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길을 터라 (4)
목에서는 쉰 소리만이 반복해서 울렸다.
쓰디쓴 철의 맛, 피의 맛.
타오르는 갈증이 목을 울렸지만, 어찌 이대로 굴복하겠는가.
적가의 딸로서, 적영은 그런 가르침을 받은 기억이 없었다.
“이… 망할…… 자식이!”
몸을 돌려 부러진 도를 휘두른다.
부러졌다 한들, 그 손에 들린 것은 여전히 자신의 도다.
적혈도법의 기상세, 호환겸(虎患鉗).
맹호의 발톱과 같은 기세가 놈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거리가 모자랐다.
사내는 목을 살짝 비트는 것만으로도 가볍게 공격을 흘려내고는─
“아, 그래! 내가 누군지 물었었지. 그렇지?”
곧바로 몸을 돌려, 적영을 다시금 걷어차 벽으로 몰아서게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적영도 정통으로 당하지는 않았다.
부러진 도의 배면으로나마 발차기를 막아냈다.
하지만 그게 어쨌든, 사내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 보였다.
“세 번째 하늘, 백련(白蓮)의 주인!”
어차피 전부 죽일 건데, 때가 무슨 상관이냐는 양.
사내는 과장된 자세를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
“교아(㿟牙)가 바로 이 나란다!”
침입자의 자기소개치고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또 비효율적인 인사.
아니, 침입자인 시점에서 자기소개라는 행동 자체가 모순적이기 짝이 없기는 했다.
그러나 소개란 무릇, 소개하는 것에 대해서 기본적인 지식이 있어야 온전하게 작용하는 것 아니던가.
{백소하, 무슨 뜻인지 아나요?}
{정말 오늘 들어 많이 하는 말 같은데… 모릅니다. 흰 연꽃을 상징으로 하는 단체가 한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세 사람에게 있어, 사내의 말은 무엇 하나 알아들을 수 없는 단순한 지껄임에 불과했다.
그저,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허나… 녹가주와 연관이 있는 자라는 것은 명료하겠지요.}
어떤 이유든 간에, 저자와 녹가주가 한패라는 사실만큼은 명료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설명이라도 하듯, 사내는 녹지연을 가리키며 웃었다.
“넌 잠시만 기다리렴. 아쉽겠지만… 그 빌어먹을 녹도마뱀 새끼의 딸을 죽여볼 기회인데, 쉽게 날릴 수는 없으니까!”
‘녹도마뱀이라.’
다소 우스꽝스럽기는 하다만, 녹운룡을 지칭하는 것임은 틀림이 없을 테다.
그러나, 교아라고 이름을 댄 저자의 말을 보면 둘이 서로 사이가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개인적인 친분도 아닐 테고, 돈으로 고용한 용병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는 말은 즉.
‘…이자에게 명령을 내리는 누군가가 있다.’
즉, 녹운룡 또한 누군가를 위하여 일한다.
백소하는 그리 확신했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그런 추측이 아니었다.
그저, 상황을 뒤집을 만한 일발의 수단.
백소하는 땅에 손을 짚고 주변의 공간에 마기를 흘렸다.
이 공간에 대한 파악, 나아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감지하기 위함이었다.
적영과 녹지연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필요한 것은 시간.
단지 더 많은 양의 시간.
적영은 자세를 추슬러 방어 자세를 취했고, 녹지연은 적영과 그가 떨어진 틈새를 포착하여 십수 개의 비침을 쏘아 날렸다.
─슈욱!
“소리 없는 기습. 으음! 나도 아주 좋아해.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가벼운 움직임으로 그 모든 것이 허무하게 스쳐 갔다.
교아는 곧이어 시야에서 사라져, 녹지연의 옆에 나타나 속삭였다.
“이미 몸에 힘이 하나도 없으면서, 너무 객기 부린다고 생각지 않니?”
“……!!”
녹지연이 곧바로 단검을 휘둘렀지만, 의미 없이 허공을 스치고.
이어서 내질러진 주먹에 복부를 강타당해 바닥을 나뒹굴었다.
