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그럼에도 명예로운 (5)
콰득.
청유백의 손목을 쥔 교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니, 아니다.
교아는 이미 죽었다.
목뼈가 그대로 부러졌으니 살 도리가 없다.
그러니 저 형형하게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는 교아가 아닌 다른 누군가.
청유백은, 녹련 낙무열이 지금 이곳에 왔음을 직감했다.
‘상정한 것보다 빠르다.’
청유백은 아직 손을 빼지 못했고, 부채 조각도 교아의 몸에 있는 채다.
어쩌면 이대로 잡아 뜯으면 가장 최고의 결말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낙무열의 손아귀는 그리 쉬이 빠져나가게 두지 않을 듯 보였다.
“…너무 성급한 것 아니오? 좀 더 진득히 느껴 보시구려.”
쿠드득.
청유백이 쥔 조각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막대한 기의 응집과,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불안정한 요동.
자폭이라도 할 심산인지, 낙무열은 청유백의 팔을 더욱 거세게 악쥐며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제기랄.’
손은 빠지지 않는다.
순간이 완벽하게 어긋났다.
아니, 어쩌면 낙무열이 바로 지금의 순간을 노리고 개입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대로 폭발한다면 놈 또한 무사하지는 않겠지만, 그것은 분명 악수.
놈들이 지닌 부활의 대책이 어떤 것이 더 있는지 모르는 이상, 동귀어진의 수는 이미 논외로 둬야만 한다.
가슴에 모여드는 기운은 서서히 그 힘을 더해 이제는 일렁이는 빛을 지니고 있었고, 청유백은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강구했다.
주어진 시간은, 더도 말고 그저 단 한 순간.
검을 단 한 번 휘두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고민은 사치였고, 순간의 판단보다도 직감이 먼저 팔을 움직였다.
순간 눈에 비친 것은 무방비한 목과, 당장 방해가 되는 손목.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청유백은 당장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아아앙!
낙무열의 신체는 굉음과 함께 폭발했고, 청유백은 어떻게든 남은 마기를 끌어올리며 뒤로 물러섰다.
“크윽!”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청유백의 판단은 정확했다.
살갗을 파고들어 아직도 청유백의 손목을 쥐고 있던 낙무열의 절단된 손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손목을 자른 이유는 단순했다.
목뼈가 부러졌는데도 움직이는 놈인데, 과연 목을 자른다고 움직임을 멈출까.
확신할 수 없는 일이라면, 차선을 택하는 것이 옳았다.
청유백은 성공의 유무조차 불투명한 도박에 목숨을 걸고 싶지 않았으니 말이다.
비록 체력은 이미 바닥에, 방금의 폭발을 막아낸 왼팔이 반쯤 그을려 있었다만…….
괜찮다. 아직 싸울 수 있다.
청유백은 자세를 다잡았고, 폭발의 모래 먼지 너머에서 낙무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하시구려, 청가의 후계여. 경이로울 정도의 판단이오.”
“…….”
같잖은 칭찬이다.
낙무열의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묻어 나오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청유백은 더욱 분노가 끓어올랐다.
마치, 이번에는 좀 아쉽지만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오만이 말에 섞여 있는 듯 느껴졌다.
모래 먼지가 걷히고, 낙무열의 모습이 보였다.
상반신의 옷가지가 폭발로 인해 날아가 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가슴의 피부를 포함한 근육이 반쯤 불태워져 있었고, 찢어진 근육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와 뼈의 조각들이 엇비쳤다.
그리고 그 가운데, 심장의 오른편에 위치한 강철의 조각이 있었다.
그야말로 기괴한 광경이다.
폭발로 날아가지 않은 그 육체의 강인도를 의심하기 전에, 어째서 살아 있는지가 더 궁금할 지경이었다.
근육은 끊어졌을 것이다.
뼈는 부러지고, 내장은 박살 나 결코 살 수 있는 상황이 아닐 터.
심지어, 방금의 폭발로 심장은 형체도 남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거지? 살아 있기는 한 건가?’
[아니, 이미 죽었다. 살아 있는 게 아니야.]
‘그러면?’
[저것이 녹련의 본질이다.]
죽음에서 도망치기 위한 비술.
