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신에게 율법을 걸고 (4)
백소하가 고통의 경련인지 사후경직인지 모를 껄떡거림을 몇 번인가 반복할 동안, 갑작스런 침입자는 빼꼼 고개를 들이밀어 방 안을 확인했다.
분명 뭔가를 박기는 했는데…….
“뭐, 뭐야? 왜 문 뒤에 있어?”
적영은 늦게나마 꿈틀거리는 백소하를 발견하곤, 작게나마 묵념하고서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문 뒤에 있던 놈 잘못이지, 문 연 놈 잘못은 아니지 않겠는가?
웃음 반, 미안함 반으로 문을 닫고 들어온 적영은, 직후 그림자에 가려 못 보았던 면면들을 발견했다.
“이건 또 무슨 수라장이야.”
혼자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혼자는커녕, 시장통처럼 아주 북적북적하지 않은가.
“청유백네 꼬맹이들에…….”
자신들을 부르는 말에, 세 아이들은 흠칫 몸을 떨며 움츠러들었다.
아니 뭐, 저놈들은 아무래도 좋다.
적영은 그중에서도 녹지연을 바라보며 순간 미간을 찌푸리더니, 반사적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네년이 왜 여기 있냐?”
녹운각에서야 제 안방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이곳은 백서각(白鼠閣).
백가의 영역이다.
때 늦은 밤손님이나 일탈의 현장이 아니고서야, 이년이 지금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는데…….
“…잠깐, 너 왜 그래?”
하지만, 그렇게 속으로 그녀를 잘근잘근 씹으면서도, 적영은 눈치 빠르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
녹지연의 숨이 흐릿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저 철인이, 어두워서 잘 안 보인다곤 하지만 안색이 파래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 아닌가.
적영은 녹지연에게 다가가 이마에 손을 올리고, 팔목을 걷어 올려 혈맥을 짚었다.
“무슨… 몸이 불 같잖아!”
이 빌어먹을 년이!
적영은 곧장 녹지연을 품에 감싸 안아 들어 올리고는, 방 한켠의 침대로 다가가 눕혔다.
아무리 끔찍하게 싫어하는 인간이라 한들, 눈앞에서 죽어가는 꼴을 감정 없이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적영은 백소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상황이야?”
“나도 모릅니다. 애초에 갑자기 창문으로 들어와서는…….”
“쓸모가 없네.”
적영은 녹지연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손목의 맥을 짚어 기운의 흐름을 쫓았다.
가쁘게 숨이 내쉬어지고, 다시 들이쉬는 것을 반복했다.
녹지연이 이리 쇠약해진 이유.
지금도 그녀의 몸을 갉아먹는 원인을 찾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건 또 무슨…….”
적영은 녹지연의 오른손을 들어, 중지에 끼워진 묵색 반지를 발견했다.
모르고 있을 때는 알아채지 못했건만, 그 존재를 눈치채니 살이 에는 듯한 독기가 느껴져 왔다.
신물(神物)이나 기물(奇物)이라고 불러야 할까.
결코 자연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의 끔찍한 독기가 반지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 미친년이?’
평범한 물에 이 반지를 집어넣기만 해도 독약이 될 수준이었다.
뭣 때문이지?
두 번째 시험에서 허무하게 패배하서 본인이라도 좀 강해지고 싶었나?
아니, 하지만 이년은 교주 자리에 관심이 없었을 텐데.
심란한 적영의 뇌리에 몇 가지 생각이 스쳐갔지만, 그것이 뭐가 중요하랴.
적영은 한탄 어린 한숨을 내쉬며 녹지연의 팔을 잡아당겼다.
“하, 이런 걸 끼고 있으니 안 아프고 배겨? 손 이리 내!!”
“빼면… 안 돼요….”
“웃기지 말고 이리 내놔!”
녹지연은 입을 열기도 힘든 힘을 쥐어짜 어떻게든 주먹을 쥐려 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만전의 상태였어도 힘으로 적영에게 대항하기는 어려웠으리라.
적영은 곧장 반지를 빼앗아 어깨 너머로 던져 버렸다.
녹지연의 검지, 반지가 위치했던 자리는 어느샌가 검게 변색되어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저 반지가 얼마나 극악한 물건인지의 방증이리라.
하지만, 괜찮아 보였다.
반지가 몸에서 떨어지자마자, 창백했던 녹지연의 혈색은 곧 정상으로 돌아오는 듯 보였다.
“봐, 바로 괜찮아지고 있잖…….”
그러나.
―꿈틀.
“아…아, 아아악!”
피부 밑에서부터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 눈에 띈 것은 쇄골이었다.
아니, 어쩌면 심장일지도 모른다.
