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길을 터라 (3)
“뭐…?!”
“가, 가짜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적영과 백소하는 사뭇 진지한 그녀의 태도에 홀려 뒷걸음질 치기는 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갑자기 설명도 없이 가짜라니?
백소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녹지연을 바라보았다.
‘무슨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겠지만…….’
의심 많은 그녀이니, 지금의 상황에 그 생각을 하는 것 또한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지나친 생각임이 분명했다.
저 얼굴, 저 체격!
의심할 나위도 없는 청유백 본인이었다. 타인으로 착각하기도 힘들 수준의 실정이었단 말이다.
어딘가 망가져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심지어 방금은 멀쩡히 말까지 내뱉지 않았던가.
백소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녹 소저, 주안술(朱顔術)에도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주안술.
그것은 내공을 이용하여 근골을 뒤틀고, 그로 인해 얼굴의 형태를 변형시키는 수법이었다.
신분을 감추고 은밀하게 행동하는 간자들 사이에서 요긴하게 쓰이기는 하지만, 결코 만능은 아니다.
그 이유는 단순했고, 녹지연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알아요. 자신의 얼굴을 전혀 다른 사람처럼 만들 수는 있지만, 결코 다른 사람의 얼굴을 완벽하게 모방할 수는 없죠.”
사람의 뼈라는 것은 결국 형태가 정해져 있고, 그 부피나 크기 또한 변하는 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타인의 얼굴을 재현하려면, 무언가를 덧붙이거나 제하는 등의 특별한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러나,
“하지만 멀쩡한 얼굴이지 않습니까! 인피면수를 썼거나 살을 붙였다면, 응당 필연적으로 어색함이 있었겠지요. 이 백소하가 그것을 간파하지 못할 리 없습니다!”
“알아요. 하지만…….”
“그걸 아시는 놈이, 대체 무슨 소리십니까? 한시가 급한 마당에!”
“…….”
백소하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양 소리쳤다.
적영도 아는 게 없어 다물고 있을 뿐, 그닥 다른 눈치는 아니었다.
“빌어먹을, 무슨… 헛소리야. 빨리 좀 빼 달라고…….”
그리고 이 와중에도, 청유백은 고통을 호소하며 신음하고 있었다.
백소하가 눈치를 보며 자신이 먼저 움직일까 생각하는 동안, 녹지연이 먼저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작은 발걸음 소리가 몇 번이고 울리고, 청유백의 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녹지연은 품속에서 작은 단검 하나를 꺼내어 손에 쥐었다.
“뭐, 뭘 하려는…!”
백소하가 나서려던 순간, 적영이 앞을 막아섰다.
그냥 두고 보자는 투였다.
백소하는 어쩔 수 없이 멈춰 서야만 했다.
‘물론 그녀가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지는 않았겠지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런단 말인가?
의심할 여지는 없었을 터인데!
녹지연이 청유백의 앞으로 다가가자, 청유백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봐, 대체 뭐 하자는…….”
녹지연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고, 청유백의 질문은 공허하게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녹지연은 아무 말 없이 단검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내리그었다.
─툭, 투둑.
방울져 떨어지는 핏소리가 어둠 속에 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녹지연은 손을 움직여 그것을 청유백의 위로 가져갔다.
떨어지던 피는 바닥이 아니라 청유백의 피부 위로 흘렀고, 무슨 의미인지 모를 그 행동은 잠시 동안 소리 없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피부 위로 흐른 핏물이 다시 흘러내려 바닥으로 떨어질 즈음.
피가 구슬져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 대신─
“끄으으으윽!!”
선명한 사람의 비명이 허공을 울렸다.
“그거 아시나요?”
“무, 무슨…?!”
“녹가… 그중에서도, 직계의 체액은 독성을 띠죠. 대다수는 의미가 없는 수준이지만, 저는 좀 다르거든요….”
─툭, 투두둑.
꽉 쥔 녹지연의 손아귀에서 선혈이 선명하게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것에 닿은 피부에서부터, 선명한 형태의 부패가 일어나고 있었다.
고작 피부에 닿는 정도만으로 저 정도의 반응을 일으킬 수준의 극독.
그러나, 녹지연의 행동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네요.”
“머, 멈춰. 뭐 하는 거야.”
녹지연은 자신의 팔을 그었던 단검을 역수로 쥐고는, 높이 치켜들었다.
“청유백 그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다음 행동은 몹시도 단순했다.
