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한 발짝 앞으로 (5)
산등성이 너머로 주홍색 햇무리가 차츰차츰 피어올랐다.
아직 싸늘한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가르고, 낯선 방문객의 발걸음을 소란스레 감추었다.
새벽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청유백은 동굴 밖으로 걸어 나왔다.
슬슬 누군가가 자신을 찾을 만한 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련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동굴의 맞은편 바위에 앉아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을 발견했다.
“언제부터 기다렸지?”
“음, 글쎄요? 한 나흘 정도는 꼬박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것 같은데요.”
“보통 방금 왔다고 말하지 않나?”
“너무 식상하잖아요. 뭐, 맞아요. 방금 왔어요.”
녹지연은 생긋 웃어 보였다.
몸은 완치되었는지, 가볍게 바위에서 뛰어내려 청유백의 앞에 섰다.
안색도 따스한 것이, 정말로 괜찮은 듯 보였다.
“백소하가 먼저 올 줄 알았는데.”
“불만인가요?”
“그럴 리가. 네가 내 생각보다 우수했을 뿐이다.”
“흥, 칭찬처럼은 안 들리네요.”
“그런가.”
청유백은 단순히 대꾸했다.
그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것으로 충분할 뿐이었다.
“좀 걸을까요?”
“원한다면.”
청유백은 녹지연을 따라 숲길로 걸음을 옮겼다.
동굴 안에서의 감각과 밖에서의 감각이 상당히 상이하여, 몸이 잘 주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코끝에 느껴지는 향은 비슷했다.
지난날 마셨던 독의 향.
녹운룡에게서 느껴졌던 독의 향.
그리고, 나뭇가지 사이로 어지럽게 휘날려오는 그녀의 향.
분명 다르지만, 어딘가 비슷하게 코끝을 간질이는 그 향에 청유백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아직 정신이 몽롱했다.
그 와중에,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왜 도와줬어요?”
“네가 바랐으니까.”
“그게 전부예요?”
“네가 그리 생각한다면.”
“…피, 그게 뭐예요.”
녹지연은 농담처럼 치부하며 볼을 부풀렸지만, 청유백은 반쯤 진담이었다.
첫 번째는 거래였고, 두 번째는 목표의 일치였다.
그러나 세 번째는.
그야말로, 그저 호의였다.
대가?
그녀가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녹가의 장녀, 나아가 설령 녹가의 가주가 된다고 해도 청유백이 만족할 만한 무언가를 쥐여 줄 수는 없다.
최소한, 이 마교 안에 청유백을 만족시킬 만한 대가는 더 이상 없다고 봐도 좋으리라.
산더미 같은 금은이든, 천하에 둘도 없는 보검이든.
뭐, 영약이면 좀 고민해볼 법도 하지만, 이제 마교에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은 잘 안다.
그러니 그것은 그저 호의였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
무엇을 줄 수 있느냐 물었을 때, 서슴지 않고 뭐든지 주겠노라 결심한 사람에 대한 경의였다.
[정말로 무엇도 바라지 않느냐? 무엇도?]
‘글쎄.’
[흐으음.]
천화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목을 울렸고, 청유백은 한숨을 내쉬며 그저 무시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렇게 쓴 풀을 씹었는데도 낯설게 느껴지는 숲속의 공기와, 녹지연에게서 느껴지는 향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문득, 그녀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에게는 도움만 받네요. 바보같이.”
“아직 그래도 되는 나이지. 어른에게 도움을 청해라. 어린아이의 특권이 아닌가.”
청유백은 살며시 녹지연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자신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행위였지만, 천화가 소혜에게 하는 것은 몇 번이고 보고 느낀 바가 있었다.
그렇게 몇 번 쓰다듬자, 녹지연은 불만스레 청유백을 올려다보았다.
“저, 열아홉인데요?”
“…열아홉이면 아직 애지 않나.”
애라.
애의 기준이 참 미묘해진 것 같기는 하다만, 청유백의 기준에서 열아홉이면 충분히 아이였다.
사회 통념?
알 게 뭔가.
녹지연은 옅게 웃었다.
“당신은 아닌 것처럼 말하네요. 마치 노인네를 상대하는 것 같아요. 말해 두지만, 제가 당신보다 연상이거든요.”
“…….”
흐음.
이게 아닌가?
청유백이 눈치를 보며 살며시 손을 떼려는 찰나, 녹지연은 그 손을 붙잡으며 얼굴을 붉혔다.
“뭐, 그래도 좋아요. 나쁘지는 않네요. 나쁘지는요.”
잠깐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산길을 내려가며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부분은 시답잖은 것이었다.
