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131화 (131/200)

제131화. 신월(新月) (1)

─어딜 다녀오셨습니까, 소단주.

─영감이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이 집안에서 제가 몰라도 되는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단주, 일탈도 좋으나 부디 정도라는 것을…….

─세상이 바뀌고 있다고! 영감 따위가 깝쳐 봤자 뭐가 바뀔 것 같나?!

─소단주…….

─꺼져! 바쁘니까. 이젠 형님도 영감 편을 들지 않는다고. 왜? 평소처럼 조카 년 좀 찾자고 가서 매달리기나 하라고!

“…….”

후우.

문노는 지끈거리는 등허리를 툭툭 치며, 가문의 장원을 나와 밤거리를 걸었다.

성여답이 돌아왔을 때 어디를 갔었냐고 추궁하고, 무인 식객들에게는 지원을 요청했으나…….

‘이미 전부 한통속이었던가.’

성여답은 거칠게 문노를 밀쳐내며 또다시 장원 밖의 어디론가 향했고, 무인들은 낄낄대며 그를 따를 뿐이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묵직한 돈주머니를 보니, 분명 어딘가 가서 수탈이라도 해 온 모양이지 싶었다.

‘전부, 그 교아라는 자가 가문에 찾아왔을 때부터였다.’

그때부터 가주께서 총기를 잃으셨고, 저 망나니 성여답은 고삐가 풀려 날뛰었다.

분명 그들이 문제이리라.

교아 그자와 같이 왔던 녹색 사내는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사라진 자에게까지 신경을 쏟을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제 발로 없어져 주었다면 좋은 일이니,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

지금은, 아가씨를 찾아야만 했다.

‘가주께서 이상해지셨다고 한들, 정작 딸을 눈앞에서 보시면 다시금 뭔가 돌이키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 설령 아무 변화가 없다고 한들─

‘나는 충의를 다해야만 한다.’

죽립을 길게 눌러쓴 문노가 향한 곳은 늘어진 골목의 한 객잔이었다.

낡지도, 그렇다고 화려하지도 않은, 그저 여느 곳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객잔.

마침 저녁때인지라, 오가는 상인들과 손님, 그리고 점소이들로 일 층의 식당은 붐비고 있었다.

다행히도 볼품없는 노인에게 눈길을 주는 이는 없었다.

손님을 맞기 위한 점소이가 그를 발견한 것이 전부였지만, 그는 갑작스레 인상을 찌푸리더니 어딘가로 헐레벌떡 달려갔다.

그리고, 직후.

그가 달려간 방향에서 후덕한 사내가 버선발로 뛰쳐나오더니,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문노를 찾아 다가왔다.

“세상에, 문 총관님 아니십…….”

“쉿.”

소란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문노는 육십 평생을 오로목제에 헌신했고, 대부분의 상공인들은 문노의 얼굴을 안다.

이 오로목제에서, 그를 환영치 않는 곳은 얼마 존재하지 않겠지만.

“조용히.”

오늘은, 성대한 환대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문노는 죽립을 깊게 누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 층의 방에 술상을 주게. 상은 계절에 잘 맞는 것을, 반주는 월영취를… 그리고, 월병도 잊지 말고.”

“예? 아니, 하지만 그건…….”

후덕한 사내는 난색을 표했다.

사내는 어느 정도 위치가 있는 인물이었기에, 그 주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본래는 더욱 많은 과정이 있지만, 이 노인이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는 사실도 말이다.

“객주를 뵙고자 하네.”

“이, 일단은… 말씀은 올려 두겠습니다.”

“부탁하지.”

방을 부탁한 것은 핑계일 뿐이다.

이곳은 기루도 아니었거니와, 문노는 굳이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낼 생각도 없었다.

그저 필요했기에 암호를 대었을 뿐이다.

문노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 사람을 기다렸다.

‘산상만월… 오랜만이로군.’

그들과의 마지막 교류가 있던 것이 수십 년도 전이었다.

성씨세가의 전 가주는 그들이 이곳에 터를 내릴 수 있게 도와주었고, 야황이라 불리던 선대의 고수는 성씨세가가 오롯한 오로목제의 일인자로 거듭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 뒤로도 알음알음 안면을 터 오기는 했으나, ‘거래’라고 할 만한 것을 트는 것은 그야말로 수십 년 만인 일이었다.

볼 이유도, 필요도, 명분도 없었으니까.

허나 지금은, 옛날의 인연을 다시금 붙잡을 필요가 있었다.

곧, 아까의 사내가 다시금 다가와 속삭였다.

“객주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 * *

“오랜만입니다. 문 총관님.”

