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명예를 왜 여기서 찾아 (3)
백소하는 방 한구석에 숨겨져 있던 궤짝을 뜯어내어 그 안의 장부들을 손에 쥐었다.
암호로 쓰여 있어 당장은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다만, 차차 해독하면 될 일일 테다.
암호를 쓴다는 것 자체가, 썩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을 감추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이게 전부인가.”
“예, 저, 저는 뭔지 모르지만… 당주께서 가장 아끼시던 것입니다.”
“좋다.”
“허면 이제, 그…….”
“…데리고 꺼져라.”
백소하는 붙잡고 있던 여인의 목을 풀어 주며 사내에게 내던졌다.
여인은 반쯤 정신을 잃어 있었고, 사내는 경황없이 그녀를 업어 나갔다.
적영은 백소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뭐야,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두 번은 못 해먹을 짓이군요. 현장은 역시 제 취향이 아닙니다.”
백소하는 살짝씩 떨려오는 손을 소매 속으로 넣어 감추었다.
사람을 협박하는 것은 썩 익숙한 일이 아니었다.
익숙해지려고 어떻게든 억지로 몸을 움직여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 법.
떨리는 백소하의 손을 신경 쓰지 말라는 양 쳐 버리며 적영은 씨익 웃어 보였다.
“하니까 잘하던데 뭘. 첩자 심문도 원래 백가 일이잖아?”
“뭐, 그렇긴 합니다만.”
백소하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장부들을 품속에 넣어 챙기고, 챙길 수 있는 한 다른 책자들이나 중요해 보이는 물건들도 말없이 몇 가지 챙겼다.
일단은 이 정도면 될 것이다.
“그 이야기는 한가할 때 하도록 하죠. 무사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멀어졌던 기척들이 다시금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한담을 나누기에는 때가 적절하지 않을 테다.
적영은 먼저 방을 나서며 지척까지 다가온 무사들의 발소리를 주의해서 감지했다.
“나가는 중간에 마주치겠는데?”
“괜찮습니다. 준비는 마쳤으니까요.”
그 말과 동시에 백소하가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하고 허공에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적영은 싸늘한 눈초리로 백소하를 바라보았다.
“…뭐 한 거야?”
“죄송합니다. 순간 맞추는 게 좀 힘들군요. 아니면 아마 지금쯤?”
다시, ─따악!
백소하의 손가락이 다시 튕겨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분명히 무언가가 느껴졌다.
─쿠드드득!
그것은 진동.
건물 전체가 울리는 듯한 지진의 감각과 함께, 주변으로 서서히 안개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백소하가 준비한 진법이었다.
안개로 시야를 가리고, 추적을 어렵게 하는 진법.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퍽 조악한 진법이었다만, 탈출의 시간 정도는 분명 어렵지 않게 벌 수 있을 것이었다.
다만, 적영이 물었다.
“굳이 손가락 튕기는 이유가 있는 거야? 안 해도 되지 않아?”
진법을 발동시키기 위해 굳이 불필요한 신호가 필요하던가?
적영은 진법에 대해 그리 잘 알지는 못했지만, 굳이 그런 불필요한 과정이 있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보통 진법이라는 것은, 목표한 대상이 안으로 들어오면 자동으로 발동되기 마련이니까.
아마 이번 것도, 저 무사들이 이 상회 안으로 들어옴으로써 발동된 것일 테다.
백소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한 번쯤 해보고 싶었거든요.”
“아…….”
그래, 그건 중요하지.
칼을 들면 적을 쓰러뜨리고 무릇 멋지게 자세 한번 잡아 보고 싶은 법이고, 부채를 들면 제갈량처럼 한번 펄럭여 보고 싶은 법이고….
이해하지 못할 건 없었다.
적영은 피식 웃으며, 품에서 꽤 큼직한 흑색의 병을 꺼내었다.
“그건 뭡니까?”
“마지막 선물.”
적영은 그것을 방 안에 던져 깨트렸고, 병의 색깔만큼이나 칙칙한 검은색 액체가 바닥을 가득 적셨다.
“그냥 가면 아쉽잖아. 특별히 얻어 왔지.”
그리고는, 화륵.
적영의 손가락 끝에서 작은 불꽃이 일었다.
* * *
적영과 백소하가 돌아왔을 때, 청유백 일행도 이미 도착한 이후였다.
