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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123화 (123/200)

제123화. 보름달이 뜬 밤에 (3)

해가 중천에서 조금 더 기울어 갈 즈음, 일행은 신원의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경비병이 검문을 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만약을 위해 장포로 얼굴을 가린 성시소 탓이었다.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몰골이니 할 말이야 없었다만.

대뜸 욕설을 지껄이며 다가온 경비병의 모습에, 백소하가 곧바로 적영을 막아 세웠다.

“참아, 어허, 그건 죽이는 거 아닙니다. 씁.”

“안 죽여! 내가 뭐 짐승이냐? 한 대만 때릴게! 한 대만!”

“죽이겠다는 말이잖습니까!”

“아, 안 죽는다니까!”

…뭐, 황돈이 은 몇 냥 쥐여 주자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 장면이 보이지 않았는지─황돈의 풍채 때문일 것이다─ 왜 저들이 우릴 그냥 보내주느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통에 그 질문은 결국 마음속에 간직할 수밖에 없었다.

“자, 여기가 신원이오! 너무 신기해하진 마시오. 촌놈 같잖소.”

“오오……!”

눈에 담은 도시는 거대했다.

천산의 근처에 있는 작은 현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성벽과, 그것을 따라 줄지어 있는 건물들.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가히 장관이라 할 법했다.

건물 하나하나는 마교와 비교해서 별다를 것도 없었으나, 이리 한정된 공간에 밀집하여 있는 것은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어떻게 할 겁니까? 이곳에서 하루 묵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여름이라 해가 길다고는 하지만, 다시 산으로 들어가면 의미도 없을 테니까요.”

“안다. 지금 출발해도 밤까지 다음 마을에 닿을 수는 없겠지.”

“허면…?”

“그동안 다급히 달려 왔으니, 하루 정도는 쉬어도 괜찮지 않겠나?”

일행의 시선이 청유백에게 집중되었다.

고민도 없이, 상상 이상으로 선선히 수긍했지 않은가.

“뭐, 뭐야. 당신 어디 아파? 찔러도 피도 눈물도 안 나올 것 같은 인간이…….”

“…….”

빨리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무슨 게으름이냐 말할 것 같던, 저 피도 눈물도 없는 철인이 저리 대답하다니!

황돈은 적영의 허튼 말에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까 잽싸게 입을 열었다.

“그, 그러면 소인이 잘 아는 숙소로 안내하겠소! 이곳이 또 아주 그냥 기가 막히오!”

* * *

“아! 그래, 못해도 이 정도는 되어야 잘 맛이 나지!”

적영은 커다란 방 중앙에 깔려 있는 이부자리에 몸을 던지며 얼굴을 부볐다.

이곳 이름이 뭐였더라?

태성관(台星關)이었던가.

아무튼, 이곳 신원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호화로운 여관이라 했다.

비싸기도 오지게 비싸 보였다만, 뭐 황돈 돈이니 알 바 아니지 싶었다.

방도 하나가 아니다.

총 세 개.

이것도 남은 방이 별로 없어 저쪽에서 양해를 구한 것이지, 여유가 있었다면 인원수대로 방을 빌렸을 테다.

‘…생각해 보니 이 자식, 쓸모가 많잖아?’

이 정도면 0인분에서 반인분 정도로는 올려줘도 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뭐.

아직 한낮이었고, 여독을 푸는 것이 목적이라면야 이곳에서 그냥 뒹구는 것도 훌륭한 휴식이 되겠다만.

‘나는 할 일이 있지.’

청유백은 자신이 빌린 방 한구석에 짐을 몰아넣고는, 그대로 다시 방 바깥으로 나왔다.

“어라.”

밖에는 난간에서 바람을 쐬고 있는 녹지연이 있었다.

“청유백, 어디 가시나요?”

“나는 볼일이 좀 있어서.”

“볼일…….”

녹지연은 어딘가 아쉬운 듯한 눈초리로 청유백을 마주하더니, 이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중요한 일인가 보네요. 잘 다녀오세요.”

녹지연은 별말 없이 청유백이 지나갈 수 있게 길을 비켰다.

자신이 필요한 일이었다면, 필요하다 숨기지 않고 말했을 것이다.

어딜 가느냐 물어서 뻔한 대답을 듣는 것보다는, 그냥 보내주는 것이 나을 테다.

“위험한 일은 아니죠?”

“나한테 말인가, 아니면 너한테?”

“글쎄요? 지난밤 같은 정도라면 위험하지 않겠죠.”

지난밤.

무엇을 뜻하는지는 명확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것 같았다만, 알고 있었던가.

청유백은 피식 웃었다.

“알고 있었나?”

“잠자리는 예민한 편이라서요.”

녹지연은 살풋 웃었다.

알고 있음에도 돕지 않았다.

그때도 돕지 않았고, 지금도 돕지 않을 것이다.

