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보름달이 뜬 밤에 (1)
성시소의 완벽하다 못해 아름답게까지 느껴지는 인사에, 백소하는 흥미롭다는 양 흐음, 하고 목청을 울렸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상당히 예의가 바르군요….”
“이상할 건 없지. 양갓집 아가씨잖아. 예절 교육은 당연한 거 아냐?”
뭐, 그건 맞는 말이다.
부잣집 자식이라고 해서 다들 버릇없고 멍청하며 살만 디룩디룩 쳐 찐 머저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참 외람된 오해라고 말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돈 많으면 어디다 쓰겠는가? 당연히 자식새끼 교육하는 데에 쓴다.
황돈의 말에 따르면 성시소라는 저 소저는 퍽 잘난 집안 사람이니, 상당한 교육을 받았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어라, 그런데…….
백소하는 순간 힐끗 적영을 돌아보았다.
“적가는 양갓집이 아니었나……?”
“뭐라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백소하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재빨리 성시소와 차 호위에게 다가가 물었다.
“짐이 있다면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두 분께서 말을 같이 타셔야 할 테니, 말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것이 좋겠지요.”
“아, 그래 주시겠습니까?”
“얼마든지요.”
백소하와 다른 이들은 주변의 표사들에게 몇 가지의 물건을 받아 각자의 안장에 실었다.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약간의 옷가지와 식량 등이었다.
성시소가 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표사 여러분은 돌아가셔도 됩니다. 가마는 버리시고 표국으로 돌아가세요. 제가 가문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사람을 시켜 잔금을 치르게 보내겠습니다.”
“뜻대로 따르겠습니다. 부디 살펴 가십시오.”
그들에게는 이 일에 대해 왈가왈부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환영이었기에, 인사치레의 거절 한번 없이 가벼이 받아들였다.
차 호위처럼 처음부터 그녀를 따라온 호위 무사도 아니었을뿐더러, 고작 몇 달 여행한 것 가지고 그녀에게 충성심이 생기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그들은 그저 금전으로 묶여 있는 관계일 뿐이었다.
구두계약이지만, 저 지체 높은 가문의 아가씨가 고작 돈으로 두 말을 하지는 않을 터.
그들은 인정이 없다 느껴질 정도로 곧장 발걸음을 돌렸다.
온 길을 그대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아, 아마 대충 처리하고 온 동료의 시신을 다시금 안장하러 가는 것일 테다.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녹지연이었다.
“서둘러 움직이죠. 곧 해가 질 거예요. 조금 무리하면 그 전에 천산을 나갈 수 있을 겁니다.”
녹지연은 그리 말하며 청유백을 돌아보았다.
분명히, 그가 이들을 만나기 전에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을 쫓고 있는 사람들은 없다─라고.
청유백은 그 눈빛을 눈치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소리였다.
주변에 추적자는 없다.
백소하가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며 먼저 말에 올랐다.
“빨리 움직인다면 아예 추격자를 만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천산은 곧 벗어날 수 있을 테니, 그 때부터는 관도를 타고 신원(伸冤)으로 행합시다.”
“가장 가까운 도시군요. 헌데… 사람이 많으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저자들이 자신들이 목에 현상금이라도 걸었다면, 그것을 보고 달려드는 이가 없다 단언하지는 못할 테다.
그리고 사람이 많으면, 그런 자들도 많이 모여 있을 것이 뻔한 일.
하지만 백소하는 단언했다.
“어느 마을이든 똑같습니다. 곤륜기를 무시하고 달려드는 산적이 있는 판에, 변방 현의 왈패들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요. 작은 마을이라 안심하고 있다가 습격받는다는 것도 충분히 있을 법합니다.”
어차피 어떤 수단이든 가리지 않는 상대다.
빈대 하나 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우는 것을 거리끼지 않는 상대.
상당히 꺼려지는 상대이지만, 의외로 대적하는 법은 간단한 법이었다.
초가삼간을 태워서라도 잡으려 한다면, 다 태우지 못할 정도로 넓은 곳에 숨으면 된다.
백소하는 말을 이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군중 속에 숨는 것이 낫습니다.”
* * *
다시 며칠이 흘렀다.
성시소는 생각보다도 이 행군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잠자리에 투정을 하지도 않았고, 먹을 것이 모자란 것에 불만을 표하지도 않았다.
