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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102화 (102/200)

제102화. 길을 터라 (2)

“하, 하오나……!”

“왜, 내게도 적가의 가주를 따른다 말할 생각인가?”

적우각은 코웃음 쳤다.

그리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보잘것없는 핑계에 불과할 테니.

적영에게 그리 말했던 것도 이미 한참 선을 넘은 행위였지만, 어느 정도는 진실이었기에 뒷감당할 자신이 있었던 것일 테다.

진실인 까닭임에야─ 당연히, 적우각의 존재가 바로 그 이유다.

허나, 글쎄.

아무래도 저들은, 그 ‘까닭’의 앞에서까지는 그 말을 지껄일 용기가 없는 듯 보였다.

“감히, 이 내게?”

“그것은…….”

경비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저 뒤에 존재하는 켕기는 비밀과, 눈앞의 적우각에 대한 공포.

그 사이에서 저울질이라도 하는 꼴이었다.

이 상황까지 치달은 지금까지도 말이다.

“네놈들이 지금, 적가의 후계를 우롱하는가!!”

“아, 아닙니다! 당치 않습니다.”

“당치 않다? 무엇이? 설마하니 나의 명은 아닐 테고, 아직까지 그곳에서 버티고 서 있는 네놈들의 목을 말하는 것이렷다.”

적우각은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그의 전신에서, 근육에 함축된 마기가 증기가 피어오르듯 끓어올랐다.

동시에 치솟은 것은 그의 존재감.

본디 거대한 덩치를 지닌 그였지만, 저리 마기를 끌어올려 주변을 압박하자 그 크기가 그야말로 태산같이 느껴졌다.

“무례에 대한 죄는 묻지 않겠다. 그것을 물을 자격은 다른 이에게 있을 테니. 허나!”

─쿠웅!!

한순간, 먼지바람이 일었다.

적우각이 내려밟은 진각,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파공성과 충격음이 잇따라 땅을 울렸다.

“명령에 불복하는 자는,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상관의 명에 불복하는 것을 군법으로 다스리겠다는 말은, 재판을 생략한 즉결 처형.

그리고, 당장이라도 그것을 행할 수 있다는 압박.

이 지경까지 다다르자, 경비들은 빠르게 결정해야만 했다.

“젠장……!”

경비들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판단은 빨랐다.

다음 순간, 그들이 선택한 것은 도망이었다.

일제히 뛰어올라 담을 넘어서는, 한달음에 숲을 향해 내달렸다.

이 마교에서 도망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대처로군.’

저 뒤에 숨겨둔 것이 그만큼이나 께름칙한 것이라는 방증일 테니 말이다.

“허, 도망을 쳐?”

적우각은 그리 코웃음을 치면서도 곧바로 그들을 뒤쫓지는 않았다.

천산의 세가 넓고 험하다고는 하나, 도망자의 신분으로 갈 수 있는 길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당장 그들을 쫓는 것보다는, 이쪽과의 용무가 우선일 테다.

적우각이 자신들을 돌아보자, 백소하는 당혹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어떻게…….”

“위쪽에서 보고 있었지. 영이가 이 야밤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녹 소저까지 보이더군.”

위쪽?

백소하가 표정으로 의문을 표하자, 적우각은 턱짓으로 만검각 건물의 위쪽을 가리켰다.

‘……아.’

하긴, 백소하 자신도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고 백서각에서 머무르곤 하지 않았던가.

그가 이곳에 있는 일이 이상하진 않을 테다.

적우각은 팔짱을 끼며 일동을 돌아보았다.

“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셋이 모여 악행을 작당하고 있지는 않았을 터! 반가운 기척도 있어 내려와 봤네만… 허어! 이게 대관절 무슨 일이란 말인가!”

“설명하려면… 좀 깁니다.”

“그건 안타까운 일이군. 퍽 좋은 술안줏거리가 되었을 텐데 말이야.”

적우각은 그리 말하며 몸을 풀었다.

주먹을 뚜둑이고, 어깨를 돌리며 당장이라도 움직일 태세를 취했다.

그에게 어떤 진실도, 정보도 말해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음으로 미루면 될 일 아니겠나. 나는 달밤에 산책하는 셈 치고… 놈들을 쫓도록 하지!”

“예?”

쫓는다고? 저들을?

적우각의 성정을 생각하면, 사전에 무언가 알았을 리도 없다.

방금 말한 것에 거짓이 섞였을 리도 없다.

