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뜻하지 않은 만남 (5)
아이고 쾌재다!
어이쿠 호재로다!
‘이게 웬 떡이냐!’
오로목제!
서역과 중원을 잇는 사주지로(絲綢之路)의 허리 같은 도시였다.
당연히, 수많은 이해관계와 원한이 엮여 있는 장소였고.
아무리 마교라고 해도, 이 거대한 도시를 통째로 지배하에 두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었다.
서역 수많은 나라의 상인이 오가는 무역의 중심지일뿐더러, 중원의 무림뿐만 아니라 황실조차도 주시하고 있는 도시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 오로목제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었고.
그것을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이란, 더더욱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오로목제도 사람 사는 곳.
누구보다 먼저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이들은 있기 마련이었고, 그들 중 일부는 유지가 되고 지주가 되어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오로목제의 성씨세가라 하면, 누구나가 알아주는 오로목제의 대지주!
그 깐깐하기 그지없는 양반과 식사 자리 한 번이라도 마련하기 위해 황가에서 돈을 얼마나 썼는데, 천금을 주고도 못 사는 기회가 굴러들어온 꼴이었다.
“부탁입니다, 협객님들! 부디 저희와 함께 움직여 주십시오!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하실 것이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여러분의 키만큼 황금을 쌓아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 성씨세가의 사람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가씨라는 자는 가마 안에서 여전히 겁에 질려 있는 듯 보였지만, 은혜를 입어놓고 그대로 저버리지는 않을 터.
“허어…….”
황돈은 슬쩍 고민하는 듯하더니, 청유백을 돌아보았다.
어찌해야 할지 묻는 눈빛에 청유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네 알아서 하라’라고 대충 입을 달싹였다.
‘어휴, 이거 참.’
입꼬리가 씰룩인다.
하지만 안 된다.
진정 좋을 때, 웃는 것은 하수다.
고수는 좋을 때 오히려 얼굴을 찌푸릴 줄을 알아야만 한다.
“허… 오로목제, 오로목제라…….”
황돈은 힐끗 자신에게 허리를 숙인 사내를 돌아보았다.
차 호위라고 했던가.
성씨세가씩이나 되는 가문 아가씨의 호위를 맡는다고 생각되기에는 꽤 어린 나이대였다.
이십대 중반 정도나 될까.
이름도 뭔가 말했었던 것 같은데, 알 게 뭔가.
‘중요한 건, 머리를 조아렸다는 사실. 누가 갑인지는 명확하지.’
좋은 조건은 바로 덥석 받아버리면 안 된다.
좀 더 애간장을 태우다가, 마지못해 받아주는 식으로 거들먹거려야 하는 법이다.
“흐으음…….”
“무, 무언가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최대한 맞춰 드리겠습니다.”
차 호위뿐만 아니라, 주변의 호사들까지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급기야, 누군가 땅에 머리를 처박고 조아리자, 다른 사람들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 따라서 큰절을 하기 시작했다.
순간, 청유백을 포함한 네 명의 이목이 황돈에게 쏠렸다.
다음 그가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
“허허, 이러지 마십시오. 비록, 저희가 가는 방향과 반대된다고는 하나… 곤경에 처하신 분을 어찌 내버려 두겠습니까.”
“그, 그런… 그런 고생을 하시면서까지…! 감사합니다, 대협님들! 감사합니다!”
“이리 부탁하시는 것을 그냥 넘어가기도 어려운 법이지요. 비록 우리와 방향이 반대라고는 해도… 그래요. 먼 길을 돌아가게 되겠지만….”
“감사합니다, 대협! 감사합니다!”
황돈은 묘하게 무언가를 반복해서 강조하며 말하고 있었다.
아직도 바닥에 엎드려 있는 그들을 일으켜 세워 주며, 계속해서 그것을 상기시키고 있지 않은가.
목적지가 그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러분을 모른 척할 수 없으니…….
“…….”
저거… 공갈 아닌가?
적영은 고개를 까딱이며, 옆의 백소하에게 전음을 날렸다.
우리 목적지가… 오로목제 아니었나?
{저거 사기 아냐?}
{쌍방 이득이지 않습니까. 저쪽이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되지요.}
{그런가…?}
이게 맞나…?
하긴, 손해를 보지 않았으면 그건 사기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적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인으로서의 신념은?}
{엿 바꿔 먹었나 보죠.}
* * *
걸음을 서둘러 움직여야만 했다.
표사들은 방금 동료를 몇 잃었음에도 제대로 수습할 새도 없이 무엇에 쫓기는 듯 급급했고, 가마꾼들은 아가씨의 가마를 들고, 말이 멀쩡한 자들은 말 위에 올랐다.
