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보름달이 뜬 밤에 (4)
시간은 흘러, 밤.
청유백은 거진 반나절 동안이나 술을 들이켰다.
거침없이 들이부은 것은 아니었다만, 그래도 옆의 사람이 보기에 걱정될 정도는 되었다.
“이제 공자님에 대한 것도 말씀해 주세요. 어디의 귀족분이신가요? 이리 부유하시다면, 무지한 소녀라도 그 명성을 귀에 담을 법한 분이신 것 같은데…….”
“맞아요. 저희 둘을 동시에 사시는 분은 정말 오랜만이거든요.”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계속 술을 따르며 질문을 종용하는 여인들.
청유백이 듣기로, 이 기루에서 가장 비싼 두 명이라고 했다.
금을 타는 것도, 시를 읊는 것도 영 시원찮아 술이나 따르라고 했지만 말이다.
뭐… 보편적으로 보자면, 아름답기는 했다.
이 거대한 도시에서 가장 비싼 여인들이라는 평판은 결코 공으로 차지한 것이 아닐 테니 말이다.
청유백도 처음에는 꽤나 즐겁게 어울렸고, 최고급 술과 안주를 즐겼다.
허나… 글쎄.
술병이 둘이 되고, 셋이 되고, 넷이 넘어갈 즈음에는…….
“그, 그런데… 아직 괜찮으신가요? 많이 드신 것 같은데…….”
즐거운 마음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뒤였다.
청유백은 한숨과 함께 대꾸했다.
“괜찮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그, 그럴 리가요! 소녀는 그저 공자님의 건강이 염려스러워서….”
“술병에서 손이나 놓고 이야기하지.”
“……!!”
그런 말을 하면서도 계속 따르고 있다니, 참 무섭기 그지없다.
참고로 말하자면, 청유백에게 취기를 없애는 능력은 없었다.
취기는 독이 아니고, 선천진기가 마기라 하더라도 취기는 오르니까.
내공으로 취기를 분해할 수는 있겠다만, 멍청하게 비싼 술을 그리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취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했다.
청유백은 말을 이었다.
몇 시간 동안이나 그것을 마신 이후에야, 이 밤에 이르러서 말이다.
“훌륭한 술이야. 정말 좋은 술인데… 왜 굳이 쓸데없는 것을 더하는지 모르겠군. 손님 대접을 이런 식으로 하나?”
빌어먹을 년들.
술에 약이 타져 있었다.
정확히는 독이라 불러야 할까?
정신을 잃게 만드는 혼절산의 일종이었으니까.
“소, 소녀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안다. 관심도 없고.”
청유백은 코웃음 치며 남은 잔을 비웠다.
이 기루에 있는 모든 이가 산상만월의 관계자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극히 한정된 사람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가령…….
“뜸은 충분히 들이지 않았나.”
─똑똑똑.
저 너머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 저 여자라든가.
청유백은 손기척에 대답하지 않았다.
허나, 애초부터 대답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는 양 자연스럽게 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들어온 것은 여인이었다.
굳이 각자의 소개가 없어도, 청유백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일찍도 왔군, 루주.”
“저희 아이들이 만족시켜 드리지 못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분명 꽤 훌륭히 길러냈다 생각하는 아이들이었는데, 성에 차지 않으신 모양이지요?”
청유백의 비아냥거림을 능청스레 받아내며, 그녀는 눈웃음을 흘렸다.
대충 보기에는 젊은 여인이었다.
하지만, 엿보이는 기백은 그야말로 백전노장.
저 진한 화장과 주안술 뒤에 얼마만 한 세월이 감춰져 있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저 정도면 화장이 아니라 둔갑이 아닌가 싶다.
…뭐, 그것을 직접 물어볼 심술은 없지만 말이다.
“만족스럽지는 않더군.”
“별난 분이시군요.”
마치 서로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는 듯이, 얼굴에는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혀에는 칼을 숨기고 있었다.
전혀 개의치 않는 단답과, 예의상 오갈 법한 입에 발린 말하나 나오지 않는 인사의 와중.
루주는 술상 위에 올려져, 그 중앙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월병 그릇을 들어 보였다.
정확히는, 월병 중 하나를 말이다.
“그런데… 월병을 좋아하시나요?”
“아니.”
“구태여 찾으셨다고 들었는데요. 허면 어찌 한 입도 대지 않으셨습니까?”
“오늘은 썩 기분이 아니더군.”
“허면, 무엇을 할 기분이셨습니까? 저를 찾으셨다면… 달밤에 핀 절벽의 꽃에 손이라도 뻗어볼 심산이셨는지요?”
루주는 그리 말하며 웃고는, 앞섶으로 고운 손을 가져갔다.
청유백은 코웃음 치며 대꾸했다.
