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한 발짝 앞으로 (3)
마교에서 가장 많은 약재가 모이는 곳이 어디냐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녹운각이라 대답할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녹운각의 덩치가 거대한 만큼 소모되는 약재도 많고, 가장 많은 약재를 소지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가장 다양한 종류의 약재가 모이는 곳이 어디냐 묻는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녹가의 장원이었다.
녹운각이 수용하는 것은 양이 많긴 하지만, 엄중히 검증되고 항상 필요로 하는 약재들뿐이다.
하지만 녹가의 장원은 연구를 위하여 듣도 보도 못한 생초나 야산의 들꽃까지 두루 갖추고 있었다.
새로운 약, 새로운 독이라는 것은 무릇 새로운 시도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런 곳의 창고를 관리하는 사람이라면, 무릇 여러 가지 인간 군상을 보기 마련이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극악한 독초만을 긁어모아 가는 사람이라던가.
야생의 들풀이나, 서역의 귀중한 약초만을 찾는 사람이라던가.
하지만 지금 이런 군상은 처음이었다.
녹가 창고의 관리자인 주 총관은 때아닌 요구에 당황하고 있었다.
“그, 그걸 전부… 말입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뇨. 문제는 없습죠. 없습니다마는…….”
주 총관은 끙끙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눈앞의 사내, 청가의 문양을 새긴 청년이 내민 쪽지에 적혀 있는 약재들 탓이었다.
‘아씨께서 원하는 대로 내어 드리라 하셨으니, 드려야 하긴 한데….’
이거, 뭔지는 알고 가져온 건가?
황련에 곰취, 익모초….
뭐, 전부 약재로 쓰는 것들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딱히 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 쓸지 묻는 것은 그야말로 무례이리라.
하지만, 이 약재들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주 총관은 걱정스레 물었다.
“무지막지하게… 쓸 텐데요.”
진짜.
말도 안 되게 쓰다.
솔직히, 녹가의 사람이 이것들을 달라고 했다면 ‘대체 누구를 골탕 먹일 생각이냐’라며 경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아씨께서 직접 말씀하신 귀인이니 함부로 대할 수도 없고.’
주 총관은 한숨을 내쉬었고, 청유백은 그것을 보며 대꾸했다.
“알고 있다.”
“아, 그…그러시겠지요. 물론이고 말굽쇼.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그래, 뭐.
알고 있으시겠지요. 네.
어디다 쓸 거냐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주 총관은 두말 않고 창고로 들어갔다.
양도 꽤 많으니, 챙기는 데에 시간이 걸릴 듯싶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화가 호기심이 동한 듯 물었다.
[이건 뭣 때문에 챙기는 게냐?]
‘먹으려고.’
[…왜?]
‘필요할 것 같아서.’
천화도 나름 약학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다 기억나지는 않는다만, ‘알고 있었다’라는 사실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
그렇기에 안다.
약을 사용하는 상황이 어떤 때이고, 어떤 몸이 약을 필요로 하는지.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청유백의 지금 몸 상태는 몹시 정상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생채기 하나 없이, 피로감 하나 없는 상태였다.
[…오체 건강한 놈이 왜?]
‘먹는다고 독이 되지는 않잖나?’
[그야 그렇겠다만, 낭비 아니냐.]
천화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목청을 울렸다.
뭐, 그래.
약재 자체는 상관이 없다.
독을 약으로 받는 몸이기는 하지만, 반대로 약을 독으로 받는다거나 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물론, 뭐 어디 영산(靈山)에서 자라서 신령한 선기를 듬뿍 머금은 산삼쯤 된다면야 극독이 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약초는, 선기 같은 것은 머금지 않는 법이다.
세상은 선의보다는 악의로 차 있는 게 보통이니 말이다.
하지만, 굳이 왜 쓴 약재를 찾아가며 먹으려 한단 말인가?
[정말…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낭비일진대…….]
심지어 청유백이 요구한 것들 중 하나인 저 익모초(益母草).
천화도 저것은 잘 알았다.
다른 것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저것만큼은 똑똑히 기억에 새겨져 있었다.
왜냐고 묻는다면야, 단순했다.
정말, 끔찍하게.
지옥같이 맛없다.
어느 정도냐고 묻는다면,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 신상에 이롭다 말해야 할 수준이다.
[…네놈, 네가 먹는 것은 본녀도 느낀다는 것은 알고 있는 게지?]
‘아무렴. 너무 잘 알지.’
[복수…하는 것은 아니지?]
‘아휴, 아니지. 내가 그리 속이 좁아 보이던가?’
솔직하게 말하면 응, 이라고 대답하고 싶었다만.
천화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니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래. 설마 저걸 정말 직접 먹으려고 구하고 있겠는가.
익모초 하면 그거다.
여자에게 효능이 있는…….
그런 풀이다.
