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재회 (2)
잠입의 목적은 명료하다.
성씨세가의 현황 파악.
그리고, 사마신교 지도층의 파악.
이를 통해 어떻게 성씨세가를 원래대로 돌려놓을지 결정할 수 있을 테다.
가주가 협박을 받고 있다면 협박의 요체를 제거하면 될 것이고, 매수당해 넘어갔다면 다소의 협박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만약 가주가 처음부터 사마신교의 사람이었다면 얘기가 조금 달라지긴 할 테다.
‘그래도 뭐, 그건 그것대로 해결 방법이 있기 마련이지.’
성시소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 될지도 모르지만…….
당장의 목표는 성씨세가를 정상으로 돌리고, 사마신교가 지원하는 동우회를 친다.
지금은 그것 외의 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원각 지부장이 입을 열었다.
“저희 무사들은 전면에 나설 수 없습니다. 알고 계시지요?”
청유백과 그의 시선이 마주쳤고, 곧 청유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적영은 이해할 수 없는지 탁상을 쾅 내리쳤다.
“아니, 왜?! 객잔 지키는 무사가 그리 많더만! 교를 위한 일에 목숨이 아까워?”
“적영, 진정하십쇼. 그게 정상입니다. 이 지부를 이번 작전만 하고 버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온 거고요.”
“까짓 지부…….”
“하나 짓는 데 금이 수천이요, 시간이 오 년입니다. 오로목제만큼 큰 도시면 십 년은 잡아도 되겠죠.”
“…….”
그 정도면 까짓…은 아니긴 하지.
‘왜 안 싸우느냐’가 아니라 ‘교를 위한 일인데 목숨이 아깝느냐’를 걸고넘어지는 게 그녀답기는 했지만, 적영은 곧 입을 다물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청유백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지령을 내리겠다. 우선 녹지연, 네가 나와 함께 들어간다. 의원과 함께 들어가면 많은 인원이 가진 못할 테니, 너와 나만 간다.”
“뭐야, 우리는 안 들어가?”
적영이 따지고 들자, 청유백은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대꾸했다.
“너는 도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지 않나. 설마, 의원과 함께 가는데 무기를 갖고 들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아니, 그건 아니지만… 칼 없으면 병신인 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나는 방법이 있지. 얌전히 들어라. 너도 역할이 있다.”
“으…….”
적영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고, 청유백은 신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신월.”
“그래.”
“너는 우리와 함께 들어가되, 기회를 봐서 따로 움직여라. 그리고 이걸 찾아.”
청유백이 그리 말하며 꺼내든 것은 천화의 부채 조각이었다.
문득, 백소하가 물었다.
“그런데… 그 조각은 정말 어디에 쓰는 물건입니까?”
청유백이 매만지던 부채 조각은, 어떻게 보아도 특별한 것 하나 없어 보이는 그저 철 조각일 뿐이었다.
청유백 본인이야 천화에 대한 것을 알지만, 다른 이들에게 그것을 설명할 수도, 납득시킬 방법도 없다.
게다가─ 어디에 쓰는 물건이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청유백으로서도 답하기가 궁색한 것이 지금의 상황이었다.
“나도 모른다.”
신월이 기가 차다는 듯 대꾸했다.
“뭔지도 모르는 물건을 내게 찾으라 시키는 건가?”
“추론의 연장일 뿐이다.”
“그 추론이 틀렸다면?”
“내 예측이 틀렸다면, 그 또한 좋다. 다른 정답에 다가서는 것이니.”
“입은 살았군.”
사마신교가 이것을 쫓는 이유는 모른다.
상상력을 동원해서 온갖 재밌는 가설을 내놓을 수야 있겠다만, 현실성을 들먹이면 무엇 하나 쓸모 있는 가설이 없다.
그러나, 두 가지만은 확실하다.
이 첫 번째 조각이 교아가 사라진 뒤, 그 잔해에서 나왔다는 것.
