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네 죄를 헤아려라 (4)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다.
녹지연을 나무에 기대어 놓고, 청유백은 곧장 등을 돌려 동굴을 향했다.
적가의 무인들은 서로 책임을 미루고 방법을 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헌데, 그러던 순간.
─카각!
“……!”
눈 깜짝할 사이에, 청유백의 걸음 바로 앞에 일자의 선이 그어졌다.
뒤돌아보자, 적철진이 자신의 도를 뽑아든 채로 청유백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하는 거냐.”
“무지한 자의 만용을 막는 중이다.”
“무지(無知)라.”
청유백은 힐끗 적철진의 허리춤에 달린 검을 보았다.
한 자루의 검과 한 자루의 도.
그러나 이번에도 뽑아든 것은 도뿐이었다.
저 검은 장식인가, 하고 생각하며 청유백이 대꾸했다.
“어차피 네놈들의 손해는 없지 않나? 내가 움직인들 무슨 상관인가.”
“손익과는 별개로, 헛되이 목숨을 버리는 행위는 좋아하지 않는다.”
아, 빌어먹을.
저 오지랖은 적가 놈들의 가훈이라도 된다던가.
적영이든, 적우각이든, 제 일도 아닌 것에 끼어들어서는 참견하는 꼴이라니.
‘그 둘은 방해는 안 되었으니 상관이야 없었지…….’
제멋대로 행동하는 거야 지들 손해니 알 바 아니지만, 직접 앞을 막는다면 얘기가 다르다.
그러나, 당장 놈을 베고 강행할 수도 없는 노릇.
청유백은 그를 무시하고 다시 걸음을 내뻗었다.
그리고, 찰나.
─카캉!
이번에는 바닥을 긁는 소리가 아닌, 강렬한 금속의 충격음이 울렸다.
청유백이 비스듬히 꺼내든 검이 반쯤 검집에서 뽑혀 나온 채, 적철진의 도를 막아내고 있었다.
“……!”
“여기서 베는 것이야말로 헛되이 목숨을 버리게 하는 것 아닌가?”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
적철진은 자신의 공격이 이리 쉽게 막힐 줄 몰랐는지, 퍽 기분 나쁜 기색으로 도를 집어넣었다.
하지만 협박 삼아 가한 공격이 이리 쉬이 막혔는데, 그것에 분노하여 달려든다면 그야말로 본말전도.
그런 면에서 적철진은 생각이란 것을 할 줄 아는 놈이었다.
적철진은 가슴팍을 쥐어뜯듯 부여잡으며 청유백을 바라보았다.
“나는 할 수 없다. 만전의 상태도 아니거니와, 저 안에서라면 내 아비라도 그자를 대적할 수 있을지 명백지 않다.”
그럴 것이다.
고독이 완벽하지 않고, 그 움직임을 막고 있다고 한들 그 방법 또한 독의 일종일 테다.
검에 실린 무게도 상당히 약했으니, 지금 적철진이 저 안에 들어가 봤자 자살 행위일 뿐이다.
적철진은 말을 이었다.
“헌데, 너는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아니. 조금 다르다.”
“허면?”
“못 할 이유가 없다.”
“…….”
침묵이 흘렀다.
적철진은 다시금 도를 뽑아 들지는 않았지만, 그 무뚝뚝한 면상에 조금이나마 복잡한 감정이 깃들었다.
찰나가 지나고, 적철진은 다시금 대꾸했다.
“…오만이다.”
“자신일지도 모르지.”
청유백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막지 않았다.
한 번을 무시당하고, 두 번에 막혔으니.
세 번은, 그야말로 추한 짓이었다.
* * *
[허어! 세상에… 이런 곳이 존재하다니. 사람의 손으로 이런 것을 만들 수 있단 말이냐!]
동굴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천화는 진심으로 감탄하여 연신 목청을 울리고 있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강렬하기 그지없는 독기가 폐에 채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청유백에게 세상에 둘도 없는 생명의 기운.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티끌이나마 존재했던 피로조차 일순간에 사라져, 그야말로 만전(萬全)이라는 문자가 어떤 뜻을 지녔는지 비로소 깨닫는 기분이었다.
“이게 입구에 불과하단 말이지.”
[허어…….]
역시 인간은 아무래도, 살리는 것보다는 죽이는 것에 재능이 있는 생물이 아니던가.
이것이 독기가 아닌 생기(生氣)라면, 결코 인간의 힘으로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아닐 것이다.
숨만 쉬어도 상처가 치유되고 어떤 피로조차 일순간에 회복시키는 환경이라니, 그런 게 있다면 그게 바로 무릉도원일 테다.
[동서고금, 언제나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 살리는 방법보다 많았느니. 당연한 일이니라.]
청유백은 덤덤하게 동굴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독기는 갈수록 강해져 옷은 서서히 부식되어 가고 있었지만, 청유백의 정신은 갈수록 또렷해졌다.
