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네 죄를 헤아려라 (3)
청유백과 녹지연은 숲을 가로질러 내달렸다.
백소하는 도움이 안 될 게 뻔하니 돌아가서 애들이나 보라고 보냈고, 적영은 때 좋게 적우각이 돌아와 데려갔다.
그 덕에 청유백의 허리춤에는 감옥으로 끌려오며 잃어버렸던 검 두 자루까지 되찾은 채였다.
“오는 길에 찾아왔다네. 도망치는 놈들이 딴 길로 새길래 좀 내버려 놨더니만, 이걸 찾으러 가더군. 팔아서 도항비라도 만들려 한 모양이야.”
청유백으로서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는 힘들 따름이었다만─감옥 바깥의 일은 듣지 못했으니─일단 그렇다니 감사히 받기는 했다.
결과, 아무런 걱정 없이 일단 녹가의 장원을 향해 달리기는 했으나….
모든 것이 만전인 것은 아니었다.
“하아, 하아…….”
녹지연의 안색은 갈수록 창백해졌고, 숨은 거칠어져 회복될 기색이 보이지를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가 일언반구의 불만도 내뱉지 않는 것은, 아마 잠시의 쉴 시간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일 테다.
그들은 어느덧 녹가장의 근처까지 다다랐다.
“잠깐.”
그러나 문득 청유백은 녹지연을 막아서며 근처의 수풀에 몸을 숨겼다.
“……?”
녹지연은 흐릿한 초점의 눈으로 청유백을 올려다보았고, 청유백은 쉬잇, 하고 제 코앞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전방을 가리켰다.
“…뭔가 있나요?”
“적가의 무인이다. 숫자는… 백 명쯤은 될 것 같군.”
그것도 기를 숨기고 잠행하는 것이 아니라, 대놓고 움직이고 있었다.
저렇게 움직인다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이유와 명분이 있다는 것인데.
“헌고를 건드렸다는 건, 고독이 심어진 모든 인간을 죽이겠다고 결정했다는 거예요. 적가주를 포함한 요인 몇몇에게도 심어 놓았었으니….”
녹지연의 설명에 청유백은 침음을 삼켰다.
적가가 반응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하지만… 어떻게 벌써 녹가를 흉수로 단정한 거지?’
…아니, 멍청한 질문인가.
청유백은 스스로 질문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완벽한 은폐였다고 한들, 수십 년이 흘렀다.
그 긴 시간 동안 작은 이상함 하나 알아챈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겠는가.
중요한 것은, 어떤 수단으로든 적가가 녹가를 용의선상에 올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 고독이 발동했다면…….’
[비단 적가만이 아닐 게다. 아마 다른 가문… 혹은 여타 세력에서도 이곳으로 병력을 보낼 가능성이 높겠지. 늦어도 동이 틀 무렵까지는 말이다.]
천화의 말이 옳았다.
아직 감히 육대가인 녹가를 의심할 세력은 몇 되지 않을지도 모르나, 다른 가문과 세력에서 병력을 보냈다는 정보를 듣는다면 거리낄 게 없어진다.
목표는 사태의 해결?
뭐, 그것도 좋겠다만─
대부분의 목적은 다를 것이다.
이 갑작스러운 사태가 해결되고, 누군가가 책임을 묻게 된다면, 그것에서 떨어질 이권의 쟁탈을 위해서다.
‘나 이번 일 해결하는 데에 힘 좀 썼소.’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청유백은 말을 이었다.
“저들 앞에 나설 텐가?”
솔직히, 현명한 결정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녹가를 향해 가는 이상, 그녀가 표적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들이… 장원의 앞에 있나요?”
“그래. 흠, 방금 막 대문을 부쉈군. 결정을 한다면 빨리 해야겠는데.”
“저를 데려다주세요. 죄송해요. 눈이… 안 보이기 시작했거든요.”
“…….”
청유백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보통이라면 시선을 느끼고 시선을 마주하겠지만, 그녀는 지금 청유백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듯 보였다.
녹지연의 공동은 점차 흐려져, 거의 회색을 띄어가고 있었다.
청유백은 군말 없이 대꾸했다.
“빨리 움직이지.”
* * *
청유백이 녹지연을 이끌고 장원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반쯤 난장판이 된 이후였다.
대문은 부서졌고, 적가의 무인들과 녹가의 무인들은 서로에게 장병기를 내세운 채 대치하고 있었다.
녹가의 장로로 보이는 이가 가장 앞에서 소리쳤다.
“작금의 일에 대하여 적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만 할 것이오!”
“우스운 소리. 책임을 물으러 온 자에게 책임을 묻겠다 하는군.”
“뭐라?!”
“녹가주는 어디에 있소? 자신의 집이 짓밟히는 데도 코빼기 하나 보이지 않는군. 더 이상 의심의 여지도 없게 말이오.”
“무슨 말인지 설명을 해야…!”