청유백이 먹어 봤자, 정말 진짜 끔찍하게 맛대가리 없는 것 말고는 아무런 효능을 보지 못할 테다.
그래.
아마, 분명히 ‘먹이려고’를 잘못 들었던 것일 게 분명할 테다.
천화는 반쯤 자포자기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믿으마…….]
‘그래. 믿으라고.’
천화의 전전긍긍함과 묘하게 여유로워진 청유백의 태도가 잠시 엇갈리고, 주 총관은 꽤 큼지막한 보따리를 싸서 가지고 나왔다.
“전부 집어넣었습니다. 그, 먹어도 죽는 녀석들은 없으니 별말은 안 하겠습니다만… 다른 사람에게 말없이 먹이면 두 번 다시 상종을 안 하게 될지도 모르니 조심하십쇼.”
“…그 정도인가?”
“경험담입니다. 아, 제 이야긴 아니지만 말입죠.”
“괜찮군. 선처해보지.”
귓가에서 ‘선처한다니 무슨 말이냐’라고 소리치는 천화의 목소리를 가뿐하게 무시하며, 청유백은 주 총관에게 물었다.
“녹지연은 어떻지?”
“아, 오늘 아침 즈음에 눈을 뜨셨습니다. 깨어나자마자 공자님을 찾으시던데, 아마 지금은 주무시겠지만… 말씀드려 볼까요?”
“필요 없다. 알아서 하겠지.”
청유백은 그렇게 등을 돌렸다.
천화는 또다시 ‘무심한 놈! 여인의 마음도 모르는 놈!’ 따위의 말을 하고 있었다만, 알 게 뭔가.
당장 필요에 의한 선택을 할 뿐이었다.
그녀는 유능하고, 굳이 자신이 찾아가지 않더라도 알아서 회복하고 자신을 찾을 것이다.
아침에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신에 대하여 언질해 둔 것만 보아도 명료하지 않던가.
차라리 수면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그녀를 돕는 일일 테다.
[머저리 같은 놈.]
‘…아니라니까.’
청유백은 걸음을 옮겼다.
주어진 시간은 결코 많지 않다.
지금은, 그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해야만 할 때다.
* * *
어둡다.
차갑다.
아니…뜨거운가.
…모르겠다.
들려오는 것은 노랫소리.
누군가를 경배하는 소리.
그리고, 주문을 외우는 소리.
아니, 주문이 아니라 염불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새하얗다.
그러나, 어둡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아니, 생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생각하기 시작한 것일까.
점차 바람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새어오는 공기, 그리고 느껴지는 숨결과, 무언가에 부딪혀 부서지는 바람의 흐름.
그것이 얼굴에 부딪히는 감각까지, 점차 선명해진 무언가가 색이 되어 다가온다.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표류하던 감각은 어느새 색을 되찾고, 어둠의 가장자리에서부터 알 수 없는 빛을 맞이하기 시작한다.
드드득.
무거운 소리가 울린다.
사각형의 가장자리, 시야의 바깥에서부터 빛이 들어온다.
…이윽고, 빛은 사방을 전부 채워, 시야에 밝은 백색의 빛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위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시야에 적응하는 것에는 꽤 시간이 걸렸다.
그림자는 기다려 주었다.
계속 같은 자리에서, 그가 일어나는 것을 기다리는 듯, 혹은 보채는 듯이 계속 지켜보는 듯 보였다.
“…….”
사내는 눈을 깜빡였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내는 반복적으로 그 행동을 반복하면서, 자신을 향하는 그림자의 시선과 마주했다.
그것은 여인.
황금색 옷을 입고, 온갖 장신구와 장식으로 치장한, 과도하다시피 화려한 여인이었다.
기이한 형태의 모자와, 손에 들고 있는 방울 등을 보면, 제사를 위한 도구로 보이기도 했다.
“깨어났어?”
그녀는 그것을 장난스레 흔들며 사내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도왔다.
갑작스러운 기상에 머리가 아파 왔다.
아니, 머리뿐만 아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몸을 움직이는 모든 감각이 처음인 것만 같았다.
“…여긴?”
“뭐, 여느 때랑 같지.”
사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은 어두웠다.
곳곳을 밝히는 불꽃이 있었지만, 어딘가의 동굴인 듯 보였다.
그리고 이 칙칙한 동굴을 장식하는 것은, 심장이 뽑혀나간 사람들의 시체.
누군가의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었고, 누군가의 손에는 심장이 들려 있었다.
오래지 않았다.
길어야 반나절.
수십 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심장에서 흐르는 피가 이 제단 전체를 적시고 있었다.
사내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것들은…….”
“음? 너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 뭐, 굳이 필요 없대도 나서는 거 있지? 상관없어서 냅뒀어. 분위기는 잘 살잖아?”
그녀는 웃었다.