작은 움직임, 하지만 결코 사람의 몸에서 보일 수 없는 꿈틀거림이 점차 퍼져나갔다.
녹지연의 광기 어린 비명과 피부 밑의 경련이 교차했다.
반지를 빼지 말라고 했던 이유.
녹지연은 더 이상 단어를 내뱉을 기력이 없었지만, 적영은 단숨에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세, 세상에…!”
적영이 반지를 다시 주워 와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 넣기까지는 찰나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주워 담지 못할 선택이었다면 꽤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겠지만, 다행히도 녹지연의 상태는 곧바로 다시금 호전되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니, 호전이라고 불러도 될까?
백소하는 그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며, 당혹한 안색을 감추기 급급했다.
‘어느 쪽이건 간에 목숨을 갉아먹고 있다. 이대로는…….’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
이게 대체 다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백소하도 아는 것 하나 없이 당혹뿐이었지만, 적영은 그를 향해 다가오더니 멱살을 틀어쥐었다.
“설명해. 무슨 상황이야?”
“나도 모른다지 않습니까!”
백소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적영의 손을 떨쳐냈다.
도리어 자신이 묻고 싶었다.
대체 녹지연의 저 몸은 무엇 때문이며, 청유백이 이 아이들을 두고 간 이유는 뭔지.
그리고 뭣보다, 애당초 적영 네놈은 왜 여기 와서 이러고 있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싸울 틈은 없었다.
녹지연의 상태가 조금이나마 호전되었는지, 신음을 흘리며 무어라 속삭이고 있었다.
“녹운각, 제 방에… 끓고 있는 액체가 있어요.”
녹지연은 그리 말하며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내었다.
들어서 건네줄 힘은 없었는지, 팔은 힘겹게 떨궈져 병이 싸늘하게 바닥을 굴렀다.
녹지연도 기력을 전부 쓴 듯 보였다.
더 이상의 말은 없이, 색색거리는 숨만이 옅게 들려왔다.
“망할 년이……!”
적영의 표정이 험악하게 구겨졌지만, 두 말은 없이 병을 주워 들었다.
알고 있는 것, 할 수 있는 것 하나 없는 상황이라면, 눈앞의 일이라도 해치워야 할 테다.
적영은 숨을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넌 여기 있어. 내가 다녀온다.”
“예? 하지만…….”
“닥쳐, 백소하. 네가 갔다가 도둑질한다고 동네방네 소문낼 일 있어?”
그녀의 그림자가 사라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녹지연과의 개인적인 사이가 험악한 관계이기는 했지만, 죽어가는 것을 좌시하고 지켜볼 정도로 매정한 사이는 아니리라.
누군가 자신의 행동을 질책한다면, 최소한 적영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개 같은 년, 뒤질 거면 아무도 없는 데서 객사할 것이지, 재수 없게 눈앞에서……!”
* * *
어둠 속에서 눈 뜬 청유백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습기였다.
그리고 이어서 울려오는 명음(鳴音)과, 쓰라린 목 부근의 통증이 과거의 기억을 돌이키게 했다.
청유백은 눈을 굴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긴.’
[마교의 뇌옥이니라. 퍽 일찍도 깨어나는구나.]
천화는 비아냥거리며 청유백을 질책했다.
빛 하나 들지 않는 이 장소, 축축한 이끼만이 자라 벽을 가득 메운 이곳에서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철그럭.
팔을 움직이려던 청유백의 움직임이 철의 마찰음과 함께 부자연스럽게 멈춰 섰다.
정신없는 와중에서 어둠에 적응한 눈은, 팔 끝에서부터 벽으로 이어진 사슬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연한 건가.’
[당연한 게다.]
지금의 수준으로 마주급의 고수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알고 있었다.
이리 쉽게 제압당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만년한철인가? 백 년이 지나도 이 돈지랄은 그치지를 않는군.’
뭐, 신중이라는 것은 언제나 과하여 나쁠 것 없다고는 하다만.
오히려 입에 재갈은 물려 있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청유백은 묶여있는 팔을 억지로 끌어당겨 보았지만, 무언가로 통제되고 있는 것인지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쉬운 대로 뻐근한 목과 어깨를 살짝 돌리는 정도로 만족하며, 청유백은 천호에게 물었다.
‘특이하다 할 일은 없었나?’
[없었느니라. 네가 다섯 수만에 제압당해 이곳으로 끌려왔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런 것 말고. 가령 팔다리의 힘줄을 끊어버렸다던가?’
[…뭐, 이 이상 저항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것일 테지. 네 몸 상태가 느껴지지 않느냐? 서른여섯 개 혈을 점혈당했다.]
청유백은 천화의 말에 제 몸을 돌이켜 보았다.
