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신월(新月) (4)
“비겁한 놈. 어떻게 아이를 인질로 삼는단 말이냐!”
“인질이라니. 인질은 가치가 있을 때에나 인질이지. 신경 쓰지 말고 말하던 거나 마저 말해 보게나. 목적은 하나시라면서?”
“이……!”
“설마 천하의 신월께서 아이 목숨 하나 때문에 발을 뺀다고 하시지는 않을 테고… 도대체 목적이 뭘까?”
“이… 이 찢어 죽일…!!”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이는 청유백의 입가에는 옅은 웃음이 드리워져 있었다.
뭐, 아무것도 없이 하는 거래에 응할 거라고는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저 신월이 누구인가?
‘그 야황의 후손이니 뭐.’
마교에 혈혈단신으로 쳐들어와 술 한잔 하고 가는, 천하제일의 지 꼴리는 대로 살던 인간.
그 인간의 후손이, 남이 뭔가를 제안한다고 멀쩡히 알아 쳐 들을 리가 없지 않던가.
이성적인 판단?
개나 주라지.
들을 생각도 없는 대상에게 협상이 무슨 소용이고, 대화가 무슨 소용일까.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밤에, 아무도 없이, 이런 곳으로 초대하는 놈이 이성적인 대화를 바랄 리는 만무하지 않던가.
뭐, 그래도 인심 써서 말 한 마디 정도는 해 봤다만…….
그러면 그렇지.
청유백은 코웃음 치며 말을 이었다.
“인질이라고 하긴 그러니까, 그래. 거래라고 하지. 난 당신 목적이 뭔지도 모르고, 왜 이 아이를 신경 쓰는지도 ‘전혀’ 모르겠지만! 무고한 목숨 하나 살리면 잠도 잘 오고 좋지 않던가.”
[진짜 모르더냐?]
‘모르겠냐?’
[으음… 설마 모르고서 인질극 벌이는 미친놈인가 싶었지. 공교롭게도 미친놈은 맞지 않더냐.]
‘…….’
당연히 알고 있다.
그녀가 정말로 신월에 ‘우연히’ 있었을 리는 없으니, 그때에도 모종의 목적이 있었을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녀가 ‘굳이’ 신원에서 여기까지 자신들을 쫓아온 이유.
그리고 사마신교를 적대하지 않음에도, ‘굳이’ 자신을 불러내어 대화하고자 한 이유.
그 외의 수많은 잡다한 이유는, 신월 그녀의 목적이 성시소라는 것을 명료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인질극?
뭘 그렇게 험한 말을.
점잖게 ‘수 싸움’ 정도로 불러도 되지 않겠는가.
애당초─
‘인질극은 아니지. 성시소가 동의했지 않나?’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끌고 나와서 목에 침 꽂는 게?]
‘이따가 먹으면 되지. 거짓말은 아니잖나. 그냥 중간에… 작은 체험 행사 하나 정도 있는 거라고.’
[…….]
천화의 따가운 눈총과 침묵을 무시하며, 청유백은 고개를 까딱였다.
어쨌든 간에, 신월이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다.
청유백의 웃음을 어찌 받아들였는지, 그녀는 깊게 심호흡했다.
그리고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청유백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깟 아이 목숨 하나…….”
“그래? 그깟?”
청유백이 웃으며 손을 들어 보이자, 녹지연의 손에 들린 백은침이 성시소의 뒷목 한 부근에 찔러 들어갔다.
“흐윽…….”
그리 깊지는 않았지만, 사람에게서 직접 들려오는 신음은 그럴싸한 위협을 조성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
“오기 부리지 마라, 애송이. 그딴 허세를 부리려면 처음부터 했어야지.”
신월의 어깨가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움츠러들었다.
‘놈은 아직 감정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다.’
이미 한 번 도발함으로써 안 사실이었다.
암살자로서의 냉정함도 완벽하지 않고, 그렇다 하여 비정함을 갖추지도 못했다.
그녀가 아직 경험을 쌓지 못한 원석임을 감안하면 봐줄 만한 정도겠으나─ 어쩌겠는가?
상대방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는 것은 분명 죽음의 한 이유가 된다.
“처음 계획은 뭐였지? 나를 제압하고 성시소를 데려가는 거였나? 뭐, 그럴싸해. 내가 없다면 어렵지 않게 성공했겠지.”
