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보름달이 뜬 밤에 (5)
한편.
청유백이 떠나고, 백소하와 적영은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호화로운 한 상 차림을 시켜 음식을 즐길 때 즈음에는 백소하도 나름 즐거웠으나, 적당한 소일거리도 결국에는 떨어지기 마련.
백소하는 적영의 부탁─을 빙자한 협박─에 성시소에게 책에서 보았던 동화들을 들려주고 있었다만, 그것도 그녀가 피로감에 잠들어 버렸기에 끝나고 말았다.
‘녹지연은 상비약 재료를 사겠다고 나가버렸고, 황돈은 뭐… 기루에서 돈이나 쓰고 있겠지.’
백소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가 일중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자니 좀이 쑤셔왔다.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조사라도 하러 나가지요. 너도 몸이 뻐근하지 않습니까?”
“어디 갈 건데?”
“말했잖습니까. 조사요. 이왕 큰 도시입니다. 뭐가 되었든 간에 시도는 할 수 있겠지요.”
뭐 가령 사마신교의 움직임이라든가.
아니면 뭐, 위험 부담이 있겠지만 성시소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적영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런 거라면 황돈을 시키면 되잖아. 여기도 마교 지부 정도는 있지 않아?”
“있기야 합니다마는…….”
마교 지부?
있다. 있기야 하다.
옛 마교는 이 거대한 신강 전체가 영역이었으니, 웬만큼 큰 도시다 하면 숨겨진 지부 한둘쯤은 있기 마련이었다.
당연히, 이곳 신원에도 있다.
하지만 백소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히 못 갑니다. 우리가 오로목제로 가는 것부터가 기밀이란 말입니다. 뭐, 지금쯤에는 이미 어느 정도 들키긴 했겠지만요.”
“왜 들키는데?”
“당연하지요. 적당히 감추기야 했겠습니다만, 사람의 행적이란 그리 쉽게 지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간자가 있다면, 후계자들이 일제히 안 보이기 시작한 시점에서 의심이 시작되었을 테다.
시험을 떠나는 것을 비밀로 했다고 한들, 행적도 결국에는 들키기 마련.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른 지부에 들르는 것은 별로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
“뭐야, 그럼 나가는 것 자체가 문제 아냐?”
“틀린 말은 아닙니다. 어디에 눈이 숨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러면 왜?”
“하지만 그렇다 하여, 가만히 있기만 한다면 무엇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놈들이 저희를 아는 만큼, 저희도 그들을 알아야만 합니다.”
“으음…….”
적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기는 했다.
알아듣기 어려워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귀찮은 것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은 이해한 듯 보였다.
백소하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짐을 뒤지더니, 돌아와서는 적영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자, 이거 쓰십쇼.”
“…가면?”
“대낮에 거지들한테 얼굴을 보이는 건 좋지 않습니다. 정보를 산다는 것은, ‘누가’ ‘어떤’ 정보를 샀다─라는 정보가 새로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건 이거대로 수상하지 않아?”
“그러니까 몰래 다녀야지요. 옷도 갈아입고요.”
“아하.”
가면을 얼굴에 쓰려던 적영은 문득 백소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백소하의 옷차림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방금까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하얗던 차림이었는데, 방금 갈아입은 건지 꽤 평범한 차림이었다.
길을 오가다 볼 수 있을 법한, 그런 차림 말이다.
“너 하얀색 말고 다른 옷도 입을 수 있는 거였구나?”
“나를 대체 어떻게 본 겁니까?”
“하얀 옷을 못 입으면 죽는 병 같은 게 있는 줄 알았지.”
“…….”
* * *
백소하와 적영은 최대한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움직였다.
백소하가 앞에서 움직이면, 적영이 근처에 사람이 있는지 파악하고 경고하는 식이었다.
“이쪽일 겁니다.”
“아, 그 앞에도 있어. 오른쪽으로 돌아가자.”
상당히 돌아가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사람은 한 명도 마주치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이 다다른 곳은 축축하고 어두운 골목의 한구석이었다.