실용 없는 동정은 죄의 한 종류이고, 능력 없는 적선 또한 죄의 한 종류.

“당신이 바란다면 언제든 돕겠지만요. 그러길 바라나요?”

도움을 원치 않는 자에게 손을 내미는 것 또한, 크나큰 잘못의 하나일 테다.

청유백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녹지연이 말을 이었다.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다녀오세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

…청유백이 가고 난 후, 방에서 나온 백소하와 적영의 눈이 마주쳤다.

“뭐야, 아까 황돈 녀석이랑 청유백도 나가던데, 넌 또 어디 가냐?”

“이 정도 큰 도시면 책방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잣거리의 풍속은 어떠한지…….”

“넌 여기 나랑 있어. 심심해.”

“이, 이건 폭거입니다! 저도 권리가… 아니, 무슨 힘이… 악! 아, 알겠다고요!”

* * *

청유백이 향한 곳은 홍등가였다.

서쪽의 으슥한 구역.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난다면 썩 당당하게 행보할 만한 거리가 아니게 되겠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라 거리는 상당히 한산했다.

그나마 거리를 노니는 것은 온갖 짐을 나르는 업자들 정도였다.

청유백의 발걸음은 지체 없이 한 기루로 향했다.

다섯 층짜리 거대한 전각을 세운, 성화루(成化樓)라 이름 붙여진 호화로운 기루였다.

[흐음, 기루에 가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 아니더냐? 네놈도 사내자식인 건 알겠다만, 대낮에는 좀…….]

‘사람이 많으면 번거로운 일이다.’

[번거롭다? 무슨 뜻이더냐?]

청유백은 대답 않고 대문의 문고리를 밀었다.

안에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밤에 일하는 기녀들은 한창 쉴 법한 시간이고, 하룻밤 묵은 손님들은 이미 빠져나가고 없을 법한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저만치에서 점소이로 보내는 사내 하나가 달려와 청유백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저, 손님. 송구하지만 지금은 영업시간이 아닙니다.”

“안다.”

“네? 허면….”

“루주를 뵈러 왔다.”

그 말에 점소이는 알게 모르게 청유백의 차림을 훑었다.

그리 지저분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여행 중이고, 야간에 거칠게 움직였다고는 해도 그 정도 간수할 몸가짐은 보일 수 있었으니 말이다.

허나 어딘가의 고관대작이라고 보기에는 분명 평범한 옷차림이었다.

의외로, 점소이는 침착하게 물었다.

“혹여 약속이 있으셨습니까?”

“그래. 말씀하시면 아실 게다.”

“즉시 전하겠습니다.”

점소이는 고개를 숙여 물러났고, 천화는 흥미롭다는 양 물었다.

[그런 약속 한 적 없잖느냐?]

약속은 뭔 놈의 약속.

이곳은 처음 올 뿐더러, 청유백이 누군가에게 미리 서신을 전하는 것 같은 행위도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무언가의 언질을 전해 들은 적도 없고 말이다.

청유백이 계속 묵묵부답하자, 천화는 짜증내듯 신음을 반복하더니 뭔가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아, 설마 여기가…….]

청유백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신원에서 하루를 묵는 목적.

다른 이들에게야 듣기 좋게 둘러댔지만, 애초부터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산상만월.

그들에게의 접근이었다.

‘원래는 다른 방법이 있다. 여기서 무슨 음식을 시키면서 암호를 말하고… 거기에 또 대답을 하고…….’

그걸 몇 번 반복해서, 저쪽에서 신호를 알아보고 접선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번거롭고, 귀찮다.

무엇보다 그 방법은 상대방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볼 시간을 주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에게 썩 유리하게 작용하는 일은 아니리라.

헌데 갑자기, 아까 다가온 점소이가 아닌 다른 사내가 다가왔다.

젊은 점소이보다는 조금 연륜이 있어 보이는 사내.

다시 보니, 점소이는 그의 뒤를 따라 쭈뼛쭈뼛 내려오고 있었다.

일개 점소이는 아닐 테니, 루주의 대리인 정도는 되리라.

사내는 청유백에게 읍하며 물었다.

“어느 분이 오셨다고 전하면 되겠습니까?”

“신월(新月)의 대리인이 왔다 전해라.”

청유백은 지체 없이 대답했고, 그 말을 듣고는 사내는 곧장 어디론가 달려가 사라졌다.

딱히 당황한 기색은 아니었지만, 뭔가 의아한 듯 보이기는 했다.

[대리인? 그게 무어냐?]

‘산상만월의 후계자. 그 직위를 신월이라고 부른다.’

[그건 또 어찌 안 게야?]

‘야황이 말해 줬지. 할 짓도 없어서 허구한 날 술 마시러 오던 양반이었거든.’

실력은 좋은데, 몸값은 죽여주게 비싼 인간.

