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화. 신월(新月) (5)
신월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순간은, 자신의 비기를 막아냈던 그 한순간은 정말로 불가능한 가능성까지 뇌리에 스쳐갔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반로환동한 고수는 아닐까.
느껴지는 기운은 그리 대단치 않지만, 자신이 짐작조차 못할 경지에 오른 탓에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곧 그 생각은 버렸다.
그런 고수가 뭐가 아쉬워서 인질극을 벌이겠는가.
명예고, 양심이고 전부 내다 버리고, 어린 여자아이를 인질로 잡지는 않을 테다…….
“그냥 작은 성의니, 넣어 두라고.”
청유백은 그리 말했다.
굳이 오기 부려 좋을 게 없다.
이 짓도 다 돈 벌려고 하는 짓인데─ 같은 속물적인 생각을 치워 두고서라도, 당장 받아들이지 않으면 성시소의 안전은 어찌 되겠는가.
금 같은 것은 그저 부수적인 문제일 뿐이다.
그래, 그렇고말고.
신월은 도끼눈을 뜬 채 전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확인했다.
빛이라고는 옅은 달빛뿐이었지만, 어둠이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이건 진짜다.’
진짜로, 금 백 냥짜리 전표.
산상만월의 당주가 움직이기에는 적은 금이지만, 신월은 아직 당주가 아니었다.
그러니, 합당하고도 충분한 양의 금이다.
허나 그것이 합당하다고 하여 적은 양은 결코 아니었다.
천하의 누구라도, 이것을 선뜻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상단이 서역과 중원을 한 번은 오가야 이익을 낼 수 있는 돈이며, 그것을 시간으로 따지면 거진 몇 년에 육박한다.
그것을 단순한 의뢰 한 번에 탕진한 것이다.
심지어는, 끝나면 보수는 두 배.
이쯤 되면 의심이 갈 수밖에 없다.
저 실력.
이 자금력.
더하여, 저 뻔뻔함까지.
신월은 이죽거리며 청유백을 바라보았다.
“…너, 뭐 하는 놈이냐?”
“모르겠나? 청옥패도 봤으면서.”
“그게 가짜라곤 생각지 않아. 하지만 그건… 양도가 가능한 물건이잖아?”
청유백의 품에서 확인했던 청가의 옥패.
그것은 분명 진품이었다.
그리고 천마신교 소속인 것 또한 부정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행적이 십만대산부터 시작되었으니까.
‘하지만… 이만한 돈을 융통할 수 있는 개인이라면…….’
…황가밖에는 없는데.
신월은 잠깐 든 생각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멍청한 생각이다. 황가의 자제가 저런 실력을 지녔을 리가 없지 않던가.
육대가에 대한 정보는 중요하니 신월로서도 다양한 인적 사항을 숙지하고 있었지만, 저 나이에 이기어검을 다루는 황가 자제 따위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검을 다루는 것이라면, 마교의 육대가 중에서도 청가.
그렇다면, 가장 합당한 것은 당연히 청가의 대공자였다.
‘하지만… 청가의 대공자는 오로목제에 올 이유가 없다. 그는 이녕으로 갔다는 첩보가 있었어.’
그리고 청가의 대공자는…
얼굴을 안다.
각 가문의 유력 후계들에 대한 정보는 그 무엇보다도 상세히 알아야만 하니까 말이다.
신월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최소한, 자신이 아는 한 그에 대한 정보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모르겠다. 넌 대체… 누구지? 정말로 청가의 후계인가?”
“발칙한 질문이군. 의뢰인의 정체를 묻는 살수라니.”
“친구라면서? 당신 입으로 한 말이잖아. 친구 이름 정도는 물어볼 수 있지.”
“…하하. 그리 나오시겠다.”
청유백은 피식 웃었다.
그러나 불쾌하지는 않은지, 그저 어깨를 으쓱이고는 대꾸했다.
“좋다. 한 방 먹었군. 내가 한 말이니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 나는 청가의 청유백이다.”
“청유백이라면…….”
청유백, 청유백.
…그래, 기억한다.
몇 달 전이었던가, 어떤 상단으로부터 암살 의뢰가 들어왔던 이름이다.
결국 상단 측에서 값비싼 의뢰금을 지불하지 못해 의뢰가 취소되었었다만…….
그 이름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별명까지도 말이다.
신월은 아직도 뇌리에 뚜렷한 그 별명을 입에 담았다.
“…청가의 쓰레기?”
“아, 그건 또 오랜만에 듣는군. 감회가 새로운걸.”
“그 병신으로 유명한 청가의 쓰레기가 이기어검을 쓴다고?”
뭐 그런 웃기지도 않는 농을?
