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원수는 원수로 갚는다 (3)
“가주!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사특한 무리가 아가씨를 쫓고 있거늘, 어찌 그것을 방치한단 말입니까!”
“그만. 이미 결정한 일일세. 더는 거론하지 말게.”
“허나…!”
“그만 하라지 않았나!”
“……!”
성씨세가의 외총관, 문노는 침음을 삼키며 주먹을 쥐었다.
가주께서 갑자기 이상해지셨다.
조금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회까닥 돌아 버렸다─라고 말해도 괜찮으리라.
성씨세가의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대체 어찌하여 일이 이리되었단 말인가.
그토록 아가씨를 사랑하시던 분이, 어찌 하루아침에 위기를 나 몰라라 하시게 된단 말인가!
“가주, 한 번만 더 재고해 주십시오. 어찌 이러신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의 상관, 성씨세가주 성여문은 그럴 가치도 없다는 양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문노의 등 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객이 온 것 같군. 이만 가 보게.”
“…예.”
문 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옅지만, 기분 나쁜… 이질적인 무언가.
‘그 교아라는 자인가.’
시비들이 이르기를, 하얀 사람.
분명 저자가 온 이후로 가주께서 이상해진 감이 있었다.
상공들의 다툼을 중재하기는커녕 부추기지를 않나, 뿌리 깊은 서검련과 동우회의 마찰에 오히려 더 싸우라며 증원을 해 주지를 않나….
나아가, 이번의 아가씨 건까지.
‘이대로 두고만 볼 수는 없다. 향후 내가 책임을 지게 되더라도, 따로 사람을 움직이는 수밖에…’
문노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드르륵.
문이 열리자, 바로 건너편에 서 있는 순백색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별일이 있지는 않았다.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공연한 장소에서 사람을 모욕할 정도로 문노는 교양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탁.
두 사람이 스치듯 지나가고, 문이 닫힌 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왔나.”
교아는 당연하다는 듯 허락도 받지 않고 성여문의 앞에 앉았다.
그것 때문일까.
그와 동시에 성여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성여문은 코를 씰룩이며 이죽거렸다.
“피 냄새가 나는군.”
옅지만, 분명 비릿하면서 이질적인 냄새.
익숙한 것이었지만, 이 집 안에서 맡는 것이 결코 유쾌하지는 않았다.
“또 죽인 건가?”
“죽이지는 않았어. 하하, 눈깔 하나를 뜯어 버리기는 했지만!”
“…적당히 해라. 입막음도 슬슬 버거운 참이다.”
“선처해 볼게!”
선처는 개뿔이.
맘에 있지도 않은 말을 내뱉는 것은 여전한 놈이었다.
교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상큼하게 대답하고는, 탁상에 턱을 괴고 앉았다.
그리고 성여문을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그래서, 왜 불렀니?”
“결국 놓쳤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뭘? 그 딸이라는 년 말이야?”
“그래.”
“으음? 설마.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성여문의 딸. 성시소라고 했던가.
분명 알고 있었다.
딱히 대단한 년은 아니었다.
쫓는 이유라고 한다면, 서역에 갔던 그녀가 ‘조각’ 중 하나를 지니고 돌아오고 있다는 첩보를 들은 것, 그것 하나 때문이었다.
오랜 기간 주시하고 있던 조각 중 하나이니, 반드시 손에 넣어야만 하는 물건일진대.
그걸 놓쳤다고?
허, 참!
교아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딸한테 호위로 딸려 보냈다는 절정 고수들은 잘나신 묵련(墨蓮)께서 직접 조지셨다고 했고… 추적하는 놈들도 못난이는 아니지 않니?”
“그만큼 꼬리 자르기에 능한 놈이라는 것이지. 도망친 놈들끼리 한 짓은 아니야. 분명 조력자가 있다.”
성여문은 그리 말하며 서함 하나를 꺼내었다.
전서응(傳書鷹)에게 매달아 날리는 부류의, 작은 서함이었다.
“그리고 현장에 따르면, 놈들의 추적을 처음 실패한 것은… 천산 부근이라는군.”
“천산? 십만대산의 그 천산?”
“그래. 마교가 있는 곳이지.”
성여문은 가벼이 대답했다.
천산에 자리한 세력은 마교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감히 누구도 마교의 앞마당에 둥지를 틀고자 하지 않는다.
“웃기지도 않는 옛날이야기처럼 길을 지나던 의인이 구해준 것이 아니고서야, 마교의 힘이 개입했다고 보는 것이 옳겠지.”
문제는, 마교가 왜 개입했는가.
성시소를 놓친 곳은 천산 인근이라고는 해도, 마교의 본산에서는 깨나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헌데 굳이 그곳에서, 마교의 누가 그들을 도왔단 말인가.
