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119화 (119/200)

제119화. 뜻하지 않은 만남 (4)

“……무슨 생각?”

안타깝다고 해야 할까, 황돈의 말을 고깝게 듣는 것은 적영뿐이었다.

대충 표정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을 읽자면, 들어는 줄 테니 일단 한번 씨부려는 봐라─ 정도의 표정이었다.

특이한 점 있냐고 물었지, 저들을 구하기 위한 기똥찬 발상 같은 것을 원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일단 적영처럼 ‘일단 구하고 보자고요’ 투의 말은 아니었는지, 황돈은 진정하라는 듯 양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적 소저가 본 깃발 중 하나는 만상표국의 것이오. 서역과 신강 부근에서 활동하는, 꽤 덩치 있는 표국이지.”

황가는 상계의 가문.

천하의 수많은 유력자들과, 그들의 약동을 아는 것이 장사의 기본이다.

당연히, 그에 관련한 정보에 대해서는 백가보다도 더 민감한 면이 없잖아 있다.

황돈은 숨을 한껏 들이쉬고는, 진중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곤륜기요.”

“곤륜기? 곤륜기라면…….”

“그렇소. 곤륜파의 상징이오.”

곤륜파.

굳이 다식하지 않더라도, 이 자리의 모두가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백 년도 전의 과거, 중원 강호에서 가장 강성했던 아홉 개의 문파 중 하나이며, 패도천마가 직접 그 뿌리를 흔들어 놓았다는 문파였다.

그때의 피해가 너무 막심하여,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렇다 할 대문파 소리도 못 듣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과거의 명성은 여전한지라, ‘곤륜의 비호를 받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경고 이상의 것으로 작용했다.

정파 무림의 숙적이던 마교와 가장 일선에서 싸웠다는 그 ‘곤륜’의 이름.

그것을 저버린다는 것은, 정파 무림을 저버리고 무림 공적이 되겠다는 것과 같았으니 말이다.

즉, 곤륜기는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평화의 상징이었다.

아무리 이곳이 세외에 가깝다고는 하나, 이곳 또한 무림.

그런 곤륜기를 단 표행이 습격받는 경우는 거진 단 하나였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털 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일 때…….’

모두의 뇌리에 그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고작 그것만으로 저들을 구할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자신들의 입장에서 까짓 황금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허나 그때, 황돈이 말을 이었다.

“먼저 말해야 하겠군. 황가는 특별한 유력자 몇몇의 명단을 작성하여, 그 명단에 오른 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고 있소. 간단히는 호불호나 근래 즐기는 취미, 어렵게는 자식의 패악이나 비리까지 말이오.”

뭐든 간에, 교섭에 이용할 수 있는 정보라면 전부 다.

황돈은 그렇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소인… 근래, 곤륜기를 단 표행에 대해 정보를 접한 바가 있소. 며칠 되지도 않은 급보였지.”

“그게 저거라고?”

“확실하다 말할 수는 없소. 세상에 곤륜기가 하나뿐인 것도 아니고.”

“당연히 그렇겠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하지만, 결코 흔하지도 않은 것이 곤륜기라오.”

확실하다 책임질 수는 없지만, 웬만하면 맞을 것이다.

참으로 비열한 말이 아닐 수 없지만, 괜히 장사치가 아닌지 말 자체는 그럴싸하게 들렸다.

실제로, 적영은 당장이라도 가자는 양 눈을 빛내고 있었고 말이다.

“확인해볼 만한 가치는 있지 않겠소? 그 정보가 일치한다면, 저 무리가 지키고 있는 것은…….”

황돈은 천천히, 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리의 목적지. 오로목제의 유지이자 대지주인 성무련의 딸이오.”

* * *

상황은 척 보기에도 열악했다.

이 첩첩산중 산적이라는 산적은 싹 다 긁어모아 끌어온 것인지, 아니면 이미 소식을 알고 기다리고 있던 것인지 산적의 수가 거진 기백은 되어 보였다.

그에 반해, 보표행을 행하는 표사는 스물 남짓.

아무리 실력에 차이가 있다고 한들, 다섯 배나 되는 숫자를 극복하기에는 무리였다.

“두목! 어찌할까요?”

“저기 타 있는 계집년 하나만 빼고 다 죽여라. 저년 모가지에 황금 백 관이 걸려 있으니, 저년은 상처 하나 내지 말고 데려와!”

“아유 참, 맛 정도는 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황금 백 관이면 계집을 수레로 수백 대 사고도 남는다. 참아!”

─챙! 카캉!

그다지 넓지도 않은 산길은 때 아닌 금속의 마찰음으로 가득 차고 있었다.

그들이 지키려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들 중심의 한 가마.

이 보표행의 대상인, 그들의 의뢰주였다.

