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한 발짝 앞으로 (2)
하룻밤.
수많은 소동이 일어났던 그날의 밤도 끝이 찾아왔고, 결국 동은 텄다.
마교 본산 전역에서 일어난, 고위 인사들의 갑작스러운 발작 사태.
수많은 가문과 세력이 간밤을 지새운 이 사태는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그러들었다.
퍽 소란스러웠던 것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야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히 넘어갔다.
무성한 소문들 가운데에는 녹가주가 무언가 음모를 꾸몄다는 음모론도 존재했으나─
결국, 헛소리로 치부될 뿐.
사건을 겪은 당사자와 녹가의 장원에 있었던 무인들을 제외하면, 누구도 진상을 알 수 없었다.
그저 평소와 같은 밤을 보내고, 평소와 같은 아침을 맞았을 뿐이었다.
녹가는 녹가대로.
적가는 적가대로.
굳이 진실을 들춰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기에, 진상을 아는 자는 입을 벌리지 않았다.
그리고 모르는 이도, 굳이 그것을 알고자 하지 않았다.
굳이 자신과 무관한 일을 파헤쳐 가며, 사서 근심을 늘리고자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사람이라면 무릇, 자신의 눈앞에 놓인 상황부터 해결하고 나서야 다른 것에 눈이 돌아가는 법.
그리고 대체로 마교의 사람들에게는, 당장 눈앞에 놓인 일이 있기 마련이었다.
가령─ 모포로 둘둘 감긴 검을 들고 골머리를 싸매는 이 청년.
묵태곤 또한 그러했다.
“아… 좆됐네…….”
큰일 났다.
진짜로 큰일 났다.
‘내가 미쳐서 그런 약속을 해가지고…….’
묵태곤은 탁상에 머리를 몇 번이고 내리박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걸리면 진짜 큰일 난다.
자식이고 나발이고, 당장 족보에서 파여 길거리에 나돌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약속은 이미 했고, 지켜야지.
“…….”
묵태곤은 검을 감싼 모포를 풀어, 잠깐 그것을 검집에서 뽑아 보았다.
서슬 퍼런 한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은 마검.
청유백과 약속했던 검이었다.
그가 두 번째 시험에서 우승하면 검묘에서 검 하나를 내 와 주겠다고 했던, 바로 그것 말이다.
“호언장담했으니 이제 와서 뺄 수도 없고…….”
쯧.
묵태곤은 혀를 찼다.
그래. 뒤지기야 하겠는가.
‘그냥 줄 섰다고 생각하자.’
혹시 아는가?
정말로 청유백이 교주가 될지.
묵태곤은 다시 검을 모포로 감싸 품에 안아 들었다.
‘선조님, 죄송합니다!’
그래도 그렇게 동굴 속에서 빛도 못 보고 썩어가는 것보다는, 사람 손에서 구르는 게 더 나을 겁니다.
…아마도!
* * *
소혜는 곤란해하고 있었다.
이유를 묻는다면, 모시는 도련님께서 평소에는 일평생 찾지도 않던 다과를 찾으셔서 주방에 어려운 부탁을 해야 했던 것이 첫 번째 이유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그렇게 가져온 다과를 청유백이 근엄한 표정으로 집어 들어 자신의 얼굴 앞으로 내밀었기 때문이다.
행동의 의미는 명확했고, 소혜는 몇 번이고 그것을 받아먹었지만.
“도련님? 그, 제가 직접 먹을 수 있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시면서 왜… 읍!”
소혜는 반쯤 강제로 입으로 쑤셔 넣어지는 다과를 씹으며 얼굴을 붉혔다.
청유백은 무슨 생각인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소헤에게 직접 먹여주고 있었다.
뭐, 맛이야 있었다만.
“괜찮다니까요…….”
소혜로서는, 계속 한숨을 내쉬면서 자꾸만 제 입으로 다과를 가져오는 주인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일까.
한숨은 왜 자꾸 내쉬는 것인가.
뭐가 되었든, 의문밖에는 들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천화의 목소리가 소혜에게 닿지 않는 탓이었다.
정말, 너무 안타깝게도….
[어휴! 애가 뼈만 남아서 아주! 더 먹어라 더! 아유 그렇지!]
‘…….’
청가가 그리 가난한 것도 아니고, 소혜는 나름 잘 먹고 사는 편이다.
기본적으로 주는 식사도 그렇거니와, 어른들에게 예쁨 받으며 받아먹는 것도 상당히 많다.
하지만 뭐, 손주 보는 할머니의 마음 같은 것일까.