황돈은… 아까 지나치면서 보니, 자신의 방에서 흐느끼며 장부를 끄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좀 안타까운 뒷모습이었다만, 뭐 어쩌겠는가?
그게 황가 일인데.
적영은 탁자 앞에 앉아 있는 청유백을 발견하고는 다가갔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앞에 놓여 있는 두 개의 부채 조각을 발견한 적영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하나는 그가 지니고 있던 것일 테니 상관없지만, 다른 하나가 꽤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끄트머리에 황금색 실타래로 치장이 되어 있는 그것은, 분명한 성시소의 것으로 보였다.
“뭐야 당신, 애 물건을 뺏은 거야?”
“내가 안 뺏었다.”
청유백은 그리 대꾸하며 턱짓으로 신월을 가리켰다.
굳이 탁자에 앉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그녀는 벽면에 기대 있기를 고집하고 있었다.
암살자라는 족속은 의자에 앉으면 죽는 병이라도 있는 건가 싶기는 했지만, 지금 중요한 게 그건 아닐 테다.
적영의 시선이 신월에게로 옮겨가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뺏은 건 아니야. 달라고 했더니 줬을 뿐.”
“아, 그러셔.”
“그 아이에게 있어서 좋을 게 없어. 표적이 될 뿐이겠지.”
“아니면 잡혔을 때 조각이 없다는 걸 알고, 그 보복으로 살해당할 수도 있겠고?”
적영의 날선 대꾸에 신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기분 나쁜 상황은 얼마든지 있는 법이다.
게다가 고작, 성시소와 며칠이나 알고 지냈다고 그런 말을 꺼낸단 말인가.
주제넘은 참견이었다.
“마교는 실패하고 패배할 때를 가정하고 움직이라고 가르치나?”
“중원의 쥐새끼들은 대책 없이 앞만 보고 움직이라고 가르치는 모양이지?”
두 사람의 으르렁대는 시선이 맞부딪혔다.
백소하는 청유백을 바라보며 말리라고 눈짓했지만, 청유백은 ‘내가 왜?’라는 투로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두 사람의 대치를 보다 못한 백소하가 나서며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그만 싸우십쇼. 어차피 이번 일 끝나면 얼굴 안 볼 사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애초에 그 아가씨 일이고요. 그 아이도 어련히 생각하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
“…뭐. 좋아.”
두 사람은 혀를 차며 물러났다.
애초에 싸울 일도 아니었다.
이제 와서 다시 성시소에게 저 조각을 맡길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적영은 청유백과 신월의 차림새를 살피고는, 예상 밖이라는 양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의외네? 다 몰려 가길래 꽤 크게 싸움이 났을 줄 알았는데.”
그들의 상태는 생각보다도 멀쩡했다.
옷은 다녀와서 환복한 것이라고 치더라도, 작은 생채기 하나 없는 것은 꽤 뜻밖이었다.
그 멀리서 보기에도, 성씨세가로 몰려간 병력이 심상찮게 많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할까.
“그에 관해선… 꽤 이야기가 길어지겠지.”
청유백은 난처한 낯빛으로, 일단 이야기의 서두를 꺼내었다.
가장 먼저, 교아가 살아 있었다는 것부터.
* * *
설명은 꽤 길어졌다.
산등성이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던 해는 어느새 져버려 황혼의 끄트머리가 하늘을 붉게 적시고 있었다.
적영이 탁자에 머리를 박으며 탄식했다.
“이해가 안 되는데…….”
진짜로 모르겠다.
들어가자마자 들켰는데, 그걸 또 멀쩡히 걸어 나왔고, 죽은 줄 알았던 놈은 살아 있었고…….
성여문은 또 이상한 상태라고?
이해고 나발이고, 말이 되는 소리인지부터 생각하고 싶었다.
적영은 자신의 머리가 나쁜 것인가 싶어 백소하를 돌아보았지만, 백소하도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인 듯 보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다.
그가 내뱉은 말 중 무엇 하나, 일반적인 이치에 들어맞는 것이 없었으니까.
죽은 자의 부활.
살아 움직이는 시체.
심지어, 이리도 갑작스러운 ‘결투’라니?
머리로는 이해하더라도, 실제로 납득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교아라면… 그 지난번의 미친놈 맞지?”
청유백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고, 적영은 어처구니없어하며 되물었다.
“아니, 어떻게? 죽였다면서?”