시체를 억지로 일으키고, 영혼을 강제로 몸에 처박아 넣는 것이다.
놈은 마땅히 ‘생물’이라고 할 법한 운동을 하지 못했다.
다리는 풀려 꼭두각시 인형처럼 지지대의 역할만 할 뿐이었고, 부러진 양팔은 기괴하게 비틀려 향할 수 없는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놈은 움직인다.
청유백은 저 움직임의 원리를 짐작할 수 있었다.
‘몸이 아니군. 근육이 아니라 내공으로… 영혼이 몸을 조종하는가.’
스스로도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지 자조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눈앞에서, 항설 속의 강시보다도 비현실적인 존재가 적의를 내비치고 있는 것을.
“방금 그것으로 끝낼 생각이었거늘. 명줄이 상상 이상으로 질기신 모양이오.”
“아무렴 네 명줄보다야 길지. 넌 여기서 뒤질 거니까.”
“허허, 그것은 과연 어떨는지.”
낙무열이 팔을 들었다.
부러져서 축 늘어져 있는 목을 바로 세워 맞추고, 형형한 녹색 눈동자를 빛내었다.
단전이 아닌 눈에서부터 녹색의 기운이 흘러나와 팔을 감쌌고, 뒤틀린 팔을 원래대로 돌리며 본래의 형태를 되찾아 갔다.
순식간에 뼈가 붙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어찌 되었든 움직이기 가장 효율적인 형태로 돌아온 셈이다.
낙무열은 청유백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대는 분명 특이하구려. 이런 꼴을 보고서도 그리 투지를 불태우는 이는 흔치 않았다오.”
“모가지를 베면 뒤질지 시험해 보고 싶어서 말이지.”
“큭큭, 한번 시험해 보시구려. 발버둥을 지켜보는 것도 하나의 여흥인 법이지.”
말하던 낙무열의 미간으로 청유백의 검이 쏘아져 날아갔다.
검은 신속했지만, 복잡한 궤도를 그리지도, 별다른 움직임이 있지도 않았다.
검을 계속해서 붙들고 있기에는 청유백의 남은 마기가 모자랐다.
그것은 이미 이기어검이라기보다는 그저 단순한 투척.
자연스럽게 결과도 당연하듯 다가왔다.
─파악!
낙무열이 장난스레 휘두른 팔의 연장선에서 녹색의 채찍이 휘둘러졌고, 그것은 가볍게 머리로 향한 검을 쳐내었다.
그리고 바닥에 처박힌 검은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낙무열은 미동도 않는 검과 청유백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안쓰럽다는 듯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한 가지 좋은 것을 알려 드리겠소. 청가의 후계여.”
“……?”
“곧 시간이 되오. 성씨세가의 무사들에게 결투의 장소들을 습격하라 명해 두었지. 그들은 이미 대기하고 있을 것이고, 무참히 살해당한 성여문의 시신을 발견할 터.”
‘무참히 살해당한…이라.’
청유백은 놈들도 명예 따위는 개나 주고 이것저것 준비했다는 사실보다도, 적영이 살아 있을 거라는 단서를 내포한 그 말이 먼저 다가왔다.
준비한 진법과 독을 전부 간파하고 적영을 간단하게 살해했다면, 굳이 성여문의 몸을 포기하는 선택을 할 리가 없으니 말이다.
적영에게 특별한 마음이 있는 것은 결단코 아니었지만, 언제나 쓸 만한 장기 말은 많은 것이 좋았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 무리해서 빠르게 교아를 제압한 감이 있었다만, 그것이 무의미한 행위가 아니게 된 것이 무엇보다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미련 없이 눈앞의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소리.
낙무열은 자신의 말이 청유백에게 확신을 가져다주었다는 사실은 모른 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살아 돌아간다고 해도, 그대들에게 다음은 없소. 목숨을 부지해도 오로목제에 발을 들일 수단은 사라지겠지.”
결국 결투는 속임수였고, 무사들을 동원하여 밀어 버리겠다는 소리였다.
하긴, 당연하다면 당연한 선택이다.
수적인 우세와 환경의 이점을 포기하고, 굳이 멍청하게 결투를 말한 시점에서 예상할 수 있던 대목이었다.