“가주를 데려오시오. 그의 앞에서 설명하겠소.”
“그럴 수 없다 하지 않았소!”
상황은 극단으로 치달아 갔다.
귀살마는 명받은 대로 가주를 찾을 뿐이었고, 녹가 사람들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가주를 부르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칼부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듯 보였다.
그리고 그 일촉즉발의 한가운데에서, 녹지연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그만…….”
힘찬 목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거의 죽어 가 겨우겨우 내뱉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전부 절정 이상의 고수.
아무리 작은 목소리라고 해도, 그들의 이목을 모으기에는 충분했다.
“……!!”
“…허어, 자네는.”
적가의 무인들은 고개를 돌려, 뒤편에 나타난 청유백과 녹지연을 보았다.
그들을, 특히 청유백을 발견한 귀살마는 손짓하여 적가의 무인들을 물러나게 했다.
한가운데에 길이 열리고, 청유백에게 부축받은 녹지연은 천천히 중앙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들은… 이번 일과 무관합니다.”
“아, 아가씨! 이게 대체 무슨…!”
무인 중 하나가 쓰러지는 녹지연을 받으며,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청유백을 올려다보았다.
‘진실이군. 진짜 당황이야.’
굳이 천화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저 감정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녹지연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가주는 이곳에 없어요.”
“저것을 어찌 믿겠습니까. 시간을 끌려는 수작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적가의 무인들이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녹지연은 말을 여럿 반복할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고, 그저 그대로 침묵하는 것은 감정에 호소하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제가 안내할게요. 멀지 않은 곳에 그의 비동이 있어요. 그리… 멀지 않으니…….”
적가의 무인들도 그녀의 상태가 결코 좋다 말할 수 없는 상태임을 잘 알고 있었다.
모르면 병신 아닌가. 저 정도로 죽어가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가장 유력한 흉수의 딸을 곧이곧대로 믿겠다 따라갈 수도 없는 노릇.
귀살마 또한 근심에 신음하다, 뒤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말대로 해줘라.”
“!!”
청유백으로서도 익숙한 목소리.
그리고 동시에, 귀살마에게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자의 목소리.
“대, 대공자!”
청유백은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코웃음 치며 시선을 마주했다.
“적철진, 네놈도 고독이 심어졌었다 들었는데.”
“…견딜 만한 정도다. 청가의 어린 시비가 그녀의 전언을 전해주었다. 내 고독은 아직 완전히 자리 잡지 않았노라고.”
청가의 어린 시비?
[우리 소혜 말이냐?]
천화의 반사적으로 대꾸하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려왔다.
하기사, 그렇게 말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그 아이밖에 없기는 했다.
청가에 시비가 소혜 하나밖에 없지는 않겠다만, 어린 시비는 그리 흔치 않으니 말이다.
“솔직히 긴가민가했다. 운기행공을 해 보아도 내 몸에 이상은 없었으니, 그저 헛소리로 취급했지. 허나, 이런 날이 또 오는군.”
적가의 무인들도, 녹가의 무인들도 그 말에 당황하는 눈치였다.
녹가의 사람들은 갑작스레 제시된 ‘고독’이라는 단어에, 적가의 사람들은 믿지 않을 수가 없는 적철진의 발언에 말이다.
‘녹지연이 적철진을 만나지 못했다면, 당연히 다른 연락책을 쓰기도 했겠지만…….’
도대체 언제…?
청유백이 녹지연을 쳐다보자, 녹지연은 살풋 쓴웃음을 지으며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잘 보이지 않을 텐데도, 청유백의 반응을 예상한 모양이었다.
“…똑똑한 아이던데요. 부러울 정도로.”
적철진은 귀살마의 앞에 서서는 고개를 까딱였다.
둘의 경지는 아마 비슷하거나 귀살마가 아직 좀 더 높겠지만, 명령권은 적가의 장자인 적철진에게 있다.
귀살마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서둘러 움직이도록 하지요. 그편이 소저에게도 좋을 터이니.”
* * *
녹가주의 비동(秘洞)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녹지연은 등에 업혀 방향만을 가리켰으니, 찾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도착한 다음이었다.
선발대로 동굴 안쪽으로 들여보낸 무인 다섯이 돌아와 귀살마에게 보고했다.
“도저히 안쪽으로 진입할 수가 없습니다.”
“호흡을 멈춰도 말인가?”
“호흡의 문제가 아닙니다. 살이 타들어가고, 옷은 흩어지며, 검은 뽑는 순간 부식됩니다. 어지간한 명검이 아니고서야… 저곳에 가지고 들어가는 의미도 없게 될 겁니다.”
“…입구까지만 다녀왔는데도 말인가.”
“그렇습니다.”
허, 참.
귀살마는 녹지연을 향해 돌아섰다.
‘분명 저 극악한 상태를 보면 필시 모종의 일이 일어났던 장소이기는 하나…….’
