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신월(新月) (3)
아! 생각해 보니 거짓말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 아마 진실이 아니어서 마음이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청유백은 문득 떠오른 생각을 입에 담았다.
“아니, 정정하지. 할아버지일 수도 있다.”
“네놈이 나를 능멸하는구나…!”
흠, 그 인간 뒤진 나이를 생각하면 딸은 아닐 텐데.
신월은 기껏해야 이십대로 보였으니, 아빠일 수는 없다.
아니, 그건 그거고.
“진짜라니까?”
“그럼 나는 네 애미다.”
“안타까운 현실이구만….”
역시 성현의 말씀은 다 사기였던 것으로 하자.
진실은 가끔씩 사람의 마음에 닿지 않는 날도 있는 법이다.
청유백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오해가 있다면 대화로 해결…….”
─슈욱!
말을 끝맺기도 전에 비도가 날아들었다.
[뭐, 대화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아 보이는구나.]
젠장할.
신속하게 날아든 비도를 검집으로 비스듬히 쳐내며, 청유백은 그녀의 흔적을 쫓았다.
비도를 쳐내고, 다시금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에는 이미 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든 이후였다.
“꼭 피를 봐야 하겠나?”
“죽기 직전이 되어서도 그 잘난 혀를 놀릴 수 있나 어디 한번 보겠다.”
“할아버지를 할아버지라 부르지 못 하는군…….”
스르릉.
예리한 소리와 함께 백월검의 검신이 달빛 아래 드러났다.
검신은 분명 순백색을 띄었으나, 그것이 머금은 선한 기운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 완성된 그것이 머금은 기운은 칠흑과도 같은 검정.
아니, 그 이상의, 세상의 수많은 악의가 뒤섞인 기괴한 암흑이었다.
신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음에도, 일순간 그녀가 거친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신월. 알아보겠나? 이 아름다운 검신을 좀 보게.”
지금껏 다른 이들은 알아채지 못했건만, 역시 야황의 후계자라는 것일까.
자신의 기척을 숨기는 것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의 기운에도 민감하다는 반증일 테다.
고작 한 번 보았을 뿐인데, 이 검에 담긴 기운을 알아챈 듯 보였다.
스륵.
어둠 속에서 무언가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날붙이의 소리다.
“아니, 끔찍하군. 네놈을 가만히 두면 안 될 이유가 하나 늘어났다.”
“그것 참 애석하군.”
─파앗!
청유백이 먼저 땅을 박차고 날아들었다.
‘방심하고 모습을 드러낸 지금이 기회!’
멍청하게 공격을 기다려줄 생각은 없었다.
저쪽은 물러설 의지가 없어 보이나, 만들어 주면 그만이다.
박찬 땅이 작게 파이고, 찰나를 가르며 검이 허공을 날았다.
“……!”
그러나, 청유백의 검은 허무하게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그녀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청유백의 뒷목으로 한 쌍의 날카로운 단도가 찔러 들어왔다.
청유백의 반응은 반쯤 본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휘두른 검은 아직 자리로 돌아오지 못했고, 팔로 막아내기에는 각도가 맞지 않다.
그렇기에, 생각보다도 빠르게 홍련검이 청유백의 의지에 응답했다.
─채앵!
검집에서 홍련검이 반쯤 빠져나와 공격을 막아내고, 홍련검은 그대로 밀어 올려 그녀를 베어내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
서걱.
바람만을 가르며, 무의미한 공격을 끝마칠 뿐이었다.
“…….”
공격과 이탈.
그것이 완벽한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차라리, 자신처럼 저 검 두개만 날려 공격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아니다.
분명 옅기는 하지만, 공격의 순간 그녀의 살의가 직접 내비쳐지고 있었다.
청유백은 홍련검을 다시 검집으로 돌려보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아직 야황만큼은 아니군. 많이 모자라.”
죽이는 순간까지도 고요하게.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마치 아이가 개미를 밟듯, 아무런 감정도 없이 행한다.
야황이란 그런 인간이었다.
목이 떨어져 자신의 몸뚱어리를 바라보게 될 때까지도,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경지였더랬다.
뭐, 누구라도 그와 비교해서 자격지심을 느낄 필요는 없을 테지만─
글쎄, 그녀는 조금 다른 듯 보였다.
“네가 입에 담을 분이 아니다!”
“그래, 그런 점을 포함해서.”
“……!”
모습도 보이지 않고, 기척도 느껴지지 않지만.
‘소리는 다르지.’
파앗!
청유백의 손을 떠난 홍련검이 암흑을 갈랐다.
그저 직선이 아니라, 손가락 끝의 연장선을 붓으로 긋듯이.
