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명예를 왜 여기서 찾아 (4)
“아 맞다. 이거 받아.”
“뭐?”
갑작스러운 적영의 말에 청유백이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던졌다.
─팅, 챙그르르르….
맑은 소리를 내며 그의 앞으로 미끄러져 온 것은, 명료한 하나의 철판.
즉, 천화의 부채 조각이었다.
“이건…….”
“오다 주웠어.”
…오다 주워?
이걸?
청유백의 어이없는 시선이 적영에게 향했고, 적영은 시선을 피하며 볼을 긁적였다.
“음,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덮친 상단의 주인한테 뜯어왔어.”
“…말 그대로의 의미냐?”
적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뜯어왔다.’
가슴팍에서 우드득, 진짜 말 그대로였으니까.
하지만 청유백은 조금 다르게 이해했다.
‘적영이 그만큼 강했나? 오로목제만큼 큰 도시에서 물자를 보내는 곳의 책임자라면 분명 상당한 실력자일진대….’
거기서 공갈을 치고 삥까지 뜯어 왔다니.
그야말로 커다란 전과였다.
‘확신할 만한 무력 없이는 이뤄낼 수 없는 일일 터.’
다른 한쪽에서 싸울 그녀가 걱정되었던 적도 있었지만.
‘쓸데없는 기우였나.’
하긴, 적영의 성정이라면 교아와 다시 싸우더라도 죽이려고 달려들 테다.
그리고 저 정도 실력이라면… 어느 정도 버틸 수준은 될지도 모른다.
칭찬할 것은 칭찬해야만 하리라.
“대단하군. 생각보다 걱정할 필요 없겠어.”
“음? 아! 뭐, 그렇지! 항상 그랬잖아? 이 적영 님이 누구냐!”
“그래, 잘 부탁한다.”
“물론이지!”
뭔가 서로의 이해가 엇갈린 것 같았다만, 청유백이든 적영이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옆에서 한심하게 바라보는 백소하의 눈빛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 * *
어둑한 노을이 성벽 너머로 넘어가는 것이 보여 왔다.
성의 한편에서는 화재로 소란이 일기도 했다는 모양이었지만, 계속 방 안에 있어야만 하는 성시소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다.
걱정하고 싶고, 현장에서 위로해 주고 싶어도 지금으로서는 전부 무용한 일.
근래 나가지를 못한 탓일까?
성시소는 눈에 띄게 침울해져 있었다.
심지어는, 서역의 공주에게 받았던 친구의 정표조차도 빼앗긴─성시소가 스스로 건네기는 했지만─ 상태였으니, 더 어두워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차 호위가 간단한 다과를 들고 그녀를 찾은 이유는 그런 까닭이었다.
“아가씨, 정말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아. 친구가 준 정표이긴 하지만, 필요한 사람이 달리 있다면 맞는 장소로 가야지.”
“하지만, 정말 그들의 말대로 걱정할 필요 없다면 그냥 아가씨께서 지니고 계셔도 될 일일 겁니다.”
“……괜찮대도.”
성시소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괜찮을 리가.
‘괜찮을 리가 없잖습니까.’
성씨세가라는 명문의 딸.
그 직함이 짓누르는 어깨의 무게를 차 호위는 잘 알고 있다.
그야 자신이 성씨세가에 갓 취직하고, 그녀가 젖먹이를 졸업할 때 즈음부터 그녀의 곁을 지켜온 것이 바로 차 호위 자신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안다.
저 대답 또한─
그저 명문의 여식으로서 자신에게 ‘요구’된, 정답과도 같은 대답을 반복할 뿐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동시에, 그렇기에 서글펐다.
무력한 자신이, 그녀에게 투박한 손 하나 내밀어 줄 수 없는 자신의 실력과 처지가 서글펐다.
아니.
서글펐다기보다는, 원통하다는 말이 더 알맞을지도 모른다.
허나 어쩔 도리가 있을까.
‘내 마음이 무어 중요할까.’
중요시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 따위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저 주인의 상태.’
즉, 아가씨의 마음뿐이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그게 무어 중요하랴.