청유백은 어느 정도로 살이 쪄야 옳게 된 손주의 형태일까 고민하며, 천화에게 물었다.
‘이제 만족하나?’
[아아, 어쩜! 보채지 말거라!]
청유백은 해탈한 웃음을 지으며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급기야 천화는 자신의 앞에서 무릎 꿇고 있는 소혜를 번쩍 들어 올려, 품속에 안아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 도련님?”
“…….”
그 어색한 정적이 이어지기를, 몇 초.
저항하는 청유백과 어떻게든 끌어안으려는 천화의 기 싸움에 손이 부들부들 떨릴 무렵─
─콰앙!
문이 터지듯이 벌컥 열리며, 불청객이 난입했다.
“이봐! 청유백!!”
묵태곤은 몹시 좋지 않은 안색으로 청유백을 애타게 찾았다.
분명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왔으니, 오차는 없을 것이다.
이 물건을 들고 나돌아 다니다가 가문의 어른에게 걸리는 날에는 끝장이니, 당장이라도 이 저주받은 흉물─본인 기준─을 청유백에게 넘겨 버리고 싶었다.
헌데…….
“…….”
“어…….”
묵태곤과 청유백의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는, 청유백의 품에 안겨 뭔가를 오물거리는 소혜와.
“…….”
그 머리를 쓰다듬는 청유백의 흔들리는 눈동자까지 말이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묵태곤은, 자신이 꽤 눈치가 있는 남자라고 자부하는 편이었다.
“어… 좋은 시간 방해해서 미안하다. 그럼 이만.”
─쾅.
다시 문이 닫혔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문이 열리고는.
“…그래도, 걔는 아직 너무 어리다고 생각한다. 좋은 시간이야 말리지 않겠다만, 역시 오 년은 더….”
청유백은 고민해야만 했다.
어떻게 해야 잘 죽였다고 소문이 날까.
좋은 시간은 또 무슨 지랄일까, 일단 땅에 반쯤 파묻어 보고 물어보고 싶었다만─
‘…좀 가만히 있어라.’
[본녀 마음이니라.]
그 와중에도 천화는 손을 강제로 움직여 소혜를 쓰다듬고 있었기에, 무어라 할 말도 없었다.
소혜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청유백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고, 그제야 천화도 체념한 듯 그녀를 놓아주었다.
온전히 몸의 움직임을 되찾은 청유백은 맑게 웃으며 살기를 뿜어냈다.
“혹시 삶에 싫증이 났거나 이제 사는 게 지루해졌나?”
“…….”
뒤지고 싶냐고 온몸으로 경고하는 청유백에게, 묵태곤은 ‘에이 농담이지’라고 저항하며 얌전히 들어와 앉았다.
도망가면 진짜로 쫓아와서 죽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묵태곤은 청유백의 앞에 모포로 싸인 검을 내려놓으며, 소혜가 그럼 저는 이만! 하고 잽싸게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
“…….”
그리고는 어색하게 흐르는 정적과 한숨.
‘뭐 하러 왔냐’는 청유백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묵태곤은 입을 열었다.
“…그, 축하하고! 어. 솔직히, 네가 진짜로 이길 줄은 몰랐는데.”
“용건만 말해라.”
“니미럴, 내가 무슨 용건이 있겠어.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 하러 왔다. 개자식아.”
묵태곤은 지끈거리는 미간을 짓누르며 청유백의 앞에 검을 내던졌다.
충격으로 모포가 벗겨지고, 그 안에 싸여 있던 검과 검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유백은 의외라는 듯 대꾸했다.
“…안 그래도 말하려 했었는데, 꽤 신속하군.”
“쉬운 일이 아니거든. 걸리면 죽어. 무슨 말인지 알지? 마침 지금 가문 어른들이 난리가 난 것 같아서 손쉽게 빼돌렸다.”
묵태곤으로서는 기회였다.
무슨 일인지, 야밤에 갑자기 가문의 어른들이 헐레벌떡 뛰쳐 모여 뭔가를 회의하는 것이 아닌가.
그 틈을 타서 어른들의 눈을 피해 검묘에서 이 검을 갖고 나온 것이었다.
물론, 청유백으로서는 알 바 아닌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스릉.
청유백이 손잡이를 당기자, 검은 저항 없이 부드럽게 뽑혀 나왔다.
차가운 서리빛 검신에 새겨져 있는 이름은 두 글자.
주천(周天).
천화는 놀란 듯 목소리를 높였다.
[호오. 지난날 보았던 검묘의 그 검이 아니더냐. 백월을 찾기 전에, 제일 쓸 만했던 녀석이구나.]