그리고, 사마신교는 이 조각들을 모으기 위해 온갖 짓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청유백은 말을 이었다.
“교아는 죽었지만, 사마신교의 지도층들이 지니는 물건일 가능성이 있다. 성시소를 죽이려 하면서까지 빼앗으려던 물건이니,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건 확실하겠지.”
“그걸 빼앗으면 되나?”
“누가 지니고 있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지휘관을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신월은 어깨를 으쓱였고, 청유백은 적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적영, 너는 원각 지부장이 추측한 사마신교의 지부로 가서 대기해라. 백소하, 네가 같이 가고.”
“대기? 몰살이 아니라?”
“어쩌면… 그곳의 병력이 전부 빠져나올 가능성도 있으니.”
적영은 이해 못 했다는 표정을 애써 감추려 들었지만, 어림도 없었는지 백소하가 옆에서 거들었다.
“잠입하는 것이 들킨다는 것을 상정하고 움직이는 거군요.”
“만약이지만, 그렇지. 이 계획은 딱 한 번밖에는 통하지 않을 테고, 실패하더라도 어딘가에서는 이득을 봐야만 할 테니.”
“동의합니다.”
적영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는 양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러고는, 백소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굳이 같이 가야 해? 방해되는데.”
“혼자 갔다가 사람을 몇 명이나 죽이려고?”
“…….”
적영이 괜한 화풀이로 백소하의 옆구리를 찌르며─비명이 다섯 번쯤 새어나올 즈음─ 이 자리가 마무리되어 갔고, 아직까지 아무 역할도 받지 못한 황돈은 조심스레 손을 들어올렸다.
“소, 소인은 뭘 해야 하겠소?”
“아, 너는…….”
청유백은 잠깐 침음을 삼켰다.
무엇을 고민하는 것일까, 아주 심각하게 목을 울리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돈을 바라보았다.
“아주 중요한 임무가 있다.”
“주, 중요한 임무 말이오?”
“그래, 아주 중요한…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중요한 일일 수 있지.”
“이, 이 황도식. 무슨 수를 써서든 귀인을 실망시키지 않겠소!”
청유백은 품에서 작은 종잇조각을 하나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믿는다.”
“……?”
무엇인지 알아보기 힘들지는 않았다.
상계의 자식인 그에게, 몹시 익숙한 종이였다.
거래 대금을 결제하고 주고받을 때 사용하는, 일종의 영수증인데…….
근데, 어라?
‘…금(金)?’
황돈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인가 싶어 눈을 부비고는, 그것을 다시 한번 강하게 노려보았다.
그냥 철일 수도 있지 않던가.
그런데… 철인가 싶었는데, 앞에 황(黃) 자가 붙어 있네?
그리고 액수는… 보자, 획수가 하나, 둘, 셋….
6획이네?
‘백(百)?’
뭐지? 꿈인가?
황돈은 청유백을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저, 저기 귀인. 이것은…….”
“처리해 놔.”
“…….”
“믿는다?”
“무, 물론이오…….”
목소리까지 떨려오고 있긴 한데, 분명 괜찮을 것이라고 청유백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불쌍한 시선으로 지켜보던 신월이 슬쩍 귓속말로 물었다.
“저거 내 대금 아닌가?”
“맞다.”
“…남의 돈이었어?”
“친구 좋은 게 뭐냐?”
“그럼 나는 친구 안 하련다.”
“늦었어.”
이미 동의했잖아. 그렇지?
청유백은 씨익 웃어 보였다.
악마도 저렇게는 안 웃을 것 같았다.
* * *
“일러둔 대로 말했겠지?”
“어유, 그러믄요. 제자들과 약재를 챙겨 곧장 향하겠다 말했습니다. 다녀간 지 일각이 되지 않았으니, 곧장 가면 될 겁니다.”
“좋네.”
