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149화 (149/200)

제149화. 그럼에도 명예로운 (4)

“하…!”

“괜찮군. 훌륭하오. 적가의 도법을 본인의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오만, 그대의 몸을 취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군.”

적영의 붉은 도기와 낙무열의 녹색 수강이 맞부딪쳤다.

아니, 그것을 수강이라고 불러도 될까?

손에서부터 뻗어져 나간 그것은 이제 거의 채찍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며, 몇 개의 채찍이 한 손에서 뻗어나간 그것은 문어의 다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끝으로 갈수록 그 형상이 흐려져, 동시에 휘둘러지는 수강을 받아치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기운이 날아오는 것을 쳐내는 과정과도 같았다.

채찍 하나하나가 생물의 다리처럼 살아 있어, 오체의 빈틈을 찾아 찔러들어 온다.

특히나, 이미 상처 입은 왼쪽 다리를.

‘빌어먹을.’

적영은 집요하게 다리를 노리는 채찍을 피해 땅을 굴렀다.

바닥을 박차고 도약하는 것도 방법의 하나가 되겠지만, 다리를 다친 지금은 썩 여의치 않다.

도약도, 착지도 불안정할 것이 뻔했다.

방금 바닥을 구른 곳에 채찍 다발이 연쇄적으로 부딪치고 흙더미가 튀었다.

그나마 낙무열의 팔 한쪽이 날아가서 망정이지, 양손으로 저 지랄을 떨었다면 자신의 미래는 죽음뿐이었을 것이다.

이대로 가면 당한다.

하지만, 적영은 그때가 올 때까지 저놈의 입이 쉴 새 없이 떠벌거리는 것을 두고 볼 만큼 착한 인간이 아니었다.

“팔이 떨어져도 입은 살아 있네. 목이 떨어져도 나불거리나 한번 볼까?”

“그건 또 흥미로운 생각이오. 어디 실험해 보시구려.”

“미친 새끼.”

친구마냥 친절한 악담이 오가지만, 서로의 목적은 명료하다.

눈앞의 상대를 죽인다.

적영이든, 낙무열이든 휘두르는 그 손속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서로 죽이려고 무기를 휘둘렀고, 그 전투의 흔적은 계속해서 몸에 새겨졌다.

그러나 눈에 띄게 상처가 늘어가는 것은 적영뿐이었다.

적영은 갈수록 지쳐가고 있었고, 어깨와 허벅지의 뚫린 상처에서 흘린 피 탓에 이제는 시야도 흐릿했다.

허나 낙무열은 한쪽 팔이 잘리고서도 대체 어찌 되어먹은 몸뚱이인지, 전혀 기력이 쇠한 모습이 아니었다.

땀을 흘리는 것 같지도, 숨이 벅찬 것 같지도 않다.

적영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도를 꼬나쥐었다.

‘빌어먹을, 얼마나 더 시간을 끌어야 하냐고…!’

빈틈을 틈타 몇 번인가 반격을 가하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낙무열은 눈을 빛내며 가볍게 쳐내기를 반복했다.

준비한 것은 전부 떨어졌고, 남은 것은 완벽한 실력의 진검 승부.

허나 적영은 자신이 눈앞의 그를 이길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수련을 쌓은 시간부터가 압도적으로 다르지 않겠는가.

도망쳐도 누군가 탓할 만한 대상이 아닐 테다.

허나 적영은 버텼다.

시간을 끌었다.

자신이 맡은 일은, 청유백이 언질했던 말은 그것 하나뿐이었으니까.

‘이기기를 바라지 않는다. 죽지 마라. 시간을 끌어라.’

시간을 끌라고?

망할, 언제는 생각보다 강하다더니, 그래놓고 한다는 말이 ‘죽을 걱정은 없겠군.’ 정도냐.

그 개자식의 앞에서는 ‘딱히 내가 죽여버려도 상관없지?’라고 말하긴 했다만, 실전은 역시 다른 법이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불타오르는 듯한 상처의 고통을 억누르며 조금씩 흐르는 시간을 세는 것.

그것뿐이었다.

공방이 오간다.

무형의 기운과 적색의 도기가 격돌한다.

처음에는 불타오르는 사자의 갈기 같던 도기는 그 기세가 상당히 줄어, 도의 표면만을 간신히 빛낼 정도로 사그라들었다.

앞으로 조금이다.

이제는 도망칠 힘도 없고, 다리는 힘이 빠져 아직 무릎 꿇지 않은 게 기적일 정도다.

허나 그때 문득, 공격이 그쳤다.