“손을 뻗으면 꺾이는 꽃인가?”
“손님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지요.”
─스륵.
옅게 들려오는 천 스치는 소리를 무시하며 청유백은 스스로 술잔을 채웠다.
그리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허리 굽은 꽃은 썩 좋아하진 않는다만, 그 위의 달구경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
“…….”
“밤은 짧으니까 말이야.”
청유백의 말에, 그녀의 강철 같던 웃음의 가면이 조금 찌그러졌다.
곧 다시 자연스러운 웃음으로 돌아오기는 했다만, 한순간 찌푸려진 입가를 청유백은 똑똑히 보았다.
천화가 멋쩍게 이죽거렸다.
허리 굽은 꽃이라….
[…방금 그건 본녀라도 상처받았겠구나.]
‘알 바냐.’
[여인에게 나이 들었다는 말은 하는 게 아니니라….]
‘그래서 돌려서 했잖아.’
[칼도 살살 찔리면 안 아프다고 할 놈일세.]
맞지 않나?
칼도 살살 찔리면 안 아프다.
아마도.
청유백은 천화의 타박을 무시하며 술잔을 기울였고, 잠시가 지나 루주는 기녀 두 명에게 명령했다.
“너희는 이만 나가 보거라.”
루주의 지시에 기녀들은 황급히 몸가짐을 추슬러 고개를 숙였다.
침묵이 흘렀다.
들려오는 것은, 술잔에 술이 따라지는 소리와 황급히 복도를 건너는 기녀들의 발소리.
그리고 그것들이 멎어들 때 즈음, 루주는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실례했습니다. 근래의 상황이 상황인 바, 귀인을 시험하게 된 것을 부디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개의치 않네.”
청유백은 다시금 술잔을 비웠다.
이 술상, 방금의 문답.
단순한 대화로 보였지만, 그 전부가 산상만월의 접선을 위한 암호의 일종이었으니까.
계절에 맞는 달이 뜬 밤에 찾아와, 그날 뜬 달의 모양으로 월병을 베어 물어 가장 위에 올려둔다.
보름이라면 먹지 않고, 삭이라면 전부 먹어 그에 따른 문답을 오가는 식이었다.
오늘은 보름달은 아니었다만─
애당초,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이곳에 들어와 있는 것이었으니 처음부터가 엉망이었던 셈이다.
문득, 천화가 물었다.
[허면 마지막 것은? 젊은 아이에게도 그리 말하느냐?]
‘아니, 짜증 나게 하잖아.’
[…….]
개의치 않기는 무슨…….
천화의 이죽거림을 무시하며, 청유백은 루주의 질문을 들었다.
“신월께서는 편안히 지내십니까?”
“편안이라니, 그분과 가장 거리가 먼 질문을 하는군. 어떨 것 같은가?”
“아… 그렇겠군요.”
루주는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갑다.
‘편안은 얼어 죽을 놈의 편안.’
신월이 뭐하는 놈인지도 모른다.
그냥 야황 놈이 지껄였던 것을 나오는 대로 내뱉은 것에 불과했다.
그놈이 후계자들을 어지간히도 쪼아 댔던 것을 자랑스레 늘어놓았으니, 지금도 그럴 것이라고 어련히 짐작할 뿐이고 말이다.
“몸은 괜찮으신지요?”
“안 괜찮게 될 뻔했지. 퍽 강한 독이군그래.”
술을 그리 퍼마셨는데도 이리 정신이 말똥말똥하다니.
대놓고 기절시키려고 작정하고 넣은 것이 분명했다.
루주는 멋쩍게 웃더니 대꾸했다.
“근래의 상황이 상황인지라, 미리 정보를 전달받지 않은 이가 찾아오면 먼저 제압하고 신원을 묻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급한 사안이라고 하지 않았나.”
“하하하…. 그 부분은 부디 용서를 빌겠나이다. 해서, 신월의 대리인께서 어찌 이 먼 변방에까지 나오셨습니까?”
“최근 천마신교의 동향 때문일세.”
그래, 이 질문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으리라.
기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부터 질문, 대답까지 전부 다 백이십 할짜리 공갈이다.
저들이 마교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지 도대체 어찌 알겠는가.
정말로 이들이 교주를 죽였는지, 아닌지조차 확실치 않은 판이다.
적당히,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들키지 않을 질문으로 정보를 끌어내야만 했다.
“사마신교가 아니라, 천마신교 말입니까? 허나… 지난달 내려온 지령에서는 사마신교의 움직임에 집중하라 하였습니다만.”
사마신교, 사마신교라.
‘그분…이라고 했던가?’
녹운룡이 그만큼 맹목적으로 미쳐 있던 누군가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일 테다.