아니, 하지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을 텐데.
“그 이야기는 그만하지. 즐겁지도 않고,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니.”
“…거짓은 아니겠지?”
“이번에도 못 믿는다면 더 이상 말할 의지도 사라질 것 같군. 난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퍽이나.”
…뭐면 어떨까.
그가 누구든 성시소가 그의 손아귀에 붙들려 있고, 신월 자신의 계획이 보란 듯이 파훼당한 것은 명료한 사실이다.
침묵 사이로 청유백이 말을 이었다.
“용건은 단순하다.”
청유백은 백월검의 검병에 손을 올려, 그것을 보란 듯이 뽑아 보였다.
“넌 기척에 민감하지. 이 검의 기운을 꿰뚫어 볼 정도로.”
완전히 기운이 갈무리된 검과 아직 미완성인 검은 판이하게 다르다.
내용물은 같으나, 안정되지 못하여 그 기운을 감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 쪽은 잔잔한 호수, 한 쪽은 폭풍우가 치는 바다와도 같다.
그랬기에, 지금의 이 완성된 백월검을 그 자체로 알아차리는 것은 꽤 어려웠다.
마교로 친다면, 최소한 마두를 넘어 마군(魔君)급 이상의 고수는 되어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그런 실력자는 마교를 통틀어도 백이 채 되지 않는다.
지금의 적철진이 향후 십 년은 노력해야 닿을까 말까 한 경지일 테다.
청유백은 검을 다시 검집에 꽂아 넣고는, 이번에는 품에 손을 집어넣어 다른 물건을 꺼내었다.
“그러면… 이건 어떻지?”
신월은 청유백이 꺼낸 것을 알아볼 수 없었다.
기이하게 생긴 철판 조각.
얼핏 보기에는, 부채 조각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그건 뭐지?”
“대답부터 하도록. 나도 궁금해서 말이야. 이건 어떻게 느껴지나?”
“그건…….”
신월은 잠깐 말끝을 흐렸다.
자신이 꺼내 놓고서 그게 무슨 물건이냐니.
퍽 우스운 일이었다만, 청유백의 표정은 진지했기에 신월 또한 그것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그것의 기운은 분명 기이했다.
결코 평범한 철 조각은 아니다.
‘무언가의 힘이 담겨 있다.’
허나… 그것이 내공의 일종은 아닌 것 같았다.
선기도, 마기도 아니거니와,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듯이, 스스로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태어나서 처음 보는 금속이었다.
“모르겠다. 하지만… 특별하군.”
“그거면 된다. 멀리서도 이게 어디 있는지 알아낼 수 있겠나?”
“한 번 봤으니, 집중한다면.”
“좋아.”
청유백은 그것을 다시 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제 정말로 싸울 의지도 없다는 양, 깊게 숨을 내쉬었다.
“내일… 아니, 이제 오늘인가. 동틀 녘에 내 방으로 와라. 수하를 데려와도 상관없지만, 별로 의미가 없을 거라는 건 알고 있겠지.”
“내가 네놈의 뭘 믿고?”
“날 믿을 필요는 없다.”
신월은 이건 또 무슨 개소린가 싶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청유백은, 당연하다는 양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 지갑은 믿을 만할걸.”
…아, 그건 그렇지.
* * *
“안전한 일이랬잖습니까.”
“그랬지.”
“맛있는 거 먹인다고 하시고 데려가셨지요.”
“그랬지.”
“그런데 어젯밤 아가씨가 왜 울먹이며 돌아오셨는지, 이유를 좀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손에 당과 들려 있지 않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목숨이 아깝긴 한지, 차마 언성을 높이지는 못해 주먹을 움켜쥐는 차 호위를 보며 청유백은 건성으로 대꾸했다.
지금은 벌써 새벽이었다.
아니, 저 멀리 동이 트고 있으니 이젠 아침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아침 회의를 위해 모든 일행을 불러 모았고, 역시나 단합 안 되는 놈들답게 각자의 이유로 지각.
차 호위가 가장 먼저 와서는 이리 불만을 늘어놓고 있었다.
자신에 대한 불만은 아니다.
모시는 아가씨, 그러니까 성시소의 취급에 대한 불만.
‘뭐… 이해하지 못할 건 없다만.’
청유백은 자동인형 같은 대꾸 말고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아니, 그렇다고 ‘널 데리고 인질극을 벌일 건데, 우는 연기 좀 해 주라’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신월과도 분명 구면일 텐데, 고작 열댓 살도 안 된 어린애한테 뭐 많은 걸 바란다고?
‘차라리 저지르고 사후 처리하는 게 낫지.’
