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화. 신에게 율법을 걸고 (5)
적영이 돌아온 것은 달무리가 하늘을 수놓은 이후였다.
다만, 문이 아니라 창틀을 밟고서 말이다.
백소하는 왜 멀쩡한 문 냅두고 창문으로들 다니는지 문득 의문이 들었지만, 심신의 안전을 위해서 닥치고 있기로 했다.
“후우…….”
녹지연이 힘겹게 올라온 것과는 상반되게, 마치 그림자 속에서 깃털이 내려앉듯 사뿐히 들어왔다.
콧등까지 가린 복면을 내린 적영은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고, 그녀의 코앞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반겼다.
“오셨어요?”
퍽 익숙한 목소리다.
지난 십수 년 동안 실랑이를 벌이고 개와 원숭이처럼 으르렁댔으니, 익숙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다.
다행히, 다녀오는 동안 이곳이 털려 뿔뿔이 흩어지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
적영은 본능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익숙한 건 좋은데…….
적영은 너무나도 멀쩡해 보이는 녹지연을 바라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표정을 뒤틀었다.
“뭐야, 너 왜 멀쩡해?”
“적당히 조치했어요. 녹가의 딸이 이 정도도 못 하면 부끄럽죠.”
방금까지 죽어가고 있었으면서?
적영은 해명해보라는 양 백소하를 돌아보았지만, 이번에도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도움이 안 되네.”
적영은 품속에서 녹지연이 건네었던 병을 꺼내었다.
빈 병이었던 그것은, 녹지연이 시킨 대로 작은 솥의 액체를 담아내고 있었다.
“…이거 해독제 아니었어?”
“글쎄요?”
“이런 씹…….”
고생고생을 해 가며 몰래 가져왔더니만, 이건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적영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녹지연을 죽일 듯 쏘아보는 사이, 녹지연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로 그 병을 낚아채어 품에 넣었다.
그리고 그 한순간, 녹지연의 손끝과 표정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찰나에 스쳐갔다.
하지만 그야말로 찰나였을 뿐, 녹지연은 눈 깜빡할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정상적인 표정을 연기했다.
‘해독제는… 아니군.’
적영은 짜증과 분노가 눈이 가려 보지 못한 듯했지만, 백소하는 분명히 보았다.
그녀는 결코 정상이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저 기물을 손에 끼고 있는 이상, 그리고 그녀 몸의 이상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결코 그리 부를 수 없을 테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 병의 내용물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효용이 한정적이거나 의미가 없다는 것.’
가능성을 생각하면 아마 후자이리라.
하지만 지금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 왈가왈부할 시간은 없었다.
그녀의 성격상,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대답해주지도 않으리라.
백소하는 적영을 돌아보며 물었다.
“미행은 없었습니까?”
“당연히 있었지.”
“뭐요?! 아니, 그럼…….”
“내가 미행 따윌 당할 것 같아? 당연히 다 떼어 버리고 왔어.”
적영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말마따나, 다행히도 근처에 다른 추적자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 듯했지만─
녹지연은 그다지 안심이 되지 않는 듯 보였다.
“확실해요? 녹가의 추적자는 우수해요. 안일하게 그랬다간…….”
“걱정도 팔자네! 네가 할 수 있는 걸 내가 못 할 리 없잖아.”
“…당신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요.”
녹지연이 생각보다 쉽게 물러나자, 적영도 조금은 머쓱해졌는지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거칠게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헝클어뜨리더니, 침상에 다가가 앉았다.
“갈수록 가관이야. 갈수록 가관이네. 청유백은 중앙 뇌옥에 투옥되고, 저 망할 년은 뭐 하자는 건지도 모르겠고, 이제는 미행까지 당하네! 마교 한복판에서 말이야!!”
잠깐, 뭐라고?
방금 뭔가 말도 안 되는 단어가 지나간 것 같은데─
백소하는 제 귀가 잘못되었는지를 순간 의심하며 언성을 높였다.
“잠깐, 청유백이 뭐요?”
“못 들었어? 아니, 내가 뭣 때문에 여기 왔는데?”
“못 들었습니다! 누가요, 청유백이? 중앙 뇌옥에?”
“그렇다니까!”
“잘못 봤겠죠.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쇼. 차라리 황돈이 사기죄로 끌려갔다면 모를까….”
중앙 뇌옥이 뭐 하는 곳인가?
마교의 가장 중심, 고수들이 돌처럼 발에 채이게 있는 만검각의 특수 감옥이다.
지하의 그곳은 빛 한 줄기 들지 않고, 죄수를 옭아매는 사슬은 전부 만년한철로 단련한 명품.
당연히, 그곳에 가두는 죄수 또한 지극히 한정되어 있음이 당연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그래.