“큭…!!”
교아가 상쾌하게 외쳤다.
“아! 멍청한 녹도마뱀 놈을 도우라고 보내졌을 때는 정말 짜증 났는데, 지금 보니 꽤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 역시, 그분의 선견지명이 틀릴 리는 없지♡”
“역겨운 놈이….”
“어머, 어쩜 그리 심한 말을!”
적영의 눈에 적개심이 내비쳤다.
그러나 교아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투였다.
여전히 여유로웠고, 오히려 뭐든 해보라며 제자리에서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처음 당한 건 방심해서일 뿐이야. 실력 차이가 난다고 해도, 녹지연 저년과 같이 친다면…!’
적영은 부러진 도를 두 손으로 꼬나 쥐고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전신의 마기를 끌어올려, 그 기세를 도에 담아냈다.
피어오르는 것은 붉은색, 옅은 자홍에 가까운 검기.
적가의 절기, 적혈도법의 도기였다.
“호오! 그래, 그쯤은 되어야 재미가 있지!”
부러진 도의 일부분이 붉게 타오르는 도기로 대체되었다.
여전히 전보다 짧기는 했지만, 그것은 이미 충분한 하나의 도.
굳이 말로써 분노를 표현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적영의 도가 단숨에 쇄도했다.
그리고 동시에, 바닥에 엎드려 때를 기다리던 녹지연의 비침이 날아들었다.
“흐음!”
사각에서의 일격.
도저히 반응할 수 없을 듯한 공격이었지만, 그는 덤덤했다.
그리고 일순, 폭풍이 일었다.
콰아아아아!
그것은 그의 손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교아의 손끝에서 강렬한 마기가 휘감기고, 자리를 돌아 회전하며 나선을 만들어 냈다.
강력한 바람에 비침은 힘을 잃고 흐트러졌고, 적영의 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
투로(鬪路)가 뒤틀릴 정도의 바람.
칼끝은 갈 길을 잃어 흔들렸고, 그 틈 사이로 교아의 주먹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폭풍이 멎어, 백소하가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에는.
“끅… 크흑….”
“아, 정말. 왜 이리 성격이 급해? 넌 이따가 죽여 준다니까. 자꾸 이러면 천천히 즐길 수가 없잖니. 이런 건 그분께서도 싫어하실 텐데!”
적영은 날아가 벽에 처박힌 채.
그리고 녹지연은, 어느덧 그 앞에 나타난 교아에게 목을 붙들려 두 발이 공중에서 버둥거리는 채 모든 상황이 제압되어 있었다.
힘의 차이만이 아니다.
기술, 기교의 차이도 격이 달랐다.
분명 저 사내에게 쥐어진 무기는 아무것도 없음에도, 전황은 너무나도 일방적이게 흘러갔다.
녹지연이 결코 멀쩡한 상태라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 대 일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녹지연은 자신의 목을 붙잡은 팔을 떼어내려 저항하면서도, 반항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분, 이라니, 그거참 궁금한 이야기인데요. 좀 더 말해줘도 좋지 않나요? …어차피 죽일 거라면.”
“이야기? 이야기라. 흐음!”
교아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허나, 결코 호의적인 웃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차가운, 멸시하는 듯한 웃음.
“너 같은 아이는 썩 좋아하지 않는단다. 여기까지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지 뭐니? 두근, 두근….”
교아는 목을 틀어쥔 손에 힘을 더하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발악하려는 소리가 말이야.”
“커억….”
녹지연이 정신을 잃기 직전, 교아는 손을 풀어 그녀를 패대기쳤다.
헛숨을 삼켜대며 숨을 헐떡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방금 전까지와는 다른, 웃음을 지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혹은, 단순한 변덕인지 모를 웃음을.
“좋아! 마지막 선물이다. 가련한 아이야. 아까 저 아이에게 물었었지? 백련이 무엇이냐고.”
저 아이?
백련?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뜻하는 바는 명료했다.
방금, 녹지연이 백소하에게 속삭였던 전음의 내용이었다.
