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126화 (126/200)

제126화. 원수는 원수로 갚는다 (1)

“뭐, 뭐라고?”

“지금부터 다섯 센다?”

“이런 미친…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모르는 건가?”

왕초는 그리 말하면서도 주춤주춤 물러섰다.

미친년.

미친년이다.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저 도에 담긴 살기는 정말로 당장 누구 하나 죽이고도 남을 것 같지 않은가.

‘아냐, 빌어먹을. 쫄지 마! 허세다, 허세!’

휘익!

왕초는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바깥에 있던 거지들이 몰려와 그들의 주변을 에워쌌다.

손에는 다양한 무기가 들려 있었다.

괭이가 있는가 하면 호미도 있고, 몽둥이나 다 낡아빠진 검도 있다.

보기에는 볼품없지만, 일단 이 공간을 지켜보는 시선만큼은 위압적이었다.

그들의 공간에서 행하는 압박이었으니 말이다.

“아직도 그딴 말을 할 생각이 드나? 네년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하지만 뭐, 어쩌라고.

누가 몰려오건 간에, 그것은 적영의 관심사가 아닌 듯 보였다.

“어디에 와 있냐고? 하, 내가 그걸 알아야 해? 되려 네가 알아야지.”

“뭐, 뭣?!”

“네가 지금 누구 앞에 서 있는지.”

적영은 탁상에 박힌 도를 뽑아 들어 왕초의 목을 향해 겨누었다.

허나, 글쎄.

“…여봐요.”

썩 현명한 판단은 아닐 테다.

백소하는 일부러 이름이 아닌 지칭으로 호명하며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설마 스스로 자기가 누군지 까발릴 멍청이는 아니리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일말의 불안은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적영도 아는 듯, 짜증과 함께 손을 떨쳐냈다.

“알아, 나도 생각할 줄 알거든?”

그리고 자기소개 대신에, 왕초를 향한 도를 고쳐 잡고는 붉은 도기를 발현시켰다.

그리고는, 왕초가 들고 있는 종이 뭉치를 가리켰다.

“지금 이걸 받고, 그걸 넘겨. 그러면 얌전히 떠나 주지. 뭐, 총타주인지 뭔지 해먹고 싶다며? 오래 살고 싶지 않아?”

“허… 개방에 쳐들어와 협박을 해? 감히?!”

“말귀를 못 알아 처먹네….”

적영은 귀를 후비며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새끼.

이렇게까지 말해도 말을 못 알아 처먹으면, 자신이 쓸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백소하야 뭐, 몇 가지 생각하면서 상황을 고쳐보려고 하는 기색이었다만─

알게 뭔가.

적영은 아까의 거지, 처음 입구에서 자신들을 안내했던 녀석에게 질문을 던졌다.

“야, 거지.”

“예, 예?”

“쟤가 죽으면 누가 왕초냐?”

“그, 그건… 이곳의 삼결 제자는 저분뿐이고, 이결 제자는 몇 있지만… 제가 제일 배분이 높습니다.”

“망할, 너는 묻는다고 그걸 고분고분하게 쳐 대답하고 있냐!”

왕초는 분개하며 놈의 뒤통수를 후렸다만, 상관없다.

놈의 짜증 섞인 눈빛도, 왕초를 향한 원한 어린 기색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역시, 이게 제일 빠른 방법이다.

“그래? 그러면 축하해.”

“예…?”

“이제 네가 왕초네.”

흠칫.

적영이 뭘 하려는 건지 눈치챈 백소하는 그를 막으려 손을 뻗었으나.

“자, 잠깐만요, 뭐 하는 겁니─”

─퍼걱.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적영이 왕초에게 다가서고 그의 머리가 바닥에 나뒹굴기까지, 찰나가 걸리지 않았다.

방금까지 왕초였던 몸뚱이가 무릎을 꿇었다.

목의 단면에서 울컥이는 핏물이 적영의 가면에 튀었다.

그녀는 도를 휘둘러 피를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

“자, 선택지는 둘이야. 왕초 되고 싶은 놈이 손을 들든가, 지금 왕초인 새끼가 말을 듣든가.”

그리고 여전히 붉은 도기가 실린 도를 한 바퀴 휘둘러 주변의 거지들을 가리켰다.

분명히 가면으로 얼굴이 감춰져 있있었지만, 백소하는 그 뒤의 표정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쉽지? 왕초 되고 싶어? 말만 해. 그 위로 싹 다 죽여줄게.”