이제 와서 굳이 ‘다음은 없다’ 따위의 엄포를 놓아도 뭐가 바뀌겠는가.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그러니 전력을 다해 덤비시오. 본인도, 그대도. 마지막이라면 미련은 없어야 하지 않겠소?”
청유백은 코웃음 치며 대꾸했다.
마지막일 생각도 없고, 미련이라는 것은 살면서 가져 본 역사가 없는 몸이다.
허나 네놈이 잘난 듯 떠든다면야.
청유백도 할 말이 있었다.
“하, 그런가? 그럼 나도 좋은 것 하나 알려 주지.”
청유백은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종이에 싸매어진 환단 세 알을 꺼내었다.
약병도 준비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그것들은 전투 중에 깨어져 버린 모양이었다.
청유백은 아쉬운 대로 환단을 전부 입속으로 털어 넣고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넌 속은 거야. 병신아.”
“……무슨 말을?”
“난 두 번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굳이 말해 주지. 네가 속았다고. 멍청한 새끼야.”
“……?”
낙무열은 청유백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의심이 되었다.
청유백이 자신의 말을 듣기는 한 것일까?
아니면, 듣고서도 이해를 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한 것일까.
하지만 지난날 성씨세가와 사마신교 휘하의 상회를 동시에 습격하여 조각 하나를 탈취한 그의 수완은, 결코 멍청하다 폄훼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청유백의 대꾸가 이어졌다.
“내가 진짜 몰라서 멍청하게 계속 그 몸에 팔을 처박고 있었을까? 생각해 보니 이상하지 않나? 그만큼이나 난장판을 피우면서 땅을 갈아엎었는데, 굳이 교아는 손으로 제압한다? 정말로 굳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요?”
“네가 빈틈을 찌른 게 아니라, 내가 빈틈을 보여 준 거라고.”
뭐, 솔직히 인정한다.
예상한 것보다 조금 빨리 등장해서, 살짝 위험했던 순간은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청유백의 계획대로였다.
녹련이 몸을 옮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들의 노림수가 무엇일지 간파한 결과다.
그들은 이리 생각했을 것이다.
첫째, 겁 없는 애송이들을 떨어뜨려 각각 척살한다.
둘째, 설령 교아가 실패한다고 한들, 교아의 죽음을 보고 안도한 청유백의 빈틈을 낙무열이 찔러 죽인다.
전부 실패하더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상황은 여전히 그들의 손에 의해 통제되고 있고, 죽음은 두렵지 않으니 다음을 노리면 그뿐이다.
그렇다면, 일어날 수 있는 경우 중 청유백이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뭘까.
적영의 죽음?
아니다.
그것은 부담되겠지만, ‘가장’ 두려운 경우까지는 아니다.
낙무열의 개입으로 인한 청유백 자신의 죽음?
그 또한 아니다.
만에 하나라도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두려움을 어찌 느끼겠는가.
청유백에게 있어, 이 상황에서 가장 곤란한 경우는…….
다름 아닌, 낙무열의 ‘이탈’이다.
싸우는 모양만 잡은 후, 성여문의 몸에 아무런 미련을 가지지 않고 다른 몸으로 떠나버릴 경우.
청유백에게도 눈을 돌리지 않고, 그저 가문으로 떠나 이 상황만을 마무리 지으려고 하는 경우─
그 경우에는, 청유백은 상당히 곤란해졌을 것이다.
청유백 뿐일까. 적영과 녹지연, 백소하를 포함한 일행들과, 나아가 이곳의 지부가 통째로 밀려버릴 가능성 또한 존재했다.
가주를 잃은 병력은 분노로 날뛸 것이고, 마교의 지부는 그 파도를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성씨세가를 본래대로 되돌린다는 목적은 길을 잃어버리고, 낙무열은 어떠한 손해도 없이 세력의 계승을 적절하게 이어갈 것이다.
성여답의 몸을 빼앗든가 하는, 그런 방법으로 말이다.
허나 낙무열은 기회를 보았다.
지금 개입하면, 청유백을 죽일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후의 일이 편해질 것이며, 남은 일은 오합지졸을 쓸어버리는 것일 뿐이라고─
그리 확신해 버리고 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