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원수는 원수로 갚는다 (4)
“예? 예.”
차 호위는 순간 얼타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었다.
저 뚱뚱한 돼지 공자를 제외하면, 이들 중 가장 약한 이가 백소하인 것처럼 보였으니까.
아니 뭐 그야… 저 적영이라는 아가씨한테 허구한 날 맞고 다니지 않는가.
‘게다가 아무 무기도 들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뭘 하려는 거지?
그런 생각이 스쳐갈 즈음, 백소하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그건…….”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자그마한 막대기와, 여러 가지 모양의 꺽쇠.
딱, 자물쇠의 구멍에 들어갈 법한 크기의 물건이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덜그럭.
잠깐 그것으로 자물쇠를 만지작거리던 백소하의 발치로 풀어진 자물쇠가 떨어져 내렸다.
“흔적은 적을수록 좋을 테지요.”
“대, 대단하시군요.”
믿기 힘든 기술이었다만, 무림인이라는 족속에게 비밀을 묻는 것은 실례일 테다.
차 호위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일행이 전부 철창을 넘어오고, 백소하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다시금 사슬과 자물쇠를 되돌려 놓았다.
얼핏 보기에는, 이전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모양새였다.
적영은 휘파람을 불며 백소하를 돌아보았다.
“이런 건 또 언제 배웠대?”
“백가의 일이 항상 책상 위에만 있는 것은 아닌지라.”
차 호위는 저건 또 무슨 소리일까 싶어 귀를 기울였지만, 그들은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뭐, 상관없는 일이다.
그저, 아가씨의 안전만 보장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차 호위는 그리 생각했다.
* * *
하수도는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성벽의 끝, 저만치 멀리 보이는 대로의 정 반대편이었다.
일행은 성벽에 붙어 가까운 대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곧, 자연스럽게 골목으로 걸음을 옮겨 길을 다니는 보행자들의 무리에 섞여들었다.
“지켜보는 시선은요?”
“없군. 최소한 지금은 말이야.”
청유백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성벽 위에서 경비를 서는 병사들도 이변을 눈치채지는 못한 듯 보였다.
잠들어 쓰러진 병사들이 깨어난 뒤에 어찌 반응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자물쇠가 손상되지 않았으니 의심을 조금은 늦출 수 있으리라.
그러다 문득, 황돈이 입을 열었다.
“헌데… 통행하는 사람이 너무 적소.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군.”
“이상할 정도인가?”
청유백의 질문에 황돈은 고개를 주억였다.
“이곳은 중앙 대로에서도 멀지 않은 길이오. 오가는 사람이야 없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근처에서 인기척은 느껴져야 하는데…….”
발소리도 별로 들리지 않잖소.
황돈은 그리 말을 이었다.
주변에 사람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었다.
있기는 했지만, 이만한 도시에서 인기척이 드물다는 것 자체가 기이한 일이었다.
심지어, 아직 낮이었으니까.
“이게 대체 무슨… 아.”
그렇게 길을 걷다가, 일행은 부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대로에서, 통행에 방해가 될 정도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에 관심을 가져 달려드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도리어, 무언가를 기피하여 둥글게 피해가는 듯한 형태였다.
“소란이 있는 모양이군. 싸움이라도 난 모양이야. 무시하고 가지.”
이만큼 사람이 모인 소란이라면 퍽 흥미도 있었다만….
거기에 신경을 쓸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오로목제가 어떤 상태인지를 모르는 이상, 이곳의 지부에 접선하기 전까지는 잠정적 적지.’
그러니, 지금은 목적지를 향해 일적선으로 가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황돈은 곤란하다는 양 머리를 긁적였다.
“무시하고 못 가오.”
“…왜?”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일까 싶다.
적영은 그 빌어 처먹을 적가의 정의감─물론 이 동네는 마교 영역이 아닌지라 살인 사건이 나도 알 바 아니라고 하겠지만─때문에 이런저런 일에 끼어들기를 좋아한다지만, 이놈은 또 왜 뭔가에 끼어들고 싶어 한단 말인가.
청유백이 그래도 일단 짖어 보라는 양 묻자, 황돈은 담백하게 대답했다.
“우리 목적지가 저곳이라오.”
“…….”
골이 아파온다.
그래, 그건 어쩔 수 없지…….
하필 이 넓디넓은, 십수만 명의 사람이 살 오로목제에서 하필 저기라면야…….
결코 우연은 아닐 테니 말이다.
‘빌어먹을.’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예상대로 오로목제는 정상이 아니고, 그 적대의 칼날은 생각보다도 더 깊숙이 목덜미를 향해 온 듯 보였다.