정말로 방금 발견하여 내려와, 저들을 쫓아낸 것이 그의 행동의 전부이리라.

도와준다니, 그거야 좋다만…왜?

백소하는 이해가 되지 않는 듯 호통쳤다.

“아니,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움직여도 되는 겁니까? 의심이 너무 없지 않습니까.”

“이유? 친우를 돕는 데에 이유가 어디 있겠으며, 또한…….”

적우각은 제 가슴을 탕탕 치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시선은, 그것을 물은 백소하가 아닌 그 뒤의 녹지연에게 향해 있었다.

“무슨 고민이 있든, 이 내가 돕겠다 이르지 않았는가! 남아일언중천금, 모르는 바는 아니겠지!”

죽립을 눌러쓰고, 온몸을 장포로 휘감았음에도, 그녀를 향하는 그의 눈빛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어쩌면, 다른 가능성을 생각 못 하는 단순해빠진 사고의 결과물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간에.

녹지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를.”

“무얼, 빚은 달아둘 거라네. 녹 소저. 다음에 밥이나 사시게나.”

적우각은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을 지나쳐 담벽으로 걸어갔다.

급이 차이 나는 수준의 실력이라면, 동이 트기 전에 무리 없이 둘 모두를 잡을 수 있으리라.

이 여유로운 한담이, 결코 허세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나 혼자 처리할 수 있었어.”

적우각이 지나치는 순간, 적영이 작게 속삭였다.

작지만, 적우각의 귀에는 똑똑히 들어갈 수 있도록.

일말의 추한 자존심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그러나 적우각은 기분 나쁜 기색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암! 알고 있고말고.”

오히려 기쁜 웃음을 지으며, 자연스럽게 적영을 지나치며 담벽을 뛰어넘었다.

* * *

“이봐. 바, 밖이 소란스러운데.”

“곧 잠잠해질 걸세. 나 참, 걱정하지 말라니까? 이 일에 얼마나 높으신 분이 관여하신 줄은 아는가?”

“누, 누구길래?”

“……나도 모르지. 하지만 어련히 높으신 분 아니겠나.”

“뭐 그딴…….”

“그래도 지금껏 이런 일은 얼마든지 있었고, 그때마다 별일 없이 넘어갔다는 것은 잘 아네.”

“그, 그렇지?”

“그래. 뭐 가령 적가의 직계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찾아와서 난장을 피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야.”

“저런 거?”

“응?”

사내는 그 말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안타깝게도 그 실체를 보는 일은 없었다.

오도독!

경쾌한 소리와 함께, 목이 신명나게 돌아가 버렸으니…….

다행인 것이라면, 먼저 그 불그스름한 무언가를 발견한 사내도 잇따라 떠나 저승길이 외롭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백소하는 그들의 몸을 수색하고는, 재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잔챙이들이군요. 하긴, 그렇겠죠.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가장 위험한 곳에 심복을 찔러 넣지는 않았을 겁니다.”

녹지연에게 듣기로 녹가주 녹운룡은 결코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자.

그렇다면, 이곳의 중요도와는 별개로 자신의 사람은 이곳에 심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들킨다면 곧바로 정체가 직결되는 현장.

그 방증으로, 이들은 녹가의 표식 하나조차 걸치고 있지 않았다.

녹지연이 거들었다.

“아마 본인도 녹가의 장원에 있을 거에요. 결코 본인이 움직이는 일은 없겠죠. 만에 하나라도 발각될 위험이 있을 테니까.”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안전을 챙기는 겁니까?”

“그건 아니에요. 오히려 자신의 계획이 실패할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죠. 실제로, 적영이 우연히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리되었을 테고요.”

제 이름이 거론된 적영은 녹지연을 돌아보았지만, 마냥 나쁜 이야기는 아니어서 뭐라 하기 머쓱한 표정이었다.

적영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 어쨌든 좋아. 이제 문제는 저쪽 아냐?”

적영은 그리 말하며 창살 안쪽을 가리켰다.

어두운 방 안, 작은 빛 하나 비치지 않는 그 그림자의 한편에 누군가의 인영이 보였다.

백소하는 곧장 철창의 문을 당겨 보았지만, 거친 마찰음만이 몇 번 반복되었다.

“…잠겨 있군요. 아까 저들에게 열쇠는 없었고…….”

그렇다면, 급한 대로 당장 조치를 취하는 수밖에 없었다.

백소하는 적영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떻게, 벨 수 있겠습니까?”