초가집이라고 말하기에도 뭣한, 극히 허름한 나뭇가지와 짚단이 서까래를 이루어 하나의 문을 만들고 있는 곳이었다.
건물과 건물의 틈을 이어 집을 만든 듯 보이기도 했다.
“여긴…….”
“개방(丐幫)이라는 곳입니다.”
개방.
그것은 거지들의 집단이었다.
아니, 연합이라고 이르는 것이 좀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굳이 연합이라고 이르는 이유는, 그것을 단순한 집단이라고 이르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하고 무시할 수 없는 조직이기 때문이었다.
개방은 정보를 모은다.
다름 아닌 거지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말이다.
거지는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든 있다.
특히, 많은 사람이 몰리는 곳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처음에는 더욱 효율적인 동냥을 위해서였다고 했다.
어느 집에서 잔치가 열린다더라.
어느 집 부인이 만삭이라더라.
어느 집 규수가 곧 생일이라더라.
그런, 잡다한 정보들을 취합하여 조금이라도 더 잘 빌어먹고 살게끔 말이다.
허나─ 언제부터인가, 변질되기 시작했다.
단순한 소문의 취합에 불과하던 정보는 수많은 거지들에 의해 정리되고, 압축되고, 정밀해졌다.
천하의 그 누구보다도 많은 인원의 숫자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한 사람의 눈은 잘못 볼 수 있지만, 수십, 수백 명의 눈이 같은 것을 보았다면 그것은 진실이 되기 마련.
개방의 정보는 어느새 천하에서 수위를 다툴 정도로 정확해져 있었다.
중원 전체를 아우르고,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든 있는 거지들에 의해서 말이다.
적영도 그것은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오대 거파(巨派)와 일방(一房).
천하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세력들 중 하나가 바로 개방이니까.
적영은 심술궂게 대꾸했다.
“그건 나도 알거든? 내 말은, 여기를 어떻게 찾았느냐고.”
“외웠습니다.”
“뭐?”
“중원에 있는 모든 정보 조직, 암살 조직, 하오문의 위치와 접선 방법…. 전부 머릿속에 들어 있습니다. 백가 자제라면 전부 배우는 겁니다.”
“너, 생각보다 똑똑하구나?”
“너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정말 미묘하기 그지없지만,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아무튼… 들어가죠.”
백소하가 먼저 골목을 나서려 하자, 적영이 따라붙으며 물었다.
“그런데, 정말 전부 다 아는 거야? 중원이 그렇게 넓은데?”
“그야… 정말로 전부 알지는 않죠. 아무도 모르는 건 저도 모릅니다.”
“아무도 모르는 거라니?”
“그 조직의 내부자만 아는 접선 정보 같은 것 말입니다. 가령, 산상만월 같은 단체 말이죠.”
“헤에…….”
“아시죠? 퍽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의뢰를 접수받는 것도 심히 까다롭게 받습니다. 그들끼리 접선하는 방법은 백가조차도 모릅니다. 접선을 하기는 하는지조차도 알려져 있질 않아요.”
그리 말하고는, 쉿.
가면의 코 위로 백소하는 손가락을 올렸다.
이제 저들에게 목소리가 들릴 거리였다.
개방의 입구에는 거지 하나가 보초를 서고 있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졸고 있는 것이, 보초라고 말하기에도 묘했지만 말이다.
백소하는 그의 앞에 다가가 입을 열었다.
“왕초는 있나?”
“…뉘슈?”
“소문을 사러 왔다.”
그 말에 거지는 백소하의 차림을 위아래로 훑더니, 코웃음 치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리고는 골목 저편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런 거라면 저기 뒤쪽의 하오문에나 가보슈. 뭐 맘에 드는 곳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거지 소굴에 와서 소문은 뭔 놈의 소문…….”
그들을 퍽 무시하는 투였다.
죽립과 장포로 몸을 감추고, 가면까지 얼굴로 감춘 두 사람.
척 보기에도 ‘나 수상하니 잡아가쇼’ 하고 소리치는 것과 다름없는 꼴이었다.