“오랜만이오. 십 년… 아니, 그보다 더 되었나. 이제는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군.”

“옛날처럼 간단히 월영(月影)이라 부르셔도 좋습니다. 어차피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다 그리 불리니까요.”

문노는 그의 앞에 자연스럽게 다가와 앉았다.

피차 안면이 있는 사이였고, 용건이 있는 것도 알 터.

굳이 불필요한 말로 간을 볼 필요조차 없을 테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객주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총관님. 외람된 말이지만, 알아주셨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왜 그러오? 작은 부탁일 뿐이오.”

“총관님 개인이 아닌, 가문과 관련된 도움을 바라시는 것이라면… 저희는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그게 무슨…….”

문노는 인상을 찌푸렸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불가능하다는 말부터 늘어놓다니.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기실 생각해보면 무리도 아니었다.

그들은 산상만월.

무엇을 부탁하러 왔는지, 지금 자신이, 성시소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도 전부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허나, 그것을 전부 알고 있다는 말인즉…….

알고도, 방관을 택하겠다는 말과도 같지 않던가.

“……모든 것을 알고도 도와줄 수 없다는 말이오? 설마 모른다는 말은 않겠지. 이 오로목제의 현재가, 어딘가 뒤틀려 있다는 것을 당신들이 모를 리가 없지 않소.”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면!”

쾅.

문노의 주먹이 작게 탁상을 내리쳤다.

옅지만, 분명한 노기가 느껴졌다.

객주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알고 있기에, 그래서 도울 수 없는 것입니다.”

“알고 있기에 도울 수 없다? 그게 대관절 무슨 소리요. 그대들이 어찌 그럴 수가 있소!”

“그 뒤에 누가 있는지, 어떤 세력이 움직이고 있는지. 우리가 총관님을 도우면 어찌 되는지, 전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습니다.”

“…대체, 어떤 무리가 있길래 두려워하는 것이오. 내가 젊을 적의 그대들은 마교가 밀려온대도 두려워하지 않던 이들이었거늘.”

“…송구합니다.”

객주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결국 도울 수 없다는 표명이었다.

허나, 문노 또한 이대로 물러나려 하지는 않았다.

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차마, 이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곳에서 일어나서, 다시금 손을 뻗을 만한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수십 년의 인생, 쌓는다고 쌓아 온 공덕이었으나.

지금에 이르러, 도움을 청할 사람은 터럭만큼도 없었다.

“도움을 청할 곳이 이곳밖에 없소. 이 늙은이의 육십 평생, 이토록이나 무력함을 느꼈던 적은 처음이오.”

“…….”

“개방도, 하오문도 전부 그들이 장악한 지 오래요. 이젠 놈들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개일 뿐이지. 허나… 허나 그대들은 다르지 않소.”

산상만월.

옛날의 그 이름이 지니던 위명과 다르게 지금은 상당히 그 이름의 빛이 바랜 상태였다.

야황이 별세한 이후, 기존에 사용하던 외부의 접수 방법을 전부 철폐하고, 내부의 인원들끼리만 소통하는 방법만을 전하며 명맥을 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름은 수십 년간 잊히고 풍화되었을 것이다.

젊은이들은 산상만월이라는 이름조차 모르는 이들도 있을 테다.

허나, 그렇기에.

지금의 가주조차도, 그 성여문조차도 산상만월에 접촉하는 방법은 모른다.

아니, 애초에 이 도시에 존재하는지의 여부조차 알 수 없었으리라.

즉, 오로목제가 지금에 이른 상황에서도 그들은 오롯한 산상만월로서 서 있었다.

누군가의 개도, 수족도 아닌.

오롯한 그들로서.

“부디, 어떻게 안 되겠소?”

“후우…….”

“…이리 부탁하오.”

고개 숙인 얼굴에서 방울져 떨어지는 굵은 눈물방울에, 난처한 듯 객주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인지, 고뇌인지, 그도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뭔지 모를 감정으로 인상을 찌푸리고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저희도 곤란한 상황입니다. 정말 도와 드리고 싶지만, 신월께서 이곳에 와 계신 탓에─”

“신월… 신월께서 와 계시단 말이오. …신월께서.”

문노는 고개를 조아렸다.

목청에서는 찢어질 듯한 통곡이 흐르고, 머리가 조아려질 때마다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너무도 무력했다.

할 수 있는 것이 무엇도 없어서.

그저, 고개를 조아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그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것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옛정을 생각해 주십시오. 이 늙은이의 볼품없는 명을 거둬 가셔도 좋습니다. 그러니 부디, 부디…….”

“…….”