처형을 기다리는 반역자 정도나 그곳에 가둘 법하리라.
그런데, 뭐? 청유백?
‘그 꼼수와 명분의 화신이?’
사람을 팰 때도 계획을 세우고 패는 그 인간이, 반역죄?
어유, 참.
‘그럴 리 없지.’
설령 뭐 그게 진짜라고 하더라도, 분명 모종의 계획이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세상엔 다 쓸모가 있는 걱정이 있고, 하등 쓸모가 없는 걱정도 있는 법이다.
백소하가 봤을 때, 뭐가 되었든 간에 청유백에 대한 걱정은 후자에 속했다.
하지만
“뭐야, 너도 모르고 있었어?”
“요즘 들어 많이 말하는 것 같습니다만, 나라고 모든 걸 알고 있는 건 아닙니다.”
백소하는 지끈거리는 미간을 짓누르며 힘겹게 대꾸했다.
심지어 방금 적영 자신의 입으로 ‘방금’ 보고 왔다고 했지 않나.
근데 그걸 자신이 어떻게 안단 말인가?
백가의 정보원들도 사람이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곤 하지만, 사람인 이상 잠은 자야 하지 않겠는가.
“쓸모없네….”
“그것도 요즘 들어 자주 듣는 것 같군요. 눈물이 납니다.”
“아무튼 간에, 난 알아야겠어. 분명히 뭔가 있어!”
적영은 대체 뭔가에서인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의욕을 얻은 모양이었다.
어릴 적 뒷산에 올라 어두운 동굴을 탐사할 때의 기분이라도 느끼는 것일까.
백소하는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뭐, 잘해보십쇼.”
“너도 가야지!”
“아니, 내가 왜요?”
“넌 이상하지도 않아? 갑자기 청유백은 갇히고, 저년은 쫓기고, 방금 나한텐 미행까지 붙었었어!”
분명히 뭔가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다.
적영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백소하도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청유백이 한 일이 아닌가.
분명 전부 계획이 있을 텐데, 어설프게 끼어들었다가는 도리어 망치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잘못돼서 뇌옥까지 끌려간 거라면…….’
……빌어먹을.
수많은 가정들이 어지럽게 뇌리를 스쳐갔다.
그 청유백이니만큼, 어떤 가능성이라고 해도 그럴싸해 보였지만.
뭐든 간에, 이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어떤 변화도 이끌어낼 수 없으리라.
“그러면 일단, 설명부터 듣고 생각합시다.”
백소하는 결국 결단을 내렸고, 녹지연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달빛 아래에서 맑게 억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흐드러져 스러질 것만 같은, 그런 위태함이 엇비치고 있었다.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미래의 자신에게 선물하는 고난인 셈 치도록 하지요.”
* * *
녹지연의 설명은 길지 않았다.
그것이 진실인지.
감춘 것은 없는지.
그녀가 잘못 알지는 않았는지.
그런 것을 따질 시간은 없었다.
아직 동이 트려면 꽤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시간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므로.
백소하는 지금껏 들은 것을 대충 정리하여 대꾸했다.
“그러니까… 녹가주가 옛 고독을 지금까지 발전시켜 왔고, 그걸로 마교를 뒤에서 휘어잡으려 한다?”
“쉽게 정리하자면 그렇네요.”
“믿기 어렵군요….”
적철진에게 고독을 심은 것으로도 모자라, 적가주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에게까지 이미 손이 미쳐 있고─
당장에라도 그것을 발동시킬 수 있다니.
적영 또한 쉬이 믿을 수 없는 말인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믿을 수 없어. 아버지는 그리 허술한 분이 아니신데!”
“아무리 고수라도, 발동되기 전의 헌원고의 침입을 알아챌 수는 없을 거예요. 한 몸에 두 가지 성질의 기가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이 천하에 몇이나 있겠어요?”
녹지연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만큼 중요한 정보를 잘못 알고 있을 리도 없고 말이다.
녹지연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하긴, 녹 소저의 말이 맞다면 실로 그렇겠군요. 칠면석척처럼 제 기운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벌레라니.”
백소하는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물론 믿을 수 있겠지만, 어느 것 하나 믿기 힘든 것이었으니까.
‘눈앞에서 그녀의 몸이 뒤틀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나도 믿지 못했겠지…….’
지금까지 그녀가 그 누구에게도 말 못 한 채 혼자서만 비밀을 간직했던 것 또한 납득이 되었다.
십수 년 지기인 저와 적영도─물론 적영은 친구는 아니라고 발악하겠지만─믿기 힘들진대 다른 누군가라고 오죽하겠는가.