그저 할 수 있는 자에게, 그 차례를 넘기면 그뿐인 일이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알고 있다.
그녀는 축객령을 내릴 정도로 매몰찰 수 있는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그렇기에 차 호위는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탁.
문을 닫는 소리가 공허하게 울리고, 방에는 성시소 혼자만이 남았다.
허나,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다시금 문이 열렸다.
조용히 울린 미닫이문 소리에 성시소는 과자를 베어 물며 물었다.
“뭔가 두고 간 것이라도…?”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성시소가 기이함에 문을 올려다보자, 그때에서야 문을 연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소야.”
“…달님 언니!”
신월은 방 안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고, 성시소는 곧바로 달려와 그녀의 품에 안겼다.
그리운 품이었다.
수년 만이었다.
어릴 적에는 몇 번이고 같이 놀았던 기억이 있었지만, 어느새 그 기억은 바래어 추억으로만 남아 있었던 품이었다.
성시소는 그녀의 품속에서 고개를 들어 물었다.
“바쁘실 텐데, 어쩐 일이세요?”
“아니 뭐, 오랜만에 보았는데… 그리 가버리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지 않니.”
“그건 그래요.”
“…하하.”
신월은 멋쩍게 웃었다.
그녀는 거짓말하지 않는 성시소의 순수함을 좋아했기에, 그런 대답을 질책할 수도 없었다.
그야 사실 아닌가.
거진 못 본 지 수년 만에 나타나서 한다는 말이, ‘나 그거 필요하니까 좀 줘’ 따위의 말이었으니까.
…급박하긴 했지만서도.
뭐, 결국 형편 좋은 핑계일 뿐이었다.
이 일을 받아들인 것도 성시소를 위해서였지만, 말해주지 않는 이상 그것을 어찌 알겠는가.
조금은 그녀와 마주하며 진실을 알려줄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이 성씨세가와 연관된 일련의 사건의 피해자.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분명할 테니까.
“자, 누굴 데려왔는지 보렴.”
신월은 그녀를 품에서 내려놓으며 방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그녀의 뒤로 문 바깥에서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는 죽립의 사내가 보였다.
성시소는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문노!”
“아가씨……!!”
세가의 내총관이자, 동시에 자신에게는 할아버지와도 같았던 인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다행입니다. 실로 다행입니다! 아아, 신이시여!”
문노는 성시소를 발견하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주름 사이로 구슬져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히 추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시소는 작은 소매로나마 문노의 눈물을 닦아 주며 그의 앞에 섰다.
“감시가 심했을 텐데요.”
“생각보다 쉬이 빠져나왔습니다. 제게는 관심도 없더군요. 단주… 성여답 그 망나니는 어제부터 끙끙거리느라 방에만 처박혀 있고요.”
문노는 죽립을 내려놓고는 신월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신월이시여.”
“감사는 소혜에게 하게.”
아무리 감시가 적었다고 한들, 그녀가 보낸 수하의 도움 없이는 빠져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문노는 신월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오늘 낮에 가문이 한창 시끄러웠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자신이 빠져나온 것은 그 혼란을 틈타서였다.
전부 신월의 안배였다.
“가문은… 아버지는 괜찮나요?”
“…….”
“문노?”
“아가씨께서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니었다.
모든 것을 숨기고자 했다.
암암리에 일어나는 어른들의 일을 알기에는 그녀는 너무 어렸고, 아직은 그저 밝고 좋은 것만 보고 자라기를 바랐다.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주인인 성여문도 그러했고, 성씨세가 전체의 총의가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의 성씨세가는 성시소의 집이 아니었고, 그 뜻에 성시소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지금은 형편 좋은 생각을 가려 할 때가 아니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총명했고,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언제부터 일어났는지. 그리고… 사마신교라는 자들이 얼마나 무서운 이들인지. 아가씨.”
문노는 침음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성씨세가를 되찾아 오기 위해 모든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당신께서 선택하셔야만 합니다.”
* * *
─덜그럭.
“…흐음.”
이것으로 세 개째.
청유백은 손바닥 위에 놓여진 부채 조각을 들여다보았다.
펼쳐도 보고, 늘어놓고 만져도 보았지만…….
