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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118화 (118/200)

제118화. 뜻하지 않은 만남 (3)

처음은 순탄했다.

누구든 그럴 것이다.

여행의 시작은 언제나 즐거우며, 선선한 아침 바람과 함께 가벼운 발걸음으로 출발하기 마련이다.

향긋한 풀 내음과, 저 멀리서 들려오는 산새들의 노랫소리, 폭력과는 동떨어진 산의 멋들어진 광경…….

그것을 누가 싫어하랴!

태어나서 줄곧 마교 내에서만 자라고, 바깥 구경을 해본 적 없는 규중처녀 몇몇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뭐…….

절경도 절경 나름이지.

아침, 산.

점심, 산.

저녁, 산.

밤, 조금 자고, 아무튼 산.

어제와 비교해서 뭐가 달라졌는지도 모르겠는 주변 풍경을─ 빌어먹게도 사흘 동안이나 반복해서 보고 있노라면, 이게 여행인지 고난의 행군인지 고민하게 되는 시점이 오고 만다.

사흘이다. 사흘.

말 타고 산길을 걷기 시작한 지 벌써 사흘이란 말이다.

절경 구경도 적당히여야지.

이미 여행을, 강호를 경험한 적 있는 이들은 그러려니 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적영은 이런 지루한 상황에 면역이 없는 편이었다.

“…더워.”

“참으십쇼.”

“…짜증 나.”

“물이라도 마시든가요.”

“…너, 때려도 돼?”

“허헛! 언제는 물어보고 때린 것처럼 말하는… 악! 미친년! 말 타고 있습니다! 위험하다고요! 아악!”

안면 한구석이 푸르딩딩해진 백소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황돈은 고개를 들어 해의 높이를 가늠했다.

어느덧 점심이었다.

“좋소. 조금 쉬는 게 어떻겠소?”

“찬성이라고 말해.”

“차, 찬성…….”

“……….”

안타까운 녀석…….

청유백과 일행은 적당한 공터에 말을 묶어놓은 뒤, 대충 주변의 수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둘러앉아 각자 육포와 건식을 뜯을 때 즈음, 황돈이 바닥에 무언가를 끼적이며 입을 열었다.

“오로목제까지는 한 달이 조금 넘게 걸리오. 우리가 대충 이쯤에 있으니… 내일이나 모레 즈음에는 산을 나갈 수 있을 것이오.”

대충 무언가를 그리는가 싶더니, 그것은 대략적인 지도였다.

표기에 따르면, 이제 반 좀 넘게 숲을 지난 듯 보였다.

“이틀…….”

“천산은 원래 넓습니다. 천혜의 요새 소리는 공으로 듣는답니까? 마음을 비우고! 저 산새 소리나 즐겨 보십쇼. 얼마나 좋습니까?”

“풍류 공자 나셨어, 아주!”

적영은 투덜거리면서도 이 이상 짜증을 부리지는 않았다.

다그친다고 무언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이미 꽤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신, 심심함을 달랠 다른 무언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말들은 조금 더 쉬어야 할 테니까…….’

적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백소하는 언제 챙긴 것인지 가져온 서책 한 권을 꺼내어 읽고 있었고, 황돈은 쓴 적도 없는 돈주머니를 꺼내어 황금의 개수를 세고 있었다.

그리고 청유백은 어느샌가 나무 위로 올라가 한가롭게 잠깐 눈을 붙이고 있었고…….

녹지연은… 몰라. 알 게 뭔가.

적영은 청유백이 몸을 누인 나무 아래로 다가가 몸을 기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봐, 청유백 당신.”

“왜 그러지?”

“당신이 그 미친놈이랑… 녹가주를 잡았다면서. 진짜야?”

미친놈?

‘아, 교아를 말하는 것인가.’

청유백은 잠깐 의아한 듯싶다가도 곧장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녹가주에 대해서는 함구령이 내려졌다면서 어찌 알고 있나 싶었다만, 적영은 그 일의 당사자 중 하나였으니 알아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청유백은 코웃음 치며 대꾸했다.

“어떨 것 같나?”

“솔직히 얘기해도 돼?”

“얼마든지.”

“그럼… 당연히 구라 같지. 그게 말이나 돼? 그 또라이는 그렇다 쳐도… 녹가주는 마주(魔主)잖아.”

마주.

쉽게 이야기했지만, 그 직위가 가지는 영향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마졸, 마사, 마두, 마군, 마주.

그 꼭대기에 위치한 마주란 것은, 다시 말해 현 마교의 최고수 중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현재의 마교에 마주는 고작 열 명 남짓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교가 약해졌다고는 하나, 최고수들의 경지란 결국 유지되는 법.

즉, 마교의 마주는 천하에서 가장 강한 고수 백 명 안에 반드시 들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청유백이 녹가주를 이겼다고?’

치.

말도 안 되는 소리.

백련인지 뭔지 씨부린 그 교아라는 놈은 별것 아니다.

적영 자신은 이길 수 없었지만, 오라버니 중 한 명이었다면 분명 승부는 달랐으리라.

‘아니, 나도 다시 싸우면 이길 수 있어. …넓은 곳, 그래. 들판에서라면…….’