성여문은 말을 이었다.
“모든 우연을 배제하고 본다면, 육대가의 후계자들이 움직였다 보는 것이 옳겠지. 그러잖아도 두 번째 시험 이후로 행방이 묘연하던 상태였으니 말이야.”
“그놈들이 왜 지들 집에서도 멀리 떨어진 거기에 있었는데?”
“글쎄. 그 근처에는 관도가 깔려 있지. 신원까지는 나흘 거리에… 그대로 올라오면 이곳 오로목제다.”
혹시 모르지.
어쩌면,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것일지도.
성여문은 그리 말을 이었다.
계속해서 보고가 올라올수록 신원 부근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니, 어쩌면 정말 이곳으로 오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확하지는 않았다.
아직 놈들의 정체도 포착하지 못했고, 결국 발자취를 좇은 잔재일 뿐이니까.
허나 그럼에도, 교아는 눈을 까뒤집으며 제 얼굴을 쥐어뜯었다.
“아하, 아하하하하!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이리로? 그래애애?!”
길게 찢어진 입꼬리는 분명 웃고 있었으며, 기괴하게 뒤틀린 눈 또한 따진다면 웃는 표정에 가까웠다.
“아, 아아아아아… 너구나! 그래, 청유백! 날 보러 오는 거구나?!”
미친놈.
성여문은 숨기지도 않으며 대놓고 뇌까렸지만, 교아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성여문은 대꾸했다.
“누구일지는 아직 모른다. 청가의 아이가 추적과 사냥에 대하여 그리 해박한 지식을 지녔다고는 생각하기 힘드니, 녹가나 백가라고 생각하는 편이 차라리 옳지.”
“아니, 아니야… 난 알 수 있어! 그래, 분명히 그놈이라고!”
“…….”
성여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뭔 말을 한들 듣기나 하겠는가.
뭐 저 멍청한 놈의 말이 맞을 수도 있는 일이다.
다만, 걱정되는 일이라면…….
“죽지 마라.”
“뭐야, 걱정하는 거야? 네가? 날? 하핫, 그 녹련이 다른 사람 생각도 할 줄 알았는지는 처음 알았는데!”
“이지의 결과일 뿐이다. 네놈은 특히 가성비가 좋지 않아…. 한 번 뒈져나갈 때마다 조각도 하나씩 잃어버리는 꼴이니까.”
그건 정말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조각’이 무한하지 않은 이상, 놈의 목숨도 결코 무한하지는 않다.
놈을 살리는 것이 황련, 그녀의 소관인 것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말이다.
어쩌면, 이번에 죽는다면 귀찮아진 그녀가 더 이상 살려내는 것을 포기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뭐, 이성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그만 살아서 그만 뒤지는 쪽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만.
“걱정 마. 걱정 말라고…….”
교아는 무슨 자신감인지, 섬뜩한 웃음을 지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를 테니까.”
* * *
문노는 성여문의 방을 나오자마자 곧장 어디론가 향했다.
식객들이 기거하는 구역이었다.
성씨세가는 오로목제의 유지로서, 능력 있는 자라면 누구든 식객으로 맞이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 대부분은 장기로써 무력을 자랑하는 무인들이었으며, 그들은 때로 성씨세가의 강력한 우군이 되어 주었다.
‘아가씨와의 관계도 원만한 자들이 많으니, 부탁하면 들어 줄지도 모른다.’
일단은, 그런 계산이 있었다.
문노는 무슨 일이 있냐며 자신에게 달려오는 시비에게 명령했다.
“식객들을 불러 모아라. 전할 말이 있다.”
“죄, 죄송하지만… 대부분 출타 중이십니다.”
“뭐라? 어째서?”
“그게… 작은 주인님께서 전부 모시고 나가셨습니다.”
“성여답 그 망나니 놈… 아니, 작은 주인님께서 말인가?”
성여답.
그는 현 성씨세가주인 성여문의 동생이었다.
우수한 형님과 다르게, 계속 비교당하며 차별 속에 자라 어딘가 비뚤어진 면모가 있었다.
그들의 성장을 옆에서 지켜본 문노였기에, 그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보듬어 줄 수 없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
문노는 그의 패악스러운 성격에 손을 놓은 지 오래였다.
심지어는, 가주가 저리 싸늘하게 변한 이후로는 기회다, 하고 더욱 거리낌 없이 행동하고 있었더랬다.
“빌어먹을.”
문노는 지끈거리는 미간을 짓눌렀다.
보나 마나 패싸움이나 하러 나간 것이 눈에 훤하다.
당하고 돌아오지는 않겠지만, 싸우는 것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된다.
‘찾으러 가 봤자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을 테니…….’
