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그럼에도 명예로운 (3)
“그리고, 대놓고 진법을 깔아놓은 그대들이 할 말은 아니지 않소?”
낙무열은 그녀를 비웃으며 빈정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하기야, 누가 먼저 잘못했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먼저 준비한 쪽의 잘못이다.
그리 따지자면 적영도 떳떳하게 할 말이 많지는 않았으니, 적영은 피가 섞인 침을 삼키며 침묵할 뿐이었다.
청유백이나 녹지연이었다면 말 한 마디라도 지지 않게 혀에 달린 칼로 궤변이라도 늘어놓겠으나.
아쉽게도, 적영은 입으로 싸우는 것은 익숙지 못했다.
그리고 낙무열 또한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뺏어 든 도로, 적영의 왼쪽 어깻죽지를 사정없이 후벼 팔 뿐이었다.
“아아악!!”
“이 도에도 분명히 독을 발라 놨겠지. 녹가의 여식이 있었으니…….”
낙무열은 확신하고 있었다.
명예?
피차 핑계에 불과한 단어다.
명예로운 패자는 동정을 사겠지만, 세상은 결국 명예 없는 승자의 것.
그러니 즉, 서로가 무슨 수를 써서든 승리를 추구할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장소를 따로 정하고, 다른 사람의 눈을 물린 시점에서 정해진 결과나 마찬가지였다.
독 또한 그들의 무기 중 하나이니,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리라.
그리고 그 독은 당연하게도 몹시 극악할 것이다.
‘한 번 스치기만 해도 팔이 썩어 들어가는 독일지도 모르지…….’
녹련은 코웃음 치며 물었다.
“스스로가 준비한 것으로 천천히 죽어가는 것도 꽤 비참한 기분이겠지? 어떻소? 본인은 잘 모르는 기분이온데.”
“엿이나 처먹어…!”
“흐음, 재미없는 답변을.”
낙무열은 어깨에서 도를 뽑아 이번에는 허벅지에 박아 넣었다.
푸욱.
살벌한 파육음이 흐르고, 적영의 소리 없는 비명이 아우성쳤다.
“이 정도로 죽지는 않소. 인간의 급소는 잘 알거든. 보자… 일각 정도는 더 즐길 수 있겠구려.”
낙무열은 맑은 웃음과 함께 도를 다시금 뽑아 들었다.
티 하나 없는 그 웃음은 도리어 섬뜩하게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캉!
“어허, 피하면 어찌하오. 귀한 도의 날이 상하지 않소.”
적영은 어떻게든 남은 힘을 모아 바닥을 굴러 칼을 피해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차마 세 발짝을 가지 못했고, 낙무열은 그저 여흥을 즐기듯 여유롭게 다가올 뿐이었다.
“어찌하오? 준비한 것이 전부 소용이 없어서. 심지어 그중 하나는 도리어 자신의 몸을 찌르고 있구려. 어떻소? 그 독은 어떤 감각이오?”
“…소용이 없어? 킥, 아닐걸?”
“그리 누워서도 아직 허세 부릴 기운이 남아 있다니, 그것 하나만큼은 진실로 놀랍군.”
“…….”
이 순간, 적영의 뇌리에 백소하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분명 어젯밤의 대화였다.
* * *
“아마, 안 통할 겁니다.”
작전을 설명하던 와중, 대뜸 백소하는 그렇게 말했다.
계획대로만 하면 다 잘 풀릴 것처럼 설명해 놓고, 마지막에 와서 그렇게 마무리한 것이었다.
적영은 어이없어하며 대꾸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잠깐의 시간은 벌 수 있을 테니까 진법을 만들어 두기는 할 텐데… 그다지 의미는 없을 거라는 말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 혹시 모르는 거잖아? 그 왜… 지난번 우리가 당했던 것도 진법이라면서.”
교아와의 일전.
그때, 신출귀몰하게 모습을 감추는 교아의 진법에 칼질 한번 제대로 못하고 당한 기억이 있었다.
말은 안 하고 있었다만, 적영은 그것을 꽤 기대하고 있었다.
진법이라는 생소한 전술과 전투가 어떻게 녹아들지 말이다.
하지만 백소하의 대답은 완고했다.
“그때의 우리는 준비가 되지 않았었죠. 지금은 다르고요. 애초에 그만큼이나 당당하게 장소 선택을 맡겼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거야말로 진법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무엇이든 간에 진법을 무효화할 대책이 있을 거예요.”
