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그럼에도 명예로운 (2)
[해치웠나?]
‘그런 말 하면 안 된다.’
[왜? 망자에 대한 무시더냐? 문화가 많이 바뀌었나…….]
‘그런 말 하면 대개 죽던 놈도 다시 일어나더라고. 무신이 그러더라.’
해치웠나 싶으면 살아 있고.
낭떠러지로 떨어뜨려서 이번에야말로 조졌나 싶으면 기연과 함께 살아 돌아오고.
한 다섯 번쯤 반복한 이후부터는 그냥 절벽 근처에서 싸우지를 않았더랬다.
하지만 뭐, 각설하고.
청유백도 이번만큼은 동의했다.
분명한 손맛이 있었다.
무언가를 가르는 감각이 손끝을 울린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먼지구름으로 다가가던 순간.
─피슉!
“!!”
먼지구름을 가르고 교아의 손이 일순간에 쇄도해 들어왔다.
청유백은 들고 있던 검을 휘둘러 그대로 팔을 베어냈지만, 먼지구름과 함께 팔의 잔상만 흩어질 뿐이었다.
그리고 검격으로 단번에 개어진 먼지구름 너머에서 청유백을 바라보고 있는 교아가 보였다.
“킥, 키히힛. 역시 멋져. 이걸 피할 줄은 몰랐는데!”
“…….”
……이걸 피해?
도리어 청유백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걸 피했다고?
‘분명 느낌이 있었는데.’
처음의 기습도 그렇고.
방금의 검격도 그렇고.
분명 맞혔다.
적중하지 못했을 리가 없는 공격이었다.
허나… 놈은 멀쩡하다.
청유백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봐라, 그렇게 말하니까 살아 있… 아니, 이게 아니라.
‘…진법인가?’
하지만… 시간이 없었을 터인데.
장소를 알리고 난 뒤, 놈에게 주어졌을 시간은 고작 하룻밤이었다.
그리고, 청유백은 그 하룻밤을 위해 수많은 준비를 했더랬다.
혹여나 그 장소로 홀로 나온다면, 기습하여 죽여 버리기 위해서.
결투 이전에 수작질을 부리는 현장을 발각당한다면, 죽어도 할 말 없을 죄가 아니던가.
하지만 교아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놈이 실질적으로 가질 수 있었을 시간은 한 시진 남짓도 채 되지 않을 터.
‘고작 그 시간 만에 진법을 펼쳐 놓는다라…….’
재밌군.
과연, 장소의 선택을 대뜸 넘겨줄 만큼의 자신은 있었던 모양이지.
청유백은 검을 꼬나쥐고 교아의 공격에 대비했다.
어차피 지금 이곳이 진법 안이라면, 무의미한 선공을 날리는 것보다는 반격을 노리는 것이 낫다.
헌데, 대뜸 교아는 제 머리를 쥐어뜯더니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입을 열었다.
“자, 놀아 보자고. 청유백……. 이번에는 내가 죽여 줄게. 킥, 키힛, 킥……!!”
“미친놈.”
청유백의 대꾸가 끝나기 무섭게, 교아의 신형이 흩어져 사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바닥 속에서 구름안개가 피어올랐다.
안개 너머에서는 바람이 불어오고, 불어오는 바람에는 북소리처럼 느껴지는 의문의 환청이 섞여 있는 듯 느껴졌다.
그래, 의심할 나위 없는 진법이다.
이 모든 것이 환각이고 환청이겠으나, 사람 감각이 어디 깨닫는다고 마음대로 사라질까.
‘와라.’
청유백은 그 상황 속에서도 정신을 집중했고, 칼 세 자루를 칼집에서 반쯤 빼낸 상태로 기다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찰나의 시간을 가르고, 스러지는 듯한 바람의 감각을 찢어발기며, 무언가가 접근하는 것이 느껴졌다.
검?
아니다. 너무 가볍다.
허면 사람의 주먹인가?
그 또한 아니다. 너무 작았다.
청유백은 그저 본능적으로 칼을 들어 그것을 막아냈다.
아니, 잘라냈다고 이르는 것이 옳을 테다.
촉과 깃간, 그 사이의 마디를 잘라낸 후에야, 청유백은 자신에게 날아든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화살?”
멍청하게 내뱉은 한 마디였다.
하지만 그것을 멍하니 쳐다볼 시간은 없었다.
곧이어, 다른 화살들이 연달아 날아들었으니까.
“시답잖은 짓을.”
그러나 큰 문제는 아니었다.
─캉! 카앙!
청유백은 어렵지 않게 화살들을 튕겨냈다.
그리고 화살이 날아든 방향으로 검을 날려 한바탕 휘저어 보았으나, 돌아온 칼에 피는 묻어 있지 않았다.
안개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멋져. 멋지다고. 맞았으면 죽을 뻔했어어! 아아, 너도 알면 좋을 텐데. 죽음이라는 건… 꽤, 아니, 엄청, 아니…… 몹시! 황홀하단다!!”