살아만 있다면 천하의 그 누구라도 죽일 수 있다는 살수였지만, 그 몸값이 터무니없이 비쌌다.

의뢰 한 번에 황금 일만 관.

황금 일만 관이면, 원한이고 나발이고 잊고 살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금액이다.

그걸로 사람 목숨을 사느니, 그냥 잊고 행복하게 사는 게 나은 돈이란 말이다.

‘말이야 사파 최고수였다만, 의뢰가 안 들어오니 사실상 백수였어. 그 인간.’

물론, 휘하의 살수들을 양성하는 일도 있었으니 마냥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겠지만서도.

아무튼, 썩 막역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심심하면 술 마시러 오는데 이 미친 인간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고, 아닌 밤중에 문 두드려서 안 열어주면 부수고 들어오는 인간이라…….

‘…아무튼 그랬었다.’

[백 년이나 지났는데 그게 안 바뀌었겠느냐?]

‘죽은 지 삼십 년이면, 괜찮을걸?’

안 그래도 확인한 차였다.

자신이 알고 있던 마교의 암호 체계는 얼마나 바뀌었는지 말이다.

그런데, 뭐.

걱정 안 해도 될 듯싶었다.

청유백이 그렇게 멍하니 있기를 잠시, 저 멀리에서 아까의 그 사내가 다시금 다가왔다.

“저… 죄송하지만, 시간이 너무 이르다 합니다.”

“당장 일각을 다투는 일인데도?”

“죄송합니다. 이 이상 들어주지 말라 하셨기에…….”

사내의 표정도 난처해 보였다.

청유백 때문이 아니라, 루주의 반응이 의외였던 것이리라.

‘편법은 안 된다는 건가.’

청유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관없다.

어차피 하룻밤 동안은 시간이 있지 않던가.

“…그렇군. 좋다. 허면 기다리지. 방을 줄 수 있겠나?”

“아, 예! 물론입니다. 어찌 도와드릴까요?”

“육 층의 두 번째 방을 빌려주게. 술상은 계절에 잘 맞는 것을, 그러나 월병은 있었으면 좋겠군. 술은 월영취로.”

청유백이 그리 말하자, 사내는 난처한 듯 대꾸했다.

“저, 손님. 저희 기루는 오 층까지밖에는…….”

“알고 있네.”

모를 턱이 없다.

바깥에서 보기에도, 건물의 외견은 오 층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바깥의 외견은 그저 꾸밈용 속임수일 뿐이다.

이 건물은 여섯 층짜리다.

아니, 숨겨진 지하의 한 층을 포함한다면 일곱 층이라 말해도 무리가 없을 테다.

가장 꼭대기의 여섯 번째 층.

‘특별한’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다.

본디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추천을 받거나, 오래도록 이곳에 들려 신뢰를 쌓아야만 하겠으나─

‘그럴 시간 없다.’

청유백은 소매에서 금 한 냥을 꺼내어 사내에게 튕겨 주었다.

반짝이는 황금색이 찬연한 태양빛에 반사되어 빛났다.

말할 필요도 없는 황금이었다.

“더 필요한가?”

“아, 아뇨.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물론이고말굽쇼! 예!”

“아, 그리고……”

“뭐든 말씀하십쇼!”

“지금 깨어 있는 아이가 있나?”

청유백은 여색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만, 그동안 거진 금욕적으로 무예만을 추구해 온 탓이었다.

하지만, 기루에 와서 쓸쓸히 술을 기울일 정도로 고자 새끼인 것도 아니다.

천화가 옆에서 흥미롭다는 듯이 계속해서 목청을 흐으으으음, 하고 울렸다만, 신경 쓰지는 않았다.

“하하, 공자님 같은 분이시라면 자던 아이라도 뛰쳐나와 마주할 겁니다. 어떤 아이를 원하십니까?”

“시가를 잘 읊는 아이 하나, 그리고… 금을 탈 줄 아는 아이도 있었으면 좋겠군.”

“아아! 알겠습니다. 준비토록 하지요. 야! 개똥아! 와서 공자님 모시거라!”

“예, 옙!”

아까의 점소이가 달려와 청유백을 응대했다.

곧이어 가장 큰 전각으로 들어가 층을 올랐고, 한산한 복도를 지나 호화로운 방 한편으로 안내받았다.

온갖 돈지랄을 한 것이 딱 눈에 보이는 방이었다.

족자에, 벽지에, 병풍에…….

아주 그냥, 황금을 주체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천화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헌데, 다른 기척이 없구나? 무슨 암살 집단이라길래 흉흉할 줄 알았더니, 감시하거나 지키는 이 하나 없느니라.]

‘여긴 그저 창구일 뿐이니까. 평소에는 그냥 고급 기루일 뿐이야.’

이곳의 진실을 알고, 진면목을 위해 찾아온 이들에게나 다르게 보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밤이 찾아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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