분명 그럴 것이다.
다른 일행들의 전투력을 어찌 파악했을지는 모르겠다만, 성시소를 데려가는 데에는 분명 큰 장애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위치 선정도 좋아. 내가 눈에 띄는 전투를 할 수 없는 시간, 전력을 낼 수 없는 장소로 끌어들인 것도 좋다.”
청유백은 전력을 낼 수 없지만, 살수에게는 가장 좋은 시간.
살수의 안방이나 다름없는 밤의 시간에 싸우는 것까지 말이다.
나쁘지 않은 계획이다.
상대방을 제압할 자신까지 있었으니, 분명 완벽하기 그지없는 계획이었다 말해도 좋으리라.
상대가 나빴을 뿐.
청유백은 어둠을 넘어 그녀를 꿰뚫어 보았다.
“다만, 네가 무슨 계획을 세웠는지 상대가 간파했을 경우도 생각했어야지. 네가 이기지 못할 경우도 생각했어야 했고. 이렇게 말이야.”
청유백은 백월검을 검집으로 집어넣고, 마기를 갈무리했다.
이미 형세는 기울었고, 청유백은 웃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기실, 반쯤은 도박이었지만 말이다.
‘이만큼 소중하게 생각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그러게나 말이다. 죄악감마저 드는구나.]
‘그냥 잠깐 멈추게 하는 정도로도 충분했는데 말이야.’
성시소가 그녀의 목적인 것은 알았다.
다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알 수 있었을 턱이 없다.
그러니, 반은 도박이었다.
설마 ‘어쩔 수 없지’ 하고 돌아서서는 성시소가 죽어도 방관하는 지경까지 갔다면, 그건 좀 곤란한 일이 되었으리라.
뭐, 결국에는 잘 작용했다마는.
신월은 그래도 아직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없는지, 최후의 발악으로 입을 열었다.
“…흥, 네놈이 정말로 그 아이를 죽일 수 있을까? 너희들이 십만대산에서부터 이곳까지, 정성 들여 보호하며 온 것을 안다.”
아, 이런.
단도를 잡은 그녀의 손이 떨리는 것까지 보여 온다.
그래, 허세를 부릴 일이 없었겠지.
웬만하면 일격에 죽이고, 굳이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었을 테고.
자신이 불리한 상황에 몰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만 하는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지금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하나는 아는데, 둘은 모르는군. 데려온 건 아는데… 왜 데려왔는지는 몰라. 설마 우리가 순수한 선의로 움직였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건…….”
“뭘 고민하나? 성씨세가의 덕을 좀 보기 위해서지. 오로목제에서 그 위세는 대단하니까 말이야. 그런데 와 보니 오로목제는 개판이고, 성씨세가는 사마신교에 넘어가 있군. 그러면… 뭐.”
청유백은 조소를 머금으며 성시소를 가리켰다.
손가락 끝 너머로, 공포에 젖어든 어린 소녀의 표정이 보였다.
“쟤가 우리한테 무슨 가치가 있는데?”
“…….”
신월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라고 표현하는 쪽이 올바를지도 모른다.
결국, 청유백을 향하고 있던 칼끝을 내리고 분한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청유백이 말을 이었다.
“들어봐. 우리라고 극단적으로 하고 싶지는 않다니까? 그냥… 평화롭게 대화를 좀 하자는 거지.”
“…원하는 게 뭐냐.”
“원하는 거? 좋은 질문이야. 그런데 그 전에 말이지…….”
─스릉.
백월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와 청유백의 주변을 돌았다.
그리고 어느덧 멈추더니, 신월이 아닌, 청유백의 뒤편 허공을 향해 칼끝을 겨누고 멈춰 섰다.
누군가 보면 이해할 수 없을 행동이었지만, 신월은 그것을 보고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파랗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 위로, 청유백의 말이 이어졌다.
“일단 내 뒤로 천천히 다가서고 있는 저 버러지부터 멈추는 게 어떻겠나? 내가 저놈을 죽여버리면 평화적인 대화가 안 되지 않나.”
* * *
‘……어떻게?!’
신월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당연히, 청유백의 말마따나 만약을 위한 담보 정도는 준비해 두었다.
잠깐 무기를 내려 방심을 이끌어 내면, 지켜보고 있었던 자신의 수하가 저놈의 목을 능히 꿰뚫을 수 있을 것이었다.