결국, 대답은 하나밖에 없는 셈이었다.
“식객들께서 돌아오시면 내게 말해 다오. 밤중이라도 괜찮으니 말이다.”
“그리하겠습니다.”
* * *
“굳이 이렇게 숨어들어야 해?”
“어쩔 수 없습니다. 이미 정하지 않았습니까.”
“좀 다른 방법이 있을 거 아냐. 가령 짐마차에 숨어든다던가.”
“성문에 사마신교의 고수가 있기라도 하면 어쩌려구요? 단박에 간파당할 겁니다.”
“그건 그렇지만…….”
적영은 짜증스레 한숨을 내쉬며 어둑한 수로를 걸었다.
말들은 오로목제까지 오며 있던 평원에 전부 풀어놓은 뒤였기에, 신발이 더러워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뭐, 그야 잠입을 하면서 말을 둘러메고 다닐 수는 없으니 당연한 일이지만서도.
뒤따라오는 황돈이 말을 받았다.
“아까 성문을 봤잖소. 확실히 분위기가 이상하긴 하오. 본디 이만큼 험악한 분위기는 아닐진대… 마치 전쟁이라도 있는 것만 같소.”
오로목제의 분위기는 한눈에 보기에도 기묘한 것이 느껴졌다.
“맞아요.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밝지 않았고… 병사들은 날이 서 있었죠.”
누군가는 분노한 듯 보였고, 누군가는 실망한 듯 보이기도 했다.
더구나 눈에 띄었던 것은, 드나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짐을 검사하며 신원을 확인했던 것이었다.
“보통 그 정도로 검사를 심하게 하지는 않소.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굳이 검사를 하는 곳이라고 한다면, 밀수꾼을 색출하기 위해 국경 근처에서나 하겠지.”
“맞습니다. 실용도 없을뿐더러, 굳이 상인들의 반감만 사는 행위…. 오로목제에서 할 이유가 없습니다.”
차 호위가 그리 대꾸했다.
즉, 예상한 대로 이곳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
“최소한, 이곳의 지도층에게 분란이 생겼다는 것은 알겠군.”
알 수 있는 것이 없는 와중에도, 그것 하나만큼은 명확했다.
그렇기에 청유백 일행은 성문을 통과하지 않고, 다른 길로 숨어드는 것을 선택했다.
성의 서쪽 하수로.
도심을 가로지르는 하천의 끝자락에 있는, 오물의 처리장이었다.
대낮이지만, 성문 바깥의 이곳을 지키는 이들은 없다.
하나밖에 없는 길이라면 한쪽만을 지켜도 무방할 테니 말이다.
어둠 속을 찰박거리던 일행의 걸음은 차 호위의 신호와 함께 멈추었다.
“곧 출구입니다. 지키고 있는 무인들이 있을 텐데… 아, 저기에.”
차 호위는 저 멀리에서 비춰오는 빛을 가리켰다.
사슬과 자물쇠로 가로막힌 철창과,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두런두런한 말소리.
대략, 두 명 정도의 인기척이다.
뻔히 근무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자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따돌리거나 처리하지 않으면 지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가 해결하죠.”
“예? 잠시만요, 여협. 제가 알고 있는 이들일 수도 있으니─”
“아뇨.”
차 호위는 손을 뻗어 녹지연을 막으려고 했지만, 그녀의 행동이 먼저였다.
─파앗!
섬전같이 휘두른 손끝이 잠깐 반짝이더니, 그 끝에서 바늘 두 개가 각각 보초들의 목덜미에 날아가 박혔다.
그리고 곧 그들이 무어라 소리치거나 반응하기도 전에, 전신에 힘이 빠져 허물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는 이는 어떤 경우든 적은 게 좋아요. 이르든 늦든 어차피 들킬 테니까요. 게다가, 모르는 사람이면 어쩌시려고요?”
“그, 그렇긴 합니다만…….”
차 호위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먼저 간 녹지연은 철창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그들의 목덜미에서 독침을 수거하는 중이었다.
뒤를 따른 일행들이 철창 앞에 다다랐고, 사슬을 묶은 자물쇠가 보였다.
차 호위가 청유백을 돌아보았다.
“이건 어찌할까요?”
사슬을 끊어내는 것은 가능하다.
차 호위 자신도 시간을 들인다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흔적이 남기야 하겠지만, 다른 방법이 없으니 끊어내는 수밖에.’
그러나, 청유백 일행이라면 그다지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저것을 끊어 낼 수 있으리라.
그러니, 물어본 것은 그런 의미였다.
‘나도 할 수 있긴 한데, 당신네들이 하는 게 낫지 않겠소?’
같은 것 말이다.
허나, 앞으로 나선 것은 기대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백소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비켜 보십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