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한 발짝 앞으로 (1)
“눈을 떠라. 편히 가면 안 되지.”
죽는 것은 곤란하다.
그리 약속했지 않던가.
청유백은 녹지연과의 약속을 떠올리며 녹운룡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허나 이대로 끌고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지.’
녹지연이 건넨 독의 효력은 무한하지 않고, 이 동굴을 나가는 순간 이 회복력도 끝이다.
‘뭔가 추가로 제압할 수단이 필요하겠군.’
힘줄을 끊어버리는 것도 괜찮겠다만, 지금 상황에서 그랬다가는 과다출혈로 죽을 것이 뻔하다.
이미 상처는 심했으니 말이다.
‘점혈도 안심이 안 되겠지.’
청유백이 스스로 점혈을 풀어냈듯,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고수라면 시간을 들여 자신의 혈도를 풀어낼 수 있다.
물론 그에 따라 추가적인 조치를 할 수는 있겠지만, 녹운룡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마주.
점혈보다 확실한, 항구적인 제압 방법이 필요했다.
“…….”
청유백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혈관을 타고 강렬한 황홀함이 내달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떠한 것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전능감은, 생각이라고 하여 비껴가지 않았다.
수백, 수천 가지의 가능성이 일순간에 뇌리에 스쳐가고.
청유백은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한 가지 생각이 번뜩였다.
그리고 청유백은 그것을 천화에게 속삭였다.
[흠? 허어… 흐음…….]
‘할 수 있겠나?’
[으으음, 못 할 것은 없을 것 같구나. 사람 몸에 흐르는 것이라곤 하지만, 결국 독기니 말이다.]
‘그럼 당장 하지.’
─콰악!
청유백은 녹운룡의 머리를 붙잡아 들어 올려 벽에 처박았다.
자신의 머리 위로, 정확히 가슴팍 정도가 시선에 오게끔 말이다.
그리고 오른손을 펼쳐, 녹운룡의 단전에 가져다 대었다.
[몸을 잠시 빌리겠느니.]
“…….”
청유백은 후회하고 있었다.
먼 옛날, 몇 번이고 회귀할 때에는 내공의 부족이나 고갈을 걱정하지 않았기에, 그것을 보충할 방안도 생각지 않았다.
가령, 흡성대법이 그러했다.
‘천지에 널린 것이 영약이고, 그것으로 늘리는 내공이 갑자 단위였으니…….’
고작 흡성대법으로 몇 년씩 찔끔찔끔 늘려 봐야 간에 기별도 안 간다.
그렇기에 그것을 천시했고, 익힐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영약이라는 놈은 얼굴 한 번 보기도 어려운 지경이 되어 버렸고….
‘…결국, 빠른 시일 내에 내공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하게 되었지.’
그래.
그리 천시하던 흡성대법 하나조차 요원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뭐, 이제 와서 그것을 처음부터 익힐 수는 없는 노릇.
그렇기에 있는 것들을 조합하여 어떻게든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청유백의 손끝에 흑색의 빛이 감돌았다.
강렬하지만, 패도적이기보다는 부드러운 회전을 반복했다.
청유백으로서는 불가능한 기예.
파괴가 아닌 조화를 위한 마기였다.
청유백은 그것을 잠깐이나마 대단타 생각했고, 그것을 느낀 천화는 금세 웃으며 으스댔다.
[흐음, 좀 더 본녀를 치켜세워 줘도 괜찮다고 본다만?]
‘그래. 대단하군.’
[그럼 내일은 우리 소혜를 보러 가자꾸나! 일을 전부 마치고 말이다.]
‘…생각해 보고.’
천화는 똑바로 대답해라! 라고 말하면서도, 손의 기운을 흩트려놓지 않았다.
손끝에 모인 기운이 점점 커져가고, 이제 그 크기 자체가 하나의 형태를 띠어갈 때 즈음.
정신을 차린 녹운룡이 눈을 가늘게 뜨고 청유백을 내려다보았다.
“큭, 큭큭… 죽일 생각이냐? 네놈도 똑같은 놈이다. 너는, 너는 특별한 줄 아는가…. 네놈도 결국 연옥에 처박힐 죄인일 뿐이야…….”
아, 자주 본 유형이었다.
뒤지기 직전에 입이라도 좀 털어, 어떻게든 살 방법을 강구하든가─ 죽더라도 끝까지 기분을 엿 같게 만들고 싶어 하는 놈들이 하는 행동이다.
하지만 뭐…….
어쩌라고?
“내가 알아야 하나?”
“뭐라고?”
“뒤져가는 꼴로 하는 말이 고작 그거라니, 안쓰럽기 그지없군. 차라리 멋들어진 유언이라도 하지 그랬나.”
청유백의 손끝에 모인 기운이 점차 녹운룡의 단전으로 파고들었다.
거대하고, 강하게 회전하는 그 마기는 마치 소용돌이처럼 주변의 기운을 빨아들여갔다.