교아는 말끝 한 마디 한 마디를 끊을 때마다 기분이 고양되기라도 하는 것인지, 말이 끝날 때 즈음에는 거의 흥분하여 소리치고 있었다.
청유백은 이죽거리며 대꾸했다.
“네가 미쳤다는 건 알겠군.”
완전히 미친놈이다.
하지만, 전술은 그야말로 냉철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진법과 활이라.
그야말로 전쟁에서나 사용할 법한 물건 아니던가.
화살이 자신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주지는 못할 테지만…….
‘…이대로 시간을 끄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 자체로 좋지 않다.’
만약 저들의 목적이 반대쪽, 그러니까 적영을 살해하는 것이라면.
그리함으로써 전력을 깎아내리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리 시간을 빼앗기는 것만으로 자신의 패배였다.
그리고 그 생각이 어느 정도는 맞았던 것일까, 교아는 도발하듯 말해왔다.
“유백아, 유백아. 그렇게 가만히만 있어도 괜찮겠어어? 반대쪽의 네 친구가 지금 당장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도 안 되는 걸까아?”
“별로. 알아서 하겠지.”
“그래? 걱정도 안 되니~?”
“곧 뒤질 본인 걱정이나 하는 게 좋을 거다.”
“킥, 키힉, 그래? 그러지 뭐!”
─카캉!
다시금,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냈다.
청유백은 그리 대답하기는 했지만, 이 상황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천화.’
[으, 으음?]
청유백은 ‘정말로 살아 있지 않으냐!’ 따위의 삼류 악당 같은 대사를 뱉고 있던 천화를 다그치며 물었다.
‘이 진법, 해제할 방법은?’
[……으음, 어렵다.]
‘어렵다고?’
[해체 방법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이 진법, 무지막지한 넓이로 펼쳐져 있구나, 매개체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얼마나 넓길래?’
[가로세로 폭이 삼백 장 정도?]
‘…….’
그건 무리군.
굳이 한다면 가능은 하겠지만, 그 길이 너무 멀다.
진법을 파훼하려면, 다른 방법을 써야만 했다.
‘교아의 위치는 보이나?’
[본녀가 보는 것은 네가 보는 것의 연장선상일 뿐이다. 네가 흔적도 쫓지 못하는 것은, 본녀도 볼 수 없어.]
지난번의 진법은, 교아가 지척에 있었기에 알아챌 수 있었다.
시선뿐만 아니라, 후각과 청각 등의 정보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 어떤 감각으로도 상대방을 포착하고 있지 못했다.
그러니, 영혼 또한 볼 수가 없다.
‘그런가.’
캉! 카강!
청유백은 날아오는 화살을 반복적으로 튕겨내며 생각했다.
저쪽의 목적이 시간을 끄는 것이라면, 자신은 분명 패배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계속 이대로 막아내고만 있는다면 기력이 먼저 빠지는 것은 자신일 것이다.
‘허나, 상관없다.’
청유백은 검을 꼬나쥐었다.
지금 이 와중에도, 자신만만하여 소리치고 있는 교아가 보였다.
“뭐 해애애!! 그게 다야?! 더 할 수 있잖아! 아까처럼 칼이라도 날려 보렴?!”
“원한다면야.”
청유백의 검 세 자루가 검집에서 스스로 뽑혀져 나왔다.
날아오는 화살을 스스로 베어내며, 청유백의 주변을 지키듯 회전했다.
교아는 비웃듯 코웃음 쳤다.
“킥, 뭐 하려고? 진짜 날리게? 그게 닿을 것 같아?”
“안 닿겠지.”
당연하다.
이곳은 놈의 진법 안.
놈이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설계된 상황에서, 완벽한 통제를 당하며 싸우고 있는 것이다.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에 놈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뿐더러,
나아가 저 화살이 진짜인지 가짜인지조차 알 수 없다.
어쩌면, 지금까지 베어낸 화살이 전부 허상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공격은 무의미하다.
“뭐야, 알고 있어? 알고 있으면 뭐 하려는 걸까아? 나, 기대해도 되지? 우리 청유백이, 멍청한 건 아니지이?”
하지만, 상관없다.
청유백은 놈의 웃음소리에 집중했다.
이 공간을 울리는 웃음소리는, 분명 어디서 들려오는지의 단순한 방향조차 알 수 없게 뒤틀려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집중해야만 했다.
한 순간,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순간이 주어질 테니까.
청유백은 계속해서 정신을 집중했다.
날아오는 화살들은 검들이 막아냈다.
허상이든, 진짜든 상관없다.
베어내면 되는 문제니까.
“뭐 하는 거냐니까? 포기한 거야? 지난번이랑은 다르지, 그렇지?”
“그래, 확실히 다르지.”
“킥, 너무 순순히 인정하지 마. 재미가 없잖아. 천천히 죽여 줄 건데 말이야!”
“…그때는 지하였고, 여기는 지상. 장애물 하나 없는 평야다.”
“뭐?”
언젠가, 말한 적이 있지 않던가.
진법을 부수는 방법 첫 번째.
진법을 이루는 매개를 부순다.
방법 두 번째.