“…….”

“자, 질문 있는 사람은 잘리고 싶은 손을 위로 번쩍 들어. 질문 있는 사람 있니?”

* * *

“생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대로 보내주기는 했지만, 개방에게 꼬투리라도 잡히게 된다면…!”

“아, 몰라! 결과적으로 미행도 안 붙었잖아. 그러면 된 거 아냐? 아무도 모를 텐데!”

“젠장, 지금이야 미행이 안 붙었지만… 후우…….”

백소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과적으로, 정보를 가지고 이리 숙소로 돌아올 수는 있었다.

누군가에게 들키지도 않았고, 뒤를 밟는 기척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겠는가.

“얼굴은 감출 수 있지만… 체형과 목소리는 감추지 못합니다. 거지들의 정보를 얕보지 마십시오. 오늘 신원에 출입한 자들의 정보를 모두 뒤지고, 그것을 추려 쫓고자 마음먹는다면…….”

하고자 한다면, 그들은 분명 쫓을 수 있다.

그것이 개방이니까.

‘…뭐, 그래도 이미 벌어진 일.’

우두머리가 갑자기 사라졌으니 내분이 일어나는 것을 기대하는 게 최선일 테다.

선수를 치고 나설 수는 없으니,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러던 도중,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의 꾸러미를 바리바리 싸 들고 온 녹지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뭐야, 피 냄새가 나는데요?”

“왔냐? 너는 어딜 그리 쏘다니는 거야? 우리가 무슨 고생을 했는데!”

“…대체 여러분이 먹는 식량과 간식은 다 누가 준비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시, 식량은 어쩔 수 없지….”

녹지연에게 삿대질하던 손가락을 접으며, 적영은 머쓱하게 고개를 돌렸다.

자신은 이 여행의 회계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으니까.

돈은 황돈이, 물품은 녹지연이 대부분 담당했고, 현지의 조달─가령 신선한 고기 같은 것─은 청유백이 어떻게든 해온 편이었다.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

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대로라면, 적영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열댓 번은 굶어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대충 나눠서 정리해 주세요. 할 수 있죠?”

“내가 그런….”

“설마 못 하나요? 이런.”

“다, 당연히 할 수 있지! 한다고!”

녹지연은 웃으며 꾸러미를 적영에게 던졌고, 작게 ‘단순하기는’ 하고 읊조린 뒤에 방의 구석에 처박아둔 짐짝으로 다가갔다.

백소하와 적영이 그곳에 다녀와서 갈아입은 옷을 숨겨 둔 짐짝이었다.

“흐음…. 많지는 않네요.”

녹지연은 코를 찡긋거리며 그것을 들춰 보았다.

가면에 튄 피나 옷에 묻은 혈흔으로 볼 때, 다행히도 살육의 잔치를 벌이고 온 것은 아닌 듯 보였다.

“하나나 둘?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사람을 죽이고 오셨을까?”

“…어차피 악당이었으니까 상관없어. 게다가 우리 사람도 아니잖아.”

“뭐, 알아서 하세요. 당신 양심의 가책 같은 것 알고 싶지 않거든요.”

“장담하는데, 너였으면 열 배는 더 죽여야 했을걸?”

“흐음, 보통 죽일 상황까지 가지 않게끔 하는 게 최선이겠지만요….”

녹지연은 그리 대꾸하며 백소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계속 그녀와 실랑이를 벌인다고 뭔가 제대로 말을 듣기는 어려울 테다.

그녀가 혼자 움직이지는 않았을 테니, 그나마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묻는 것이 나았다.

“청유백이 오면 한 번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좋아요. …아, 마침 때도 좋네요.”

백소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 어깨를 으쓱였지만, 녹지연은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그 너머로 그림자가 드리우고, 다음 순간 천천히 문이 옆으로 열렸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 * *

졸립다. 피곤하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성시소는 갈수록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계속 무리를 반복한 탓이었다.

그러니, 이런 푹신한 침상을 마주하는 것도 상당히 오랜만이어서… 그리 오래지도 않아 잠에 빠지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깜빡 잠들어버린 건가?’

그녀는 눈을 부비며 잠에서 깨어났다.

원인을 찾자면, 방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란 때문인 듯 보였다.

바로 문 앞, 누군가가 싸우는 것 같은 소리이기도 했다.