마치 더 큰 덩어리에 부딪혀, 하나가 되려는 물방울처럼.
“끄으으…….”
녹운룡은 심상치 않음을 느꼈지만, 이미 무엇 하나 할 수 없었다.
전신이 망가졌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아직 멀쩡한 혀를 조금이나마 놀릴 수 있을 뿐이었다.
“네놈은… 네놈은 악이다! 네놈만 없었다면, 마교의 민중은 그분의 휘하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어…!!”
“저런, 안타깝군. 조금 더 노력했어야지. 태만하기는.”
“네놈이 전부 망쳤거늘, 아무런 심경조차 들지 않는가!”
심경? 무슨 심경.
청유백은 코웃음 쳤다.
설령 그 계획을 자신이 망쳤다고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인가.
“네놈이야말로 악인 아닌가. 민중에게는 꿈만 꾸게 해 놓고, 결국 가져다준 것은 아무것도 없군…. 저런, 줬다 뺏는 희망이 가장 잔인한 법인데.”
“그, 그건 결국 네놈이…!”
“패배하지 말지 그랬나. 이기지 그랬어? 네놈이 이겼다면 마교의 민중은 그 멋진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 텐데. 고작 그것 하나 해내지 못하다니.”
실패자, 무능한 놈!
결국 패자에게 따라붙는 것은 그런 꼬리표뿐이다.
“무능이야말로 이끄는 이의 가장 큰 죄악인 것을, 그 나이 처먹고 아직 모르는군.”
“궤변이다… 궤변일 뿐이야…!”
“그래. 궤변이지.”
청유백은 대충 대꾸했다.
손끝의 기운은 점점 함축되어, 갈수록 빠르게 녹운룡의 독기를 흡수하고 있었다.
전신에 흐르는 그 기운, 수십 년의 세월, 수십 년의 내공을.
마치 마중물이 지하수를 끌어올리듯이 빨아들였다.
“선이든 악이든, 결국 이긴 자의 입맛대로일 뿐인 것을 몰랐나?”
“큭… 크악……!!”
녹운룡은 대답하지 못했다.
급격하게 안색이 나빠지기 시작한 그는, 급기야 눈알을 까뒤집으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래. 조용하니 나쁘지 않군.”
자신의 단전으로 흘러 들어오는, 막대한 양의 독기를 느끼며.
청유백은 웃었다.
* * *
귀살마는 만검각에 보낸 무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 독굴에 맨몸으로 진입하는 것은 미친 짓이고, 결국 진입하더라도 호신구나 영단 등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동굴을 무너뜨렸다간 내가 책임을 져야만 하겠지.’
화공이든, 폭발이든 뭐가 되었든 고독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결국 책임은 현장 지휘관인 자신이 져야만 할 터였다.
당연히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기다리는 도중 문제가 생겼다.
“허어, 정말로 녹가주가…….”
“서둘러 가주께 연통을…….”
이 고독 사태는 적가뿐만 아니라 다른 가문과 세력에도 연쇄적으로 일어난 것인지, 그쪽에서도 무인을 보내온 것이다.
협력이 된다면 아군의 불필요한 손실을 줄일 수 있으니 구태여 내쫓지는 않았다만, 이리되면 정말로 사태가 낙장불입이 되고 말 것이다.
정말로 녹가가 범인인 것으로 낙인찍히면 마교는 세력 다툼으로 한바탕 피바람이 일 것이며─
‘나아가, 마교 세력의 외각에서는 슬금슬금 기회를 노리겠지.’
그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녹가주를 잡아낸다고 해도, 그것은 비밀리에, 아무도 모르게 해결하고 다른 이유로 덮어 버리는 것이 가장 모양이 좋았다.
권력의 구조가 최대한 바뀌지 않는 쪽으로 말이다.
‘가령 예를 들자면… 녹가주의 자리를 승계하는 도중에 일어난 작은 사고라든가.’
그러나 녹가주를 살해하는 것이 공연하게 되어버리면, 그런 덮는 행위는 불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적여문 외총관도 자신에게 그리 명하지 않았던가.
‘목격자는 없어야 할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귀살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땅한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문득, 무인 하나가 그에게 물었다.
“대주님.”
“뭐지?”
“아까 들어간 청가의 공자, 괜찮은 겁니까? 책임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닌지…….”
“…괜찮다. 어차피 우리가 강제로 집어넣을 방법이 없다는 건 모두가 알 테니까.”
막말로, 제 발로 기어들어갔는데 알 게 뭔가.
귀살마는 코웃음 쳤고, 적가의 무인들은 시시덕거리며 농담을 던졌다.
“시체는 찾을 수 있으면 좋겠군요. 책임 전가는 지긋지긋하니까요.”
“저 안에서 말입니까? 어휴, 명복이나 빌어 줘야지요.”
청유백이 살아 있을 거라는 가능성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저 독기에, 상대는 녹가주.