진법을 설치한 술사를 죽인다.
그리고, 세 번째.
진법이 설치된, 땅을 박살 내 버린다.
─고오오오!
대지가 격동했다.
마치 하늘이 내린 별의 울림처럼, 인간이 언젠가 느꼈던 원초적인 공포가 청유백의 몸에 깃들었다.
전신에서 끌어 올려진 마기가 너울거린다.
그리고, 천지가 증오하여 죽음을 소원하는 기운이 용솟음쳐 검을 휘감았다.
허공을 가르는 검이 세 자루.
그것은 청유백의 주위를 돌다가, 매가 하늘로 비상하듯 공중으로 치솟았다.
“땅이 무너질 걱정은 없겠지. 그렇지 않나?”
“어, 어……?”
청유백은 교아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확신하고 있었다.
놈의 얼굴은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일순.
찰나를 수백 조각으로 가르고, 순간을 수천 조각으로 찢으며, 세 자루의 검이 대지를 난자했다.
백월, 홍련, 비천.
세 자루의 검은 본디 그 이름에 걸맞은 빛을 띠고 있었지만, 지금 머금은 것은 온전한 흑색.
죽음의 빛이었다.
난자하는 검에 의해 땅이 갈라졌고, 안개는 그야말로 찢어져 흩어졌다.
그리고, 찰나.
청유백은 아직 채 멎어지지 않은 교아의 당황을, 신음을 붙잡았다.
‘보였다.’
[저쪽이구나.]
─콰득.
청유백이 교아의 멱살을 잡기까지, 채 한 순간이 전부 지나지 않았다.
청유백은 손을 뻗어 교아의 목을 붙잡아 그대로 바닥에 처박았다.
충격으로 땅이 울렸고, 초원이었던 것들이 거칠게 헝클어져 주변에 나뒹굴었다.
─콰아악!
방금의 일격으로 내공의 거의 전부를 사용했다만, 상관없다.
“시간은 다 끌었나?”
“킥, 키키킥, 미, 미쳤네. 이건 몰랐어. 묵련 말고도 이런 미친 짓을 하는 놈이 있을 줄은 몰랐네! 아, 아아, 시간 다 끌었냐고, 무, 물었었었나아아?”
놈을 죽이는 데에 더 이상의 마기를 낭비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나 교아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킥, 어차피 네 친구는 이미 뒤졌지 않겠니?”
* * *
적영은 허공으로 뛰어오른 자신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 사람의 손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크읏!”
손?
대체 언제?!
그것은 분명 바닥에서 솟아올라 있었다.
다시 바닥을 딛고 박찬다면 뿌리칠 수는 있겠지만, 그래서는 늦는다.
그 전에, 저 낙무열인가 뭔가 하는 놈의 공격이 닿을 테다.
‘젠장, 벌써 쓸 생각이 아니었는데!’
적영은 품에서 비수를 날려, 자신의 바로 옆에 쌓아 올려져 있던 작은 석탑을 건드렸다.
석탑은 곧바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것은, 백소하가 준비한 진법의 도화선.
적영은 한순간이나마 저자의 시선을 돌릴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그 틈에 이 손을 잘라 버리고 탈출할 계획이었다.
허나.
“통하지 않는다오. 적가의 후계여. 이런 얄팍한 술수에 당할 정도로 녹록한 몸이 아닌지라.”
낙무열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걸어왔다.
놈의 눈이 계속해서 녹색으로 발광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저것에 진법을 간파하는 힘이라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크윽!”
다리를 붙잡은 손을 가차 없이 도를 휘둘러 썰어 버렸지만, 이미 늦었다.
낙무열은 이미 순식간에 접근해 있었고, 방법은 결국 맞서는 것뿐.
‘…어차피 싸워야 한다면!’
적영은 마기를 끌어올려 붉은 도기를 만들어냈다.
어차피 부딪쳐야 한다면, 선수필승.
적영의 도가 낙무열의 목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그러나─ 한 번 더.
“아악!”
바닥을 박차는 적영의 발목을 무언가가 붙들었다.
다시 한번, 또 다른 누군가의 손이었다.
도약해 휘두르던 적영의 도는 낙무열의 바로 앞을 스쳐 지나갔고, 허무한 공격의 대가는 곧바로 돌아왔다.
─콰득!
낙무열은 여전히 안광을 형형히 빛내는 채로, 적영의 목을 붙잡아 바닥에 메다꽂았다.
“아아악!”
“멍청하군. 땅 위에서 혼자 있으면 정말로 혼자일 것 같았소? 학습 능력이 없군.”
“이, 망할… 새끼가…….”
“패배한 개의 욕설 정도야, 얼마든지 들어 드리지.”
“명예로운… 결투는 어디로 갔냐?”
“머저리 같은 소리를.”
낙무열은 적영의 손을 걷어차 도를 떨어트리고는, 그것을 쥐었다.
마치 날이 잘 서 있나 확인하듯 도를 한번 둘러보고는, 피식 웃으며 쓰러져 있는 적영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데, 당연한 것 아니오. 당신들도 다 예상했을 텐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