‘전음을… 들었어?’
말도 안 돼.
대체 얼마나 격의 차이가 있어야 그런 게 가능한 거지?
백소하는 기겁하며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허나 교아는 별것 아니라는 양,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진실된 마교… 옛 마교의 정통을 이은 우리 사마신교의 여섯 기둥임과 동시에, 곧 다시 오실 그분의 자리를 안배하는 자.”
교아가 양손을 과장되게 펼쳐 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진심으로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는 듯이 소리높여 외치는 꼴이었다.
“여섯 연꽃 중 세 번째! 백련(白蓮)의 교아. 그게 바로 나란다!”
“…사마신교?”
백색 연꽃은 모른다.
그러나, 사마신교에 대해서는 백소하도 알고 있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수십 년 전의 내전으로 갈라진 마교의 나머지 반쪽.
마교가 붕괴하고, 갈라져 나간 조각들 중 가장 큰 것─
‘나아가, 현 마교의 가장 큰 근심거리인 세력….’
그것이 사마신교였다.
헌데, 왜 천마신교의 가주들 중 하나인 녹운룡이 그에 찬동한단 말인가!
백소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교아를 바라보았다.
“녹가주가… 사마신교와 내통하고 있었다고?”
녹지연 또한 다르지 않았다.
녹가주의 음모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으나, 그가 누구를 따르는지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으므로.
“왜? 놀라워? 이상할 것도 없지 않니. 너희 교주가 죽어나간 지도 언젠데! 그걸 모를 줄 알았….”
교아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지나치듯, 너무나 당연한 것을 입에 담듯 말했지만─결코 당연하지 않은 정보.
배꼽을 잡고 웃던 교아는 찰나, 백소하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잠깐, 너희도 모르는군?”
정색하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게 대체 무슨….”
“하하하! 멍청한 놈들. 결국 눈 가리고 아웅인데, 제 자식들에게조차 진실을 알리지 않은 꼴이라니!”
교주가 죽었다는 것을 모른다.
이유는커녕, 죽었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한다.
다른 이들도 아닌, 육대가의 후계자들이!
눈을 감는다고 천하가 가려지는 것도 아닐진대.
교아는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되었다. 되었어! 더 말해 무엇하겠니! 바다를 모르는 이에게 고래를 설명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교아는 더 이상은 무의미하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다른 즐거운 것은 없을까 방을 돌아다니며 고민하다─
이윽고, 손가락을 튕겼다.
“좋아, 너희의 미래를 점쳐 볼까?”
교아는 녹지연의 머리채를 붙잡고 철창을 향해 끌고 갔다.
소리 없는 신음이 새어 나왔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며 그녀의 팔을 붙잡고 마치 인형을 조종하듯 연기했다.
“너희는 미쳐버린 청가의 아이를 구하기 위해 무단 침입을 강행했단다. 무언가 오해가 있어! 우리가 오해를 풀 수 있을 거야!”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녹지연의 몸을 움직이며 역겨운 연극을 계속했다.
간혹 저항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별다른 수도 쓰지 않고서 그저 악력만으로 행동을 강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정말 정상이 아니었던 거야…. 너희는 마공의 폭주로 미쳐버린 그의 손에 살해당하고, 내일 아침 이 끔찍한 참변의 현장이 발견되고야 마는 거지. 아아!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니!”
“그래요… 그게 그자의 계획이었던 모양이죠?”
녹지연은 저항을 포기한 듯, 팔다리에 힘을 빼고 입을 열었다.
“응? 뭐, 그래! 그랬었지! 내가 그 새끼 밑은 아니지만, 그분께서 그 도마뱀 놈을 도우라 하셨으니까─아아악!!”
교아의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대신,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끝을 대신했다.
동시에, 교아는 지금껏 붙잡고 있던 녹지연의 팔을 내던지며 물러났다.
“아악! …이 망할 년이!”
녹지연은 입가에 묻은 타액과 피를 닦아냈다.
그녀 자신에게는 별것 없는 액체일 뿐이지만, 타인에게는 아닌 피.