원각은 품에서 은전 한 냥을 꺼내어 의원의 손에 쥐여 주었다.
금이고 은이고 계속 수십 냥씩 오가다 보니 은 한 냥이 적어 보인다만, 이것도 퍽 많은 돈이었다.
최소한, 약방 할배가 고작 하루 입을 다무는 대가로는 차고도 남을 테다.
“귀인 분들, 따라오시지요. 저는 들어가서 진맥을 보고 나오고, 귀인 분들께서는 뜻을 이루실 뿐입니다.”
청유백과 녹지연, 신월은 미리 준비한 의복으로 갈아입고 상 의원의 뒤를 쫓았다.
크게 이상한 점은 없었다.
그들의 연령이 어린 편이기도 했으니, 누가 보아도 어린 약동(藥童)으로 보일 테다.
청유백은 꽤 선선히 맨얼굴을 드러낸 신월을 보며, 의외라는 듯 입을 열었다.
“화장 지우니까 그냥 평범한 미인이군. 굳이 가면을 쓰는 이유를 모르겠어. 암살자라서, 라는 이유를 대기에는… 어차피 보일 일도 없지 않나.”
“내 마음이지. 뭐 커다란 흉터라도 기대했나?”
“아니, 생각보다 어려서 말이지.”
지난번, 신원에서 화장한 그녀를 보았을 때에는 진짜 꼼짝없이 수십은 먹은 할멈인 줄 알았다.
그 정도로 짙게 분을 칠할 정도라면, 안 좋은 피부를 감추기 위해서일 것이다─라고 지레짐작한 탓이었다.
하지만 웬걸.
그녀는 끽해야 스물 안팎의 나이로 보였다.
녹지연과도 별로 차이가 안 날 정도로 말이다.
“…이게 진짜 얼굴이 아닐 수도 있잖아.”
“그 정도는 구분할 줄 안다.”
“두 분 다 적당히 하세요. 거의 다 왔다구요.”
녹지연의 말에 두 사람은 거리를 돌아보았다.
말마따나, 장대한 담벽으로 둘러싸인 장원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여기가…….”
성씨세가.
이 장원은 고래 등만 한 기와집, 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육대가의 장원들처럼 동떨어진 곳에 거대한 궁궐을 지어놓은 것도 아니었고, 도리어 거리의 크기를 유지하려 한정된 공간에 건물들을 욱여넣은 듯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눈에 띄는 삼 층 사 층짜리 건물들로 이어지는 압도적인 장원의 풍경은 도리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마치 외적으로부터 집안을 방어하기 위한 성벽처럼 보이기도 했다.
문득, 입구를 지키고 있던 무인이 다가와 의원에게 허리를 숙였다.
“상 의원님 아니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단주님이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헌데, 이 아이들은…?”
“잠깐 맡은 약동들일세. 내 제자는 아니지만, 친분 있는 사람의 제자인지라 데려왔다네. 약방에 내버려 두기에는 걱정이 앞서서 말이지.”
“아아… 잘 알겠습니다. 들어가시지요. 위치는 알고 계시죠?”
“아무렴 아무렴. 수고하게나.”
의원은 생각보다도 가볍게 정문을 통과했다.
아직까지 이렇다 할 의심되는 요소는 없었다.
일하는 사람들은 여느 곳과 같이 각자의 의무를 다하는 듯 보였고, 경비를 서는 무인들 또한 같았다.
그저, 그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그리 밝지는 않다는 것이 조금의 기이한 점일 뿐이었다.
장원의 앞길을 걷는 상 의원에게 잠깐 이목이 쏠리기는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곧, 사람들은 아무런 일 없이 각자의 일로 돌아갔다.
신월이 입을 열었다.
‘이쯤이면 될 것 같군.’
‘그래, 감시도 그리 철저하지 않아. 성씨세가를 무력으로 점거한 건 아니라는 소리지.’
‘그래도 계획대로 이행하나?’