“부디, 아가씨를 살려 주십시오.”

침묵이 흘렀다.

눈물이 흐르고, 그것이 바닥을 적시는 방울진 소리만이 정적을 가를 뿐이었다.

‘총관님, 세상에 부탁으로 되는 것이 있고, 안 되는 것이 있잖습니까…….’

아무리 감성을 팔아도 안 되는 것은 안 된단 말입니다.

객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할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러셔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 잠깐만요, 예?”

“……?”

헌데 무슨 일인지, 객주는 말을 하다가도 알 수 없는 혼잣말을 반복하며 역정을 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무언가를 혼자 속삭이듯 입술을 달싹이는 모습이었다.

‘아니, 잠깐… 신월이시여. 안 됩니다. 월주께서 분명히… 아니, 하지만! 아뇨! 반항이라니요, 그저…!’

문노는 그것을 들을 수 없었다.

그저 복잡한 표정이 여러 번 교차하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객주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객주는 문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십시오.”

“허, 허면…….”

끄덕.

객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권은 자신에게 없지만, 있는 사람이 결정을 내린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객주는 말을 이었다.

“성 소저의 위치를 아신답니다. 지금도 살아 있고요. 하지만….”

“크흡, 하지만?”

“데려올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십니다.”

“그것이 무슨 소리요? 신월께서 할 수 없는 일이라니?”

신월이 누구인가.

산상만월의 후계자, 이 천하에서 둘째가는 암살자를 이르는 말이다.

헌데… 위치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위치를 아는데 할 수 없는 것은 대체 뭐란 말인가.

문노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양 다그쳤다.

하지만, 뭐.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객주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 * *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라.”

“저, 그것이.”

청유백의 곁눈질에, 조심스레 방에 들어온 차 호위가 입을 열었다.

첫 번째 회의 이후에 모두는 각자의 방을 배정받았고, ─성시소만이 안전 문제로 적영과 같은 방을 쓰기로 했다─ 여독을 풀기 위해 우선 첫날은 쉬기로 결정했다.

바깥에 사마신교의 무사가 얼마나 깔렸는지 모를 상황에서 바깥에 나도는 것도 썩 현명한 행동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지금은 이미 어스름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차 호위는 늦은 밤, 홀로 청유백을 찾아와 질문을 꺼내었다.

“…저기, 이제 와서 묻는 것도 죄송한 일입니다만.”

“죄송하면 묻지 마라.”

“예…….”

청유백의 대꾸에 차 호위는 곧바로 입을 닥쳤다.

죄송할 일이면 안 하면 될 일이고, 미안할 짓이면 안 하면 그만이다.

뭐, 무슨 질문을 할지도 뻔하고 말이다.

하지만 알아 무엇 하겠는가.

마교가 되었든, 사교가 되었든.

무엇을 알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청유백은 대꾸했다.

“모르는 게 낫다. 너에게든, 그 아이에게든.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렇습니까…….”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입에 담지 마라. 우리의 뜻이 총체의 뜻은 아니니까. 타의로 인한 침묵이 즐거운 일은 아닐 터.”

만약 알게 된다면, 입 잘못 놀리면 그대로 끽. 알지?

청유백의 간단한 손짓에 차 호위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차 호위는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무언가 해 주실 말은….”

“…….”

“…무슨 일 있으십니까?”

청유백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하늘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듯 보였다.

‘뭐가 있나?’

차 호위가 그리 생각하며 바깥을 바라보아도,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청유백은 다시 차 호위를 돌아보며 대꾸했다.

“아니, 아무것도. 이만 가 보게.”

“잠시만요, 하나만 더….”

“다음에 하지. 지금은 아니야.”

청유백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충 손을 휘저었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차 호위는 결국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고 문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문득.

천화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쫓아내는 것이 나았겠느냐?]

‘당연하지.’

[차라리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낫지 않았겠느냐.]

‘방해다. 총력전이라면 모를까, 아직 존재가 들켜서는 안 돼.’

청유백은 단순히 대꾸했다.

필요한 것은 은밀이다.

자신은 분명히 그것을 바랐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여럿보다는 혼자 움직이는 것이 나았다.

차 호위가 결국 방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고, 그가 고개를 꾸벅임과 함께 조용히 문이 닫혔다.

─드르륵. 탁.

“…….”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들려오는 것은 바람 소리.

열려 있는 창밖의 구름이, 달빛과 함께 흘러가는 소리…….

─피슉!

그리고, 달빛을 가르고 암기가 날아드는 소리.

─채앵!

청유백은 곧장, 검들을 꼬나쥐고 암기가 날아온 바깥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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