뭐, 진짜로 죽일 생각도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우리는 신월의 도움을 받아 성씨세가까지 정상으로 되돌릴 예정이니, 결국 누이 좋고 매부 좋고인 셈이었다.
아니면 말고!
청유백은 대꾸했다.
“그래서, 성시소는?”
“어제 늦게까지 흐느끼시다 잠드셨습니다. 아직 주무시고 계시고요.”
“역시 귀한 집 애라 간식 정도로는 안 되나…….”
“사람을 그리 다루면 안 되는 겁니다!”
“앞으로는 선처하지.”
결국 언성을 높이는 차 호위였다.
솔직히, 녹지연이 어련히 잘 했을 텐데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겠냐 싶기는 했다마는.
‘침 꽂은 데가 천주혈이었나?’
도리어 당분간은 목이나 어깨 근육통으로 걱정할 일은 없을 테다.
결국 뭐 이득밖에 안 남았구만 싶다.
그런 청유백의 생각 사이로 천화가 끼어들어 이죽거렸다.
[네놈도 웬 막돼먹은 놈이 소혜를 데려가서 그리 굴리면 패 죽일 것 아니냐.]
‘무슨 소리야. 나는 그렇게 쉽게 죽여주지 않아. 태어난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줘야지.’
[…….]
아주 지가 하면 풋풋한 사랑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지.
청유백이 천화의 잔소리를 가볍게 무시하며 천화가 제풀에 지쳐 갈 즈음, 모두가 자리에 모였다.
확신하건대, 이 자리가 앞으로 자주 있지는 못할 것이다.
앞으로의 행동 방침을 정하고, 해야 할 일을 확정한 뒤로는 각자의 판단대로 움직여야 할 테니 말이다.
필요에 따라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고 외부에서 숙박해야 할 수도 있으리라.
그렇기에 이 자리는 중요했다.
앞으로의 계획과 작전이 결정되는 순간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모두는 청유백의 발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이렇다 할 계획이 없었기도 했거니와, 지금까지 너무도 당연하게 청유백의 말대로 움직였던지라 이제는 그의 말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어 있었다.
적영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거두절미하고, 청유백이 곧바로 본론을 입에 담았다.
“우리의 계획은 단순하다. 성씨세가의 장원에 잠입한다.”
“어떻게 말입니까? 이미 사마신교의 고수들이 즐비할 텐데요. 담을 넘는 순간 들킬 수도 있습니다.”
백소하가 반문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기척을 숨긴다고 해도, 저쪽에 어떤 고수가 있는지 모르니 담을 넘는 것은 썩 좋은 생각은 아니리라.
밤에 도둑 들듯 침입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일 테고 말이다.
“담은 넘지 않아. 우리는 대문으로 들어간다.”
“어떻게…?”
“다 방법이 있지.”
이미 준비해 놓은 방법이.
* * *
혼돈이 세월을 지나치고, 혼란이 바람에 실려 가도 그 다음의 일은 사람이 해결하기 마련이다.
고즈넉한 어스름이 내려앉은 지금, 마교의 각 조직들도 그러했다.
만검각의 처리 요원인 백원철은 서류를 뒤적이다 기묘한 점을 발견했고, 곧 가까운 선배에게 직행하여 물었다.
“선배님, 지난번 일 정리 중인데 말입니다…….”
“지난번? 무슨 지난번?”
“그 녹가주 사건 있잖습니까.”
“이런 병신 같은 놈이? 야, 윗선에서 그거 다 폐기하라고 한 거 못 들었어?”
“아니, 압니다. 그러고 있었고요. 그런데…….”
“그런데 뭐.”
“그, 증거 물품은 어디에 있습니까?”
증거 물품?
백원철의 말에, 선배 무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양 대꾸했다.
“왜, 빼돌리게?”
“아뇨! 그 무슨! 그저… 고독을 이용한 일이라면, 당연히 추후에 다시 악용될 여지가 있지 않습니까. 폐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엄중히 관리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관리는 개뿔이…….”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다리 찢어진다고, 사람마다 분수에 맞는 행동이 있는 법이다.
뭐, 관리?
그런 것은 노오오오옾으신 분들이 알아서 하실 일이지…….
자신들 같은 끽해야 마사급에 그치는 무인들이 뭐 그딴 걸 논하겠는가.
하지만 뭐, 말 자체가 틀려먹진 않았으니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백원철은 썩 단순하게 물러나고 싶지 않은지, 한 번 더 물었다.
“아시는 것 없습니까?”
“모른다. 내가 어찌 아냐? 말로는, 처음부터 싹 다 죽어서 없었다고 하긴 하던데.”
“그렇습니까?”
“높으신 분들이 알아서 하셨겠지. 신경 쓰지 마.”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