서로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몸은 괜찮은지.
어떻게 해서 그리 강한 것인지.
혹은 나아가, 녹운룡의 비동에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곤란하게 다가올 법한 질문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하지 않았다.
이야기는 주저 없이 흘러가, 문득 이런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었다.
“아, 녹운룡은 아직 살아 있어요. 단전을 폐하고, 팔다리 힘줄을 자르고… 목숨만 붙여 놨어요. 만면귀 할아범이 요즘은 바쁘다고 했거든요.”
굳이 다른 설명은 없었지만, 청유백은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다.
만면귀면, 지난날 첫 시험 때 만났던 그자다.
사람의 얼굴을 벗겨 거죽 가면으로 만든다는 그 말이다.
그렇다면야 뭐… 뭘 하려 하는지는 정해져 있을 테다.
청유백은 녹운룡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며, 대충 대꾸했다.
“그런가.”
또다시, 몇 번의 이야기가 오갔다.
이번에도 시답잖은 것들이었다.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차와 술 중 무엇을 즐기는지, 혹은, 다른 무언가는 좋아하는지….
그렇게 몇 번을 이야기하다가, 어느덧 저 멀리 민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은 멀었지만, 이 산길이 곧 끝나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문득, 녹지연은 우뚝 멈춰서 청유백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물어보지 않으시나요?”
“무엇을?”
“전 당신에게 빚을 졌어요. 그리고 전, 당신에게 무엇이든 주겠노라 말했죠.”
“그러했지.”
분명히 그랬다.
그저 각오를 보고자 싶은 마음뿐이었다만, 그런 말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럼, 무엇을 줄 수 있느냐 묻지 않으시나요?”
“물을 필요가 있나?”
“있죠. 저는 그렇게까지 부자는 아니거든요.”
뭐든 말한다고 뿅 하고 내줄 수는 없지 않겠어요? 라고.
귀엽게 말을 이었다.
“녹가에는 남은 게 없어요. 녹운룡이 싹 실속을 빼먹은지라, 그야말로 사상누각이죠. 이권을 바탕으로 그걸 다시 채워나간다고 해도… 뭘 비축하는 것만 십 년은 걸릴 거고요.”
“그렇겠지.”
“그리고 그중 제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더 적겠죠. 무엇이든 드리겠다 말했지만, 정작 저는 드릴 수 있는 것이 없는걸요.”
녹지연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다고 손을 털어 보이는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물어 주세요. 무엇을 줄 수 있느냐고.”
“…….”
청유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피식 웃었다.
무엇을 바라는 질문인지, 자신이 그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아무것도 손에 쥔 것이 없는 여인에게, 무엇을 받을 수 있겠는가.
청유백은 대꾸했다.
“굳이 필요 없을 것 같군.”
“네?”
청유백은 손을 들어 녹지연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그녀의 머리 뒤.
긴 머리칼을 땋아 올려 꽂아 놓은 은비녀를 가리켰다.
“네 비녀를 다오.”
“네? 하, 하지만….”
“됐으니 어서.”
청유백의 강경한 태도에, 녹지연은 조심스레 비녀를 뽑고는 머리를 풀어 헤쳤다.
옅은 보라색, 제비꽃 모양의 비녀와 함께 그녀의 검은 머리칼이 등허리까지 흘러내렸다.
청유백은 그것을 받아들고는, 제 머리를 대충 묶어 비녀를 꽂아 보였다.
“마침 너무 길었다 생각하는 참이었다. 어떻지?”
어떻느냐라.
청유백의 생뚱맞은 행동에 녹지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녀는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대답했다.
“쿡, 어울리지는 않네요.”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청유백은 머쓱하게 입꼬리를 기울이며 비녀를 다시 뽑았다.
그러고는, 녹지연에게 다시 건네지 않고 제 품에 넣었다.
정말로 이것을 받겠다는 의미였고, 녹지연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바보 같은 사람.”
“흐음, 무례한데.”
“무례하기는, 벌써 교주라도 된 것 같아요? 흥.”
“글쎄, 그런가.”
“또 뭔지도 모를 대답… 됐어요. 손이나 주세요.”
“손?”
“빨리요.”
청유백은 저항 없이 오른손을 들어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
녹지연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청유백의 앞에 몸을 숙여 앉았다.
그러고는, 청유백의 손을 자신의 머리 위에 올리며 말을 이었다.
“저 녹지연. 녹가의 딸이자, 차기 녹가의 가주로서 당신께 맹세할게요. 당신이 원한다면… 어떤 때, 어떤 일이라도 당신의 곁에 서서 힘을 보탤 거예요. 모든 것을 걸고.”