낙무열이 손을 내리고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자신에게 조금만 더 기력이 남아 있었다면, 당장에 땅을 박차고 놈의 심장에 도를 찔러 넣을 확신이 들 정도의 빈틈이었다.

낙무열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어 탄식을 내뱉었다.

“…아쉽소.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그대의 목도 취할 수 있었을 터인데.”

“…….”

적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힘이 없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어떻게든 고정하며 도를 꼬나쥐었고, 앞으로 두어 번 정도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는 다리를 일으켜 세운다.

하지만, 공격은 오지 않았다.

낙무열은 잠깐 비틀거리더니, 무게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어떠한 종류의 낙법도 취하지 않았다.

그대로 왼쪽으로, 저항 하나 없이 머리를 땅에 박았다.

인형의 실이 끊어지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이건… 설마.’

…허나 적영은, 저 움직임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 그것은 아마도 며칠 전.

침입했던 상회의 주인이… 갑자기 하늘을 바라보더니,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던 그 순간.

그래, 그때와도 같았다.

누군가가 쓰러뜨린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일했다.

남은 독이 늦게 작용한 것도 아닐 테고, 쓰러지기에는 그럴 만한 출혈도 아니었다.

피가 계속 흘렀다면 모르겠으나….

낙무열은 환부를 스스로 지져 지혈했고, 그때 바로 뒤졌으면 뒤졌지 이제 와서 사망에 이를 만한 상처는 아니었을 터.

‘시간 끌라는 게 이런 소리였어?’

무슨 원리인지, 무슨 조화인지는 모른다.

관심도 없다.

백소하야 좋아하겠다만, 적영은 그런 비밀에는 썩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해야 하는 일은 안다.

적영은 허탈한 심정으로 낙무열에게 다가가 도를 치켜들었다.

─푹.

가볍게 목을 찌르고, 놈의 가슴팍을 도려낸다.

지난날 보았던, 그 부채의 파편을.

* * *

[서둘러라. 놈이 올 게다.]

“이미 서두르고 있어.”

[각오는 되었겠지?]

“할 수 있는 만큼이라면.”

청유백은 한숨을 내쉬며 교아의 몸을 헤집었다.

사경녹련.

천화는 며칠 전의 밤, 떠올린 기억에 대한 설명에서 이리 말했었다.

사경녹련이라는 비술은 몹시 이질적인 것이라고 말이다.

[잘 듣거라. 녹련은 사람을 장생(長生)토록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소생(甦生)토록 만드는 것 또한 아니며, 불가나 도가의 환생(還生)을 묻는다면 그것은 더더욱 아니다.]

녹련은 어쩌면, 여섯 가지 방법 중 가장 이질적인 것.

죽음에서 벗어나는 방법 중에서도 가장 천륜에 반하는 일이었다.

어쩌다 이러한 결과에 이르게 되었는지, 천화는 기억하지 못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세 번째에 어떤 결과에 다다랐기에 녹련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내었는지, 아직은 알 방도가 없다.

도대체 어쩌다가, 무슨 이유로 그것을 만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녹련이 무엇인지 이야기한다면.

이리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녹련은… 다른 생자의 몸을 빼앗는 비술이다.]

몸에서 다른 몸으로, 그 영혼을 옮기는 비술.

그것이 바로 사경녹련이었다.

[그 몸의 주인이 지녔던 생전의 지식, 힘, 경지… 그 모든 것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지. 본래 몸의 영혼을 말살하고, 그 몸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면 만능 아닌가?’

청유백은 인상을 찌푸렸다.

지식이랑 힘까지 취할 수 있다면 그깟 죽음이 문제인가.

천마와 무신.

당대에는 그 둘이 천하제일인의 자리를 두고 다투었지만, 선대의 무인들 중 자신들보다 강한 사람이 없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세상은 넓고, 괴물은 많으니까.

만약 그런 비술이 자신에게 있었더라면, 청유백은 당장 초대 천마의 묘부터 파헤칠 작정을 했을 것이다.

[말처럼 편한 비술은 아니니라. 시신이 썩지 않은 상태여야 하며, 특별한 과정을 거쳐 영혼을 깃들일 준비를 해야만 하니…….]

요컨대 아무나 다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청유백은 무기질적으로 대꾸했다.

‘하긴, 그런 게 되었으면 그 뒤로 두 개가 더 나올 일도 없었나.’

나머지가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교아 놈이 ‘육련’이라고 지껄이는 것을 보면 그 뒤로 두개가 더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천화의 대답은 조금 달랐다.

[그것은 아니다. 설령 그것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녹련은 결코 완벽한 비술이 아니니라.]

‘어째서지? 죽을 때마다 몸을 옮겨가면 되잖아. 그거야말로 완벽한 영생 같은데.’