교아의 얼굴은 녹지연이 뱉어낸 그것으로 범벅이 되어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다.
결국 그것을 다 닦아낸 교아가 눈을 희번덕였다.
“사람이, 말을 할 때는, 끝까지 들어야지…!!”
─빠아악!!
말과 타격음이 들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어렴풋하게, 뼈가 부러지는 소리도 함께 들린 것 같기도 했다.
방금 전과 같은 상황이었다.
교아는 녹지연의 목을 붙잡고 있었고, 녹지연은 힘겹게 그 손아귀를 떼어내려는 모양새.
“아, 맞아! 멍청한 도마뱀 놈이 고독인가 뭔가 하는 걸 심어놨다고 하던데….”
다만, 교아의 표정이 사악하게 일그러져 있다는 점만큼은 달랐다.
“그래, 그리고 무엇 때문인지 고독이 발동하지 않는다고도 했었지…. 분명 그 깜찍한 년이 모종의 수단을 갈구했을 것이라고 말이야.”
교아는 적영이 쓰러진 방향을 슬쩍 흘겨보고는, 입가에 묻은 녹지연의 피를 혀로 핥아 훑었다.
“하나는 이미 망가졌으니…. 다른 장난감을 찾을 수밖에 없지?”
교아는 녹자연을 벽에 몰아붙여 처박은 채, 그녀의 손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지금도 강력한 독기를 내뿜고 있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도 없었다.
“흐음, 아까 봤었는데… 이건가?”
녹지연은 주먹을 쥐며 어떻게든 저항하려 했지만, 무의미한 일이었다.
손이 강제로 벌려지고, 손가락이 꺾이며 끼워져 있던 묵색 반지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어어? 저항하지 마. 손가락 잘려. 죽어도 깔끔하게 죽어야지. 자꾸 그러면 추하다?”
이윽고, 묵색 반지가 손가락에서 완전히 빠져나가고.
녹지연의 몸이 즉각 변화를 일으켰다.
“윽… 아아악…!!”
한 마리도 아닌, 수십 마리의 벌레가 피부 아래에서 날뛰었다.
심장을 조이고, 신경을 갉고, 근육을 기어 다니며.
교아는, 그 모든 것들을 즐겁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이야! 하하! 그 도마뱀 놈, 음침하다 싶었더니, 지 딸한테 이런 걸 심어 놓은 거야? 역시 미친개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교아는 흥미롭다는 듯 반지를 이리저리 살피며 휘파람을 불어댔다.
백소하는 그저 자신의 무력함에 통탄한 채, 그저 할 수 있는 일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자신이 싸운다고 달려들어 봤자 저자에게 생채기나 낼 수 있겠는가.
버틴다고 저자의 공격을 막아 봤자 한 번이라도 버틸 수 있겠는가.
“이런… 빌어먹을…!”
마음 같아서는 백 번, 천 번이라도 그리하고 싶지만, 이성이 붙잡았다.
비효율적인 일, 감정적인 일이다.
이성적으로, 자신이 나서지 않는 것이 옳았다.
허나 그럼에도, 가슴이 찢어지듯 불타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교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다그쳤다.
“왜 그렇게 울상이야?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있잖니. 뭐가 그리 불만일까?”
원하는 대로?
대체 어느 것을?
백소하가 원한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교아는 다 안다는 눈치로 산뜻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이렇게나 시간을 끌어 주고 있지 않니.”
“……!!”
그런가.
아까도, 너무나 당연하게 자신과 녹지연의 전음을 훔쳐 들었었지 않던가.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애초부터 저들이 하려는 일을 알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지금껏 여유를 부렸다는 것이었다.
“왜, 하던 거 마저 해 보렴. 어린 생쥐야. 네 무력함을 알게 될 거란다.”
“…….”
“진정한 마교가 과연 어느 쪽인지, 그 뼈에 새기고 떠나려무나.”
교아의 입꼬리가 찢어지듯 높게 기울었다.
그리고 동시에─
백소하의 입가에도 웃음이 걸쳐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