“내일 아침에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굳이 깨울 필요가 있습니까? 안 그래도 피곤하실 텐데….”

“급해! 경우에 따라서는, 당장 여기를 떠야 할 수도 있다고!”

“그, 그런…!”

무슨 소리일까.

잘 모르겠다.

창밖으로 별과 달이 보이는 것을 봐서는, 꽤나 시간이 흐른 것 같았는데 말이다.

성시소는 걸음을 옮겼다.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는 일행들의 목소리였으니 괜찮을 터였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빼꼼히 고개를 디밀었다.

“무슨 일인가요?”

“아, 아가씨.”

가장 처음 보인 것은 당황한 차 호위의 얼굴이었다.

맥락을 보면 곧 들어올 것도 같았으니, 미리 열어 주어도 문제는 없으리라.

그 뒤로는 다른 일행들이 보였다.

네 명이었다.

‘뚱뚱한 분은 보이지 않네.’

성시소는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결코 평범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잠을 깨워서 미안한데, 우리가 좀 재밌는 걸 알아 왔거든.”

“…일단 들어와서 얘기하시죠.”

성시소 혼자뿐이었던 방은 곧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러나 북적이지는 않았다.

가져온 소식이 썩 좋은 것은 아닌지, 다들 표정이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일까.

‘이제 같이 가지 않겠다는 걸까?’

그건… 곤란하다.

신원에서 오로목제까지는 그리 먼 길은 아니지만, 이분들이 이제 와서 빠지겠다는 말을 한다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로목제까지의 길에 그 이유를 맞닥뜨릴 수도 있다는 거겠지.’

성시소는 사시나무 떨듯 떨려오는 손을 애써 소매 안으로 감췄다.

어떻게든 설득해야만 했다.

조금만 더, 앞으로 며칠 동안만이라도 함께 움직여 달라고 말이다.

허나, 글쎄.

적영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서역의 공주에게 받았던 물건. 그게 대체 뭐야?”

“네? 그걸 어떻게…….”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쫓기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는 거지.”

“그럴 리가…….”

서역의 공주.

머나먼 사막 너머, 저 천축국 근방에 위치한 나라의 공주를 칭하는 말일 테다.

세상에 공주는 많겠지만, 최근 자신이 만난 공주는 그녀밖에 없으니 말이다.

서역을 여행하는 동안, 초대를 받아 친분을 쌓고 담소를 나눈 바 있었다.

통역사가 필요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무튼, 분명한 친분을 쌓았다고 자신할 정도의 관계는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증거로, 헤어질 때 친애의 증표까지 나누었으니까.

“하, 하지만 그녀는 제 친구인걸요. 친애의 증표로 부적을 주었을 뿐인데… 그게 무언가 문제가 있었나요?”

혹시 그 물건이 나라의 보물이었다던가 하는 이야기일까?

그렇다면 할 말이 없다.

자신은 받은 것뿐이라고는 하지만 분명 잘못이니,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돌려주어야만 할 테다.

청유백이 대꾸했다.

“문제는 없다. 있다면 그걸 갖고 싶어 하는 놈들이 문제지.”

“그걸 왜… 그건 정말 평범한 부적일 뿐이에요.”

“이유는 중요하지 않아. ‘누가’ ‘무엇을’ 쫓는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지. 그리고 이번에는 상대가 나빠.”

“대체 누가…….”

“사마신교다.”

“……!”

성시소는 헛숨을 들이쉬며 다른 이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 누구도 장난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나마, 차 호위가 성시소와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당황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걸… 어떻게 아신 거죠?”

“개방의 정보에 있더군요. 그들은 당신을 산 채로 잡길 원하지 않습니다. 살면 좋고, 아니면 말고죠. 공주에게 받았다는 물건이 뭔지 모른다면 가급적 살리려 하겠지만….”

백소하는 말끝을 흐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들의 목적은 성시소 개인이 아니었다.

정확한 목표를 알고, 빼앗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성시소의 목숨은 그다지 고려의 사항이 되지 않으리라.

‘물론, 어찌 되든 이제 와서 이 아이를 버릴 생각은 없다. 오로목제로 데려가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막대하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결국 오로목제로 가는 이유도 사마신교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청유백은 성시소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일단, 사마신교를 엿 먹일 방법이 있다면 뭐든 알아두는 것이 좋으리라.

“그러니, 한 번만 봐 보자고. 대체 놈들이 쫓는 물건이 뭔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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