청유백도 만족스러운 듯 검신을 매만졌다.
처음에도 꽤 만족스러운 녀석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검묘에 직접 들어가서 다시 한번 무기를 살펴볼까 싶기도 했었지만, 아무래도 무리한 요구가 될 테다.
“보는 눈은 쓸 만하군.”
“당연한 거 아니냐? 묵가의 아들이라고. 검묘의 무기를 누가 관리하는데?”
묵태곤은 순간 인상을 찌푸리는 듯하다가도, 결국 칭찬인 것 같은지 코를 쓱 훑었다.
그리고, 당장 뭔가가 생각났는지 손가락을 튕기며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아까의 그 이야기다만… 뭔가 아는 거 있냐?”
“아는 것?”
“그래. 간밤에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몰라? 어르신들은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리시질 않나, 아버지는 근심에 걱정에 아주…….”
묵태곤은 한숨을 내쉬며 불평불만을 토로했다.
가문의 어른들은 뭔가를 아는 것 같은데, 무엇 하나 말해주질 않고!
형님도 무시하고, 하나 있는 여동생한테는 바보 취급당하고!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이 말이다.
묵태곤의 불평에, 청유백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몰라도 된다.”
“뭐? 아니, 그게 뭔…….”
청유백은 묵태곤의 말을 무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묵태곤은 어이없어하며 청유백에게 계속 따지고 들었지만, 전부 무시하고선 주천검을 집어 들 뿐이었다.
대꾸고 나발이고, 알 게 뭔가.
청유백은 코웃음 쳤다.
‘어차피 일이 어떻게 되든 이대로 그저 묻히지는 않을 테지.’
대답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이유였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일은 이미 너무 커졌고, 적영과 백소하는 외부 세력에 대한 정보를 각 가주에게 말할 테다.
사마신교는 마교 입장에서도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고, 결국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쪽으로 움직일 테니.
‘결국 오래지 않아 뭔가의 통달이 오겠지.’
녹가의 처우.
교주의 공석에 따른 판단.
그리고, 앞으로의 행보까지.
‘하지만 그때까지 마냥 기다릴 이유가 없다.’
시간은 남고, 몸은 멀쩡하다.
그렇다면, 자연히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뭐야, 어디 가냐?”
“수련하러.”
청유백은 자신의 검들을 챙겨 들고 문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완벽한 장소, 완벽한 만들어진 기연을 이미 눈에 담지 않았던가.
하지만 굳이 설명해 줄 의리는 없었다.
만류당하는 것도, 몇 번이야 즐겁다만 반복되면 귀찮은 일이다.
“아, 맞아. 소혜야.”
“네?”
청유백의 부름에, 소혜는 옆방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청유백은 품에서 접힌 서신을 꺼내어, 소혜의 앞에 대충 던졌다.
“백소하가 오면 던져줘라.”
“백 공자님이요? 언제쯤 방문하시는지…….”
“그건 모른다. 오긴 오겠지.”
무책임한 말이었지만, 정말 이 이상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윗분들의 상의가 언제 끝날지 어찌 알겠는가.
그저, 빠른 시일 내에 끝날 것이라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청유백은 말을 이었다.
“오래 다녀올 테니, 찾지 말고.”
“다른 분이 찾아오시면요?”
“글쎄, 그건…….”
다른 분, 다른 분이라.
자신을 찾을 다른 사람이라 해 봤자 몇 없다.
묵태곤은 지금 봤고.
적영이 자신을 찾을 리는 없고.
황돈은 안 봐도 상관없다.
그러면 뭐, 남는 사람은 하나 정도일 테다.
“모른다고 해라. 알아서 찾아올 거야.”
“알겠습니다.”
그래, 뭐.
그녀에게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테다.
일어나면 주변의 상황을 볼 테고, 대충 주워섬기는 이야기만 있어도 적당히 추론해서 올 수 있을 것이다.
허리를 숙이는 소혜를 뒤로하고 청유백은 걸음을 옮겼다.
문득, 천화가 물었다.
[얼마나 있을 생각이냐?]
‘너무 당연한 질문 아닌가?’
[세상에 당연한 것이 어디 있겠느냐? 말이나 해 보거라.]
청유백도 천화도 서로 대답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저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청유백은 무심히 대꾸했다.
‘당연히, 시간이 되는 한 계속.’
[역시 그렇지?]
‘그래도 길지는 않을 거다.’
[으음,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 그곳이 좋기야 하다만, 오히려 그곳에서 나왔을 때가 두려워질 따름이니.]
목표는 녹가의 장원.
그리고, 녹가주의 비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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