“나도 모른다. 하지만 멀쩡히 살아 있던 것은 확실해.”
“아니, 참…….”
“뭐, 직접 보면 알겠지.”
“직접이라니?”
“결투한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그럼, 쟤를 보내랴?”
청유백이 턱짓으로 백소하를 가리키자, ‘제가 갈까요?’라고 말하는 것 같이 백소하의 눈썹이 치켜세워졌다.
적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아니지.”
“정면에서의 맞싸움이다. 녹지연보다는 네가 나아.”
“그럼, 쟤는?”
“글쎄.”
청유백은 굳이 대답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대신 신월이 대꾸했다.
“살수한테 대낮의 결투를 요구하는 것도 참 짓궂은 일인걸.”
“도움이 안 되잖아?”
“뭐, 일단은 들어라. 앞에 서는 건 내가 아니겠지만, 돕기는 할 테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결투라며?”
“당연하지. 결투니까.”
“으응?”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적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하자, 신월은 못 해 먹겠다며 청유백에게 떠넘겼다.
청유백은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너는 저놈들이 정정당당하게 나올 것 같나?”
“그야… 아니지.”
사마신교와 정정당당이라니.
천하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일 것이다.
가령 차가운 불이라던가, 뜨거운 물이라던가…….
아니, 뜨거운 물은 있나?
아무튼 간에.
적영은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날려 버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는 정정당당해야 하나? 누구 좋으라고?”
“그건 그렇…지?”
“치졸한 승리는 언제나 정정당당한 패배보다 낫다. 정정당당한 패배 운운하는 놈은 미련한 멍청이일 뿐이야.”
“그것도… 그렇지.”
적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명예.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곳은 마교가 아닐 뿐더러, 상대방은 마교의 가장 큰 적인 사교도들이다.
헛된 자존심을 부리다가 그들에게 패배하는 것이야말로, 명예에 가장 큰 먹칠을 하게 되는 꼴이리라.
하지만 그것과 신월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적영이 그녀를 돌아보았고, 청유백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준비할 것들을 지시하겠다.”
* * *
한편, 오로목제의 한 구역에서는, 때 아닌 화재로 열병을 앓고 있었다.
“빨리 진화해라! 어서!”
홍진상회.
이곳은 동우회의 비호를 받는 곳이면서, 동시에 요즘 성씨세가의 비호를 받고 있노라고 공연히 떠들어대고 있는 신흥 상회였다.
뒤로는 구린 일을 벌이고 있다는 소문도 몇 있었지만, 대부분은 잘나가는 그들을 시샘하여 꾸며진 헛소문이라고 치부될 뿐이었다.
“세상에, 저거 좀 봐.”
“쯧쯧. 천벌을 받은 게지.”
그만큼 그들을 시샘하는 자가 많기는 했으나─ 누가 알았으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어 폭삭 내려앉을 줄은.
아니, 엄밀히 말하면 아직 잿더미는 아니었다.
어디론가 나갔던 상회의 무사들이 돌아와, 불길을 다스리기 위해 열심히 물을 퍼다 나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불이 옮겨 붙을까 걱정하는 근처의 주민들도 말이다.
그런데 문득, 다른 옷을 입은 무사들이 물을 날아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에, 성씨세가의 무사잖아….”
“성가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었나 봐요!”
“허어, 저, 저분은…….”
그리고 그 너머에서, 결코 이 근방에서 볼 수 없었을 인물이 고고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방금까지 불의 진화를 지휘하던 무사가 황급히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서, 성가의 가주님을 뵙습니다!”
하지만, 성여문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드물게도 분노한 모습이었다.
잔뜩 얼굴이 일그러진 채, 불타서 쓰러지고 있는 건물의 서까래를 올려다보았다.
“…제였지?”
“예?”
“언제 습격당했느냔 말이다.”
“그것이… 성씨세가 본당으로 집합령이 내려진 직후인 것 같습니다. 이미 돌아와 보니 불은 번져 있었고… 범인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키던 무사들은 전부 살해당한 채였구요.”
“……청유백.”
“예?”
성여문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돌아섰다.
가문으로 돌아가는 그의 표정은, 전에 본 적 없을 정도로 광기로 물들어 있었다.
누군가는, 한순간 녹색으로 빛나는 그의 눈을 본 것도 같았다.
“재밌군. 순순하다 싶더니, 그저 눈을 돌린 것이란 말이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