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길을 터라 (5)
기실, 백소하는 직감하고 있었다.
이곳에 펼쳐진 진법을 한눈에 간파하지 못한 시점에서,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영역이라는 것을.
“왜애? 왜 그리 멍청하게 있니? 뭐라도 해 보라니까?”
“…….”
백소하는 침묵했다.
진법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지식이다.
알고, 공부하고, 연습하고, 대비하는 것.
반응의 영역인 무공과는 다르게, 진법은 그 대부분의 것들을 사전에 차단하고 예방할 수 있다.
또한, 진법에 걸려든다 해도 그 해제의 방법 또한 미리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첫눈에 이곳의 진법을 알아채지 못한 시점에서 정해져 있었다.
‘나는… 이 진법을 해제할 능력이 없다.’
“멍청한 백가 놈! 우리 백련과 비교하면 머저리들만 모여 있지. 어쩜 인재가 이리 없는지!”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껏 이 공간을 탐색했다.
진법의 존재는 확실했다.
푸는 방법은 모르지만, 그 존재 자체는 여실히 느껴졌다.
그러나─ 그 존재가 확실하듯이.
그 너머에 있는 청유백의 존재 또한 느낄 수 있었다.
‘희미하지만, 분명해. 그는 이곳에 있어.’
그러나 진법을 해제할 방법을 아직껏 찾지 못했다.
“뭐라도 말해 보렴. 절망이든, 광기든 뭐든 좋다! 혹시 아니? 너만은 살려서 보내줄지!”
“…….”
자신이 모르는 종류의 것이었다.
알지 못하는 것, 그러므로, 해낼 수도 없는 것.
알지 못하는 진법을 해제하는 것은, 아직 모르는 이치에 대하여 답을 찾아내는 것과 마찬가지인 일이다.
즉,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다.
‘형님이 계셨다면….’
그것은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없는 사람을 지금 찾아 무엇에 쓰겠는가.
허나 그렇다 하여, 그저 무력하게 쓰러져 있을 수만도 없는 일.
백소하는 느꼈다.
작은 진동.
이 환영 너머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미세하고도 가녀린 움직임을.
그것은 나뭇가지보다도 가는 것의 움직임, 그리고, 개미보다도 작은 것의 움직임.
가령 물건에 빗대자면─ 바늘의 크기에 가까운 물건의 움직임.
스스로, 어떠한 감옥에서 빠져나오고자 몸부림치는 움직임이었다.
백소하는 느꼈다.
청유백이었다.
‘아까 보았던 저자의 모습이 청유백의 모습과 완벽하게 일치하다면.’
저것은, 분명히 청유백이 깨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
그리고, 어떤 수단이든 간에 구속에서 벗어나려 함을 의미했다.
‘스스로? 대체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 의문을 던져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은 하등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저 그렇다는 사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뭐라도 말해 보라니까! 쥐새끼들! 항상 저 유리할 때 아니면 말문조차 트지 않지!”
다행히도, 교아는 여전히 여유롭게 백소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아무것도 못 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 테다.
그리고, 그 확신은 아주 정확하게 적중했다.
교아 저자가 동이 틀 때까지 백소하 자신을 이대로 내버려 둔다고 해도, 이 진법을 풀어 헤칠 자신이 없었다.
허나 진법의 존재를 알고, 청유백의 움직임을 안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우우웅!
진법 너머의 그것에, 간섭할 수 있다는 것이다.
‘허공섭물은… 아직 서툴지만!’
백소하의 수준으로는, 아직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릴 수 없다.
어기동검(語氣動劍)의 경지는커녕, 술병 하나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테다.
하지만, 스스로 빠져나오려 움직이는 바늘의 움직임을 돕는 정도라면.
─우우우우웅!
자신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뭐야? 계속 그러고만 있을 거야?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 봐. 쟤 죽어가는 거 안 보여? 빌어 보라니까.”
교아의 목소리가 귀에 스쳐갔다.
그리고 그제야, 백소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흥미롭다는 듯 묵색 반지를 돌려 보는 그의 손과, 발치에서 몸을 뒤틀며 죽어가는 그녀의 모습.
그 전부가 차례차례 시야에 들어왔다.
그래.
그저 서 있을 뿐인 그의 모습이 말이다.
굳이 무언가를 더 첨언하자면.
벽을 등지고서 있는 모습이었다.
“하아! 어쩔 수 없지. 정 그렇다면야, 내가 직저─”
─콰아아앙!!
굉음이 고막을 강타했다.
환영, 그리고 혈흔.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피어오르는 먼지구름이었다.
백소하는 똑똑히 그것을 보았다.
벽을 뚫고, 동시에 벽을 관통하여.
그 주먹이, 누군가의 뜯어진 팔뚝을 움켜쥐고 있었다.
다음 순간, 환영의 벽이 산산이 깨져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했다. 백소하.”
* * *
툭, 투둑.
무너진 환영과 갈라진 벽으로부터 작은 돌조각과 모래알들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이 작은 소리는, 비단 그것들만이 연주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청유백의 얼굴을 한 그것.
