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재회 (1)
“일단 소개하지.”
“무엇을…?”
청유백은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여 방 한구석을 가리켰다.
방금 전까지는 무엇도 없던 벽.
심지어 그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조차도 뭔가 있는지 모르고 있던 그곳에서 하나의 인영이 솟아올랐다.
초승달이 새겨진 순흑색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었다.
분위기는 그야말로 신묘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일순간 경직되게 하는 서슬이 있었다.
“?!”
누구냐고 묻는 모두의 눈빛에, 청유백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산상만월의 신월이다.”
“산상만월이라 함은 그…?”
청유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소하는 웃기지 말라는 양 코웃음 치고 있었다만, 이를 전혀 아랑곳 않는 그녀의 인사가 이어졌다.
“반갑지는 않고, 개 같으니까 다음부터는 보지 말도록 하자. 이상.”
“…….”
독특하다고 해야 할지, 참신하다고 해야 할지.
그녀의 진심 어린 인사에 모두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난색을 표했다.
그나마 녹지연 정도가 뚜렷하게 웃고 있었다만, 저것도 평소의 웃음과는 조금 달랐다.
그러니까, 뭔가 잘못한 게 있는데 감추기 위해서 짓는 웃음이라고 해야 할까.
딱 봐도 어떻게 된 건지 상상이 가는 정황을 보며 백소하는 청유백에게 전음을 날렸다.
{…사람을 패서 데려오기라도 한 겁니까?}
{네가 아는 신월은 패면 데려와지는 존재냐?}
{아니, 그건 아니지만…….}
패면 데려와지고 나발이고, 백소하는 저 사람 자체가 가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령 예를 들자면, 적을 속이기 위해서 아군부터 속여라─
같은 느낌의 전술일 것이다.
아니, 하지만 당연하지 않던가.
‘산상만월. 백가의 차남인 나도 접근할 방법을 모르는 단체인데…….’
신월이라고 하면 그 산상만월의 후계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당주는 아니지만, 객사하지 않는 한은 언젠가 반드시 당주가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걸 뭐, 하룻밤 새에 데려왔다고 해봤자…….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그러면 저게 진짜란 말입니까?}
{요즘은 사실을 말해도 전해지지 않는 경험을 많이 하는군. 애석한 현실이야.}
{아니, 그건 또 뭔 말이랍니까.}
백소하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청유백을 쏘아보았다.
아니, 뭘 어쩌라는 건가.
하다못해 이게 거짓인지, 진실인지 정도는 알려줘야 뭘 믿든 말든 하지.
그리고, 그렇게 툴툴거릴 무렵.
“거기.”
“예, 예?!”
문득 고막을 때리는 신월의 목소리에 백소하는 깜짝 놀라 대답했다.
그리 큰 목소리가 아니었음에도, 유난히도 귀에 들이박히는 듯한 목소리였다.
“시시한 뒷담을 할 정도로 우리가 시간이 많지는 않잖나?”
“그, 그렇지요.”
“그럼 진행하지. 친해질 생각도 없고, 더 엮일 생각도 없어. 난 그냥 여기서 주어지는 임무만 해결하고 빠진다. 그거면 되겠지?”
신월은 그리 말하며 청유백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결코 그를 좋게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 뚝뚝 묻어 나왔다.
“삼백 금을 받고 너무 날로 먹으려 하는 것 아닌가?”
“고작 삼백 금으로 신월을 사려 하는 네가 날로 먹는 거지.”
“받을 때는 좋다고 받더니?”
“시끄럽다. 아무튼, 그런 줄 알아.”
청유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기실,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번 일만 잘 해결된다면, 이 이상 그녀의 힘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청유백은 품에서 병 하나를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자, 이게 뭔지 알겠나?”
“어찌 압니까?”
“알 수도 있을걸.”
백소하는 알긴 뭘 알아, 하고 대꾸해주고 싶었다만, 청유백의 시선은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청유백의 시선은 녹지연에게 향해 있었고, 말마따나 그녀는 심각한 눈빛으로 그 병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녹지연은 저 병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아는 듯 보였다.