“잠시 지나가겠소.”
일행들은 인파를 헤쳐 중간 즈음에서 사태를 관망했다.
곧 인파 너머의 상황이 보여 왔다.
두 무리가 대치 중이었다.
객잔의 입구를 틀어막아 지키고 있는 무사들의 무리와, 그 앞에서 협박하듯이 서 있는 무사들의 무리.
“이게 대체 무슨 망발이란 말이오! 동우회는 상도의도 없소?!”
“빌려준 돈 받으러 왔을 뿐인데 상도의라니! 서검련은 엉뚱한 사람을 범죄자로 모는군!”
“어찌 백 냥을 빌린 것이 이백오십 냥이 된단 말이오! 억지도 그런 억지가─”
“아, 불만이 있으면 관에 가서 따지든가!”
한데 기이한 것은, 그들 중 한쪽 편에 선 이들만이 병장기를 뽑아 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기를 뽑고 있는 것은 지키는 쪽이 아닌, 쳐들어온 쪽.
입구를 막고 있는 무인들은 각자의 검과 도를 허리에 차고는 있었지만, 뽑지는 않고 대치하고 있었다.
적영이 작게 속삭이듯 물었다.
“왜 무기를 뽑지 않지?”
“…못 뽑는 거요.”
“왜?”
“이곳은 대로이지 않소. 민간의 부상자가 한 명이라도 나면, 그때에는 단순한 알력 싸움이 아니게 된다오.”
황돈의 말에 청유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결국, 세상 어떤 일이든 대부분의 마찰은 명분이 그 결과를 좌우한다.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다만.’
분명한 것은, 저 쳐들어온 쪽은 ‘돈을 받아낸다’라는 명분이 있다.
물론, 막아내는 쪽도 나름의 변명거리 정도는 있는 모양이나─
[쯧쯧, 민중에게 그게 무어 중요하겠느냐.]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겠지.’
누가 돈을 빌렸고, 얼마나 갚아야 하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그저 눈앞에서 싸움판이 벌어졌고, 통행에 방해되며, 그럭저럭 오늘밤의 술안주로 쓸 수 있을 법한 상황이 눈앞에 있다는 것만 중요할 뿐이었다.
즉, 지금은 그저 방관자일 뿐이다.
허나, 막아내는 측에서 작은 대응이라도 하여 눈먼 칼에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쩔까.
‘누가’ 돈을 받으러 왔는지 알아내서 그들을 탓할까?
‘웃기는 소리.’
굳이 알아내려 노력하지 않아도, 눈앞에 탓할 대상이 있는데 뭣 하러 그리하겠는가.
결국 평판을 망치는 것은 가까운 쪽, 지키는 쪽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들에게 발검이란 최후의 수단이었다.
산골짜기나 뒷골목에서의 전투라면 모를까, 최소한 대로에서는 아니었다.
“녹 소저, 아까처럼은 안 되겠소?”
“힘들 것 같은데요. 숫자도 많고… 그 보초들처럼 떨거지는 아니에요. 첫 몇 명 정도는 유효하겠지만, 나머지는 반응할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아시죠?”
“…힘들겠구려.”
당연히 공격의 주체를 찾아 나설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기에는, 지켜보는 눈이 지나칠 정도로 많았다.
“차라리 목적이 ‘죽이고 이탈한다’라면 또 모를까요.”
“…그건 좀. 눈에 띄는 것은 곤란하오. 우리뿐만 아니라, 이곳 자체가 말이오.”
“알고 있어요.”
일단은 조금 지켜보는 것이 나을 듯했다.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알아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던 중, 검을 뽑아 든 측에서 사내 한 명이 걸어 나왔다.
“하하, 거 참…. 그러게 진작 동우회로 넘어오라니까, 미련하게 서검련에 남아서는.”
“성 단주…!”
“무어,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죄는 치러야 하지 않겠소? 이제라도 동우회의 손을 잡겠다면야, 이 성여답! 이자 정도는 탕감해주지 못할 것도 없는데.”
대놓고 뻗대며 그리 요구하는 그 사내는 척 보기에도 무공 하나 익히지 않은 일반인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그에게 가느다란 적의 하나 내비치는 사람이 없었다.
분명한 그의 권력을 의미했다.
성 단주, 성씨세가.
그리고, 희미하게 떨려오는 성시소의 몸.
성시소의 손을 붙잡고 있던 적영이 그녀에게 물었다.
“아는 사람이니?”
성시소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성시소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어쩌면 조금은 예상한 것이었다.
“성여답… 제 작은아버지세요.”
성여답.
성시소의 숙부.