그저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순응할 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일행들과 불화가 생길 일도 그다지 없었고….
자연히 다른 이들과 말문을 트며 한담을 나누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와아! 진짜요?”
“그래! 정말이라니까? 동굴 속에 거의 뭐 집채만 한 황소가 있었는데…….”
가장 친해진 것은 적영이었다.
성시소는 모험이니 탐험이니 하는 것들을 좋아하는 성정인지,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퍽 좋아했다.
솔직히 보는 입장에서는 적영이나 그녀나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들 같았지만서도.
뭐,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의 대화가 있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백소하는 옆에 딱 붙어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그녀들에게서 고개를 돌려 청유백과 마주했다.
“헌데… 다행이군요.”
“뭐가?”
“예까지 오는데 추적자를 아직 보지 못했잖습니까. 아마 내일이나 모레 즈음에는 신원에 도착할 테니, 그때부터는 조금 안심해도 되겠지요.”
이것이 누군가에게서 도망치는 여정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평화로울 따름이었다.
황돈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그냥저냥 신경도 안 쓰는 듯 보였지만 말이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긴 하다.
백소하는 그리 생각하며 대답도 않는 청유백에게 말을 이었다.
“헌데 낯빛이 좀 어둡군요. 피곤해 보입니다. 잠이라도 설쳤습니까?”
“티 나나?”
“아뇨? 그냥 평소보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길래 찍었습니다. 네 낯빛 따위 알 게 뭡니까.”
“…….”
청유백은 머리가 아픈지 미간을 주무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백소하는 그가 무엇 때문에 저러는지 알 방법이 없었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망할,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시간이 다시 흘렀다.
산은 이미 벗어났지만, 밤은 그래도 오기 마련이다.
찬연하니 밝은 보름달.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옅은 달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이미 천산의 영역은 벗어났다.
땅은 대부분 평탄 대로였으나, 오늘은 운 없게도 민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면 어쩌겠는가.
야숙이지.
[딱 중천이로구나. 밤 산보 하기 참 좋을 시간이다.]
‘동의한다.’
천화의 흥얼거림과 함께 청유백은 조심스레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둠에 고개를 두리번거릴 필요는 없었다.
아직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 탓에 여전히 밝았기 때문이다.
불쏘시개로 모닥불을 뒤적이던 차 호위는 일어서는 청유백을 보고 물었다.
“더 주무시지 않구요.”
“본디 밤잠이 적은 편인지라.”
불침번이 아직 청유백의 차례는 아니었다.
청유백의 번은 끝번.
어스름이 올라올 즈음에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헌데, 청유백은 절그럭거리며 자신의 검 세 개를 챙기더니 나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바람 쐬러.”
“…이 밤에 말입니까?”
“나들이 가기 딱 좋은 달 아닌가.”
물론 핑계일 뿐이다.
나들이를 가는 데 칼이 무어 필요할까.
‘경계라도 하러 가는 건가.’
차 호위는 그것을 눈치챘다.
“아, 허면…….”
하지만, 차 호위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무슨 일이 있다 하여 불침번 하나 남겨두지 않고 둘이 전부 가버린다면 그야말로 본말전도 아닌가.
굳이 조심스레 일어난 것도 이유가 있을 테다.
‘설마, 지금까지 조용했는데 오늘이라고 혼자 누군가와 맞닥뜨리시진 않겠지.’
차 호위는 그리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잘 다녀오십시오.”
청유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야밤의 산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흐으음. 그래… 이쪽으로 오백 보 정도. 그래, 그쪽을 보고다.]
머릿속에서 천화가 길을 안내해 주었다.
어둠이 그렇게까지 큰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는 하나, 그래도 역시 영체인 천화가 보는 것이 더 많다.
가령 예를 들자면─
대략, 반나절 전부터 자신들을 발견하고 쫓고 있던 저 무리의 위치, 같은 것 말이다.
청유백은 직선으로 달렸다.
떨어져 있는 거리는 대략 삼백 장.
오래지 않아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오늘도 척후인가?’
[그렇겠지. 계속해서 꼬리를 자르고 있지 않느냐. 계속 척후의 소식이 끊기니 새로운 녀석들을 보내야만 하고 말이다.]