“…그걸 챙긴 건가요?”
“버리기에는 아깝잖나? 한 사람의 인생이 들어간 역작인데. 사람은 죄가 있지만, 도구는 죄가 없지.”
청유백은 그것의 뚜껑을 열어 자신의 손바닥 위에 뒤집었다.
병에서 나온 것은 벌레였다.
손톱보다 작은 크기의, 지네와 비슷한 형상을 한 벌레.
“헌원고의 원고다. 이 이상 번식시킬 방법은 없지만, 남아 있는 것을 활용할 수는 있지.”
녹운룡이 죽고, 안타깝게도 대부분이 죽어 몇 마리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들의 숫자를 늘릴 방법도, 다시 개발할 방법도 아는 바가 없었으니, 앞으로의 마교 전력에 극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을 테다.
그래도 언젠가는 쓸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이 유효하게 작용했고 말이다.
“효과는 알겠지? 숙주에게 극심한 고통을 준다. 기생시킨 위치, 기생시킨 정성에 따라서 죽음에 이르게까지 할 수 있다.”
“그건 압니다만, 그것을 왜 지금 꺼냅니까? 그거랑 성씨세가 잠입이 무슨 관련이 있다고. 네가 성여문에게 고독을 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성여문은 그렇지. 하지만, 그 큰 장원에 사는 게 그놈뿐이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백소하는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되었든, 결국 결론은 같다.
고독의 단점은, 그 막대한 효율에도 불구하고 ‘심는 과정’이 번거롭다는 데에 있다.
정신 말짱한 고수라면 제 몸에 침입하는 순간 알아차릴 것이고, 침입하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는 범인이라면 굳이 고독을 쓸 이유도 없다.
어찌 되었든 간에, 심어야만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여문은 가문 밖으로 나오지 않을 테고, 애초에 그의 얼굴을 밖에서 볼 수 있다면 굳이 잠입할 이유가 없지 않던가.
“성여답에게 고독을 심어 놓았다. 지난번… 밖에서 보았었지?”
일행들은 기억을 되짚었다.
첫날, 밖에서 이 객잔을 위협하던 왈패들.
그 무리의 우두머리가 성여답이긴 했더랬다.
“아, 설마 그때…!”
원각 지부장이 손뼉을 치며 경탄했고, 청유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소하가 말을 받았다.
“설마, 그 놈이 지부장과 악수하고 갑자기 소스라치게 비명을 지른 게… 그것 때문이었습니까?”
“권력자의 숨통을 잡는 건 언제든지 유효한 전술이지. 하지만 급하게 박은 거라, 목숨까지 위협하지는 못할 거다. 기껏해야 뒤지기 직전까지 아플 뿐이야.”
“어차피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잖습니까. 완벽하군요… 그걸 발동시키면, 놈이 의원을 찾을 겁니다. 고독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병에 걸린 것인가 의심할 테니까요.”
“바로 그렇지. 그리고…….”
청유백이 손을 들자,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손기척 소리가 채 잦아들기도 전에 목소리가 이어졌다.
“공자님, 급보입니다. 동쪽의 상 의원에게 부름이 들어왔답니다.”
“기다릴 필요 없이, 이미 쓸 만한 의원들에게 전부 사람을 붙이라고 말해 뒀다. 한 번 가보자고.”
* * *
“끄으… 끄으으으…….”
뒤지겠다.
진짜, 존나 아프다.
“씨발! 씨바아아알!!”
성씨세가의 으리으리한 집도, 새어 나오는 고통의 비명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당장 어젯밤부터 고통을 부르짖는 성여답 탓에, 사용인들과 시비, 그리고 식객들은 그에 대하여 수군대고 있었다.
주제는 다양했다.
개짓거리 하고 다니더니 결국 벌을 받은 것이라더라.