황금 장신구와 반짝이는 미소가 잘 어우러지는 듯 보였다.
그녀는 품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어 사내에게 내밀었다.
연꽃이 그려진 책자였다.
특이하게도, 염료를 사용해서 하얀색으로 색칠해 놓았다.
“자, 글자는 기억해?”
글자를 기억하냐고?
사내는 순간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글자가 뭐지?
하지만, 그녀가 건넨 책자를 본 순간 떠올랐다.
잊고 있는 것을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 이게 글자였지.
사내는 대답했다.
“…그런 것 같다.”
“자, 그럼 내 이름은?”
“…유서온.”
사내는 당황스러운 듯 보였다.
알고 있지 않았던 지식들이, 그녀가 말하는 것에 따라 이끌려 나오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저 잊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유서온, 사내가 그렇게 부른 여인은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네가 모시는 분은?”
“아직 오지 않은… ‘그분’.”
그분?
그분은 누구지?
왜 이름으로 부르지 않지?
이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지끈, 사내의 머리가 아파 왔다.
그러나 유서온은 걱정스러운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익숙한 듯이, 신경 쓰지 않으며 질문했다.
“좋아. 그럼 네 이름은 뭘까?”
“내 이름… 내 이름은…….”
이름.
그것이 무엇인지는 안다.
객체와 객체가 서로를 호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가 아닌가.
하지만 사내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것은, 기억나지 않았다.
“…모르겠다. 내 이름이 뭐지?”
“아하, 이번에 잊어버린 건 이름인가. 크진 않네. 다행이야.”
이번에?
무슨 뜻이지.
사내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무어라 다지기도 전에 유서온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 책에 적혀 있어. 아마… 아, 그래. 여기 있네.”
그녀가 책장을 넘겨 가리킨 것은 두 개의 글자였다.
이어서 읽는 것처럼 보였다.
사내는 입을 달싹거려 그 글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교아…….”
“그래! 네 이름은 교아란다?”
“…교아.”
사내는 멍청하게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뇌까렸다.
분명 알고 있는 이름이다.
분명, 익숙하고…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왜인지, 그것을 생각하면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잘 생각나지가 않았다.
“…교아, 교아…….”
하지만, 이름을 반복해서 되뇔수록 다른 무언가는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건 꽤 즐거운 감각이었다.
새로운 것을 익히는 쾌락.
그것이 수십 번, 수백 번 반복되는 것만 같은, 그런 감각.
“아하, 아하하… 그래, 알 것 같아!”
점점 기억이 명료해져 간다.
광인처럼 웃는 교아를 보며, 유서온은 어깨를 으쓱였다.
“다 좋은데, 적당히 죽어. 아직 소재에는 여유가 있지만… 다음에는 뭘 잊어버릴지 모를걸?”
그녀의 손에는 붉은색 끈으로 엮여진 부채가 들려 있었다.
철로 만들어졌고, 끄트머리가 풀어지고 크기가 작은 것으로 보아 조각 몇 개가 떨어져 나간 듯 보이는 부채였다.
“그래, 그래. 알고 있어. 잔소리하지 마. 아, 아아… 하하하! 그래. 기억났어. 잔소리꾼!”
“자, 누가 널 죽였는지는 기억해?”
“그러엄, 물론이고말고….”
교아는 미친 듯이 웃었다.
입꼬리가 찢어지듯 위로 기울었다.
죽음의 감각, 사지가 찢어지는 감각.
그리고 그 가운데에 서 있는, 청색 늑대가 수놓아진 옷.
“마교의 아이, 그래, 정말 재밌는 친구였어. 청… 뭐였는데? 뭐면 어때! 보면 기억할 텐데!”
큭큭큭, 하고 웃는 교아를 보며 유서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딴 게 연꽃 중 하나라니.’
말은 안 듣고, 항상 제멋대로에, 수틀리면 뭐가 됐든 항상 죽이려고 드는 천방지축.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연꽃을 정하는 것은 자신의 일이 아니니까.
그저, 자신에게 부여된 책무만 성실히 수행하면 그뿐인 일이었다.
유서온은 말을 이었다.
“이번 몸은 좀 더 강하게 만들었어. 재료가 더 들어가긴 했지만… 묵련의 지시였으니까. 함부로 굴리면 안 된다?”
“아, 알겠다니까…….”
교아는 대충 귀를 후비며 대꾸했다.
어차피 이 이상 말해봐야 듣지 않는다. 갑자기 빡돌아 자신을 죽이려 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 이상 대화에 의미는 없을 테다.
교아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혼자 낄낄거리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희번덕였다.
“그래서, 이번엔 누굴 죽이면 돼?”
“곧 정해질 거야.”
그분이 올 날이 머지않았다.
천하를 그분의 발밑에 놓고, 모두에게 평안을 가져다줄 날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