즉, 성씨세가주 성여문의 동생.
이곳 오로목제에서 그의 권력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을 테다.
대신, 청유백은 입을 달싹였다.
“소중한 사람인가?”
“네?”
“그냥 대답만 해라. 예, 아니오로도 상관없으니.”
“그야…….”
가족이 소중하냐니.
퍽 멍청한 질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청유백은 알고 있었다.
생각보다 세상에는 가족을 탐탁찮게 여기는 이도 생각보다 많다.
가문이 부유할수록, 잃을 것이 많을수록 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시기와 혐오’라는 것을 아직 모르는 어린아이일지라도, 자신을 싫어하는 어른의 반응 정도는 눈치 빠르게 알아낼 수 있는 법이다.
“그렇지는… 않아요.”
“그래?”
“남들의 시선 앞에서는 잘 대해 주시지만, 단둘이서 있을 때에는…….”
때리고.
욕하고.
어서 죽으라며 조롱하고.
그 외 기타 등등, 은근한 괴롭힘을 반복하기도 하고.
거진 반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이었지만, 성시소의 대답은 꽤 길게 이어졌다.
서역으로의 여행을 떠난 것이, 저치로부터의 도망은 아니었을까 생각될 정도로 말이다.
청유백은 대꾸했다.
“그만 됐다. 네, 아니오로 대답하라 했는데, 굳이 사서 고생을 하는군.”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
“방법, 방법이라…….”
눈에 띄어서도 안 되고, 직접 나서서도 안 되고, 폭력적으로 제압해도 안 되고.
퍽 짜증나기 그지없다만…….
“언제든 구하면 나오기 마련이지.”
* * *
태평객잔의 대리인, 원각은 난감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검이 두렵냐고?
‘미친 소리.’
이곳, 태평객잔은 숨겨진 마교의 지부 중 하나였고, 원각은 그곳의 대리인이었다.
즉, 마교의 지부장이다.
눈앞의 놈들을 때려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숫자로 밀리는 것도 아니거니와, 당장 눈앞의 저 개새끼를 제압하면 나머지 놈들은 허둥대는 허수아비일 뿐이다.’
허나… 그럴 수가 없다.
대로에서 싸우겠다며 칼을 뽑아드는 순간 민심은 우리의 편이 아니게 된다.
안쪽으로 들여와 싸우겠다면, 그것은 이미 객잔의 신용을 저버리는 것이 된다.
어느 쪽이고 중요한 이유는, 그야 이곳이 ‘평범해야’ 하기 때문이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간에, 의심이나 관심을 받아 좋을 이유가 하등 존재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군.’
관에 신고하면 되지 않느냐고?
씨발, 말이면 다 되는 줄 아는가.
이 동네에서 가장 높은 사람의 동생이 성여답 저 새끼다.
‘본교에서 보내 준다는 지원은 언제 오는 건지!’
오늘도 결국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땅을 기라면 기고, 신발을 핥으라면 핥는다…….
상관없다.
그것으로 만족하고 돌아간다면, 며칠이라도 더 이곳을 지킬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러던 중.
─철그렁.
묵직한 금속의 감각이 원각의 허리춤에 닿았다.
무기는 아니었다. 도리어 기분 좋은, 그리고 익숙한 주머니의 감각.
그리고, 뒤에서 그것을 대고 있는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
{조용.}
그는 다른 대답 없이, 그저 돈주머니를 한 번 더 밀 뿐이었다.
원각이 대답했다.
‘본교에서 오신 분이십니까?’
{시간이 없다. 해결해라.}
‘허, 허나…….’
이백오십 냥?
엄밀히 말하자면, 저 빌어 처먹을 동우회 놈들에게 빌린 돈도 아니었다.
그저 친분이 있던 상인에게 빌린 것이었고, 그에게 갚으면 그만인 일이었다.
그러나 놈들이 갑작스레 오로목제의 상공인들에게 압박을 넣기 시작했고─ 그 상인은 그들의 압박에 굴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이후, 떼인 돈을 받아 주겠다며 이리 행패를 부리는 것이 거진 닷새에 한 번 꼴.
이것을 이리 줘버리면 자신의 무능만 더하게 되는 꼴이 아니던가.
‘저들이 이리 온 것이 처음이 아닙니다. 몇 번이고 억지를 부렸고, 그 때마다 새 꼬투리를 잡습니다. 이리 해봐야 결국 돈 낭비일 뿐─’
{상관없다.}
‘예, 예?’
{상관없다 했다.}
빌어먹을.
원각은 될 대로 되라는 양 돈주머니를 쥐고, 성여답의 앞으로 던져 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