지난 며칠, 청유백은 밤마다 몇백 장 너머에서 떨어져서 자신들을 감시하는 추적자들을 척살했다.
다른 이들을 깨울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이러는 이유는 단순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거니와, 낮의 움직임을 늦추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밤에 잠을 설쳐 낮에 느리게 간다면, 척후대 따위가 아니라 대낮에 본대에게 따라잡힐 가능성도 있다.
피곤한 일이라면, 도리어 그쪽이 수십 배는 더 피곤하게 될 터.
천화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조심하거라. 계속해서 보내는 주기가 빨라지고 있어. 소식이 끊기면 그대로 죽었다고 판단하고서 새 부대를 보낸다는 뜻이니라.]
당연히, 보낼 때마다 더욱 강한 놈을 보내오는 것은 덤이고 말이다.
하지만 놈들도 머리 달린 사람이다.
빡대가리처럼 약한 놈부터 순서대로 보내기보다는, 몇 번 해 보다가 안 되면 자연히 가장 강한 패에 손이 가기 마련이다.
그게 오늘일 수도 있고 말이다.
‘걱정 마라.’
남은 거리는 백 장.
결코 멀지 않다.
청유백은 검병에 손을 올렸다.
발소리가 땅을 울리지는 않았지만,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옷자락에 스치는 소리만큼은 들려왔다.
운이 없었다.
바람이 불지 않았다.
“……!!”
상대방 쪽에서 청유백의 기척을 알아챘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 바람 소리가 울려오지 않았던가.
─파팟!
작은 도약음과 함께 몇 개의 기척이 청유백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도망치는구나. 쫓겠느냐?]
‘당연하지.’
저들의 역할은 청유백 무리를 척살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지켜보고, 주시하며, 그 위치를 알리는 것뿐.
그러니 도망쳐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인 셈이었다.
허나, 당연히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청유백은 땅을 박차 솟아올랐다.
나뭇가지를 밟고 뛰어올라, 숲의 위로 치솟아 올랐다.
만월의 밤이다.
달은 밝고, 자애로운 빛이 만천하를 비추는 밝은 밤이었다.
저들은 흩어지고 있었다.
당연했다. 어차피 목적은 척후.
여럿 중 한 명이라도 살아 있다면, 그 역할은 온전히 발휘할 수 있다.
죽인다면, 모두를 죽여야 한다.
[할 수 있겠느냐?]
“못 할 것 없지.”
내공은 이 갑자.
검은 세 개다.
이것들을 전부 사용하여 싸울 수 있는 시각은 고작해야 일각뿐.
적은 시간이지만, 그럼에도 일각이다.
저 조무래기들을 죽이는 데에 그만큼이나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우웅!
손에 든 백월검이 맑게 빛났다.
달빛을 반사하여, 찰나의 빛을 그 검신에 담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공명하듯, 나머지 검집에 담긴 두 개의 검도 스스로 떨며 서서히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일순간, 별이 반짝였다.
아니, 하늘에서 무언가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으나─ 그것이 별인지 누가 알 수 있으랴.
청유백은 날 수 없었다.
높이 뛰어올라 저들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어도, 그것을 오랜 시간 유지할 방법은 아직 없었다.
그러나, 그 시간이면 충분했다.
─파앗!
섬전(閃電).
반짝이던 별이 일순간에 지상으로 추락했다.
어느 날의 밤하늘에서 보았던 별똥별이 그러했듯이, 찬란하게 반짝이는 꼬리를 끌고서 깊은 숲속으로 날아들었다.
그러고는.
─퍼석!
“……! 어떻…게?!”
붉은 꽃을 피웠다.
홍련(紅蓮)이었다.
각자의 심장을 파고든 세 개의 칼은 주저 없이 빠져나와 다시 청유백에게로 향했고, 그 자리에는 허탈하게 죽어가는 시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검들은 다시 청유백에게로 돌아왔다.
날아오는 동안 피는 이미 전부 흘러내려 사라진 뒤였다.
명검이 괜히 명검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리라.
“다음은 어디지?”
[동남쪽. 숫자는… 넷이구나.]
“좋다.”
시간이 많지는 않다.
쫓는 것도 귀찮은 일이니 말이다.
청유백은 다시금 나뭇가지를 밟고, 밤하늘 위로 뛰어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