…헌데.
“대답은?”
청유백은 너무나도 담담하게,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을 파악하고는 검을 꺼내들었다.
저 검극이 향하는 방향은, 분명하게 매복한 수하의 심장.
허세는 결코 아니었다.
“…알았다.”
신월은 한 손을 들어 보였고, 그와 동시에 청유백의 검도 다시금 검집으로 돌아갔다.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이, 마치 허공에 뜬 검을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것마저 파악하고 있었다고?
‘어떻게 되어 처먹은 괴물이야.’
이제는 정말로 외통수다.
대화? 빌어먹을 대화라고?
신월은 눈을 부라렸다.
“목 끝에 칼날을 들이밀고 하는 대화? 좋지. 어디 짖어 봐라. 반드시 되돌려 줄 테니.”
“허 참… 들어봐. 난 그냥 친구가 필요한 거야. 산상만월의 전체가 있으면 좋겠지만, 넌 아직 당주가 아닐 테지. 그렇지?”
“…그렇다.”
그의 말이 맞다.
어떻게 저리 만월의 비밀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는지 의문일 지경이었다만, 틀린 것 하나 없었다.
지금의 당주는 자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신월(新月:초승달)이라 불리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묻는 것은 의미가 없으리라.
대답해 주지도 않을 테고, 그는 의미도 없다며 말을 이었다.
“상관없다. 어차피 별로 의미 없을 테니, 돕는 건 너 하나면 충분해.”
“돕는다고? 내가 왜…….”
“친구잖냐? 그렇지?”
꾸욱.
성시소의 목에 대어진 은침이 더 목을 파고든다.
‘젠장.’
관자놀이에 겨누고 있던 그때보다야 상황이야 낫지만, 저것도 다르지 않다.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협박 아니던가.
“그래. 친구…지.”
“그러니까… 네가 아끼는 이 아이를 보호하고, 당장 목이 꺾이지 않게 해줄 테니, 넌 우리를 돕는 거지. 설마, 친구인데 그 정도 도움은 줄 수 있잖나?”
“…….”
악마 같은 새끼.
까득.
어금니가 거칠게 비틀리는 소리와 사나운 숨소리가 엇갈렸다.
신월은 당장에라도 눈앞에 놓인 개자식의 목을 뜯어버리고 싶었지만, 청유백은 전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손해만 있는 거래는 아닐 거야.”
“손해가 아니라고? 네놈들은 인질극을 상호 존중하에 하는 모양이지? 퍽 신선하군.”
“사교 놈들이 이 오로목제를 언제까지고 먹게 놔둘 건 아니잖나? 그리고… 나는 생각보다 꽤 존중하고 있다만.”
“하! 개나 주라지.”
“또 진실이 닿지를 않는군. 안타까운지고…….”
‘빌어먹을 자식.’
청유백은 또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진실? 저 새끼가 말하는 것 중 대체 몇 할이나 진실일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그래놓고 저리 뻔뻔한 위선이라니.
…하지만, 지금은 묵묵히 들어야만 했다.
청유백은 품에서 무언가를 찾는 듯 뒤적거리더니, 결국 깊숙한 곳에서 접혀진 종잇조각 하나를 꺼내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펼쳐 확인하더니, 곧장 신월에게 던졌다.
분명 하늘하늘한 종잇조각일 그것은, 빠르게 허공을 날아 신월의 지척에 이르렀다.
신월은 그것을 잡아채고는, 확인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물었다.
“…뭐냐?”
“친구한테 보이는 성의.”
일견 보기에는 특별할 것 없는 종이였다.
접힌 종이 안쪽에 무언가 보이기는 했으나, 언뜻 보고 추측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그것을 펼쳐 확인함과 동시에 청유백의 말이 이어졌다.
“선급 백. 끝나고 나서 이백 더. 당연히 금이다. 금성전장에서 발행한 전표이니, 믿어도 좋아.”
“시소는…….”
“마음대로 해. 풀어준다고 약속하지. 우리와 있는 게 안전하겠다만.”
신월은 고개를 숙였다.
한 손에 든 전표를 지그시 바라보며, 결국 그것을 구겨 버리고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날 돈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어.”
“…….”
“…….”
잠깐의 침묵.
그리고 잠시 후, 신월이 대답했다.
“아주 정확해.”
필요 없다고 꾸짖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