“…제가 가진 모든 독이 통하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슈욱!
녹지연의 단검은 어둠을 가르고, 일직선으로 청유백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저, 저거!”
“……!!”
그러나, 다음 순간 들려온 소리는 피육을 가르는 소리가 아니었다.
─카앙!
강철과 강철이 맞부딪쳐, 서로를 튕겨내는 둔탁한 충격음.
그리고 한순간 인 불꽃으로, 그들 모두가 그 정황을 목격했다.
분명 아직 움직이지 못할 터였던 그가, 팔을 틀어 손목에 묶인 족쇄로 단검을 튕겨내는 모습을 말이다.
“크으…….”
“아, 아직 움직이지 못할 텐데?!”
백소하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목 뒤의 대침은 여전히 꽂혀 있었고, 몸 전신의 기맥은 멈추어 제대로 된 움직임조차 어려울 터였다.
헌데, 저 정도로 기민한 움직임이라니!
“…….”
녹지연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몇 번이고 단검을 휘둘러 청유백의 급소를 노렸다.
백회, 인당, 비중, 안하, 수월….
그러나, 첫 번째의 공격을 막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강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잇따라서 울리고, 청유백의 손은──
아니, ‘그것’의 손은 녹지연의 단검보다도 빠르게 공격을 쳐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하아아아!”
적영 또한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저것이 분명 불가능했을 움직임을 보인 시점에서, 적영은 자신의 도를 뽑아 들고 순간을 재고 있었다.
완벽하게, 놈의 동맥을 파고들 순간을.
다행히도 놈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은 한쪽 팔뿐인 듯 보였다.
‘지금까지 한 손으로만 방어했어. 반격의 징조도 없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
─파악!
섬전같이 쇄도한 베기와 함께, 이번에야말로 뼈와 살을 파고드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분명한 손맛이 있었다.
적영은 절호의 웃음을 지으며 도를 뽑아 한 번 더 마무리 지으려 했다.
헌데.
“……?!”
도가 움직이지 않았다.
적영이 그것을 이해하기까지,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우뚝 멈춰 선 도가, 도대체 어떤 것에 가로막혔는지.
“마, 말도 안 되는…!”
공수입백인(空手奪白刃).
비록 그 칼날을 잡은 손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는 있었지만, 날아드는 도를 맨손으로 잡아채 놓지 않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악력.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콰득, 콰드득!
째질 것 같은 강철의 파열음이 찰나에 퍼지고, 다음 순간.
─파캉!
도신이 중간에서 산산이 깨져나가,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꼴이 되어 있었다.
“……!!”
적영은 칼자루를 쥐고 한 발자국 물러설 수 있었지만, 이제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손잡이가 달린 조각난 도의 파편일 뿐이었다.
이어지는 찰나.
빠악!
“아악!”
분명 묶여 있었을 그의 손은 어느샌가 풀려, 막는 것에 그치지 않고 녹지연의 복부를 가격했다.
녹지연과 적영은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저것은 청유백이 아니었다.
“아… 빌어먹을…….”
목소리조차도, 어느 순간 뒤틀려 전혀 다른 사람의 것인 듯 느껴졌다.
사내는 어느덧 왼팔의 족쇄도 당연하다는 듯 끌러 버리고, 성가신 양 목 뒤의 대침도 스스로 뽑아냈다.
그 일련의 과정을 전부 끝마치고, 청유백의 얼굴을 한 그것은 홀가분하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허… 이리 눈치 좋은 년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살벌하다. 살벌해! 진짜로 대가리를 쪼개 버리려 들 줄 누가 알았겠어?”
가볍다 못해 경박하다 느껴질 정도의 어투였다.
그러나, 그것에 담긴 기운마저 경박하지는 않았다.
고오오오오!
끝을 모르고 치솟아 오르는 마기는 이 어둠에 있는 모두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게 방금까지 묶여 있던 사람이라고?’
‘최소한 마두급의 강자…!’
어떨까.
과연, 적우각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저자의 상대가 되었을까.
녹지연은 입에서 피를 토하는 와중에도 자세를 바로잡아, 상대를 향해 검극을 향했다.
하지만, 억지로 숨기려 해도 떨려오는 그녀의 다리는 결코 정상이 아닌 그녀의 상태를 감춰줄 수 없었다.
애초부터 정상이 아니었거늘, 일격을 허용한 지금에야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지금은 쓰러질 때가 아니었다.
