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그럼에도 명예로운 (6)
성씨세가의 장원은 평상시에 비해 상당히 한산한 상태였다.
대부분의 무사들과 칼 좀 쓴다 하는 식객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가주의 지시에 성벽 외곽으로 나가 있었고, 지금 장원에 남아 있는 것은 가문을 지키는 소수의 무사들뿐이었다.
“……뒤숭숭하구먼.”
“그러게 말이야. 외곽 쪽에 나간 놈들도 별일 없어야 할 터인데.”
가주가 어째서 무사들을 동원했는지, 그 진실을 아는 이는 없었다.
그저 평소처럼 가주의 명이니 두말없이 따를 뿐이다.
성여문의 선택과 판단은 틀린 적이 없었고, 그가 가주의 자리에 오르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는 그 판단에 이유가 없더라도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 세간의 평이었으니까.
그나마 이러한 상황에 익숙한 몇몇 이들이, 국경 너머의 이민족이 쳐들어왔다거나 하는 것은 아닐까 막연히 추측해볼 뿐이었다.
“에이, 가주님께서 뭔가 다 생각이 있으시지 않겠는가. 요즘에야 좀 뭔가… 거시기하지만서도 말이야.”
“그렇긴 한데… 갈수록 회의감이 든단 말이지. 교아라는 자를 방만하게 내버려 두는 것도 그렇고 말이야.”
“그건… 그렇지.”
가문을 지키기 위해 남은 이들은, 그런 무사들 중에서도 상당히 고참인 이들이었다.
세가에 헌신하고, 성여문을 따르는 자들.
허나 요즈음 그들 사이에서도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성씨세가의 무사들은 성여문을 신뢰했지만, 무조건적인 신뢰는 끝을 맺기 마련.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계기였다.
주인을 의심하고, 진실을 똑바로 마주볼 수 있는 계기.
이미 사람들은 전부 기이함을 느끼고 있었다.
주인이 예전 같지 않다.
뭔가 이상하다.
어째서 아가씨를 찾지 않는가.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입방아에 올리지는 못했다.
이상하다고 한들 성여문은 여전히 건재했으며, 멋대로 입을 놀리는 이들은 교아가 전부 제거했으니까.
허나 오히려 그랬기에, 그들은 계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 찾아올지 모르는 계기를.
그리고 오늘, 성씨세가의 대문 앞에 작은 소녀가 섰다.
장포를 뒤집어써서 얼굴을 가렸으나, 발걸음과 몸짓에서 풍기는 기품은 평범한 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멈추시오. 어인 일로 왔는지 용건을…….”
“허허, 주인이 제집에 돌아오는 것에 언제부터 용건이 필요해졌는가.”
아이를 멈춰 세우는 경비의 앞을 막아서며, 아이 옆에 선 노인이 죽립을 벗었다.
경비들은 허허롭게 웃는 문노를 알아보았고, 서둘러 뒤로 물러서며 허리를 숙였다.
“내, 내총관님? 언제 외출하셨던 겁니까? 그리고 주인이라니, 무슨…….”
“허허…….”
문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옆의 소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소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와 그들에게 얼굴을 보였다.
소녀의 얼굴을 본 경비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떠졌다.
무어 할 말이 있으랴.
그들이 성씨세가에 몸을 담은 지가 어언 십수 년이었고, 그녀의 어릴 적부터 이 가문을 지킨 것이 십수 년이었다.
“세상에, 아가씨?!”
성시소의 입꼬리가 잠깐 슬쩍 올라갔다가, 다시 떨떠름하게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의 집, 오랜만에 만나는 가문의 사람들.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알리게. 아가씨가 돌아왔노라고. 그리고, 가주전의 앞으로 사람들을 모아 주게. 식솔, 하인 할 것 없이 전부 다.”
“부, 분부대로!”
문을 지키던 무사 중 하나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가문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 걸음은 가벼웠으며, 표정에 담긴 것은 순수한 기쁨이었다.
성시소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어디선가 바라보고 있을 신월을 향해 속삭였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겠죠?”
그 질문은 자신에게, 동시에 청유백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눈물은 이미 삼켰다.