“왜 애가 그리 폭력적이냐? 이것도 다 우리 가문 재산이야, 알아?”

“너한테 그런 말을 듣는 것도 꽤 골 때리는 일이긴 합니다만, 그러면 뭐 어쩌자구요?”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땅을 팔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엄중히 관리되고 있을 감옥의 열쇠를 어디서 구해올 수도…

“보자… 열쇠가… 이건가?”

─달칵!

…있네?

“아, 이거 맞네.”

적영은 너무나도 당연한 손놀림으로 품에서 감옥의 열쇠를 꺼내어 맞춰내는 모습이었다.

백소하가 대체 왜 그게 네 손에 있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적영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십수 년 동안 방치된 감옥이야. 이젠 뭐 기념물에 가깝지. 다른 옥사면 몰라도, 이것 정도는 가져올 수 있어.”

“뭐… 그렇다 치죠.”

“애초에 못 부숴. 만년한철이 뉘 집 개 이름인 줄 알아?”

칭찬을 바랐는지 툴툴대는 적영을 뒤로하고, 백소하는 고개를 숙여 철창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있는 것은 분명한 청유백이었다.

양팔을 구속당해 축 늘어져 있는 것이 척 보기에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특히, 목 뒤에 박힌 세 개의 대침은 완벽하게 움직임을 통제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이런, 혈도를 제압당한 것 같습니다. 아마 말도 못 하는 상태겠죠.”

“풀 수 있겠어?”

“당연한 거 아닙니까. 내가 누군데요.”

백소하는 그리 말하며 청유백에게 다가갔다.

하긴, 점혈과 진법 하면 백가 아니던가.

누가 걸었든 간에, 시간만 있으면 어떤 점혈이든 풀어낼 수 있었다.

백소하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청유백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찰나조차 지나지 않은 그 순간.

─움찔!

청유백의 고개가 살짝, 하지만 분명히 착각은 아니리라 확신할 정도로 움직였다.

분명 혈도가 짚어져 있을 텐데!

“끄으…….”

“뭐, 뭐야. 멀쩡한데?”

“그럴 리가 없습니다만…….”

백소하는 청유백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전신에 상처라 할 만한 것은 별로 없었다.

옷은 깨나 해져 있었고,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휘날렸지만 말이다.

청유백의 힘겨운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고요하게 울렸다.

“…이제 왔나?”

“이런, 빌어먹을! 그렇게 건방을 떨더니, 이게 무슨 꼴입니까?!”

백소하가 그의 맥을 짚는 것과 동시에, 적영과 녹지연도 그에게로 다가왔다.

적영은 열쇠 꾸러미에서 족쇄의 열쇠는 없는지 뒤져보고 있었고, 녹지연은 백소하와 함께 그의 상태를 살폈다.

몸 곳곳의 혈도가 막힌 듯 보이긴 했지만, 그리 위급해 보이는 상태는 아니었다.

급히 달려온 것이 무안할 정도로 말이다.

청유백은 인상을 찌푸리며 힘겹게 입을 열어 불만을 표출했다.

“그건… 그렇고, 이 침 좀 뽑아 볼래? 힘들어 죽겠거든.”

등 뒤의 대침.

몸 전체와 머리의 기운을 단절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 테다.

어떤 고수라도, 저리 처치를 당한다면 저것을 뽑아내기 전에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녹지연이든 백소하든 그것을 당한 적은 없었지만, 지식상으로는 알고 있었다.

물론, 제거 방법도 포함해서.

녹지연은 손을 뻗어 청유백의 뒷목을 잡고, 대침 중 하나에 손가락을 올렸다.

어려운 것은 아니다.

모든 과정이 기억 속에 있으니, 그대로 따라 하면 무리 없이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서둘러 처치를…….”

…헌데.

─치이이익…….

녹지연이 붙잡은 청유백의 뒷목에서부터, 그곳을 중심으로 의문의 검은 핏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의미의 의문은 아니었다.

녹지연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독철의 맹독?’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로부터 나오는 맹독.

독에 저항이 없거나 내공이 없는 자가 만진다면, 그 자체로 큰 상해가 될 독이었다.

헌데…….

‘…….’

녹지연은 잡았던 대침에서 손을 떼고, 손을 들어 백소하를 천천히 밀어내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청유백에게서 천천히 물러났다.

백소하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지만, 녹지연이 워낙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무어라 따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청유백에게서 떨어져 창살의 옆까지 다다랐을 즈음.

녹지연은 단언했다.

“……저거, 가짜예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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