뭐, 엄밀히 말하면 의뢰주의 딸이라 부르는 것이 맞겠지만 말이다.

‘왜 이렇게 됐지?’

가마 안의 그녀는 숨을 죽였다.

비명 소리와 피 냄새가 얇은 창호지를 뚫고 들어와 감각을 자극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갑자기 기습을 받은 지 불과 일각.

자신의 호위무사인 차 호위가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며 가마 앞을 가로막은 지 벌써 일각이었다.

‘왜? 왜 날 죽이려고 하는 거야?’

이유를 모르겠다.

두렵다.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저 피와 비명이 가득한 바깥의 상황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헌데 문득, 바깥에서 방금까지와는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하나의 날카로운 금속음 뒤에 난, 어떤 여인의 목소리였다.

“뭐, 뭐야! 웬 놈이냐!”

“웬 분이시다, 이 새끼야!”

─빠아악!

그리고, 이어서 들려오는 타격음.

소리로 알 수 있는 것은 적었지만, 바깥의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야! 야! 동작 그만! 대장 나와!”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누군가와 습격자 무리가 대치하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가, 자신들을 도와주러 온 것일까?

설마 아버지가 보내신 무인인가?

그녀는 그런 희망을 품으며 손을 꼭 쥐었다.

바깥에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 * *

“네가 알던 그 표행이 맞나?”

“흐음, 만상표국의 깃발에… 곤륜기. 일단 깃발은 맞소. 내용물은 까 봐야 알겠지만!”

까 봐야 안다니.

퍽 웃기는 말이지만, 청유백은 어차피 나설 생각도 없었으므로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적영이 원해서 구한다면, 그녀가 움직여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

난입하자마자 그녀를 가로막던 산적 하나의 목을 썰어버린 그녀는 가장 앞에서 산적 두목으로 보이는 자와 대치 중이었다.

“네가 대장이냐?”

“너는 왜 네가 대장인 것처럼 말합니까?”

“닥쳐 봐. 말하고 있잖아.”

초 치는 백소하의 멱살을 끌어 뒤로 물려버린 뒤, 적영은 앞으로 걸어 나온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와 마주했다.

“목숨이 아깝지 않나 보군. 차림새를 보니 어디 명문의 후기지수라도 되는 모양인데… 너희뿐이냐?”

“왜? 덤벼 보려고?”

“큭큭큭,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부는 개새끼 같군. 네놈들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여기가 너희 문파의 안마당 같은가? 척 보니, 스승도 인도자도 없이 무림행이랍시고 나온 무리 같은데…….”

산적도 다 똑같은 급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지.

산적 두목은 클클클, 하고 웃으며 박도를 뽑아 들었다.

이곳은 천산이다.

사람 한둘─ 아니, 수십이 죽어나가도 소문 하나 나지 않고 묻혀버릴 수 있는 곳이다.

싸워서 이기거나, 죽거나.

이런 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실력을 방증하는 법이다.

‘떨거지 몇 잡아본 경험은 있는 모양인데.’

이걸 어쩌나.

그것도 오늘부로 끝이겠구나!

산적 두목은 말을 이었다.

“네년은 팔다리 힘줄을 끊어 뒤질 때까지 따먹어 주마. 그래, 뒤에 고년도 맛이 괜찮을 것 같고… 사내새끼들은 뭣 허냐? 나와서 깝치지도 않고. 네놈들은 자신 없냐?”

산적 두목은 뒤에 서 있는 청유백과 백소하를 가리키며 낄낄댔다.

청유백은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었고, 대답한 것은 백소하였다.

“이래 봬도 걱정은 하는 중입니다.”

“누구 걱정이냐? 네 걱정? 아니면 네 앞에 있는 그년 걱정?”

백소하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적영을 돌아보았다.

마교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니 다들 가문의 후계자를 상징하는 그 옷을 걸치지는 않았지만, 백소하만은 유독 여전히 하얀색 옷인 채였다.

이 산길을 지나면서 어찌 모래 먼지 하나 묻지 않았는지 기묘할 정도로 말이다.

“피 튀기지 않게 해주십쇼. 여벌도 몇 벌 없습니다.”

“노력은 해볼게.”

그리고, 다음 순간.

‘대체 무슨 개소리냐’ 따위의 말을 내뱉던 산적 두목의 입이 두 개로 쪼개졌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었다.

입술 위와 아래를 기준으로 하여, 그대로 일도양단.

두목의 말은 한순간에 끊어져, 몸은 그대로 서 있는 채로 턱 위의 머리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뒤에는, 붉은빛이 서린 적영의 도가 지나치고 있었다.

“악인은 처형. 재판은 생략한다.”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도 못 하는 표정이었고, 누군가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산적은 산적대로, 표사들은 표사대로 말이다.