그러다가, 백소하는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그러면 우리 몸에는 심어져 있지 않은 겁니까?”
“헌원고의 생산성이 기존에 비해 비약적으로 뛰어올랐다지만, 그래도 한계는 있어요. 근본적으로는, 그 사람이 필요 이상의 수를 두기 싫어하기 때문이죠.”
즉, 자신들은 고독을 심어봤자 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인 것이다.
“…부정할 수는 없군요.”
“짜증나지만, 그렇긴 하지.”
백소하는 바로 위의, 백가를 이을 형인 백소상이 있고, 적영은 말할 필요도 없이 적철진에 비해 우선도가 밀린다.
뭐라고 포장을 해도, 마교를 휘어잡기 위해 통제해야 하는 인원은 아닌 셈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면, 자연스레 이어서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헌원고라는 고독이 그토록 무서운 것이라면, 왜 당장 마교를 통제하려 하지는 않는 겁니까? 그 말대로라면, 충분히 가능할 텐데요.”
“그건 저도 몰라요. 다만… 녹운룡은 혼란을 극도로 싫어해요. 누군가에게 계획이 새어나가는 것을 병적으로 기피하죠.”
적가주를 비롯한 각 가문의 요인들에게 헌원고를 심은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 과정이 완료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녹지연의 설명이 이어졌다.
가령, 청가주 청걸명이나 황가주 황단화 같은 경우는 의심이 많아 고독을 심을 기회조차 없었더랬다.
아직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아마… 설령 고독을 발동시킨다고 해도, 모든 상황이 끝난 이후일 거예요. 그게 발동된다고 해도, 당사자들 외에는 그 누구도 모르게 되겠죠.”
녹운룡은 정말로, 지극히 병적으로 마교에 소란이 이는 것을 싫어하는 듯 보였다.
그렇기에 지금껏 비밀을 유지했고, 그 누구도 모르게 계획을 준비했으리라.
백소하 자신이, 백가의 정보부가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시점에서 비밀의 심각도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면… 당신도 모르는 뭔가가 더 존재할 수도 있겠군요. 사람의 정신을 만진다던가.”
“에이, 설마…….”
적영은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간 거 아니냐며 웃었지만, 백소하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적영이 그것을 보고 살짝 움츠러들었고, 백소하는 말을 이었다.
“이미 지금껏 믿었던 것이 전부 거짓일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이제 와서 ‘설마’ 따위가 어디 있겠습니까?”
녹지연이 말한 헌원고라는 것은, 그야말로 부작용 없는 궁극의 족쇄였다.
아까 그녀가 고통을 호소한 것을 직접 보았으니, 그 성능을 의심할 여지도 없다.
지금껏 없던 그러한 괴물을 만들었는데, 그 이상의 것이라고 하여 만들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
전략이라는 것은, 판단이라는 것은 언제나 최악을 상정하고 움직여야 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지금에서의 최악은, 믿을 수 없지만 청유백이 정말로 실패하여 감옥에 갇힌 경우다.
“…진실이 어찌 되었든 간에, 동이 트기 전에 청유백을 만나야만 합니다.”
백소하와 눈을 마주한 적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밤은 깊고, 달은 밝다.
굳이 채비할 것도 없으리라.
셋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문득, 백소하는 뇌리에 스친 의문을 입에 담았다.
“하나만 더 물어도 되겠습니까?”
“뭔가요?”
“당신 아버지의 계획이었다면, 당신은 그저 따랐다면 더 없을 부귀영화가 약속되었을 텐데, 왜 이리 움직이는 겁니까?”
“그건, 글쎄요…….”
녹지연은 옅게 숨을 내쉬며 말끝을 끌었다.
잠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백소하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제 평생의 숙원이에요. 녹운룡, 그 자의 인생을 철저히 파멸시키고….”
녹지연은 그리 말하며 품속의 병을 찰랑, 흔들어 보였다.
저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결코 인간에게 이득이 되는 물건은 아니리라.
“종국에는, 산 채로 피부를 떠 충굴에 집어 처넣고 싶네요.”
“…….”
녹지연의 미소는 섬뜩했다.
항상 감정을 감추는 그녀였기에,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감추지 않는 분노는 생소한 것이었다.
듣고자 했던 답은 아니었지만, 때로 진실이 필요치 않은 답도 있는 법이다.
침묵한 백소하에게 그녀가 한 발자국 다가섰다.
“그리고 한마디만 더 하자면.”
─콰악!
섬전처럼 내뻗어진 그녀의 손이 백소하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감정을 감출 기색조차 없었다.
아니, 어쩌면 감추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녹지연은 멱살을 쥔 손을 끌어당기며, 고요하게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시는, 그 작자를 내 아비라 부르지 마.”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