달빛을 머금은 한 줄기 은빛 선이 어둠을 물들였으나, 이번에도 결과는 같았다.
‘……빠르군.’
모습도, 기척도 보이지 않는다.
공격할 때 엇비치는 살의가 보이는 전부였다.
허나, 이대로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찾을 수 없겠나?’
[어렵다. 본녀가 아는 것은 결국 네가 아는 것의 연장선상에 그칠 뿐이야. 네가 작은 기척조차 찾지 못한다면, 본녀도 느낄 수 없다.]
‘도움이 안 되네.’
[네놈이 무능한 탓이지, 누굴 탓하느냐!]
청유백은 천화의 말을 무시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조금 더 기를 끌어올리면 반응이 한결 편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지금도 가까스로, 끌어올린 마기의 양을 극히 제한하며 싸우는 중이었다.
이유? 단순하지 않은가.
‘사마신교의 끄나풀에게 들키면 본말전도다.’
지금 보고 있는 이가 없더라도, 어디에 사마신교의 고수가 있을지 모르는 것이 지금의 상황.
오로목제가 넓다고는 하나, 고수의 싸움이 벌어진다면 청유백은 이 도시 어디에서라도 그것을 감지할 자신이 있었다.
당연히, 사마신교의 고수도 같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은 전력을 다하지 못한다. 그러나…….
‘저쪽은 전력을 다해도 들키지 않겠지. 태생이 그런 무공이니.’
야황.
한 시대를 넘어 고금의 밤을 발아래 둔 절대자의 무공이다.
지금의 청유백도 눈앞에서조차 기척을 파악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뭐, 저쪽도 당장 죽이려 달려드는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만─
어찌 되었든, 이쪽은 형편이 다르다는 말씀이다.
‘진심으로 기를 발현하면 분명 누군가는 눈치채고 만다.’
검기?
당연히 못 쓴다.
마기를 흩뿌려 위치를 찾는 방법을 썼다가는, 백중백 다른 사람에게 들킨다.
그리고 성격 나쁘게도, 저 신월도 그 사실을 파악하고 있는 듯 보였다.
‘시간을 끄는가.’
완벽한 순간이 아니면 공격해오지 않는다.
도발로 흔들어진 어설픈 마음가짐도, 방금의 한 번으로 다잡았으리라.
청유백은 검을 고쳐 쥐었다.
검기도, 마기도 충분히 사용할 수 없는 지금.
최선의 대책은 단 하나뿐이다.
‘반격.’
신월은 아직 살의를 감출 수 없다.
그것에 기대는 수밖에는 없다.
도망칠 리는 없으니, 그녀는 당연히 기회를 엿보고 있으리라.
‘……빈틈을 보일까.’
그런 단순한 수에 속을까.
…아니, 아니다.
야황의 후계를 얕보는 일이다.
잠깐,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하는 시점에서, 이미 집중이 흐트러진 반증이 아닌가?
“──!!”
청유백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음과 동시에, 청유백의 우측으로 단도가 날아들었다.
작은 생각의 빈틈을 찔러 들어온 공격, 하지만─ 막아낼 수 있다.
그리 큰 무리가 아니다.
청유백은 검을 들어 단도를 튕겨내었다.
이번에도 공격으로 이어가려 했으나, 이번에는 감촉이 달랐다.
그녀가 직접 휘두른 것이 아니었다.
“…젠장.”
그 단도가, 신월이 어둠 속에서 투척한 단도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과.
두 번째 단도가 날아든 순간.
그것은 거의 동시에 교차했다.
─카캉!
허나 이번에도, 홍련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와 단도를 튕겨냈다.
혹여 자신과 같은 방법으로 칼을 조종하여 단도를 꽂아버리진 않을까 주의했지만, 그것은 아닌 듯했다.
그러나 찰나.
한 순간을 수백 개의 조각으로 쪼개어, 등 뒤에서 살기가 한 점에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쉽게 알 수 있었다.
이건, 정말로 죽이려는 공격이다.
허나 그랬기에.
그 위치만큼은 더욱 정확히 알 수 있다.
아주, 완벽하게.
─카가가강!
섬전같이 뽑아져 나온 비천검이 허공에서 그녀의 단도를 막아내었다.
강렬한 불꽃의 노래가 순간 허공을 수놓았으나, 공중에 단단히 붙들려진 비천검을 뚫어내지는 못했다.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신월은 비천검을 튕기듯 밀어내어 물러났고, 당혹으로 물들여진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막을 수 있을 리가…?!”
“사람 손은 두 개지. 그 친구도 자주 쓰던 기술이었다.”
세 방향에서의 동시 공격.
둘까지는 팔 하나를 내어 주면 막을 수 있겠지만, 보통 셋은 막지 못한다.