‘뭔가 느껴지는 것 없나?’
[으음… 모르겠느니라. 전혀.]
‘흐으으음.’
청유백과 천화는 동시에 골똘히 고민에 몰두했다.
조각 하나로는 의미가 없는 건가?
하지만, 이 조각에 내뿜는 기묘한 기운은 분명 무언가의 의미가 있을 테다.
교아나 성여문이 이 조각들을 지니고 다니는 것을 생각하면, 분명 모종의 힘 또한 지녔을 것이고.
‘개수가 모자란가?’
[그럴지도…….]
부채의 전체 크기를 생각한다면, 아마도 전체 개수는 열다섯에서 스물 정도.
확실히, 세 개는 그에 비해서는 좀 적은 숫자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래도 전체를 모으는 것은 좀 많이 어려울 것 같은데…….
‘흐음.’
분명 모종의 방법이 있지 않을까.
반지는 고작 그 작은 하나 가지고도 기억을 떠올렸는데, 이만큼 큰 조각이 세 개나 있는데도 기억에 전혀 변동이 없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으으으음.]
천화의 신음이 귓가를 계속해서 때렸다.
그래, 하기사 기억이 안 나서 답답한 것은 청유백보다도 천화 그녀일 테다.
고민은 거진 해가 질 때까지 반복되었다.
그러다가 문득, 청유백의 눈에 조각에 새겨진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순서는 어떨까?’
[…순서? 고작 부채 조각에 무슨 순서가 있겠느냐?]
‘그림이 있잖나.’
[그림…?]
천화는 청유백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고 있는 문양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양은 모아놓고 보니 그림의 한 조각같이 보이기도 했다.
부채의 숫자만큼 쪼개어진 그림의, 작은 한 조각 말이다.
‘밑지면 밑지는 거지만, 본전은 찾아 봐야지.’
청유백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각을 뒤집어 가며 순서를 바꾸어 보았다.
그리고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앞뒷면을 바꾸어 가며 뒤집은 조각 중 딱 한 면이, 일치하는 것이 있었다.
이어지는 선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조각 중 일부인지라 아직도 전체 그림이 어떠한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일단 이 두 조각에 새겨진 것이 무엇인지는 알아볼 수 있을 듯했다.
‘이건 맞는 것 같은데.’
[확실히, 이건 뱀 같기도 하고….]
청유백의 손에 그 두 개의 조각이 들렸다.
뱀.
……뱀.
싸늘한 철의 조각에 새겨진, 녹색의 뱀.
이 조각에 녹색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왜인지 천화는 그런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불이 길을 밝히고 이어진 빛이 꼬리를 물듯이.
밤하늘에서 별빛 하나가 항해자의 길을 이끄는 것처럼.
불현듯 무언가가 떠올랐다.
처음 아는 것을 깨우치는 감각은 아니었다.
잊고 있었던 것을 다시금 기억하는 감각도 아니었다.
그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을 되짚는 것만 같은 감각.
[…기억났느니라.]
천화는 그렇게 나직이 입을 열었다.
청유백은 무심히 대꾸했다.
‘아프지는 않고?’
[이번에는 별로 아프지는 않구나. 조금 따끔한 정도야. 왜, 아프길 바랐느냐?]
‘그럴 리가. 핑계 댈 거 없으면 얘기나 풀어 보라고 하려 했지.’
‘…곤란할지도 모른다.’
‘긴 얘기? 괜찮다. 밤은 길어.’
[길진 않다. 고작 두 조각 치니 말이다. 하지만…….]
천화는 말끝을 끌었다.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억지로 꺼내듯이, 한숨을 내쉬며 어두운 기억의 화두를 던지듯 말을 이었다.
[썩 즐거운 이야기가 되지는 않을 게다. 사경(死境)의 녹련이란….]
사경녹련.
성여문이, 자신을 녹련의 낙무열이라 소개하며 했던 말이었다.
동시에, 교아는 자신을 백련의 교아라고 자칭했었더랬다.
천화의 말이 이어졌다.
[본녀가 만들었던 최악의 과오 중 하나이니.]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