그렇다 하여, 쉬이 발을 들이기는 어려운 장소였다.
만일 그녀가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이곳은 함정이고, 안쪽으로 들여보내 자신들 전원을 몰살하려 하는 흉계라면?
그때에 가서 후회해서는 늦는다.
아무리 적철진이 그녀의 말대로 하라 명령했다던들, 저 사지(死地)에 확신도 없이 들어가라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 행위와 다름이 없지 않던가.
“정말 이곳이 비동이 맞습니까?”
귀살마가 물었으나, 녹지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분명 정신은 차리고 있는 듯했지만, 눈을 감고 색색거리는 숨만이 반복해서 울려왔다.
대답은 않았지만, 뭐 어떡하겠는가.
묻는 것도 멍청한 질문이었다.
설령 거짓이었다고 해도,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대답할 리도 없으니 말이다.
“동굴을 통째로 무너뜨리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화공(火攻)도 있습니다. 녹가주가 독에 강하다지만, 독을 물리치는 것은 무릇 불이었지요.”
부하들의 제안에 귀살마는 골머리를 썩였다.
“멍청한 놈들. 녹가주를 죽이더라도 시체는 있어야만 한다. 모든 고독을 조종하는 모체를 확보해야 하는 것을 어찌 모르는가!”
무리는 아니었다.
고독은 그만큼이나 생산성이 떨어지는 수단이고, 백 년 전에나 쓰던 물건이었으니 말이다.
‘고독이라는 수단을 알 정도로 연륜 있는 고수가 많지는 않겠지.’
[킥킥, 과연 어떨는지.]
청유백의 말에, 천화는 우습다는 듯 저 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차갑게 말을 이었다.
[저들 중 몇이 진심으로 적가주가 살기를 바라겠느냐?]
‘…그 또한 그렇군.’
적가의 휘하라고 하더라도 모든 무인이 적가주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제각각 스스로 모시는 주인은 따로 있음이 분명했다.
현 적가주인 적무혁이 죽는다면, 그 자리는 아직 어린 적철진이 아닌 다른 이에게 돌아갈 것은 명명백백.
‘주군의 기회를 위해 가주의 죽음을 바란대도 이상할 것은 없지.’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만 갔다.
당연히, 고의적으로 시간을 지체시키는 무리 또한 존재할 것이다.
녹지연은 청유백의 옷을 잡아당겨 자신을 내려줄 것을 청했다.
나무 밑동에 앉아 숨을 돌린 그녀는 흐릿한 눈빛으로 청유백을 올려다보았다.
“청유백,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힘이라곤 하나도 없어 애처롭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청유백은 차갑게 단언했다.
“아니.”
녹지연의 숨소리가 떨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허나 상관없는 일이다.
지난날, 그녀는 분명히 ‘부탁’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고, 청유백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부러 확인까지 하지 않았던가.
“지난번에 들어주지 않았나.”
“하, 하지만…….”
“우리 거래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너를 여기까지 데려온 건 이해관계의 일치였을 뿐이다.”
녹가의 사정 따위 알 게 무언가.
그저 녹운룡이 방해되기에, 사마신교라는 의문의 적을 찾기 위해 그녀의 인도를 따랐을 뿐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청유백이 녹운룡을 상대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청유백은 입을 열었다.
“그러니, 거래를 하지.”
녹지연이 부탁하지 않더라도 청유백은 저 안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든 그자의 목을 따리라.
허나, 그렇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부탁을 무상으로 들어줄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녀의 부탁은 뻔했다.
자신을 녹운룡의 앞으로 데려다 달라.
그리고, 자신이 그 극독을 먹고 녹운룡의 고독을 조종해 목숨을 끊어놓겠다.
‘뭐, 그런 것일 테지.’
하지만 글쎄.
무리한 부탁이었다.
“너를 저 안으로 들여보내 줄 수는 없다. 짐이 될 뿐이니까.”
이유는 단순했다.
방해가 되니까.
그러잖아도 벅찬 상대였다.
이곳의 환경을 확인하자마자 방법이 있겠다고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모래주머니를 달고 싸울 만큼 만만한 상대도 아니었다.
왜 모래주머니냐 함은, 단순하다.
아무리 봐도, 들어가다가 독기에 침식되어 죽을 놈의 만용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네 복수를 대신 이뤄줄 수도 없다. 그딴 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청유백은 녹지연의 품에 손을 넣어 작은 병의 감촉을 느꼈다.
천주혈독보다 강한 독기를 지닌, 천고의 극독.
“허나, 놈을 잡아 네 눈앞에 던져 줄 수는 있다.”
청유백에게는 무엇보다 강한 생명의 향을 말이다.
“너는 내게 뭘 줄 수 있지?”
침묵이 흘렀다.
녹지연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독기 때문에 단순한 생각조차 어려워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허나, 시간은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대답해야만 했다.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약속을 말이다.
“…당신이 원하는, 무엇이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