‘물론. 조각과 무력은 연관이 없다. 놈들의 목표라면, 일단은 찾아내는 게 우선이야.’
신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채 조각에 잠시 손을 뻗어 선명하게 그 기운을 기억하고는, 다 되었다는 양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좋다. 찾아서, 그 다음은 어떻게 하면 되지?’
‘가능하다면 탈취.’
‘불가하다면?’
‘누가 가지고 있었는지 기억만 해도 좋다 했잖나.’
‘하면, 없을 경우에는?’
‘없다면…….’
청유백은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마신교의 지도층이 지니는 물건이라는 추론 자체가 빗나간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지도층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 어찌 되었든, 목적은 이곳을 총괄하는 우두머리를 찾는 것일 테다.
청유백은 말을 이었다.
‘성여문의 근처에 누가 있지는 않은지 살펴다오. 협박받고 있는 것이라면, 분명히 누군가와 함께 있을 테지.’
‘그래.’
신월은 그 말을 끝으로 자연스럽게 일행에서 멀어졌다.
네 사람이었던 일행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한 명이 줄어 있었지만, 마치 처음부터 세 명이었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걸리지 않아 의원의 걸음이 멈추었다.
어떤 건물의 상층, 커다란 방의 앞이었다. 방 안쪽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 의원인가?”
“예. 찾으셨다 들었습니다만.”
“빌어먹을… 빨리 들어와 내 팔 좀 보게. 왜 이리 늦었는가!”
“허허, 송구합니다. 늙은 몸이 말을 듣지 않는지라.”
끼익, 천천히 열리는 문 사이로 청유백과 녹지연은 의원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특이할 것은 없었다.
누군가의 혈향도, 수상한 기척도 없었다.
그저 평범한 방이었고, 의원의 짐을 내려놓는 척하며 주변을 살폈다.
‘호위는… 없군.’
벽 뒤든, 지붕이든 간에.
비밀스레 이 인간을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하기야, 가주도 아니고 기껏해야 망나니 동생인데 누가 목숨을 걸고 지키겠는가.
청유백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성여답이 배후일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건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듯 보였다.
그 본인에게서도 마기가 느껴지지 않았을 뿐더러, 사마신교의 내통자라면 주변에 한둘 정도는 감시자가 있어야 정상이었다.
마교 또한 그렇게 움직이니까.
천화가 비웃으며 말했다.
[애초에 저 망나니가 그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지는 못할 것 같지 않으냐?]
‘그것도 그렇군.’
[뭐, 본녀로서도 아닌 것 같구나. 저놈이 느끼고 있는 건 고통과 옅은 공포뿐이다. 뭔가 획책하고 있는 자의 감정은 아니야.]
‘…공포? 무엇에 대한?’
[으음? 그래, 공포다. 옅지만, 분명히 느끼고 있어. 그야 뭐, 죽음에 대한 것 아니겠느냐?]
천화는 가볍게 얘기했지만, 청유백은 뭔가 아님을 직감했다.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라고?
‘아니… 아니야.’
사람은 생각보다도 단순하다.
그저 고통으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차라리 고통만 강해지면 도리어 죽음을 바라면 바라지,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죽음이 두려워질 때는, 살 수 있는 방법이 전부 떨어졌을 때다.
고작 아픈 것만으로, 의원에게 증상 한번 말해보지도 않은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 할 리는…….
─덜컥.
……없다.
작은 소리가 들렸다.
청유백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눈만을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좁은 시야, 아직 시야에 비춰지지 않는 저 너머에서 작은 그림자가 비춰오고 있었다.
문이 열린 것이다.
자신들은 전부 들어와 있음에도, 다른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
청유백과 녹지연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 또한 느꼈는지, 굳은 표정으로 청유백을 바라보고 있었다.
터벅.
터벅.
한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것은.
“안녕.”
청유백의 바로 뒤편에서, 반갑다는 듯이 멈추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