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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146화 (146/200)

제146화. 그럼에도 명예로운 (1)

성시소는 대답하지 않았다.

화내면서 어린아이의 투정을 부리지도, 납득하면서 마음 없는 대꾸를 내놓지도 않았다.

그저 의자에 앉아서, 깊게 숨을 반복해서 내쉴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몇 번인가 반복한 뒤에야, 성시소는 쓴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지금은… 나가 주세요.”

“예. 아가씨.”

문노와 신월은 차분히 문을 닫고 방을 나왔다.

분위기가 결코 좋지는 못했으나, 성시소가 혼자 있는 편이 생각할 시간을 주기에는 좋을 것이다.

문노는 침음을 삼키며 물었다.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어쩌겠어. 달리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걸.”

“총명하다고는 한들, 어린아이가 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결정일 겁니다.”

“결국은 해야 하는 일이야. 영감 걱정이나 해.”

“허나…….”

여러 번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결국 요지는 이런 것이다.

‘성여문은 이미 죽었다.’

‘돌아오지 않는다.’

‘네 숙부는 쓰레기 새끼니까, 이제 성씨세가의 가주는 네가 이어야 한다.’

어른들의 목적을 위해 아이를 이용하는 것.

그래, 변명할 여지도 없이 바로 그것이다.

당장 그녀가 꺼지라고 소리치면서 축객령을 내리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일 테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손익이 달린 문제이고, 일부에게나 신념 정도가 걸린 문제일 테지만…….

그녀에게는 가족이 걸린 문제였으니.

신월은 말을 이었다.

“그런데… 확실히 이상하기는 하네.”

“예?”

“마치 알고 있었던 것 같잖아. 너무 차분한 반응이야.”

“그렇습니까?”

그저 기시감인가?

신월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성시소의 반응이, 어딘가 이미 뭔가를 결심한 사람처럼 보였던 것 같았다.

* * *

─드르륵.

청유백의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백소하가 피곤한 발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전부 끝내고 왔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끝냈군?”

생각보다 일찍, 이라.

백소하는 말없이 웃으며 창문 바깥을 쳐다보았다.

이미 달이 중천에 떠, 거진 한나절은 지난 채였다.

한나절이 일찍이라면야 뭐 할 말은 없겠다만…….

“눈에 띄면 안 되니까요. 거창한 걸 마련할 수는 없었습니다.”

“수고했다. 나쁘지 않군. 당장이라도 위치를 정했다고 서신을 보낼 수 있겠어.”

“내일 당장 싸울 셈입니까?”

“가능하다면.”

“……뭐, 그러시든가요.”

백소하는 무심히 대꾸했다.

어차피 싸우는 것은 자신이 아니고, 준비가 끝난 이상 언제 싸우는지 정하는 것도 그가 할 일이다.

하지만, 지금 그를 찾은 이유는 하잘것없는 보고 따위가 아니었다.

“한데 네놈, 이상하다고 생각지는 않습니까?”

“무엇이?”

“장소의 선택이라는 것은… 너무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는 시간이 없었기에 말하는 대로 따랐다.

일단은 벌여진 일이었기에, 그것을 수습하려고 움직였다.

하지만 일을 마친 지금에는 말할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결투는 이상했다.

이상한 점투성이다.

“무엇보다, 피차 진법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 텐데요.”

“그것을 감안해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일지도 모르지.”

“너는 반대의 입장에서도 그리 대답할 수 있습니까?”

진법가는 준비하는 자다.

충분한 시간과 자원이 있다면 혼자서 능히 십만의 대군을 막아설 수 있으며, 시간을 벌고 시야를 가리는 데에는 절정의 무인보다도 쓸모가 많다.

백소하는 그 정도의 수준은 되지 못하겠지만, 일대일의 결투에서 완벽하게 준비된 진법은 충분히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 테다.

만약 청유백의 입장에서 교아가 ‘자리를 준비하겠다’라고 말한다면, 청유백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을 것이다.

개소리하지 말라고.

“…못 했겠지.”

“그럼 뭡니까? 상대가 그만큼 순진한 겁니까?”

순진?

그 미친 광신도 놈들이?

웃다가도 배가 터져 자지러질 말이다.