“예를 들면?”
“그거야말로 나도 모르죠. 세상 모든 무공과 기물을 다 아는 것도 아닌데, 내가 그걸 어찌 압니까?”
…그리 말하면 맞기는 하지.
하지만 적영은 이렇게 물러날 수는 없었다.
막상 나가서 싸우는 것은 자신인데, 그냥 ‘안 통할 겁니다.’ 한 마디만 덜렁 던져주면 뭘 어쩌란 말인가.
근성으로 극복해라─ 따위의 등신 같은 이론은 유년기에나 통하는 소리인 것이다.
“그럼, 그걸 돌파하면 어떻게 하는데? 그래도 진법에 걸려들게 하는 방법이 있을 거 아냐.”
“방법은… 딱히 없다!”
“이 개새끼가.”
“아니, 있어 보십쇼. 진법은 안 통할 게 뻔하긴 하지만, 다른 방법을 쓰면 되지 않습니까.”
“…다른 방법?”
“친구가 저밖에 없습니까?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십쇼. 저기 있잖습니까. 저기.”
백소하가 가리킨 것은 녹지연이었다.
그녀 또한 놀고 있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듯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적영은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것은 철두철미한 준비였다.
한 수 앞이 아닌, 세 수 앞은 내다보고 대비한 만약의 만약.
그리고 그 만약의 만약은…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 * *
“조금 더 기분 좋은 비명을 질러 보시오. 적가의 딸이여.”
낙무열과 적영이 떨어진 거리가 정확하게 세 걸음.
그 걸음이 한 걸음 좁혀지고, 두 걸음 좁혀졌을 때.
마지막 세 걸음에서─
금속의 마찰음이 울렸다.
─떨그렁.
“……!!”
그것은, 손에서 떨어진 도가 바닥과 부딪치는 소리였다.
당연히, 낙무열의 손에서부터 떨어진 적영의 도였다.
“왜, 팔이 안 움직여?”
적영은 비틀비틀 억지로 일어서며 거칠게 웃어 주었다.
검게, 그리고 보라색으로 변색된 낙무열의 손이 보여왔다.
손바닥에서부터 시작된 변색은 점차 불거진 혈관을 타고 올라가, 어느 순간엔가 손목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그것은 의심할 나위 없는 독.
녹지연이 준비했던 최고의 독이었다.
하지만 낙무열은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도대체 언제?’
독안개인가?
아니, 그것은 아니다.
주변에 그녀를 제외한 적의 기척은 없으며, 그런 것이 퍼졌다면 진즉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수인가?
아니… 그 또한 아니리라.
그녀는 적가의 딸.
그만한 기술은 없을 것이 분명할 뿐더러, 낙무열은 그럴 틈도 없이 그녀를 제압했더랬다.
“독…인가?”
“독을 썼냐고? 당연히 썼지. 멍청한 새끼야.”
“…틈이 없었을 터인데.”
틈이 없었던 것뿐일까.
칼날에 찔린 것은 그녀이고, 낙무열은 오히려 찌른 쪽.
그런데 어째서 낙무열 자신이 중독된단 말인가.
해답은 명료했다.
비웃듯 대꾸하는 적영의 말이 이어졌다.
“왜, 잘나신 분이 손잡이에 독 발라 놓는 건 생각하지 못하셨나 봐?”
“……!!”
……허.
낙무열은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어느덧, 손쓸 새도 없이 변색은 손목 위까지 올라와 있었다.
칼날이 아니라… 손잡이에?
무슨 그런 멍청한 경우가 있단 말인가.
자신의 손은 어떻게 보호할 것이며, 전투에서 상대의 무기를 노획하여 사용하는 경우는 결코 많지 않을진대.
“칼을 빼앗길 것을 상정했단 말인가…. 자부심 드높은 무인이?”
“나는 자존심 좀 상하긴 했는데… 뭐, 우리 망할 오라비가 항상 하는 말이 있거든.”
적영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대지에 두 다리로 섰다.
다리가 쑤셔오고, 찔린 상처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러내리기는 했지만.
괜찮다.
이것이야말로, 근성으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니까.
그 빌어먹을 근육돼지 근성론자가 항상 하는 말이 이것이었더랬다.
“쎈 놈이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긴 놈이 쎈 거야. 등신아.”
적영은 근처를 둘러보더니, 병 하나를 주워 들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마셨던, 끔찍하리만치 맛대가리 없는 약.