세 번째 찔러오는 공격이 굳이 등 뒤가 아니라 정면이었다고 해도, 보통의 무인이라면 팔과 목숨 중 하나는 내놓아야 할 공격이다.
그랬기에, 과거의 야황 또한 즐겨 사용하던 수법이었다.
“처음부터 평화롭게 그 인간과 농지거리나 나누던 건 아니었던지라.”
“계속 헛소리를…!”
신월은 다시금 어둠 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몇 번을 봐도 적응할 수가 없는 움직임이다.
“…….”
청유백은 살짝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기고만장하게 대꾸했다만, 썩 상황은 좋지 않다.
저쪽은 이렇다 할 소모가 없지만, 자신은 계속해서 소모전을 강요받고 있다.
시간은 짧지만, 순간순간의 반응을 요구하는 것은 일반적인 전투보다 더 큰 피로를 요구했다.
검 세 개를 동시에 뽑아들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효율이 나쁘니까.
‘이것들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일각.’
선공권은 저쪽에 있고, 시간을 끌 선택권도 저쪽에 있다.
시간을 끌면 좋을 것 하나 없다.
언제까지고 이곳에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것도 장담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청유백은 능청스레 웃었다.
“이봐, 지금에 집중하지. 내가 산상만월의 비밀을 어찌 알았는지가 중요한가? 너는 내 정체도 알고, 우리는 공동의 적도 있지.”
“…….”
“적의 적은 친구. 단순한 이치 아닌가.”
그래. 몹시도 단순하다.
마교든 산상만월이든 간에, 백 년 전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세력으로 전락했다.
당장 이 오로목제에 닥친 위기의 원인이 따로 있으니,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일시적인 동맹은 나쁘지 않은 제안일 테다.
피차, 고독한 싸움은 썩 즐거운 것이 아닐 테니까.
하지만 신월은 시큰둥했다.
“그들이 우리의 적은 아니다.”
“그래? 그건 의외의 대답인데.”
“그들이 기이한 행보를 보이기에 쫓았을 뿐이다. 성씨세가의 문제를 해결하면, 그것으로 족해.”
“그게 곧 적이라는 소리 아닌가?”
“내 목표는 하나다. 그것만 이루면, 나머지는 상관없어.”
“흠, 그래? 하나? 하나라….”
청유백은 의뭉스레 턱을 쓰다듬었다.
사마신교가 적이 아니라고?
“…그건 몰랐군.”
그래, 인정한다.
사마신교 전체를 적으로 보는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 모양이다.
헛다리 하나 짚은 셈이다.
그런데.
저 하나라는 목표.
즉, 무엇 때문에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인지는 알고 있었다.
예상한 바였다.
청유백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계속 싸울 셈인가?”
“그게 제일 빠를 것 같군. 이제 대답은 필요 없다. 넌 여기서 죽는다.”
“진정해 봐. 말 아직 안 끝났으니.”
“……?”
“사람 말은 끝까지 들으라고 있는 법 아닌가. 다 들으면 생각이 바뀔지도 몰라.”
“…헛소리를.”
“들어 보라니까.”
─딱!
튕겨진 청유백의 손가락이 경쾌한 음을 울렸다.
신경을 집중시키는 그 소리에 신월은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
그러나,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언가 함정이라도 준비했는가 싶어 경계했지만, 불어오는 것은 별 것 없는 바람뿐이었다.
“시답잖은 짓을.”
“인내심이 없군.”
청유백의 이죽거림과 동시에 신월의 코가 찡긋거렸다.
그래, 그냥 바람은 아니다.
하지만 독도, 무언가의 수작이 담겨진 바람도 아니다…….
그리고 잠시가 지나서야, 신월은 눈을 부릅뜨며 청유백을 바라보았다.
“잠깐, 이건……!”
“자, 어떻지?”
“이… 비열한 놈이!”
그저 바람에 담겨 있는 것은, 흐릿하게 느껴지는 두 사람의 체취.
그러나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람의 체취.
“한 번 들어보라지 않았나.”
청유백은 옅게 웃으며 자신의 뒤를 바라보게끔 몸을 비켜 주었다.
“어, 언니…….”
“미안해요.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 건 아니랍니다.”
멀찍이서, 그녀의 기감도 미치지 않는 곳에서 지켜보던 두 사람이 서서히 걸어왔다.
때맞게 불어오는 바람에 그 분위기를 실은 채로 말이다.
녹지연은 성시소의 관자놀이에 기다란 백은침을 가져다 댄 채, 쓴웃음을 지으며 신월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일단… 그 칼은 내려놓으시는 게 어떨까요?”
“네놈……!”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