‘저딴 걸 변장이라고….’
정체를 감추는 데는 좋겠지만, 그러면 뭐하나.
수상한 사람이라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는 꼴인데 말이다.
거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여기까지 오면서 단 한 명의 사람도 마주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그에게는 그저 멍청한 옷차림의 머저리 둘일 뿐이었다.
하지만.
─쩔그렁!
경쾌한 금속의 소리가 바닥과 부딪히며 울렸다.
백소하가 던진 은전 하나가 거지의 발치에서 뒹굴고 있었다.
은전 한 문.
거지에게는 많다 못해 과분한 돈이리라.
백소하는 대꾸했다.
“되었나?”
“아, 이거로는 좀 모자란데…….”
“…….”
백소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소란은 원하는 바가 아니다.
돈 몇 푼으로 침묵과 정적을 살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할 의향이 있었다.
─찰그랑!
다시금 은전 몇 문이 바닥을 뒹굴었고, 거지는 그것들을 쓸어 담았다.
“클클클, 따라오슈. 오랜만에 귀인들이 오셨구먼. 누군지는 몰라도 말이야.”
거지는 뒤돌아서는 서까래의 아래로 걸어갔다.
백소하와 적영이 그 뒤를 따랐다.
홍등가의 높다란 담벼락 사이로 난 길들을 이어 붙여 집을 만든 모양새였다.
‘그 허름한 앞모습 뒤에 이런 공간이 있었다니.’
곳곳에 보이는 거지들의 시선이 사방에서 찔려왔다.
시궁창 썩는 냄새가 코를 찔러오고 있었다.
문득, 적영이 그에게 속삭였다.
‘너 거지한테는 존댓말 안 하는구나?’
‘…예의가 바른 거지, 자존심이 없는 게 아닙니다. 우욱….’
백소하는 견디기 역해 적영을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가면 때문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 * *
그렇게 얼마간 걸어가자, 나름 큰 공간이 나왔다.
여러 개의 장막이 쳐져 있는, 나름 거지 딴에는 꾸민다고 꾸민 장소일 테다.
‘접견실인가?’
탁자와 의자도 있는 것이, 대충 보자면 그렇답시고 만들어 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장막 중 하나가 흔들리며, 그 너머에서 수염이 덥수룩한 덩치 하나가 웃으며 걸어 나왔다.
“그래, 그래! 손님이 오셨다고!”
남루한 행색에, 방금 자고 일어난 듯 채 떼어지지도 않은 눈꺼풀.
산발이 된 머리카락….
적영은 그의 꼴을 보고는 백소하에게 속삭였다.
아니, 왕초라 하길래 뭐 대단한가 싶더니만…….
“…거지인데?”
“그럼 거지 소굴에서 두목 찾는다고 부자가 나오겠습니까?”
백소하는 그리 대꾸하며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매듭을 살폈다.
매듭은 총 세 개.
삼결(三結) 제자라는 소리다.
‘삼결 제자는 분타주던가.’
개방도가 신분의 증명이나 다름없는 저것을 조작하는 짓을 하지는 않을 테니, 눈앞의 거지는 분명 이 분타를 총괄하는 왕초가 맞을 테다.
“앉게, 앉게. 차릴 건 없어서 들 건 없지만, 숨이라도 맘껏 쉬게나. 공기는 공짜 아닌가? 하하하!”
“재미도 없는 농담을 받아줄 의리는 없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성격도 급하군그래, 무엇을 원해 왔는가?”
왕초는 의자에 허리를 기대어 넘어질 듯 기울였다.
일단 들어나 보자는 투였다.
“성씨세가의 여식에 대해 아는가?”
“알지. 장안의 화젯거리인데. 그년 목에 걸린 현상금이 어마어마하다지? 동네 왈패들까지 알 정도로 말이야.”
“…왜지?”
“왜? 왜냐고? 무슨 그런 병신 같은 말을 하나! 개방의 정보를 맨입으로 사려고?”
하, 빌어먹을.
결국 또 돈인가.