무거운 발걸음이었으나, 자신은 책임을 다해야만 했다.
성시소는 청유백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신월과 문노가 자신을 찾아오기도 전, 한발 먼저 찾아와 아비의 죽음을 속삭이며 했었던 말을 다시금 뇌리에 새겼다.
괴로울 것이다.
가슴이 미어질 것이다.
당장 부정하더라도, 곧 현실임을 받아들인다면 그때에는 더욱 슬플 것이다.
아비의 죽음이 누군가의 욕망에 휘말린 헛된 개죽음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직시할수록 슬픔은 증오가 되어갈 것이다.
‘그러나, 받아들여야만 한다.’
청유백은 속삭였다.
호족의 딸로 태어나, 세가의 비호를 받으며 자란 인생.
배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그 모든 것을 누리며 산, 높은 곳에 선 자의 책임을 져야만 한다고.
슬픔은 삭여야만 하며,
분노는 속여야만 하고,
증오는 사그라들어야만 한다고.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명예라고.
집으로 돌아온 어린 소녀는 사람들 앞에 섰다.
“여러분. 할 말이 있습니다.”
명예.
너무나도 우스운 단어임을 성시소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실존했다면 성여문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지도 않았을 것이고, 자신이 이 자리에 설 일도 없었을 테다.
하지만, 지금 성시소가 내세워야만 하는 것은 바로 그 명예였다.
청유백에게는 명예가 필요하지 않다.
음지의 싸움은 명예를 필요로 하지 않는 까닭이다.
그것은 그저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일 뿐이며, 배제할 수 있다면 가장 먼저 제거해야만 하는 불순물이다.
허나, 그것이 양지의 싸움이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명예.
그것은 그 어떠한 것보다도 확고한 종류의 ‘명분’임과 동시에─
한 가문의 적통이 주장할 수 있는, 가장 무결한 계승의 이유였다.
* * *
사경녹련.
죽음을 거부하고, 시신을 일으켜 그 몸으로써 삶을 이어 나가는 비술.
네 번째로 만들어졌고, 그때에 비로소 죽음에 닿았기에 사경(死境)이라 하였다.
뭇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녹련은 그야말로 필승의 비술임과 마찬가지였다.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에서, 동귀어진이 ‘상대방만 죽는 수’로 변모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무림인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녹련은 무적이 아니다.’
필승.
그러나, 불사(不死)는 아닌.
청유백은 천화가 속삭였던 녹련에 대한 정보들을 떠올렸다.
계속해서 몸을 옮겨 다니는 녹련이지만, 그것이 무한정 가능하지는 않다.
첫 번째로, 준비된 몸이 있어야만 한다.
적합한 재료를 들여 적절한 과정의 처리를 끝낸 육신이 필요하다.
이 ‘재료’란, 아마도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보았을 때 천화의 부채 조각이니, 그런 육신이 많지는 않을 터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한 번 몸을 옮긴 직후에는 다시 몸을 옮길 수 없다.
적어도 반 시진 정도는 뜸을 들여야만 하며, 연속해서 몸을 바꾸려 했다가는 도리어 영혼이 붕괴한다는 것이다.
즉, 녹련을 죽이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했다.
놈이 몸을 옮긴 직후, 반 시진 이내로 목을 친다.
그러면 두 번 다시는 살아날 수 없다.
…뭐, 놈들의 부활 방법이 다섯 개나 남아 있는 마당에, 속단은 이르기는 하다만.
아무튼, 정말로 간단하기 그지없는 답안인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이뤄낼지에 대한 문제는 차치해야겠다만.
‘방법 자체는 단순하다.’
그렇기에 청유백은 녹련을 끌어내는 것에 집중했다.
놈들의 목표를 예측하고,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끔 움직였다.
멀리서 교아의 사지를 찢어발길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굳이 접근하여, 굳이 팔을 처박고, 굳이 낙무열이 이리로 오기를 유도한 것이다.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눈앞에서 살랑인 것과 마찬가지였다.
낙무열은 청유백이 ‘녹련’에 대하여 알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으니, 더욱 달콤하게 다가오는 기회였으리라.
청유백은 웃었다.
“그러니까, 네놈이 한 말 그대로 돌려주지.”