녹지연의 반지를 들고 있던 교아의 팔 한 짝이, 어느덧 통째로 뜯어진 채 청유백의 손에 들려 있었다.
“큭, 큭큭, 뭐야? 뭐야아? 너, 어떻게 했어? 재밌는 놈이잖니!”
“어떻게고 자시고…….”
청유백은 묵색 반지를 뺏어 들고 뜯어버린 팔은 주저 없이 내버렸다.
그리고는 슬쩍, 녹지연을 돌아보았다.
척 보기에도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아주 잠깐이라면 괜찮을 테다.
“허술하기 짝이 없던데.”
“그으으래애?”
그리고,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터였다.
“그것참, 킥! 정말로 재밌는, 킥킥! 이야긴데에에?!”
교아의 팔은 뜯겨져 나가 피가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얼마 가지 않아 죽을 것이 분명하겠지만….
허나 그는 고통이라곤 전혀 느끼지 않는지, 오히려 일그러진 웃음을 지으며 몸을 뒤틀었다.
“아아! 아아아!! 정말 재밌어!! 이건, 이건 몰랐다고! 네 얼굴을 망가뜨릴 때는 어떤 비명을 지를까아?!”
“우연이군. 나도 비슷하다.”
“뭐어? 너도 내 비명을 듣고 싶니이이이?!”
“감사를 표하지. 사마신교라…. 어둠 속의 빛을 찾은 기분이다.”
어쩌면 비슷한 면이 있는 두 사람이었다.
서로 상대의 말은 듣는 체도 않고 제 말만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청유백은 묵색 반지를 이로 깨물어 입에 머금었다.
백소하는 순간 청유백이 미쳤나 싶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 저걸?!’
교아의 몸에 닿았을 때는 한순간 닿은 것만으로 검게 변색될 정도로 강한 독기를 머금은 물건이 아니었던가.
헌데, 그것을 만지는 것도 아니고 입으로 머금다니!
하지만 머지않아, 그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의심을 내버렸다.
이유는 모르고, 원리 또한 모른다.
이 감옥에 들어온 시점부터 자신이 아는 것은 무엇 하나 없었다.
그저 보았을 뿐이었다.
그의 전신에서 치솟아 오르는, 형용할 수 없는 수준의 악의.
그리고 마기의 양과는 관련이 없는, 순수하고도 강렬한 사악함.
하늘에 닿을 끔찍한 마기를.
* * *
‘잠깐 빌리겠다.’
조금은 미안한 일이지만, 효율로 따지자면 이편이 낫다.
이왕 빌린다면, 빠르게 쓰고 돌려놓아야 그녀도 죽지 않을 테고 말이다.
청유백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전능감.
타액을 삼키고, 피가 몸을 도는 그 모든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실로 기물(奇物)이로다. 독철로 만든 반지라니….]
천화도, 청유백도 풍문으로만 들어 온 물건이었다.
스스로 그 자체에 독기를 머금어 영구히 독을 발산하는 강철.
천주혈독의 독기만은 못하지만, 그 양에는 압도적이라 할 정도의 차이가 있다.
숨을 한 번 들이쉴 때마다 새로운 독기가 기맥을 채웠고, 이 전능감은 언제까지고 이어질 듯 보였다.
“……!!”
하지만 상대방도 그것을 좌시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겉으로 형태가 바뀌는 것은 없었지만, 무언가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는 것은 직감했으리라.
교아의 모습이 한순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적영과 녹지연이 뭔가 손쓸 새도 없이 당한 그 수다.
허나.
[왼쪽.]
─파앗!
청유백은, 덤덤하게 그 공격을 막아내며 웃어넘겼다.
“느려.”
“!!”
교아의 공격은 단 한 수에 간파당해, 복부를 처맞고는 저 멀리 날아갔다.
그리고 그제야, 교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조금 사라졌다.
청유백은 말을 이었다.
“지능이 모자라군. 진법이 깨진 시점에서 이해했어야지 않나?”
청유백은 눈을 굴려 교아의 위치를 쫓았다.
귓가에 속삭이는 천화의 안내에 따라, 허공을 응시했다.
“보인다고…?!”
“한순간에 시야에서 사라지고, 마치 공간을 뛰어넘는 것 같지만…. 그저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
정곡을 찔렸는지, 교아는 인상을 흉측하게 일그러뜨렸다.
기실, 청유백도 온전히 아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진법에 대한 것은 백소하보다도 무지하다.
본능으로 그 진법의 존재는 느끼고 있었지만, 그것을 꿰뚫어보는 눈은 없다.
자칫하면 위험했을지도 모르겠지만.
허나, 천화의 존재가 있었다.
[흐음, 은막(銀幕)이라…. 효율 좋은 진법이니라. 무언가의 모습을 인위적으로 감추고 드러내지. 처음 본다면, 그 누구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다.]
뭐! 본녀는 아니지만!
아하핫, 하고 천화는 여유로운 웃음으로 끝맺었다.