백소하는 품에서 은 주머니를 찾아서는 통째로 그의 앞에 던져 주었다.
쿠웅.
묵직한 소리가 울렸고, 왕초는 그것을 받아 안을 확인하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행색을 보니 현상금 타먹으려는 왈패들은 아니신 것 같은데….”
그래, 아니겠지.
현상금 타려고 거지 소굴에 은 덩어리를 가져다 바치는 머저리가 있을 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왕초는 고개를 까딱였다.
“그런 정보가 왜 필요하실까?”
“그게 중요한가?”
“아무렴, 중요하지.”
그리고는 은주머니를 백소하에게 다시 밀어 주었다.
백소하는 그것을 받으며 목소리를 내리깔아 대꾸했다.
“…무슨 의미지?”
“돈도 좋아. 돈도 좋은데… 시기가 조금 미묘하단 말이지. 돈보다는 실적이 필요한 시기야.”
“실적?”
“그래, 실적. 곧 사결 제자 시험이 있는데다… 아, 이건 덤일세. 공짜로 말해 주지. 오로목제의 총타주 자리가 비었거든!”
“…….”
“아… 이리 말하면 어려워서 모르나? 그냥, 이 지역 왕초 자리가 비었다는 소리일세.”
“그 왕초가 죽었나 보지?”
“그건 모르지. 대답해 줄 의리는 없어! 아무튼, 난 그 자리를 원하고… 실적이 필요하다네.”
백소하 입장에서는 알 바 아닌 소리였지만, 왕초는 뜻을 굽힐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은 따위 제 알 바 아니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자고! 내가 혹할 만한 정보를 내놔 봐.”
“뭐라?”
백소하는 인상을 찌푸렸다.
가면 탓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전혀 상정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딱 봐도 너희는 뭔가 있어. 그 차림, 그 행색에… 물어보는 건 성씨세가의 금지옥엽이라. 정체를 숨기는 건 좋은데, 너무 수상하지 않나?”
왕초는 낄낄 웃으며 아까 백소하를 안내했던 거지를 향해 손짓했다.
그 거지는 잠깐 장막을 걷어 올리고 어딘가로 들어가더니, 돌돌 말린 종이 뭉치 하나를 들고 다시 나왔다.
그것은 곧 왕초의 손에 쥐여졌다.
“뭐든 말해 보게. 만족스러우면, 나도 이걸 주지.”
“…….”
침묵이 흘렀다.
말해도 되는 가치 있는 정보?
그딴 게 있을 성싶은가.
작은 단서 하나를 잘못 흘렸다가 정체까지 탄로 날 가능성.
그 가능성이 그리 높지는 않겠지만, 수백 수천 명의 거지가 매달리면 안 될 것도 가능하게 만든다.
그게 숫자의 폭력이라는 것이다.
‘돈이면 될 줄 알았는데…….’
빌어먹을.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야 하나?
빈손으로?
‘젠장, 그러면 손해뿐이지 않은가.’
얻은 것은 없는데, ‘누군가가 성시소의 정보를 찾는다’라는 정보만 뜯긴 셈이 된다.
그리고, 이 장소를 나가자마자 미행이 붙을 것은 당연하고 말이다.
“…….”
백소하는 고민했다.
그리고, 그 꼴을 지켜보던 적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하기는.
“넌 사람이 너무 착한 게 문제야.”
“뭐라고요?”
적영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백소하를 자리에서 밀어내고는, 대신 그 자리에 앉으며 허리춤에서 도를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이죽거리듯 말했다.
“개소리 씨부리지 말고, 이렇게 하자.”
─콰앙!
날카로운 도의 끝이 탁상을 파고들었다.
탁상 가득 쌓여 있는 먼지가 일었고, 그 너머로 당황한 왕초의 표정이 보여왔다.
도, 은주머니, 왕초.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종이 뭉치.
나란히 늘어져 있는 그것들을 보며, 적영은 말을 이었다.
“자, 우리가 그 종이만 챙겨서 얌전히 가야 할 이유를 설명해 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