‘이 독굴을 보자마자 녹가주를 쓰러뜨릴 방법이 있겠다 생각이 들었는데…….’
[들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청유백은 품속의 작은 병을 매만졌다.
이 극독과, 이 천혜의 환경.
‘지는 게 더 힘들겠다.’
청유백은 그리 생각하며 어둠 속을 계속해서 걸었다.
사방에서 온갖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소리가 울려댔고, 그중 몇몇은 청유백의 걸음에 밟혀 흉측한 소리와 함께 터져나갔다.
그리고 문득, 저 어둠의 너머에서 무언가 사람의 기척이 느껴질 무렵.
─촤악!
어둠을 가르고 비침 하나가 날아와 청유백의 미간에 박혔다.
고작 머리카락 정도 얇기의 비침.
오감이 극도로 강화된 상태였기에, 그 작은 비침 하나조차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피하지 않았다.
‘흠, 여기서 뭔가 더 머리가 맑아지지는 않는군…….’
[그랬다면 만전이라 부르지 않았겠지. 욕심이 너무 과하지 않더냐….]
청유백은 비침을 이마에서 뽑아내어 내던졌다.
뽑아내어 난 작은 상처는 한 방울 피가 흐르기도 전에 다시 아물었다.
청유백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촤악! 파밧! 파악!
몇 개의 비침이 연신 청유백의 미간에 박혀댔고, 간혹 비도나 철접(鐵蝶)따위의 암기가 날아오면 적당히 튕겨내거나 피했다.
‘비침이야 맞아도 별 감각조차 없지만, 저쪽은… 굳이 맞아주고 싶지는 않군.’
청유백의 걸음은 동굴의 거의 끝에 다다라서야 멈추었다.
그곳에는, 의자에 앉은 채 몇 개의 암기를 손에 쥐고 있는 녹운룡이 있었다.
그는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당혹한 표정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났다.
“어떻게… 멀쩡한 거지?”
“글쎄다.”
청유백은 코웃음 쳤다.
뭐 어쩌겠는가?
암기고 독이고 나발이고.
자신이 바로 녹가의 살아 있는 재앙인데 말이다.
“독이 좀 불량인 모양이지.”
그 말에 녹운룡의 미간이 잠깐 뒤틀렸지만, 이내 본 표정으로 돌아왔다.
“…우스운 놈이군. 그래, 스스로 사지를 찾아 들어온 이유가 있는가?”
“굳이 이유를 찾아야 하나?”
“용서를 빌러 온 것이라면 이미 늦었다. 전부 처음부터 시작할 것이야. 번거롭겠지만, 어차피 결국 시간문제일 뿐…….”
녹운룡은 자리에서 일어나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 굴 속에서도 저리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니, 분명 숨겨둔 한 수가 있던 모양이다.
‘비침을 맞는 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지. 설마하니 만독불침은 아니겠으나… 그에 준하는가?’
기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만독불침이 어디 뉘 집 개 이름이라던가?
독공을 연마하는 자에게 있어서는 지고의 경지이며, 나아가 녹운룡 자신조차 아직 이룩하지 못한 경지였다.
헌데 저런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아이가 만독불침이라.
‘그럴 수는 없지. 절대로.’
가능성을 따지기 전에, 설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당장, 눈앞의 가능성은 그것 외에는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뭐, 상관없다.’
녹운룡은 뿌드득, 하고 어깨를 풀었다.
행동은 한 번이었으나, 뼈마디가 부딪치는 소리는 몇 번이고 연속해서 들려왔다.
어깨, 목, 등, 가슴, 허리, 무릎.
어디고 간에 그 형태가 뒤틀리고 부풀어가며.
다음 순간에는, 결코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형체의 생물이 청유백의 앞에 서 있었다.
“허어…….”
청유백은 놀라는 눈치였다.
그러는 한편, 서서히 검집에서 두 자루의 검을 뽑고 있었다.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녹운룡은 웃었다.
사람이라는 생물이, 태어나서 이 기괴한 장면을 볼 기회가 얼마나 있겠는가.
하지만.
─콰앙!!
그것과는 별개로, 녹운룡은 적가의 머저리들처럼 명예 운운하는 멍청이들이 아니었다.
대관절 왜, 검을 뽑는 것을 기다리고 있어야 하겠는가.
청유백의 신형이 저 멀리 날아가 동굴의 벽에 처박히는 것이 보였다.
“흐음, 그걸 막았는가. 대단하군.”
마지막 순간, 살을 파고드는 감각보다는 강철의 단편이 공격을 막는 감각이 더 강했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 공격을 막은 팔도, 저리 부딪힌 등도 무사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녹운룡은 클클클, 하고 웃으며 청유백에게 다가갔다.
“고작 그런 알량한 재주 하나만 믿고 설친 대가다.”
뼈가 가루가 되었거나,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결코 성치는 않으리라.
어찌 되었든, 움직일 기력조차 남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했다.
허나, 어둠 너머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윤곽이 보여 왔다.
그리고는.