“설마 ‘명예’랍시고 상대가 헛짓거리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믿고 있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해서?”

청유백이 고개를 까딱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으냐고 묻는 투였다.

백소하는 건성으로 듣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만, 어차피 그리 말해서 들을 위인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백소하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분명 그들이 따로 획책하는 무언가가 있을 겁니다. 주의하십시오. 나는 그곳에 없으니… 네놈이 해야만 합니다.”

“획책하는 무언가…라.”

청유백은 흐음, 하고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굴렸다.

그야 당연히 있을 것이다.

몇 가지 생각해 본다면, 가능성은 세 가지 정도.

‘뭘 준비하든 이길 자신이 있거나.’

아니, 이건 가능성이라기보다는 그냥 기본적인 경우 하나에 가깝다.

그야 진다는 생각을 하고 결투하는 놈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은 ‘계획’이 아니다.

그냥 ‘희망사항’이지.

계획이라고 하는 것은, ‘이기지 못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움직이느냐’인 법이다.

‘…아니면 하나만 죽이면 된다는 생각을 하거나.’

청유백이든 적영이든, 한쪽만 죽이면 전력을 깎아내는 것만으로 이득이라는 발상.

하지만 이쪽은 가능성이 희박하다.

애초에 저쪽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상태이니, 굳이 자신들을 앞으로 끌어내며 위험하게 나설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희박하다고 해도, 그저 괄시해서는 안 될 테다.

‘하지만 그쪽은 상관없어.’

결투에서 이기기 위해 백소하에게 진법을 준비시킨 것이고, 그것 외에도 다른 다양한 방법들을 준비하고 있으니 말이다.

뭐, 그래놓고도 지면 어쩔 수 없는 것이겠다만.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경우는─

다른 무엇도 아닌 이것이었다.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거나.’

결투에서 지는 것이 두려운 이유는 죽음 때문이다.

사람의 목숨은 하나이기에, 그 패배에서 비롯되는 결과가 너무나도 두렵기 짝이 없는 것이다.

허나… 그것을 아무런 미련도, 감정도 없이 버릴 수 있다면.

그저 장기판의 말 하나처럼 취급하고, 수단의 하나로서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실로 두려운 일이 될 것이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불가능할 선택과 판단을 아무렇지 않게 내릴 수 있게 될 테니까.

가령 예를 들자면, ‘일부러 허무하게 죽임당하고, 청유백 일행을 가주 살인자로 몰아가는 경우’ 정도가 있을 테다.

하지만… 뭐.

청유백은 대꾸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예?”

“어느 쪽이든 준비해 놨으니까.”

“예…?”

* * *

시간이 흘렀다.

오로목제의 매일은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평화롭게 흘렀지만, 그 물밑에서의 상황은 당장에라도 칼을 뽑아 들 것만 같은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백소하가 준비한 전장은 두 곳.

둘 다 오로목제에서 거진 반 시진은 떨어진 평원이었다만, 그 방향은 정반대 쪽이었다.

한쪽은 동쪽, 다른 한쪽은 서쪽.

처음부터 다른 편의 개입을 차단하겠다는 요량이었다.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면 인적은 결코 닿을 일이 없을 평원이었기에, 약속이 지켜진다면 그 무엇도 생각지 않고 싸움에만 몰두할 수 있을 것이다.

적영은 손에 쥔 작은 약병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결심한 듯 눈을 꼭 감고 단숨에 그것을 삼켰다.

끔찍하게 맛없는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빌어먹을, 존나게 쓰잖아.”

그리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너머에서 사내 하나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처음 보는 사내였다.

하지만, 인상착의와 생김새는 설명으로 들었던 것과 일치했다.

한편으로는, 지난번 난장판을 피우고 돌아갔던 성여답이라는 놈과 비슷하게 생긴 것도 같았다.

사내는 천천히 다가와 적영의 앞에 섰다.

“잘도 인적이 드문 곳을 골랐구려.”

“그쪽이 성여문?”

“흠. 성여문, 성여문이라…….”

사내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끌었다.

무슨 속셈이라도 있는 것일까 싶었다만, 사내는 딱히 무언가 속내는 없었는지 그저 다른 것을 요구할 뿐이었다.