[천륜을 정면으로 농락하는 짓이나 다름없지 않더냐. 당연히, 그 대가 또한 거대했느니라.]

천륜이라.

하기야, 신이 있다면 그 꼴을 가만히 즐겁게 보고 있지만은 않을 테다.

죽음으로부터의 도피.

섭리로부터의 배반.

청유백도 한때는 마교의 신인 천자마(天子魔)를 추앙했던 적이 있었지만, 수십 번에 이르는 회귀동안 그런 것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본녀가 만든 죄악들은 하나같이 그 대가가 거대했다. 기억이 사라지기도 하고, 오감을 잃기도 하며… 때로는 그 영혼을 앗아가기도 했느니.]

다른 어떤 방법이 어떤 것을 잃는지는 차차 기억해 내야겠지만, 녹련에 대한 대답만은 해줄 수 있었다.

천화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녹련이 잃는 것은 감정이니라.]

‘감정?’

감정이라.

청유백은 생각보다 별것 아닌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야 그렇지 않은가.

천화가 방금 말한 것들, 기억이나 오감, 영혼 같은 듣기만 해도 심상찮은 것들에 비하면 감정 정도야 내어줄 만한 것 아닐까.

‘싸우는 데에도 별문제가 없을 것 같고. 감정 정도는 괜찮지 않나?’

[실용의 문제가 아니니라.]

기실 청유백의 입장에서는, 이미 오랜 세월을 반복한 만큼 자신의 감정이 어느 정도 무뎌져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감정이 조금 사라진다고 하여 별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글쎄.

육련이 추구하는 방향은 영생이다.

그리고 영생에 있어 감정이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영겁에 가까운 삶. 찾아오지 않는 죽음. 반복되는 무료…. 그 가운데에서 어떠한 쾌락도 없이 공허하게 떠돈다고 생각해 보거라.]

즐거움도 없다.

쾌락도 없다.

분노도, 슬픔도, 인간을 이루는 그 어떠한 종류의 반응도 없다.

천하의 진미를 먹어도 그저 혀에서 감도는 맛을 느끼는 것에 그칠 것이며, 둘도 없는 절경을 보아도 햇빛이 눈부시다는 정도의 반응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삶.

운명과도 같은 생의 반쪽을 만나 그 손을 맞잡아도, 느껴지는 것은 그저 따뜻한 체온뿐인, 그런 삶.

[무엇을 위한 영생이겠느냐. 무엇을 위해 그 삶을 영위해야 하겠느냐? 산해진미와 절세가인을 옆에 두고서도 어떤 즐거움도 느낄 수 없거늘.]

‘…그건 그렇겠군.’

그리 생각하면 맞는 말이었다.

청유백은 순순히 수긍했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기준이 항상 효율과 실전성에만 치중되어 있던 것을 자각하고는 있었으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감정은 필경 중요한 것이 옳을 테다.

천화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지금 대비해야 하는 것은 녹련은 몸을 옮겨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설령 쳐 죽인다고 하더라도 죽기 전에 다른 몸으로 옮겨가면 모두 허사가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분명히 무언가 있을 놈들의 노림수.

뇌리를 스쳐가는 몇 가지 가능성 중에, 특히 청유백이 주의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놈이 교아의 몸으로 부활할 수 있을까?’

[으음…….]

교아는 죽음에서 되돌아오기는 했지만, 그것 또한 분명 모종의 조건이 필요할 것이다.

어쩌면 시간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뇌옥에서 교아를 죽였을 때 놈은 재가 되어 사라졌고,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녹련 낙무열이라면 어떨까.

교아가 죽은 자리에서, 놈이 그 눈을 희번덕거리며 살아날 가능성은 없을까.

천화는 잠깐 고민했다.

기억의 편린을 되짚고, 단편적이나마 가설을 세우고, 머릿속에서 그것을 검증해 보았다.

그리고 나온 대답은, 긍정.

[확신은 할 수 없다. 허나… 아마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지금에 이른다.

“찾았다.”

청유백은 교아의 몸 안에 숨겨진, 이번에는 재가 되지 않은 그의 몸에서 부채 조각을 찾아내 손에 쥐었다.

이제 끄집어내기만 하면 된다.

놈들의 몸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재료가 이것일 테니, 이것만 빼더라도 낙무열은 이 몸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허나, 다음 순간.

─콰득.

서둘러 팔을 움직이는 청유백의 손목을 교아의 손이 붙잡았다.

청유백의 시선과, 형형히 빛나는 초록색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가공할 악력이 청유백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귓가에 때려 박히는, 기이한 목소리와 함께.

“뭘… 그렇게 바삐 움직이시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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