청유백을 포함한 다섯 명도 묶어 놓았던 말을 데려와 서둘러 말에 올랐다.
동료의 시체 몇은 땅에 묻어 준 뒤였다만, 그 정도로 시체를 수습했다 말하기에는 모자람이 있으리라.
표사들의 표정은 다양했다.
누군가는 친우를 잃은 슬픔에 빠져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누군가는 갑작스레 생긴 원군에 희망이 생긴 듯 보이기도 했다.
[흐음, 참 해괴한 군상이로고….]
천화의 속삭임을 들으며, 청유백은 차 호위라는 자에게 말을 몰아 다가가 물었다.
“뭣 때문에 쫓기고 있던 거지?”
“아, 아! 그렇지요. 이리 동행하게 된 이상, 그것도… 말씀드려야겠지요.”
기실, 따지자면 이것은 동행하기 전에 물어보았어야 맞는 일이었다.
이미 이들을 구하기로 하고 움직인 것이니 황돈이 대뜸 받아들였지만, 보통은 어떤 위협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동행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래요, 말씀드려야 하는데…….”
헌데 이상하게도 말을 더듬는 것이, 척 보기에도 모양새가 이상했다.
청유백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설명하기 어렵나? 정리할 시간은 얼마든지 줄 수 있다.”
이런 족속은 대체로 뒤가 구리기 마련이다.
허나, 돌아온 대답은 퍽 상상하지도 못한 것이었다.
“아, 아니요. 그것이… 저희도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유를 모른다?”
“부끄럽게도, 그렇습니다.”
사내의 말은 그야말로 해괴했다.
성무련이라는 그의 주인은 딸을 무척이나 아끼는데, 지난 가을에 서역을 유람하고 싶다 말하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거진 반년에 가까운 유람이었습니다. 긴 여행이었지만, 아가씨께서도 좋아하셨지요. 헌데…….”
오로목제로 돌아가는 길.
이녕(泥濘)을 거쳐 길을 가는데, 의문의 집단에게 습격당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가까스로 도망쳤지만, 그 탓에 동행했던 호위 무사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고 말이다.
“심지어는, 그 이후로 산적들이나 도적 떼까지 기승을 부리지 뭡니까. 본디 표국의 표행이라 하면, 적당한 통행료만 받고 보내주는 것이 관례일진대….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겁니다.”
“그 이유는 모르겠고?”
“그렇습니다. 돈을 노리고 접근한 납치 위협이나 살해 협박 따위는 자주 있어 오셨지만… 이 정도의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랬겠지.
곤륜기를 무시하고 달려들 만한 일이라는 것은 결코 흔하지 않다.
곤륜기가 있든 없든 어쨌든 범죄라는 것은 변하지 않겠다만, 그래도 그 행위에 실린 무게가 다른 법이니 말이다.
성씨세가 하나의 적이 되느냐.
무림공적이 되느냐의 문제였다.
차 호위는 말을 이었다.
“심지어는 추적자도 붙었었습니다. 지금은 이 천산을 타면서 어찌어찌 떼어냈지만, 언제 흔적을 쫓아올지 모릅니다…….”
“…추적자가 붙을 정도의 일이라.”
이유가 없을 수가 없다.
분명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 있어서, 원하는 바가 있기에 쫓는 것이다.
천화가 말했다.
[대체로의 이유는 보물이나 목숨이지. 헌데… 이렇다 할 보물은 보이지 않는구나. 허면, 저 어린 소녀의 목숨이겠느냐?]
‘글쎄…….’
청유백은 저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고작 어린아이 하나 죽이기 위해 추적자를 붙이고, 산적이 곤륜기를 무시할 정도의 깡을 부린다라….
‘어지간한 악인이 아니고서야 아니겠지.’
대체 누구한테 무슨 원한을 져야 그 정도로 집요하게 따라붙는단 말인가?
청유백이 어깨를 으쓱이자, 천화는 코웃음 치며 황돈을 가리켰다.
[저치에게 물어보지 그러냐?]
하긴, 그도 사전에 정보를 얻었다면 그 출처와 이유가 있을 테다.
청유백은 황돈에게 전음을 날렸다.
{황돈. 알고 있는 것 있나?}
단순한 물음이었다.
헌데, 황돈은 갑자기 허리를 곧추세우더니 주변을 황급히 돌아보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뒤편에서 청유백을 발견하고는, 말의 걸음을 늦춰 청유백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제야, 머리를 디밀며 대답했다.
“무엇 말이오?”
“전음 할 줄 모르나?”
“하하, 대인. 제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시는 것 아니오. 그런 것 할 줄 모르오!”
“잘났다.”
“하하, 소인이 좀!”
칭찬 아냐. 멍청아.
부담스럽게 다가온 황돈을 밀어내며, 청유백은 다시금 물었다.