목 뒤로 넘어간 환약이 녹아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녹지연에게 요청해서 준비한 특제의 독들이었다.
마기의 회복에 큰 도움을 줄 법한 명품들은 아니었으나, 기분을 고양시키는 정도의 효능은 확실히 있었다.
몸을 휘감는 전능감과, 멀어져가는 고통을 느끼며 청유백은 백월검을 뽑아들었다.
“어차피 네놈은 여기서 끝이야. 어디 발악해봐라. 후회 남지 않게.”
“……허.”
…….
녹련은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이미 무뎌진 감정이었기에 화가 나지도, 흥미를 지니지도 못했으나, 그럼에도 ‘기가 차다’라는 감상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허세가 아니군.’
성씨세가의 장원에 두고 온 마지막 하나의 몸.
낙무열은 그 몸 주변의 상황이 시끄러워지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지난번, 신월이 가주의 방에 침입했을 때 곧바로 막아낸 것도 그 감지 능력에 근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가문을 들여다보았고, 청유백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놈은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이 올 것임을 알면서도 또 다른 양동을 꾸민 것이다.
그래, 훌륭하다.
낙무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한 수였고, 보기 좋게 한 방 먹은 것도 인정한다.
허나, 아직은 아니다.
이 결투를 바둑에 비유한다면, 낙무열의 차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대, 무언가 간과하신 것이 있지 않소?”
청유백의 계획은 훌륭하다.
양동은 언제나 표본적인 전술의 하나이며, 성동격서(城東格西)란 무릇 이럴 때 쓰는 말일 테다.
그러나… 모든 계획은, 근간이 되는 ‘전제 조건’이 있는 법.
청유백의 계획은 아직 전제 조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낙무열이 그 계획을 저지시키는 방법은, 그 무엇보다도 단순했다.
“본인이 그대를 죽이고 돌아가, 그 아이의 몸을 빼앗으면 그만인 일이지 않소.”
“뭐 그야…….”
맞는 말이기는 하다.
언제나 형편이 좋기만 한 작전은 없다.
무엇이 되었든 전제 조건은 있기 마련이고, 낙무열이 말한 것은 그야말로 핵심이다.
하지만 청유백은 가벼이 대꾸했다.
“할 수 있으시다면야.”
그와 동시에 전신의 마기를 끌어올렸다.
이미 바닥을 드러낸 마기지만, 방금 복용한 독의 효과로 조금씩이나마 다시 차오르고 있었다.
‘승리의 확신?’
웃기는 소리다.
그딴 건 처음부터 없었다.
‘숨을 쉰다’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않고, ‘잠을 잔다’라는 현상을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다.
혹자는 오만하다 말할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청유백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싸움에 임하는 이상, 패배라는 경우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낙무열은 그런 청유백을 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즐겁지는 않다.
그런 감정은 이미 오래 전에 잊어 버렸으니 말이다.
허나, 자신에게 즐거움이라는 것이 남아 있었다면 아마 이렇게 웃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하, 좋소. 청유백… 인정하겠소. 이 녹련의 이름을 걸고 보증하지. 자네는 머지않아 본교의 가장 큰 적이 될 것이오.”
청유백의 나이는 약관에도 이르지 못했다.
고작 열일곱, 아니면 열여덟.
차마 재능을 전부 꽃피우기에도 젊은 나이다.
“허나, 그렇기에…….”
그러니 이곳에서 막아서야만 했다.
더 큰 위협이 되기 전에, 아직 새싹일 때 밟아 놓아야만 했다.
그런 면에서, 낙무열은 지금 청유백이 자신의 앞에 있다는 것이 다소 행운으로 느껴졌다.
오로목제는 다시 차지하면 된다.
설령 낙무열 자신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마신교는 능히 다시금 오로목제에 손을 뻗을 수 있을 것이다.
청유백, 이 사내만 없다면 말이다.
“…자네를 길동무로 데려간다면, 그분께서도 필히 기뻐하시겠지!”
피차 물러설 곳은 없고, 목표하는 바는 적의 목숨.
녹련의 수강으로 이루어진 채찍이 청유백에게 쇄도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