녹지연이 미리 주었던 해독제의 병이었다.
그리고 피식 웃더니, 남은 거라도 핥아 보라는 양 낙무열에게 던져 주었다.
“왜, 이건 몰랐던 모양이지?”
“인정하지… 실로 놀랍군. 수 싸움은 본인의 완벽한 패배야.”
너무나도 단순한 대처였다.
그러나, 너무나도 단순했기에 상정하지 못했다.
비상식적이었고, 비효율적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실패한다면 자신에게만 해가 되는 대처.
인정해야만 했다.
상정하지 못한 대응이었고, 그 결과로 독은 이미 팔꿈치를 넘어 어깨까지 침범하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머지않아 심장까지 다다르고, 몸 전체에 독이 퍼지게 될 것이다.
벌써 팔 전체가 움직이지 않았다.
“허나, 이것으로 끝은 아니지.”
낙무열은 과감하게 왼손을 움직였다.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것은 날카로운 초록색의 수강(手罡).
낙무열은 그것으로 거침없이 자신의 어깻죽지를 베어 갈랐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깔끔하게 베어진 팔은 선명한 절단면만 남긴 채 땅으로 떨어졌고, 가공할 양의 출혈이 잇따랐다.
하지만 낙무열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며, 일으킨 수강으로 상처를 지져 출혈을 막아냈다.
살이 타는 냄새가 풍겨왔다.
강렬한 철과 불의 냄새. 결코 알고 싶지 않은, 끔찍한 냄새였다.
“이, 이 미친…!!”
적영은 기겁하며 땅에 떨어진 도를 쥐었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녹지연이 준 중화제가 작용하는 시간은 앞으로 일각 정도는 남았을 터.
적영의 눈빛과 낙무열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오른팔은 이제 없지만, 추가적인 출혈은 없다.
독이 있다는 것을 안 이상, 저 도를 다시 만질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낙무열은 다시금 웃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 핏기가 가셔 있었지만, 그 광기 어린 순수함만은 여전한 채였다.
“자, 적가의 후예여. 준비해둔 여흥이 아직 남았는가?”
“…하, 당연하지. 설마 이 정도로 만족한 건 아니겠지?”
“이런, 기대되는군그래.”
낙무열의 눈이 선명한 초록색으로 빛났고, 적영의 혼신을 다한 붉은 도기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 * *
“킥, 키킥. 네 동료는 이미 뒤졌을 거란다. 그러니까 이거 놓고, 한 번만 더 하자. 이번엔 좀 더 잘 싸울게. 응?”
“어설픈 수작 부리지 마라.”
“에이, 진정해 봐아. 한 번만 살려 달라니까? 혹시 알아? 그쪽도 살아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나를 데리고 그 쪽으로 가면…….”
“방금은 뒤졌을 거라면서?”
“내가 그랬던가아? 잘 모르겠는걸! 왜 그래, 무섭게~!”
교아는 목을 붙잡혀 땅에 처박힌 상태에서도 지칠 줄 모르고 입을 나불거렸다.
청유백은 점차 손에 힘을 주었다.
조금씩, 천천히.
고통과 이변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조절해 가면서 말이다.
마기는 이미 거의 다 소진해버린 이후였지만, 이 정도 짓은 굳이 마기를 사용한 강화 없이도 가능한 일이었다.
“켁, 어라? 걱정도 안 되는, 거니? 냉혈한이 따로 없네헤엑….”
“굳이 필요한가?”
“그렇게 동료를, 믿는, 거니?”
“아니.”
청유백은 즉답했다. 동료를 믿는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런 역사는 한 번도 없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믿는 게 있다면, 하나뿐이다.
완벽하게 짜여진 계획과, 그 너머에서 도출되는 답의 관계.
즉.
“나는 나를 믿지.”
─콰득.
청유백의 마지막 말과 함께 이윽고 교아의 목뼈가 부러졌다.
동시에 놈의 숨도 멎었고, 손은 힘을 잃어 축 늘어졌다.
청유백은 곧장 놈의 앞섶을 풀어 헤치며 부채 조각을 찾았다.
‘시간이 없다.’
청유백은 서둘러 손을 움직였다.
이놈도 몸에 부채 조각을 품고 있을 것이다.
몸속인가, 바깥인가.
놈보다 먼저 움직여야만 했다.
사경녹련.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네 번째 방법을 상대하기 위해서.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