확실히, 몸 곳곳의 기맥이 멈추어 온몸이 무력감과 탈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뭐, 팔다리를 자르는 것보다는 양호한 편 아니겠느냐?]
‘시간만 있다면 풀 수 있지만….’
문제는, 목에서 아려오는 통증.
목 아래 부근에서 자신의 몸 깊숙이 찔러온 대침(大針)을 느낄 수 있었다.
내공으로 점혈한 것은 풀어낼 수 있지만, 이렇게 물리적으로 찔러온 것은 침을 제거하지 않는 한 풀기 어려웠다.
‘그렇군. 움직임을 봉한 건가.’
[아혈과 훈혈의 점혈은 풀어 두었다. 미련한 놈.]
목소리를 잃게 만드는 아혈과 정신을 잃게 하는 훈혈.
지금 보니, 그나마 지금 깨어난 것도 천화가 조치를 취해서인 듯 보였다.
청유백의 정신이 기절한다고 한들 천화는 영체.
시야는 막히겠지만, 그 외의 것들은 온전하게 느껴 전달받을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오래지는 않았다. 아마, 한 시진 정도일 게다.]
즉, 이제 밤이 깊어가는 정도의 시간이라는 것.
동이 틀 때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천화는 비아냥거리며 물었다.
[뭐, 어찌 방법이라도 있느냐?]
솔직히, 인정한다.
허를 찔렸다.
그 인간이 정말로 죽이려고 달려들어도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만…….
‘이건 예상치 못했군.’
[결국 변명일 뿐 아니더냐.]
‘……그것도 맞고.’
그것도 인정해야 할 테다.
옛날이었다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수였고, 그에 대한 대처 또한 생각할 수 있었으리라.
혹은, 처음부터 이런 상황이 오지 않게끔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야말로 보기 좋게 한 방 먹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청유백은 겨우겨우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웃었다.
‘뭐, 상관없지. 도박에서 지지는 않은 셈이니까.’
[이 꼴을 보고도?]
‘딴 게 더 많잖나?’
다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녹운룡의 목표를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적이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의 차이는 그 무엇보다도 크다.
형체가 없는 적이 이제 형체를 가지게 된 꼴이다.
지금 당장에야 갇혀 있다만, 이 감옥에서 나가기만 해도 형세를 역전시킬 수 있으리라.
하지만 천화는 한심하다는 양 코웃음 치며 이죽거렸다.
[본녀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네 머릿속은 이미 벌레가 다 파먹어 버린 이후였을 터인데, 잘도 그런 말이 나오는구나?]
‘그야…….’
말을 잇기도 잠시.
청유백은 한순간 느껴오는 오한과 동시에, 귓구멍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무언가를 느꼈다.
분명 온몸이 구속당해 손끝에 힘 하나 들어가지 않는 상황에서도, 피부에 솟는 이 선명한 오한은 감출 수가 없었다.
천화가 지금껏 몸 안의 기맥을 조작하여 붙잡아두고 있던 벌레들을 몸 밖으로 쫓아낸 것이었다.
천화는 보란 듯이 ‘계속해 봐라’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청유백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 괜찮은 대사를 내뱉었다.
‘……너를 믿었으니까.’
잠깐 침묵이 흘렀다.
청유백은 뻘줌해졌는지 말이 없었고, 천화는 감동이라도 먹은 모양인지 대답을 않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게 다더냐?]
‘음….’
아, 정정.
감동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감동해서 침묵한 게 아니라, 더 할 말 있냐고 기다리는 것이었나 보다.
청유백은 머리를 긁적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대꾸했다.
‘보통 이쯤에서 콧방귀 한 번 뀌면서 얼굴을 붉히던데. 귀신이라 감성이 없나?’
[미친놈…….]
다른 곳도 아니고, 뇌옥에 갇혀서까지 이 지랄을 할 기력이 남아 있다니.
놀랍기만 할 따름이다.
[본녀가 네놈에게 뭘 바라겠느냐? 죽어라. 나가 죽어!]
‘안타까운 귀신…….’
잠깐의 실랑이가 오가고, 제풀에 지친 천화는 어느덧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누구의 잘못이냐 묻는다면 당연히 기대란 것을 한 제 잘못 아니겠는가.
애초에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는 것을…….
천화는 있지도 않은 머리의 고통을 호소하며, 짜증을 억지로 삼켜내고 물었다.
[허면, 이다음은?]
‘글쎄…….’
청유백은 공허하게 어둠 저편을 바라보았다.
저 머나먼 복도의 끝에서, 어슴푸레 비쳐 오는 작은 횃불의 불빛이 보였다.
‘……기다리는 것뿐이겠지.’
떡밥은 뿌려 놨다.
낚시꾼의 역할은, 물고기가 그것을 무는지 지켜보는 일이 전부일 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