희망적인 사고가 어쨌든 간에, 적영은 일단 교아와 다시 싸우면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녹가주는?

‘절대… 못 이기지.’

백 번 싸우면 백한 번 진다.

죽어도 지옥에서 끄집어내어져서 영혼까지 죽을 것만 같았다.

아마, 눈이 마주치는 순간 미간에 암기가 박혀 독으로 즉사하는 것만을 반복하게 되리라.

“솔직히 말해봐. 뻥이지?”

“그리 믿고 싶다면 그리해도 상관은 없다만, 너무 부주의하게 말하는군. 분명 함구령이 내려지지 않았던가?”

“뭐 어때. 우리뿐인데.”

─쿵.

적영은 잔소리하지 말라는 양 장난스레 팔꿈치로 나무를 찍었다.

일순간 흔들린 나무에 청유백은 떨어질 뻔하다가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건 그렇긴 하지. 백소하, 너는 알고 있었나?”

“예?”

“지금, 정말로 우리뿐이라는 말이다. 비밀리에 호위라도 딸려 보낼 줄 알았는데. 정말로 우리 넷이 전부야.”

“다섯이오.”

“그래, 다섯.”

전력이 되질 않으니 넷이 아닌가 싶긴 했다만, 일단은 황돈의 항의를 받아들인 청유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주변에 감시자 하나 존재하지 않는다. 백 리쯤 밖에서 주시하고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최소한 근처에는 없어.”

청유백이 최대한 정신을 집중하여 내공을 주변으로 흩뿌려도, 사람의 형체라고는 무엇 하나 걸리지 않았다.

만약의 안전을 위해 보낸 호위 담당 하나 없다는 것이다.

백소하가 대꾸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녹가주가 그들에게 가담했던 마당에, 또 달리 누가 배신자일지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위험 부담은 커져만 갈 테지요.”

“하긴, 그 또한 맞군.”

가주조차 회유했는데, 그 아래의 잡것들이야 하지 못하겠는가.

적영이 코웃음 치며 대꾸했다.

“물가에 내놓은 아기 취급은 지긋지긋해. 오히려 이게 낫지 않아?”

“글쎄…….”

아무런 안전장치도 준비해 놓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다섯을 묶어 보낸다고 쳐도,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필요는 있을 테니 말이다.

뭐, 정말로 백 리 밖에서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는 노릇이고.

그렇게 유야무야 넘어가는 듯싶다가, 적영은 갑자기 떠올랐는지 다시 성을 내며 나무를 흔들었다.

“아니 그래서, 진짜냐니까! 말 좀 해 봐! 거짓말 맞지?!”

“알아서 생각해라. 그런갑다 해.”

* * *

시간이 흘러, 다시 이틀.

주변의 풍경이 조금 바뀌었다.

얼마나 가야 끝날지 알 수 없는 끝없는 산길에서, 이제는 그나마 드문드문 다른 것이 보이는 산길로.

“아… 아…… 아아…….”

“적영이 강시가 되었군요. 안타깝지만, 이대로 버리고 가는 수밖에는…….”

─빠악!

왜 굳이 사서 매를 버는 건지 모르겠는 놈의 뒤통수에 혹이 하나 추가되고, 적영은 하품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기대한 여행은 이런 게 아니었다고.”

적영은 찔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말의 갈기에 머리를 기대었다.

“청유백, 좀 더 빨리 갈 수는 없어?”

적영은 고개를 돌려 청유백에게 물었다.

끔찍하게 싫으니, 나가 죽으니─ 해도, 결국 이 일행의 머리는 청유백.

왠지 이런 여행에도 익숙해 보이는 것 같으니─이미 십 년 동안 방에 처박혀 있던 사람이라는 것은 잊어버린 후였다─ 뭔가 그럴싸한 계획이라도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청유백은 대꾸했다.

“없다. 중간에 말을 갈아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걸음을 재촉할 수도 없어. 물론 말을 버리고 달린다면야 산은 빨리 나갈 수 있겠다만…….”

“나갈 수 있겠다만?”

“한 달 동안 말도 없이 걸어 다니고 싶다면야, 말리지 않겠다.”

“망할…….”

뭐, 그녀의 입장에서는 마교 본산 밖으로 나가 보는 것도 처음일 테니, 한껏 기대했던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뭐 어쩌랴?

풍류도 즐길 줄 모르는 무지함을 탓해야지.

백소하는 태연히 이죽거렸다.

“산새 소리나 즐기라니까요.”

“아, 그래. 산새 소리… 산새 소리라… 듣다 보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저 깊은 산속 옹달샘…….

─짹짹!

어디선가 들려오는… 작은 동물들의 소리…….

─휘이이잉.

바람과 함께, 짹짹 지저귀는, 뭐 그런 작은… 새들…….

─으아아아악!!

그리고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비명?

“?!”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적영은 갑작스레 화색을 띠며, 고개를 돌려 비명이 들려온 방향을 찾았다.

한 번의 단말마였지만, 지루함의 극한에 달한 적영의 집중력은 그것만으로도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자신이 있었다.