순간, 녹지연과 청유백의 눈빛이 마주쳤다.
어떤 표정일까.
지금만큼은, 청유백도 그녀의 감정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읏차.”
곧이어 녹지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허례허식, 증인도 없는 다짐이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홀가분한 듯 보였다.
청유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면 굳이 질문하지 않은 의미가 없지 않나.”
“뭐, 제 마음이에요.”
녹지연은 그리 웃으며 어께를 으쓱이곤, 먼저 가보겠다는 말 한 마디 남기고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저 청유백만이, 어안이 벙벙한 채 자리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천화가 한심하다는 양 질타했다.
[왜 그 한 마디를 못 하느냐? 머저리 녀석. 알고 있지 않느냐. 저 아이도 알고 말을 꺼낸 것일진대.]
안다.
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무엇이든 주겠다.
그래, ‘무엇이든’.
당연히 그 말에는, 그녀 자신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너를 원한다! 라고 한 마디만 딱 하면 되지 않느냐.]
아니, 말할 필요도 없다.
무엇을 줄 수 있느냐 물었다면, 대답할 수 있는 것도 하나뿐이었을 테니까.
허나, 청유백은 대꾸했다.
‘대가를 바란 행위가 아니었다.’
[퍽이나.]
‘결과는 좋았지 않나.’
[그래. 결과는 말이지. 허이구, 언제부터 남에게 그리 친절하셨다고?]
‘유능한 새싹에게 건네는 친절일 뿐이야.’
[흐으으음~.]
천화는 간드러지게 목을 울렸다.
정말 그게 다냐?
라고 묻는 듯한, 그런 울음.
몇 번이고 흐음, 흐으음 하고 반복하자, 청유백은 짜증스레 입을 열었다.
“…설령 그리했다 하여도, 명령하여 여인을 취하는 것만큼 멍청한 일이 어디에 있겠나.”
[그 나이 처먹고 순정남이냐?]
‘…닥쳐라.’
[큭큭, 원한다면~.]
천화는 청유백의 목소리를 어설프게 흉내 내며 웃었다.
전혀 비슷하지도 않은 것이, 대놓고 놀려 먹으려는 투다.
‘…….’
하지만, 계속해서 웃지는 않았고.
침묵하는 청유백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괜찮다. 본녀도 그런 멍청한 인간, 싫어하지 않아.]
* * *
늦은 시간, 청유백은 청가로 돌아왔다.
대연무장에는 몇몇 무인들이 때 늦은 수련을 반복하고 있었고, 하인들이 다니는 뒷길에는 하루를 마무리하며 작업을 정리하는 이들이 보였다.
청유백은 그들 사이로 자연스레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모습을 보이는 청유백을 힐끗힐끗 쳐다보는 이는 몇 있었지만, 감히 그를 멈춰 세우는 자는 없었다.
‘…피곤하군.’
지난 보름.
상당한 성취를 올리기는 했지만 피로를 잊었다고 하여 그 피로가 허공으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청유백은 느꼈다.
동굴에 들어가기 전보다도, 확연히 강해진 자신의 마기를.
‘한 갑자… 그리고 반.’
허공에 떠도는 녹운룡의 독기를 모으고, 전력으로 그 동굴의 독기를 긁어모은 결과물이었다.
보름 만에 반 갑자의 내공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성취는 성취고, 피로는 피로.
당장 밤에 전쟁이 나든 산불이 나든 간에, 지금은 자고 싶었다.
헌데, 그런 와중에.
갑자기 저 멀리서 누군가 사내의 그림자가 쏜살같이 달려오더니, 청유백의 어께에 팔을 걸쳤다.
“오, 유백아! 오랜만이구나. 찾아도 통 보이질 않더니! 어디에 가 있었느냐?”
…청률이었다.
꽤 오랜만에 얼굴을 본 것 같기는 하다만, 알 게 뭔가.
이미 빨아먹을 것은 다 빨아먹은 놈이고, 그리 가치 있게 볼 만한 놈도 아니다.
청유백은 대충 대꾸했다.
“아… 뭐, 볼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뭐, 그러냐! 너도 다 네 일이 있겠지. 뭐냐, 혹시 이거냐?”
청률은 새끼손가락을 하나 펴 흔들어 보였다.
오랜만에 반가워서 이러는 건가, 원래 이리 경박한 놈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청유백은 그저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저, 그것이면 되었다.
……헌데.
“아무튼, 아버지께서 부르신다. 창운각으로 가자.”
생각해 보니, 이 새끼는 원래도 눈치가 없는 편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