“이야… 더럽게 아프네. 역시, 신경독은 없어서 그런 건가? 고통까지 줄여 주지는 못하는군.”
청유백은 너무나도 멀쩡히 흙모래를 털어내며 일어났다.
그 기색이 지나치게 멀쩡한 것이─
때린 것이 허상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어떻게 된 거지?”
“물주먹이네. 천하의 마주급 고수가 이것밖에 안 되나?”
“허허, 그럴 리가 있겠는가….”
‘무언가 실수를 한 것인가.’
녹운룡은 그리 결론을 지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청유백이 저리 멀쩡히 일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독이 통하지 않더라도 당황하지 않은 것은, 애초부터 기본기에 압도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독과 암기를 제외하더라도 녹운룡은 가주의 자리에 오른 자이며, 동시에 마교의 최고수인 마주(魔主)의 자리에 오른 자.
‘독이 통하지 않는다면, 달리 죽이면 그뿐이다. 당장 몇 시진 전만 해도 그리하지 않았던가…….’
녹운룡의 마주 자리는 독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이기는 하다만, 알 게 무언가.
눈앞의 애송이는 기껏해야 마사.
마두를 앞둔, 혹은 잘 쳐줘야 마두 초입에 오른 아이에 불과한 것을.
“죽어라.”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녹운룡의 팔은 그 자체로 흉기였다.
검? 창?
그런 것이 무어 필요하겠는가.
저 압도적인 크기와 무게 앞에서는, 날붙이 따위 작은 이쑤시개에 불과할 뿐이었다.
─콰과광!!
다시금 굉음이 동굴을 울리고, 청유백은 또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이번에야말로….’
이번에는 정말 손맛이 있었다.
살을 뜯고, 뼈를 부수는 손맛이.
팔을 강타하는 순간 부러진 뼈가 피부를 찢어내고 튀어나오는 감각이 분명히 느껴졌다.
결코 살아 있을 수 없으리라고, 그리 단언할 수 있었다.
……헌데.
“어, 어떻게 일어서 있는 거지?”
“아… 매콤하군. 쌉쌀해. 이번 것은 좀 아팠다.”
청유백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일어서, 뻐근하다는 것처럼 목과 어깨를 돌리고 있었다.
심지어는 분명히 저 팔과 다리, 복부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녹운룡은 그제서야 발견했다.
청유백의 팔, 뼈와 살갗이 드러난 그것이 스스로 제 모양을 되찾고, 다시금 아물어가는 모습을.
‘강시라도 된단 말인가…?!’
아니, 아니다.
설령 절정 고수의 시체로 만드는 금강강시가 온다고 해도, 이 환경하에서는 일각도 버티지 못하고 피부가 문드러져 썩어갈 테다.
헌데, 저놈은 상처가 썩기는커녕 도리어 순식간에 아물어 버리고 있지 않던가.
“자네…무슨 사술을 익혀 온 건가?”
녹운룡은 그리 말하면서도 다시금 주먹을 휘둘렀다.
압도적인 무게의 폭력에 청유백은 다시금 날아갔고, 이번에는 녹운룡도 그저 보고만 있지 않았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청유백의 몸이 공중에 뜨는 순간 바닥을 박차고, 다시금 그것을 내리찍었다.
몸이 회복한다면, 그 전에 으깨 버리면 그뿐인 일이니.
그러나.
“─크윽!!”
녹운룡은 손끝에서 불타오르는 듯한 감각을 느끼고는 손을 거두어야만 했다.
크기가 비대해져 아픔에 둔해졌다고는 하나, 결국은 자신의 주먹.
녹운룡은 육탄전의 전문가는 아니었고, 그 거대한 몸 전체에 강철 같은 호신강기를 두를 능력은 없었다.
아예 없지는 않았으나…….
“…네놈이!!”
청유백의 저 검 두 자루에서 빛나는 묵색 검기를 막아내기에는 퍽 역부족인 듯 보였다.
“퉤.”
청유백은 피 섞인 침을 내뱉으며 자세를 다잡았다.
백월검을 바닥에 꽂아 넣고,
홍련검을 양손으로 꼬나쥐어 녹운룡을 향했다.
이런 말이 있다.
계급 하나가 차이 나면, 그 위 계급을 잡기 위해 아래 계급의 무인이 열 명 필요하다고들 한다.
마두 하나를 잡기 위해 마사 열을.
마군 하나를 잡기 위해 마두 열이 필요한 셈이다.
물론, 위아래의 격차가 크게 벌어질수록 그 숫자는 유명무실해지겠으나─ 결국, 청유백과 녹운룡의 사이에는 두 개의 벽이 있는 셈이었다.
다시 말해 녹운룡을 잡기 위해서는 청유백 백 명이 필요하다.
즉, 청유백의 목숨이 백 개 있어야만 녹운룡을 잡을까 말까 하다는 소리였다.
청유백은 웃음 지었다.
‘허면, 뭐…단순한 결론이지.’
백 번 죽으면, 놈을 잡을 수 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