녹지연은 아득히 멀어질 것 같은 정신을 붙잡으며, 사내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당신, 누구죠?”
“뭐? 날 몰라? 나를? 흐음, 이상한데, 분명 옛날에… 아니, 아니지! 그년은 분명 죽었는데?”
첫마디부터 무슨 말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는 사내였다.
방금 적영의 칼을 맨손으로 붙잡아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으며 피 묻은 손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흐음, 흐음, 흐음…….”
그 기괴한 광경을, 세 사람은 침음 속에서 지켜보아야만 했다.
정면 승부로는 이길 수 없다.
이미,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상태였다.
양쪽 팔이 구속된 상태에서도 간단하게 제압당했거늘, 설령 가짜였다고 해도 족쇄에 대침까지 제거한 지금에야 어련하겠는가.
필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파악.
사내를 견제하며, 세 사람은 서로 전음을 나누었다.
{어떻게 하지? 이게 전부 함정이었나?}
{…이 장소 전체가 함정은 아닐 거예요. 무의미한 허수를 두지는 않았을 테니까.}
적영의 질문에 녹지연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청유백을 바깥으로 돌리지 않고 말지, 불필요한 이목을 감수하면서까지 함정을 팔 이유는 없을 테다.
그렇다면, 당연하게 도출되는 답은 단 하나뿐.
청유백 또한, 이곳에 있다.
보이지 않을 뿐.
녹지연은 결론을 지었다.
{…진법이에요. 그는 여기 어딘가에 있습니다. 저희가 시간을 벌 테니, 그를 찾으세요.}
{허, 허나… 퇴각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곳은 적가의 안뜰. 설사 저자라고 해도 쫓지는 못할 겁니다.}
{그럼 우리가 다시 왔을 때, 저 자와 청유백은 사라지고 난 뒤겠죠.}
{…….}
선택권은 없다.
주어진 선택지는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두 가지뿐.
백소하는 한탄 아닌 한탄을 내뱉었다.
{…조금만 시간을 벌어 주십시오.}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라고 해야 할까?
사내는 스스로 무언가를 계속 고민하느라 두서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사내는 그렇게 조금을 더 고민하다가, 뭔가 알아차린 듯 크게 손뼉을 치며 눈을 떴다.
“아, 그렇군! 네가 그년이구나! 녹운룡 그 머저리의 딸! 어쩐지, 어쩐지! 낯익은 얼굴이다 싶었지!”
“무슨 소리를…?”
“킥킥킥, 알아야 뭣 하겠니? 곧 죽을 텐데! 게다가 멍청한 적가의 딸에다, 헛똑똑이 백가의 아들! 아쉽긴 하지만, 그분께 바칠 첫 제물로는 나쁘지 않지!”
뭘 그리도 떠벌리는지, 원.
적영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적가의 안마당에서 이런 짓을 벌이다니, 배짱도 두둑한 놈이다.
적영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은밀 같은 것은 개나 줘 버리게 되겠지만…!’
상관없다.
지금 이자를 붙잡는 것만으로도 증거의 일부가 될 테니까.
바깥의 경비에게 소란을 전달하기만 하면─
─빠악!
된…다.
“그러면 재미가 없지. 왜 기껏 준비한 여흥을 망치려고 할까?”
순간, 적영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둠 속이라 파악이 늦었던 것일까?
아니면, 저자와 자신의 실력 차이가 그만큼 압도적인 것일까.
단지, 결과로서 느껴지는 것은, 단 일격을 방어의 시도조차 못 하고 떨어져 나갔으며.
“꺽, 끄윽…….”
그 증거로, 목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과 토혈하는 핏물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우웨에엑!!”
목을 부여잡고 헛구역질하는 적영을 바라보며, 사내는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진심으로 자신들을 상대한다는 태도조차 아니었다.
그저, 단순한 여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 보였다.
사내는 장난스레 말을 이었다.
“아, 내가 누구냐고 물었었니? 그래그래, 그것까지 또 답해주지 않으면 재미가 없겠지. 그렇지?”
사내는 쓰러져 있는 적영에게 다가가 발로 머리를 짓밟았다.
소리 없는 고통이 탄식처럼 반복되었지만, 유의미한 비명으로 표현되지는 못했다.
“걱정 마렴. 시간은 많단다. 동이 틀 때까지… 잔뜩 알려 줄 테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