녹지연과 적영의 수준이 낮은 것이 아니다.
이미 완벽히 준비된 진법가를 이기지 못하는 것을 어찌 흠이라 이르겠는가.
허나, 교아는 받아들일 수 없는 듯 보였다.
“허세는 추하단다! 그냥 우연이었을 뿐─어억!!”
뭐, 받아들이지 못하면 받아들일 때까지 처맞으면 그뿐인 일이다.
교아는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애초에, 같은 수준이라면─ 팔 하나가 없는 시점에서 대항의 여지조차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의 기습.
거기서부터 이미 승부는 결정 나 있었다.
몇 번의 공방이 오갔지만, 그 격차만이 여실히 벌어질 뿐이었다.
상처 입은 자는 더욱 죽음의 경계로. 상처 입지 않은 자는, 더욱 승리의 경계로.
교아는 눈에 띄게 옅어진 숨을 헐떡이며 눈을 희번뜩였다.
“하! 하하! 너는 정보에 없었는데 말이야. 아주 재밌구나?!”
어느덧 그는 광기에 가까운 웃음을 되찾아 있었다.
죽음을 각오했나, 혹은 이미 목숨을 포기한 것인가.
어느 쪽이 되었든 상관없겠지만, 다음 그의 행동은 퍽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는, 갑작스레 문득 허리를 숙여 몸을 굽혔다.
아니, 쭈그려 앉았다. 라는 표현이 더 가까울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행동에서 청유백은 그 의미를 이해했다.
“너 쎄! 인정! 그러니까 동작 그만! 딱 거기까지만 하렴!”
교아는 어느덧 바닥에 쓰러진 적영의 옆까지 이르러 있었다.
교아는 몸을 숙여, 적영의 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청유백이 한 발을 내딛자, 곧바로 그 손에 힘을 더하는 모습이었다.
“이년 아직 살아 있는데? 우리, 이제 그만하자구. 소중한 친구가 죽어도 괜찮겠어?”
“그래? 뭘로 죽일 생각이지?”
“뭐? 그야 당연히이~”
무슨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하지?
교아는 하찮다며 웃었다.
이리 기절하여 저항 못 하는 사람 한 명쯤이야, 이대로 목을 꺾기만 해도…….
“어라?”
교아는 팔을 들어, 방금까지만 해도 뭔가 달려 있었던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작은 칼날의 파편과 함께 저만치 날아간 손을 발견했다.
“어라라~?”
“정말로 뭔가 하고 싶었다면….”
청유백의 손과 함께, 주변에 나뒹굴고 있던 부러진 도의 파편이 공중에 떠올랐다.
수십 개의 강철 조각.
그것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교아의 몸을 사납게 난자했다.
“말하지 말고 죽였어야지.”
눈을, 코를, 입을, 귀를, 목을 긋고, 찢어발기고, 양분했다.
심장이든, 간이든, 폐든, 그 어떤 것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하! 하하!! 좋아, 아주 좋아!!”
교아는 실성한 듯 웃으며 청유백을 올려다보았다.
싸울 수 있는 상태는커녕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상태라 볼 수 없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솔직히, 이건 몰랐거든! 이번엔 내가 졌어! 깔끔하게 인정할게!”
“이번?”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이대로 보낼 생각도 없거니와, 저 상태로 살아남을 수 있을 리도 없다.
대라신선이 와서 명줄을 붙잡아도 저것을 살려놓지는 못할 것이다.
“다음은 없다. 역겨운 놈.”
“아니, 있어.”
그러나, 교아는 단언했다.
“장담컨대, 그리 길지 않을 거란다. 그분께서 널 찾으실 테니까.”
청유백은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깨어서 보고 있던 백소하도 마찬가지였다.
곧 죽을 놈이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그럼, 다음에… 보자아아….”
만신창이가 되었던 교아의 몸이 모래처럼 녹아 사라졌다.
아니, 모래처럼이 아니다.
“무슨…?”
실제로, 그 모든 살점이 먼지로 변해 녹아내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반 시체가 있던 그 자리에는, 마치 수백 년은 지난 것 같은 백골과, 그것을 둘러싼 모래, 철가루 따위가 있을 뿐이었다.
혹은, 재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것도 진법의 일부인가?’
[아니. 그건 아니니라. 허, 본녀로서도 처음 보는 사술이야.]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기척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죽었다.
그리 보아도 되겠지만….
아무래도, 저 사라진 모습은 의구심을 남기기에 충분한 무언가가 있었다.
‘허언이 아니었는가?’
다음. 다음이라.
죽음의 다음이라니, 실로 께름칙한 말이었다.
그러다 문득, 청유백은 그 백골과 재의 사이에서 무언가 이질적인 것을 발견했다.
“이건….”
청유백은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것은, 무언가의 작은 편책.
폭은 손가락 정도에, 너비는 책 한 권 정도의 크기를 가진 작은 철판이었다.
그래, 굳이 이르자면.
부채의 한 조각으로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