결국 어디 가게의 주인이 횡포를 못 참고 일을 저지른 것이라더라.
당해도 싸다.
그래도 의원을 불러야 하지 않겠느냐 등등.
물론 성여답이 그것들에 신경을 쓸 겨를은 없었다.
당장, 타들어 가는 것만 같은 이 오른팔의 고통을 참아내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으니까.
“끄으으…….”
오른쪽 팔 전체가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외견으로 보기에는 이렇다 할 문제가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독인가 싶기에는 딱히 혈관이 불거지지도, 피부가 변색되지도 않았으며, 애초에 자신이 먹는 모든 음식은 기미를 두어 다른 이가 먼저 먹게 한다.
자신이 이만큼이나 아프다면, 먼저 아픈 다른 누군가가 있어야만 했다.
‘씨발… 대체 뭐야……!’
병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음모?
최근에 문제가 될 만한 일을 당했던가 싶어도, 짐작 가는 것은 별로 없었다.
누가 감히 이 도시에서 자신에게 대든단 말인가.
최근에 오른팔이 아팠던 일이라고 한다면, 당장 어제 있었던 그 일뿐이었다.
태평객잔에 시비를 걸어 돈을 뜯으러 갔다가, 객잔주와 악수를 한 것.
단지 그게 다다.
하지만, 성여답은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원 객잔주? 아냐. 그자는 그럴 만한 위인이 못 돼… 그건 그냥 화풀이었을 뿐이다.’
객잔주는 결코 고수가 아닐 테고, 설령 고수라고 해도 어떻게 하루나 지난 지금 팔이 이렇게 아플 수가 있겠는가.
나중에 꼬투리를 잡아 돈을 더 뜯으러 갈 소재가 될 순 있겠지만, 당장 이 고통을 무마하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성여답은 바깥을 향해 외쳤다.
“이봐!! 의원은 아직이냐!!”
“죄, 죄송합니다! 가장 실력 좋은 의원을 부르러 사람을 보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심이…….”
“당장 데려오란 말이다! 당장!!”
“히익! 예, 예…!”
“씨발, 도움이 되는 새끼가 없군.”
성여답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저 쓸모없는 새끼들이 지금껏 한 일이라고는, 이빨 상하지 말라며 수건이나 하나 입에 물려준 것뿐이다.
‘빌어 처먹을, 내가 산모인 줄 아나?’
팔은 아파 죽겠는데, 의원은 오지 않고.
결국, 짜증만 늘어갈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바깥에서부터 잔잔히 가라앉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시비들의 발소리라 보기에는 무거웠고, 무인들 특유의 발소리라기엔 절걱이는 무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분명 의원이 도착한 것이라고 확신하며, 들어가도 되겠느냐는 질문이 있기도 전에 목청을 울렸다.
“빨리 쳐 들어와! 빨리!”
“…….”
바깥에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장지문이 거칠게 양옆으로 젖혀지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성여답은 고통에 찌푸려진 눈으로 대답도 없이 들어온 의원을 돌아보았다.
“어떤 새끼인데 대답도 없이… 뭐, 뭐야.”
“너저분하군. 차라리 빨리 죽어 버리면 좋으련만.”
그러나, 그것은 의원이 아니었다.
그 새하얀 차림은 얼핏 보면 대라신선의 환생이라고 믿어도 될 법할 정도로 선하게 생겼다만, 그가 은연중에 풍기는 기세는 선(善)과는 퍽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그는 싸늘한 표정으로 방을 둘러보고는, 성여답을 향해 다가왔다.
“교, 교아 님?”
“네놈의 비명이 밤새 온 집안에 울린 것을 아느냐?”
“죄,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 말투가 원래 이랬던가?
한순간 스쳐가는 의문이 있었지만, 성여답은 입을 닥치며 고개를 조아렸다.
교아, 이 자는 가주가 데려온 이후로 특히 아끼며 존대하라고 경고까지 한 존재였다.
안하무인인 성여답으로서도 그의 앞에서는 결코 입을 놀리려 하지 않았다.