“그 이름도 꽤 나쁘진 않지만, 이왕 아무도 없는 것 내 이름으로 불러주면 좋겠구려. 나는 낙무열(洛武列). 녹련 낙무열이라 한다오.”

“헤에, 그래?”

“그렇소.”

적영은 대충 ‘뭐 그러든가.’ 하고 대꾸했다.

알 바 아닌 일이었으니까.

어차피 곧 쳐 죽일 상대다. 이름 따윌 알아서 쓸 곳이 어디에 있을까.

적영은 자신의 도를 뽑아 들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래요, 낙무열 공? 아니, 성씨세가 가주면 성무열인가? 어쨌든 간에 가주시라면서? 가문은 어떻게 설득하고 나왔는지 모르겠네.”

“큭큭,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라오. 그대가 걱정할 바는 아니지.”

“아, 그러셔?”

“그리고 미안하오만, 그리 시간이 많은 몸이 아닌지라…….”

성여문은, 아니 낙무열은 그리 말하며 눈을 빛내었다.

‘……!!’

녹색의 안광.

청유백에게 이미 언질을 들었다.

눈이 녹색으로 빛나면 위험한 공격이 올 테니, 곧바로 내공을 끌어올려 간격에서 벗어나라고.

적영은, 즉시 그렇게 했다.

전신에서 마기를 끌어올려 몸에 둘렀고, 당장 바닥을 박차 뒤로 뛰어올랐다.

상대방의 실력은 모르지만, 우선 위험한 한 수는 피하고 보는 것이 옳을 테니까.

허나.

“빨리 좀 끝내겠소.”

콰득.

땅 아래에서 솟아오른 손 하나가, 적영의 발목을 붙잡았다.

“……!!”

* * *

한편, 청유백은 저만치 멀리서 바위에 걸터앉아 있는 교아를 발견했다.

얼마나 의욕이 넘치는지, 먼저 도착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한 것은, 주변의 탐색.

하늘, 땅, 그리고 지하.

근방 백 리. 두 발로 서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혹여나 땅에 묻힌 시체는 있을까 살폈다만, 최소한 지금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최적의 상태로구나.]

‘흐음, 이러면…….’

[음? 잠깐만, 네놈…….]

‘선수필승이지.’

청유백은 저 멀리의 교아를 바라보았고, 전력으로 마기를 끌어 올렸다.

─스릉.

청아한 소리를 내며 뽑혀 나온 것은 백월검.

자신의 이 검들 중, 가장 많은 마기를 담아내고 감당할 수 있는 검이었다.

청유백은 검을 쥐었다.

육도홍련신공.

다섯 자루의 검으로 하늘을 수놓는 검식이며, 한 자루는 손에 쥐는 무공이다.

아니, 어쩌면 그저 청유백이 그것이 편하기에 그리 사용하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최소한 청유백은 그것이 가장 편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손에 쥔 그 한 자루가 항상 가장 강했으니까.

‘이 기술은 오랜만이군.’

시간을 오래 끌 생각은 없었다.

원래는 자신이 먼저 도착하여 교아를 기다릴 줄로 알았으나, 상황이 이리 되었다면야.

당연히, 가장 좋은 방법을 쓸 수 있지 않겠는가.

‘비겁하다곤 하지 않겠지. 교아.’

[아니, 충분히 비겁한 것 같은데….]

청유백의 검이 공명했다.

마기를 담아낸 검이 바람을 떨게 만들었고, 요동치는 대기가 청유백의 몸을 휘감아 돌았다.

그리고는, 일격.

거의 백장은 넘을 거리를 순식간에 넘어, 참격의 바람은 교아의 목덜미에 이르렀다.

교아가 심상찮은 기척을 눈치채고 청유백의 방향을 돌아보았으나─

─콰아아앙!!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먼지구름이 피어올랐고, 청유백은 유유히 검을 뽑아 든 채로 구름 속으로 다가갔다.

[좀 많이 비겁하지 않으냐?]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때.’

[그건… 그렇다만, 명예는?]

‘이게 우리 동네 명예야. 서쪽 나라 명예는 서쪽 나라에서 찾아야지.’

그 동네 명예를 왜 여기서 찾아?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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