그야말로 그저 자살행위였다.
심지어 적철진이 그것을 두 번이나 막아 세우기까지 했으니, 이 이상 무언가 해줄 의리는 없는 셈이었다.
적가 사람이면 모를까, 청가의 공자가 뒤지든 말든 알 게 뭔가.
“뭐, 죽을 때 비명 정도는 지르겠지요. 언제 지르는지 내기 하시겠소?”
“좋아. 앞으로 반각 내에 들린다에 걸지.”
“그럼 나는 반의 반각.”
이제는 청유백이 언제 죽을지를 가지고 돈놀음까지 하는 꼴이었다.
귀살마는 그것을 제지해야 할까 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어차피 만검각으로 보낸 인원이 올 때까지는 할 일도 없을뿐더러, 그들이 하는 짓거리가 아예 틀려먹은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다만,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비명도 못 지르고 죽을 것 같긴 하다만…….’
정도, 말하고 싶을 뿐이었다.
녹가는 독과 암기의 가문.
그리고 녹가주는 장장 이십 년 가까이 그곳의 수장 노릇을 해먹고 있는 위인이었다.
청유백 정도야, 그 기척을 느끼는 즉시 순살당하리라.
물론, 거기까지 이르기 전에 독에 뒤지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
헌데 문득, 귀살마의 시야에 적철진이 보였다.
그는 동굴 안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있나 싶어 귀살마 또한 그쪽을 바라보았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했다.
‘뭔가 오고 있다면 내가 먼저 느꼈을 테지. 그저 기시감일 뿐인가.’
귀살마는 그래도 아직은 자신이 적철진보다 윗 수준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쌓아온 시간의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그리 생각하며, 귀살마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헌데, 찰나.
“……!!”
흠칫.
─고오오오!
무언가 느껴졌다.
느린 발걸음, 그리고 무언가 끌리는 것 같은 흐릿한 소리.
‘녹가주는 아니다. 걸음걸이를 보아하니 한 사람, 그리고… 뭔가를 땅에 끌고 있다. 무거운… 쌀 한 포대보다도 더 무거운 것. …사람?’
헌데 기묘한 것은, 보통 기운이라 함은 가까이 올수록 강하게 느껴져야 하는 것인데.
저 기운은, 무엇 때문인지 이리 가까이 올수록 그 존재가 약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설마.’
그것은 점차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다른 무인들도 그 기척을 느꼈는지, 점차 하나둘 동굴 안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어 당장이라도 전투를 준비하는 듯 보였다.
모두가 저것이 녹가주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동시에 보았다.
“저, 저건……!”
“녹가주… 말도 안 돼!”
“……!!”
청유백이, 피떡이 된 녹운룡의 머리채를 붙잡고 질질 끌고 나오는 모습을 말이다.
녹운룡은 저리 반 시체가 되어 죽어 있음에도, 청유백의 몸에는 작은 생채기 하나조차 나 있지 않았다.
귀살마는 감탄했다.
‘어떻게…?! 싸움의 성립조차 안 되었단 말인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습인가?
혹은, 이미 녹가주가 다른 누군가에게 당해 쓰러져 있었던 것인가?
그래. 차라리 후자라면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
천마가 길 가다가 벼락 맞고 죽을 정도의 가능성 정도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은 귀살마만의 것이 아니었다.
‘저, 저 동굴에서?’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가…?’
‘들어갈 엄두도 나지 않았는데…!’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동시에, 믿을 수 없어도 믿어야만 했다.
결코 꿈이 아니었다.
청유백은 반쯤 뽑혀 나간 녹운룡의 머리채를 놓아 적가 무인들의 앞에 던졌다.
‘우, 웃고 있는 건가?’
아니, 아니다. 웃는다기보다는, 오히려 웃으려는 것을 참는 듯한 표정에 가까워 보였다.
대체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결코 정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청유백은 주춤거리는 적가 무인 하나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데려가 뇌옥에 가둬라.”
“보, 복명.”
무인은 반사적으로 경례했다.
그리고 대답한 후에야 자신의 상관인 귀살마를 돌아보았다.
순서대로라면, 상관의 허락을 받고 대답하는 것이 옳았음에도.
“…….”
청유백은 숙연하게 찾아온 침묵 속에서 그들을 무시하고 걸었다.
피 칠갑이 되고 넝마가 된 옷은 분명한 격렬한 전투가 있었음을 의미했지만, 그의 몸에는 작은 생채기 하나 없었다.
그 괴리감이, 청유백의 걸음 앞을 누구도 막아서지 못하게 만들었다.
청유백의 걸음은 녹지연의 앞에 이르러서야 겨우 멈추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청유백이 행한 행동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빼내고, 대뜸 그녀의 손을 맞잡아 무언가 집중하는 듯 보였다.
그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단지, 그 직후 그녀의 표정이 조금 편해진 것 같다는 생각만이 뇌리를 스칠 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