말에서 다급히 내려 어딘가를 바라보는 적영에게 황돈이 일러 주었다.

“저 방향이면… 흐음. 이녕과 신원을 잇는 산길이오. 멋모르는 여행자가 이용할 만한 길은 아니지. 저쪽으로 움직인다면, 아마 걸음을 재촉하는 표국 무리일 거요.”

“왜 관도를 타지 않고?”

백소하가 질문했다.

관도라 함은, 나라─ 즉 관(官)에서 관리하는 길을 뜻했다.

치안과 안전, 그리고 정비까지 알 수 없는 숲길보다는 당연히 훨씬 나았고, 대부분의 여행자는 관도를 사용했다.

안전이든, 편의성이든, 길동무든 간에 알 수 없는 산길을 타는 것보다는 그편이 훨씬 편했으니 말이다.

“관도가 잘 닦여 있고 편하긴 하지만, 가장 빠른 것은 아니오. 어디에나 시일에 쫓기는 자를 위한 지름길이 있지. 그리고… 그런 길에는 무릇 잡배들이 있기 마련이오.”

“멋모르고 길을 탔나?”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통행세를 내고 지나가려 했는데 협상이 결렬되었을 수도 있고…. 확률은 낮지만, 체면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달려들 만한 보물을 싣고 있는 것일 수도 있소. 뭐, 어느 쪽이든 우리 알 바는 아닐 테지만 말이오.”

─챙! 챙!

비명에 이어서, 때아닌 숲속에 병장기 소리가 잇따라 울리기 시작했다.

무어라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전투가 시작된 것일 테다.

적영은 대뜸 말을 멈추더니, 말의 머리를 그쪽 방향을 향해 틀었다.

“…구해주자!”

“예에에에?”

아니, 이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래?

백소하는 집 나간 어처구니를 찾아 헤매며 웃기지도 않다는 양 대꾸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우리가 정의의 협객이라도 됩니까? 정신 좀 차리십쇼. 머리가 장식은 아니잖아요.”

“무슨 소리야. 우리 교민일 수도 있잖아!”

“천산을 지나는 모든 사람이 우리 교민이랍니까?! 이미 천산은 거의 벗어났고, 사주지로에 가깝다고요. 저희와 하등 관련 없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마교의 ‘세력’이라고 해서, 그 지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쟁에 관여한다는 것은 아니다.

굳이 마교뿐만 아니라, 어떠한 문파, 어떠한 세력이든 다 그렇다.

딱 자기네와 관련된 것, 자기네에게 이득이 되는 것, 자기네에게 합당한 대가를 바치는 것에게만 관여한다.

그리고 당연히─ 마교의 영역 내에 있는 모든 사람이 마교도인 것도 아니고 말이다.

게다가, 뭐 설령 마교도일 수 있다고 쳐도!

“산적 놈들이 생각이 있으면 마교의 물건을 건드리겠습니까? 아무리 위상이 떨어졌기로서니, 산적 놈들에게 꿀릴 정도는 아닙니다. 산적 나부랭이가 어딜 뒤질라고…….”

“으극…….”

적영은 할 말은 없는지 입을 다물었지만, 대뜸 말을 내팽개치고 언덕 위로 올라가더니, 저 멀리를 바라보는 듯했다.

그리고 그 방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하지만 사람도 꽤 많아! 마교의 땅에서 무고한 사람을 죽게 할 수는 없잖아?!”

“아니, 그러니까 알 게 뭐냐고요.”

백소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적가가 명예에 집착하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정도가 과하다.

‘아니, 이게 명예에 관련된 건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

반쯤은 그냥 심심해서 돌발적인 상황이 기쁜 것이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도 들었다.

결국 그냥 무시하고 가나 싶었는데, 웬일인지 황돈이 입을 열어 그녀에게 호응했다.

“흐음, 그곳이 보이는 것이오?”

“어? 뭐, 대충은.”

“허면, 그들이 지닌 깃발을 살펴봐 주시오. 수레에 꽂혀 있거나, 기수가 들고 있거나 할 거요.”

적영은 그 말에 눈을 찌푸리더니, 목을 쭉 내빼고 안력을 돋구었다.

그렇게 한참을 가늘게 찌푸린 눈으로 쳐다보다가, 결론을 내렸다.

“으음… 두 개야. 하나는 만(滿)이라고 쓰인 깃발이고… 하나는… 저건 뭐지? 구름처럼 보이는데. 구름이랑 산?”

아니, 둘 다인가?

백소하는 머리를 굴려 그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아무래도 이쪽은 백가보다는 황가 사람들이 더 잘 아는 지식이었으니 말이다.

말마따나, 황돈은 곧장 알아들었는지 흥미롭다는 듯 목을 울렸다.

“흠? 그건… 호오. 흐으음…….”

“특이한 점이라도 있나?”

청유백도 말을 멈추어 황돈을 돌아보았다.

적영 한 명의 의견이야 묵살해도 알 바 아니지만, 장사치인 황돈이 저리 반응할 정도라면 무언가 있기는 있다는 것.

곧이어, 황돈이 고개를 들었다.

“…소인에게 좋은 생각이 있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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