그리고 나서는.

“바, 반격이다! 저 여협을 도와라!”

“우와아아아!!”

표사들은 상황을 파악하고는, 기세 높여 목청을 울렸다.

저들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일단 산적 놈들을 치는 것으로 보아 적은 아닐 터!

표사들은 일제히 가마를 둘러싼 산적들에게 달려들었고, 산적들은 혼비백산하여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두목의 목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고, 그 과정은 눈에 스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산적으로서 잔뼈가 굵은 이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망할, 저런 고수가 이딴 산중에 왜 있어!’

저 붉은 검을 보라.

검기다, 검기!

씨발, 이제 스물도 안 될 것 같은 계집이 저딴 검기를 발산하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방금 전 두목의 농담에는 낄낄거릴 여유가 있었다.

그야, 아무리 명문의 후기지수라고 해도 대부분은 거기서 거기일뿐더러─

누구나 이름을 들어 볼법한 대문파의 후계라면 무서워할 법도 하지만, 그런 이들이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저건 뭐냐고!’

애초에, 이 깊은 산중에서 다른 이를 만날 것이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남은 산적들에게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대충 보기에, 산적의 숫자는 대략 팔십 정도.

스무 명 남짓하던 표사들은 서너 명이 당해 숫자가 줄어 있었지만, 뒤에는 저 미친 고수 년이 있었다.

금이고 뭐고, 돈이고 나발이고 간에 목숨은 보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두목이 당했다!”

“고수다! 도망쳐!!”

산적들은 표사들에게 검을 겨누며 견제하다, 그대로 등을 돌려 산속으로 달아나는 꼴이었다.

몇 놈을 베어 넘긴 적영은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쫓으려 했지만, 백소하가 팔을 붙잡으며 막아섰다.

“됐습니다. 토벌이 목적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기까지만 하시지요.”

“어? 아, 그렇지.”

적영은 정신을 차리고서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싸울 때 보는 시야와 그 후에 돌아보는 시야는 역시 확연히 달랐다.

돈과 목숨 중에는 역시 목숨이 중요한 편이었고, 단숨에 두목의 목이 날아간 산적들은 이미 싸울 의지가 없어 보였다.

적영은 백소하를 돌아보며 불만스레 말했다.

“근데 너, 너무 담담한 거 아니야? 내 걱정보다도 옷 걱정을 먼저 하냐?”

“네 걱정을 내가 왜 합니까? 지나가는 동네 개 간식을 걱정하고 말지.”

오호라.

매는 저렇게 버는 거구나.

지켜보던 황돈은 가르침을 하나 얻었다.

* * *

‘끝난 건가? 어떻게 된 거지?’

어느 순간부터인가 조용해졌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대화가 없어졌다는 것이 옳을 테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 수많은 사람들이 땅을 박차는 소리, 피가 땅에 튀기는 소리…….

그리고, 무언가 날아와 부딪히는 소리.

─콰앙!

“꺄아아악!!”

그녀는 몸을 움츠리며 머리를 감쌌다.

무언가가 부딪혀 왔다.

크기와 형태를 보아하니, 사람.

다만, 미동이 없고 그저 피 칠갑된 문과 신체의 형태만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시체가 날아와 쓰러진 듯 보였다.

누구지? 설마, 차 호위인가?

이제 정말 끝인가?

눈꼬리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이제 저 문이 열리고, 우악스러운 손이 자신을 바깥으로 끌어낼 테다.

그녀는 가마 한쪽으로 몸을 구겨 넣어 더욱 몸을 굽혔다.

얼마간인가 계속 소리가 들려왔다.

똑같았다.

단지, 사람의 단말마가 좀 더 많이 들리게 되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모르겠다.

치마폭에 파묻은 얼굴 탓에 치마가 잔뜩 젖어들었을 때 즈음, 주변의 소리가 잦아들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강철의 소리 대신, 사람들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주변을 채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끝난… 건가?’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잠깐이면, 살짝이면 괜찮을 것이다.

어차피 이제 싸우는 소리도 안 들려오지 않던가.

불안감 반, 호기심 반의 감정으로 살짝 가마의 창문을 밀어 열었다.

그러나, 그때.

─드르륵!

“꺄악!”

갑작스레 창문이 거칠게 열리고, 햇빛을 등진 두 사람의 인영이 가마 위로 고개를 디밀었다.

눈이 부셔서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지만, 목소리는 똑똑히 들려왔다.

“어때? 진짜 같아?”

“흐음, 일단 보고에서 보았던 인상착의와는 일치하오.”

“뭐야, 확실하게 말해.”

“보고를 보내오는 자들이 전부 절세의 화공은 아니지 않겠소. 그림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오…….”

아무래도, 산적은 아닌 듯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