헌데, 마교뿐 아니라 다른 세력들까지 그들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만큼 대놓고 움직이고 있다는 소리군. 모든 것을 물밑에서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청유백은 의아한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루주에게 대꾸했다.
이렇게 말하는 게 좋을 터였다.
“마교가 사교의 움직임을 눈치챈 것 같네.”
“……! 어느 정도입니까?”
“아직 모르지. 해서 자네를 찾은 것일세. 마교의 동향은 어떤지.”
“그렇습니까. 그러고 보니, 근래에 두 번째 시험이 끝났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열흘 전일 겁니다.”
“후계자들의 행보는?”
“아직 들어온 바가 없답니다. 변방의 쥐새끼들 주제에, 여전히 방첩 하나만큼은 잘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확실히, 분위기가 심상찮다고는 하더군요.”
하하, 쥐새끼라.
청유백의 귓가에서 천화가 악을 쓰며 화를 내는 것이 들려왔다.
하지만 이곳에서 난장을 피울 수도 없는 일.
청유백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허면 교주에 대한 것은 어떻지?”
“새로운 정보가 들어온 바는 없습니다. 혹여, 저희가 놓친 동향이 있어 문책하시러 오신 겁니까?”
“…문책씩이야 하겠는가.”
놓친 동향.
분명 그리 말했다.
그래, 현 교주가 요즘 공식 선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뜸해진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즉, 죽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
[이 아이는 모르는구나. 이들이 한 일이 아니야.]
그렇다.
‘마교를 상대하는 가장 최전방의 지부를 이끄는 여인조차 모른다?’
그 말의 의미는 단순하다.
산상만월이 벌인 일이 아니다.
…허면, 대체 누가?
대관절 누가, 그리도 은밀하게 마교에 침입하여 교주의 목을 딸 수 있단 말인가.
청유백은 생각을 정리하며 대꾸했다.
“문책은 내 일이 아니지. 언젠가 그리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살벌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루주는 피식 웃었다.
아직 의심받는 기색은 없었다.
‘이왕 온 김에… 몇 가지 질문을 더 해 볼까.’
아직 대화는 자연스러웠다.
책잡힐 구색은 없었으니, 조금은 더 대담하게 나가도 될 것이다.
“기실… 문책이 아니라, 사실 하나를 확인하러 왔다네.”
“무엇을?”
“성씨세가의 여식이 이곳, 신원에 있는 것을 아는가?”
명확한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전혀 모른다고 대답해도 상관없다.’
그것은 그것대로 주요한 정보다.
산상만월이 누군가의 암살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은, 최소한 그 의뢰가 중원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라는 소리다.
만약 그랬다면, 그들이 모를 리가 없으니 말이다.
허나 들려온 대답은──
청유백의 기대보다도 훨씬 명확한 것이었다.
“압니다. 사교의 목표물은 항시 추적중이니까요.”
‘……!’
[그 아이를 노리는 것이 사마신교였더냐!]
청유백은 순간 표정이 흔들리려는 것을 참아냈다.
사마신교라고?
아니, 하지만… 왜?
무엇 때문에 사마신교에서 그 아이를 죽이려 한단 말인가.
청유백이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루주가 청유백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직 윗선에서 논의하고 계시는 일일세. 알려 하지 말게.”
“그렇습니까…?”
청유백은 되는 대로 대꾸했다.
무슨 일인지 아냐고?
웃기는 소리.
아무것도 모른다.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물은 것이지만, 이 상황에서 왜 사마신교가 성시소를 쫓는지 묻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그것대로, 달리 알아볼 방법을 찾아봐야 할 테다.
“아무튼, 새로 들어온 정보가 없다면 이만 일어나야겠군. 당분간은 첩보에 집중하게.”
“명대로 하겠나이다.”
청유백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루주는 고개를 숙였다.
이대로 떠나면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테다.
모든 것은 완벽했다.
그러나 청유백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물을 만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지.”
“하문하시지요.”
“최전선에서 마교와 사교의 동향을 살피는 자로서, 어떻지? 우리가 아니라면… 마교에 숨어들어 교주의 목을 딸 수 있는 존재가 있겠나?”
청유백의 물음에 루주는 옅게 웃었다.
질문 자체가 우스운 것인지, 혹은 그런 질문을 하는 청유백이 우스운 것인지.
그것은 모를 일이겠다만, 그녀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설마요. 선대 야황께옵서 살아 돌아오시는 것이 아님에야…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 뻔한 대답이군. 기대한 것은 아니야.”
“그럼에도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겠지.”
그래, 당연한 대답일 테다.
그만큼, 교주가 죽었다는 상황이 당연하지 않다는 말이 되겠지만 말이다.
루주는 말을 이었다.
“도련님께 안부 전해 주십시오.”
“그래, 물론이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