‘조용히 대답해라. 습격의 이유, 알고 있는 것 있나?’
‘모르오. 우리 측에서도 정말 갑작스러운 정보였고, 이유도 아직 추적하는 중이었소. 최소한, 그녀의 여행 중에는 이렇다 할 사고가 없었다오.’
‘사고도 없었다라….’
심히 미궁이다.
가령 뭐 유람 중에 실수로 누군가를 죽였다.
그래서 원한을 샀다!
이런 이야기라면 생각이 편할진대, 그런 것도 아니라고 하니.
청유백은 뒤편의 가마를 돌아보았다.
가마꾼들은 어지간히 경공에 숙련된 자들인지 이리 산맥을 걷고도 아직 지친 기색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 이상 속도를 높이는 것은 무리로 보였다.
저들의 다리나 체력이 문제가 아니라, 안에 있는 저 아가씨가 버티지 못할 테니 말이다.
‘이대로 쭉 가면…….’
오로목제까지…
…두 달?
‘그건 곤란하겠군.’
한 달이나 시간을 더 허비할 생각은 없다.
시험은 시험대로 문제고. 사마신교는 사마신교대로 문제다.
더불어, 청유백은 한 가지 계획이 더 있었으니 말이다.
‘교주의 죽음. 그 배후…….’
청걸명에게 따로 물었던 그것에 대해 조사할 심산이었다.
두 달은 너무 길었다.
걸음을 재촉할 필요가 있었고─
마침, 적당한 핑계가 있었다.
청유백은 문득 말의 걸음을 멈추었다.
“허면 이리 하지.”
“예?”
“그녀는 말을 탈 줄 아나?”
그녀.
누구를 칭하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차 호위는 대답했다.
“조금은… 교양 정도로는 익히셨지만, 전력으로 달리는 말을 버티시지는 못할 겁니다.”
“상관없다. 네가 태우면 되지 않나.”
“제, 제가?”
“혹은 다른 누구라도 상관없고. 중요한 것은 이쪽이 더 빠르다는 사실뿐이다.”
차 호위는 갈등하는 듯했다.
전력 면에서는 문제가 없다.
아까의 저 여협이 혼자서 능히 수십 명의 산적을 상대할 수 있던 것을 보았으니 말이다.
허나, 곱게 자란 아가씨를 가마도 없이 말을 달리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인가.
청유백은 말을 이었다.
“추적자가 붙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 그렇습니다.”
“그들을 완벽히 따돌렸다고 자신할 수 있나? 산적들이 저리 눈이 돌아가 달려들 정도로 중대한 건인데, 그런 건에 붙은 추적자를?”
“그건…….”
확신할 수 없었다.
어찌 그리하겠는가.
‘선배님들은 전부 죽고, 나 혼자 살아남아 도망쳤다. 정말 도망친 게 맞을까? 고의로… 놓아준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부터가 뇌리에 깊숙이 박혀 있었는데 말이다.
허나, 그가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오로지 아가씨의 뜻, 그리고 편의.
목숨이 날아가면 편의가 무슨 소용일까 싶지만, 그래도 이들과 함께라면 어지간한 위기는 타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걸음을 재촉해야만 하겠는가.
“으음…….”
차 호위가 신음하던 그때.
─드륵.
작은 소리를 내며, 가마의 창문이 조금 열렸다.
그리고, 아직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뜻에 따르겠습니다.”
“아, 아가씨!”
차 호위는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가마는 멈춰서 땅에 내려지고 있었다.
가마가 멈춤에 따라 다른 이들의 걸음도 일제히 멈추었다.
청유백과 그의 일행들도 고개를 돌려 가마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최선의 선택임을 압니다. 불초 은혜를 지는 신세, 어리광을 피울 상황은 아니겠지요.”
그 말을 하는 것은, 이지적인 말과 걸맞지 않게 몹시 어린 소녀였다.
소혜와 비교해도 고작 두어 살 정도 많아 보이는 아직 어린 소녀.
청유백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읍하고는, 차 호위를 돌아보며 손을 잡았다.
“능초야, 나는 괜찮아. 어릴 적에는 자주 그러고 놀았잖아. 옛날처럼 그렇게. 응?”
“허나… 도피행은 험난합니다. 지금까지처럼 꼬박꼬박 쉬고, 자고 할 수 없어요. 지금부터는… 유람이 아니게 될 겁니다.”
“괜찮대도.”
차 호위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아가씨의 뜻.
본인이 그리 말한다면, 자신이 거스를 방법은 없었다.
“감사합니다, 소협. 이 은혜, 성가(惺家)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보은하겠습니다.”
소녀는 허리를 숙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성가의 딸, 성시소라 합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