 허공을 박찰 내력도 남아 있지 않을 터. 본인의 승리구려.”
잡았다. 그리 확신했다.
허나.
─파앗!
청유백은 허공을 박차고 한 번 더 도약했다.
“……?!”
그리고 동시에, 묵직한 금속의 충돌음이 들려왔다.
─카가강!
허공에 붙들린 검이 채찍들과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앞으로 남은 거리는 십 장.
‘말마따나 그럴 마기는 없지.’
허공을 박찰 수는 없다.
검을 날릴 기력도 없다.
하지만, 잠깐이나마 검을 허공에 고정시켜 두는 정도는 할 수 있다.
공중에서의 급격한 도약은 바닥으로 향했고, 다시금 땅을 내디딘 청유백은 낙무열에게로 내달렸다.
“허어.”
거리가 좁혀진다.
하지만 채찍은 여전히 남아 있고, 그것들은 지체 없이 다시금 청유백을 향했다.
도리어 가까워질수록 더 위험했다.
몇 갈래로 나누어진 채찍들은 청유백을 감싸듯 포위했고,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내리쳤다.
청유백의 손에 남은 검은, 이제 단 한 자루.
청유백은 까득, 어금니를 악물며 채찍의 비 사이로 몸을 던졌다.
‘천화, 도와다오.’
[뭐? 무얼─]
그리고 동시에, 청유백이 선택한 것은 마지막 비장의 수.
청유백의 전신 기혈이 달아올랐고, 심장은 미친 듯이 빨리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 타오르는 것은 흑색으로 물든 생명의 불꽃.
선천진기(先天眞氣)였다.
[어, 어리석은 놈이! 그건 그리 형편 좋게 쓸 수 있는 힘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않느냐!]
‘네가 도와주면 다를 수도 있지.’
청유백은 맥동하는 심장에서 마기로 물든 선천진기를 일으켰다.
보통은, 수명과 목숨을 대가로 막대한 힘을 끌어다가 쓰는 것.
그것이 바로 선천진기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청유백은 결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 일로 영구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본말전도다.
그렇기에, 딱 한 번이다.
많이도 필요 없이, 그저 검을 한 번 휘두르는 것.
청유백이 필요한 것은 딱 그것 한 번의 마기였다.
보통은 전투 중에 한 번 풀어낸 선천진기를 그리 쉬이 멈출 수는 없겠으나…….
몸의 마기를 다스릴 수 있는 다른 이가, 그것도 천마 수준의 실력자가 존재한다면.
분명 가능할 것이다.
‘믿는다.’
[이, 이이… 빌어먹을 천치가…!]
지금 이 순간에도 채찍은 몰아치고 있었다.
검으로 막아내는 것은 언어도단, 양이 저리 많으면 흘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청유백은 홍련검을 꼬나쥐었다.
그리고 일순간, 붉었던 검신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순간 검신에 일렁인 마기는, 그야말로 세상의 악의를 압축시켜 놓은 듯 짙고 어두웠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힘.
그 무엇보다도 순수하고 악한, 순수한 악의 그 자체의 검기가 허공을 갈랐다.
촤악!
비처럼 내리던 녹색 채찍의 호우가 찢어발겨졌고, 곧바로 검신에 흘렀던 마기는 사그라져 없어졌다.
[이이… 목숨이 아깝지도 않으냐?! 수명을 깎는 행위니라!]
‘몇 년 정도야, 뭐.’
이미 지긋지긋하게 살았다.
고작 그 정도는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수준이다.
이후의 전투 능력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테니, 청유백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온 신경을 집중시켜야만 했다.
눈앞의 상대는 눈 하나 깜빡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청가의 후계여. 한 번 베었다 하여 달라지는 것은 없소.”
낙무열의 손에서 다시금 채찍이 뻗어져 나왔다.
저것은 실존하는 형체를 지닌 것이 아니니, 당연히 얼마든지 다시금 만들어 낼 수 있다.
남은 거리는, 오 장.
낙무열이 팔을 앞으로 뻗자, 곧장 뻗어 나온 채찍들이 청유백을 향해 쇄도했다.
선천진기를 다시 일으킬 수는 없고, 도약하여 물러난다면 방금의 수는 헛되이 수명만 날린 것이 되리라.
그러나, 청유백은 검 대신 손을 뻗었다.
낙무열을 향해서.
아니, 보다 정확히는─
낙무열의 뒤에 떨어져 있던, 처음에 날린 백월검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지금.’
지금껏 검을 날리지 않은 것은, 오로지 이것을 위해.
바닥에 꽂혀 있던 백월검은 고개를 치켜들어 낙무열의 등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저 속도라면 능히 등을 관통하고, 그 너머에 있는 철판을 찌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입니다.”
─카강!
낙무열의 채찍은 청유백을 향하던 궤도를 틀어, 찔러 들어가던 백월검을 쳐냈다.
백월검은 이번에도 궤도를 틀지 않았고, 무력하게 다시금 땅에 박혔다.
하지만, 상관없다.
“알고 있다.”
“뭐라…?”
확신하고 있었다.
낙무열의 채찍이 궤도를 틀어, 곧장 그 백월검을 쳐낼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 채찍이 아무리 빠르다고 한들.
그 채찍이 돌아오기 전에, 자신이 낙무열의 지척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것까지도─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흡!”
청유백은 마지막 검을 던졌다.
공중에 뜬 홍련검은 스스로 가속하여, 낙무열의 심장을 향해 쇄도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채찍들은 그 경로를 가로막아 쳐냈다.
낙무열은 시선을 돌렸다.
이제 입을 벌려, ‘무의미한 저항이었다’라고 말해 주려던 순간이었다.
청유백의 내력은 이제 분명히 바닥을 드러냈을 테고, 이제 그의 손에 검은 들려 있지 않다.
이리 다가와서 무엇을 하려 했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검이 없는 이상 무엇도 할 수 없으리라.
‘무의미한 저항…….’
그러나 청유백은 마지막 한 발짝을 내디뎠다.
백월검을 막으면서 벌어낸 한순간.
홍련검을 튕기면서 벌어낸 한순간.
그리고, 무엇도 들고 있지 않은 청유백을 보고 방심한 마지막 한순간.
청유백은 다섯 장의 거리를 좁히며, 낙무열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낙무열은 피하지 않았다.
그것이 너무 빨라 피하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이대로 목이 뽑혀 나가더라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청유백이 무슨 행동을 하든 간에 그대로 자신의 채찍이 청유백을 꿰뚫으리라고, 그리 확신했다.
이 거리에서는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니까.
“……자.”
하지만, 청유백은 그의 머리를 쥔 채 무엇도 하지 않았다.
목을 돌려 부러뜨리지도 않았으며, 그대로 목을 뽑아버리지도 않았다.
단지 전력으로 단전을 열어젖혀 주변의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무인이 하단전(下丹田)을 열어 대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내공을 쌓아나가는 것을 바로 운기조식이라 한다.
허나 찰나를 조각내고 순간을 쪼개며 청유백이 열어낸 단전은, 다른 무엇도 아닌 머리.
천화를, 천마혼을 각성할 때 열었던 상단전(上丹田)이었다.
하단전에는 힘이 깃든다.
중단전에는 마음이 깃든다.
상단전에는 신이 깃든다.
그러나, 이미 청유백의 몸에 있는 마신은 기껍게 그것을 받아들일 요량이 없을 테다.
청유백은 마지막으로 작게 속삭였다.
“자, 네놈이 좋아하는 다 뒤져가는 몸이다.”
어디 한 번, 먹어치워 봐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