건들면 좆된다는, 거의 동물에 가까운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으니까.
교아가 차가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직접 봐 주겠다. 팔을 내밀어라.”
“그… 의술에 소양이 있으셨습니까?”
“무능해 빠진 네놈보다는 훌륭하겠지. 팔 내밀어라.”
“…….”
성여답은 저항하지 않고 오른팔을 내밀었다.
교아는 지체 없이 그의 옷을 걷어 팔 전체를 확인하고, 또 쓸어내려 맥을 짚는 행동을 취했다.
“이건…….”
그러나 곧, 인상을 와락 찌푸리고는 쯧, 하고 혀를 차는 꼴이었다.
“왜, 왜요. 무슨 심각한 병이라도……?!”
“백련, 네가 보는 것이 낫겠군. 병은 아니다. 아마, 네가 본 적이 있는 물건일 것이야.”
“예?”
“시끄럽다. 저쪽도 처리할 일이 많은 것을 알잖나. 당장 교에 보낼 물자만 해도 수십 수레다.”
“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성여답의 질문에도 교아는 알 수 없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것이 몇 번쯤 반복되자, 성여답은 슬쩍 팔을 내리고는 기묘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미친 새낀 건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뭐, 의원 놀이라도 하러 온 건가?
씨발, 사람이 아파 죽겠는데.
성여답의 생각이 대충 그쯤까지 이르러, 표정에도 슬슬 드러나기 시작할 즈음.
“야! 이봐! 잠깐… 아, 녹련 이 새끼 정말…….”
교아는 갑자기 전혀 다른 태도, 전혀 다른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방금 전의 서슬 퍼런 태도가 농담인 것만 같이 혼잣말로 툴툴거렸다.
방금 전이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 같았다면, 지금은 그저 혼자 불만을 중얼거리는 모양새였다.
“뭐, 뭐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교아는 그를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방금까지의 싸늘한 표정과는 전혀 다른, 장난기 가득한 미소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섬뜩한, 언제나의 ‘그 다운’ 표정이었다.
“네가 신경 쓸 자격 없는 일이란다. 그래서, 어디가 아프다고?”
“그, 팔이…….”
‘빌어먹을 새끼.’
성여답은 짜증이 치밀었지만, 이 거지 같은 의원 놀이에 조금 더 어울려 주기로 했다.
어차피 미친놈과 엮이면 정상인 사람만 고통받는 법이다.
괜히 미친놈의 눈 밖에 나느니, 당장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어디 볼까~?”
교아는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기세로 팔을 살폈다.
소매를 걷어붙인 것은 똑같았으나, 맥을 짚지도, 근육을 만지지도 않았다.
그저 눈을 부릅뜬 채, 팔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미친 새끼.’
하지만, 그의 의원 놀이에도 나름 끝은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건…….”
옅게 시작되었던 그의 웃음은 만면으로 퍼져나갔고, 거의 찢어질 듯 치솟은 입꼬리는 흉측하다 느껴질 정도로 기울었다.
“재밌네에에……. 아주, 아주아주 재밌어.”
무엇이 그리 재밌을까.
성여답은 그것을 물을 용기가 없었다.
단지, 그의 다음 질문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의원을 불렀다고?”
“그, 그렇습니다. 거리에서 가장 명성 자자한… 도, 동쪽의 상 의원을 부르러 갔을 겁니다.”
“그래? 그러면…….”
교아는 웃는 표정을 조금 찡그렸다. 뭔가를 고민하는 듯 보였고, 이내 말을 이었다.
“놈들이 오면,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진단을 받아. 아니! 아무 일 없는 게 맞지. 걔네 올 때까지 계속 아플 테니까.”
“그, 그럼 제 팔은……?”
“어쩜, 내가 신경 써야 하니?”
감히?
너 따위를?
이 내가?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눈빛이었다.
성여답은, 그대로 입을 닥쳤다.
“아, 아닙니다… 아니고말고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