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98화 (98/200)

제98화. 신에게 율법을 걸고 (3)

“말을 신중히 택해야 할 걸세, 공자.”

“저잣거리의 항설을 주워섬긴 것은 아니니 걱정 마십시오.”

청유백은 코웃음 치며 응수했다.

퍽 감정적인 말이었다고 자조하면서도, 천화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양 씩씩거리고 있었다.

[찢어 죽여도 성치 않을 놈이…!]

녹운룡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자신의 설명이 무언가 모자랐던 것인가, 돌이켜 보는 생각인 듯 보이기도 했다.

“…설마, 본인의 말이 거짓이라 생각하고 있는가?”

“그럴 리가요. 전부 믿고 있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교주가 없다라?

마냥 듣기에는 웃기지도 않은 개소리와 다름이 없다만, 녹운룡이 말하니 퍽 신빙성이 있었다.

그의 계획은 하나부터 열까지 멍청하기 그지없었지만, 교주가 없다는 그 마지막 말이 사실이라면 마냥 멍청하다고 바라볼 수도 없게 된다.

‘교주가 없다’라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명제 하나만으로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적철진에게 고독을 심니, 마니 해 봤자 현 교주가 멀쩡하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지.’

적철진에게 고독을 심어서 꼭두각시로 만든다?

그래서 뭐가 변한단 말인가.

마교의 최강자는 굳건하게 살아 있고, 아직 십수 년은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어떤 이변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고 말이다.

가령 교주가 한순간 의심이라도 품으면 녹가는 꼼짝없이 수색을 받아야만 할 테고, 고독을 심었다는 정황이 있는 것 하나만으로 녹운룡의 모가지가 위태롭게 될 것이다.

‘지금 교주의 위상과 권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는 하지만… 그조차 상관없게 되겠지.’

[공공의 적이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교주가 없다면 그것이 불가능해진다.

설령 심증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지시할 구심점이 없고, 서로를 견제하는 사이에서 시간은 그저 흘러만 갈 테다.

녹가에게 고독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그것을 알아내게 할 기폭제가 없는 탓이다.

그렇기에 저 말은 진실이었다.

아니, 설령 거짓이라고 하더라도─ 녹운룡 그 자신은, 교주가 없다는 그 말을 티 없이 진실로서 믿고 있음이 분명했다.

녹운룡은 이를 갈며 말했다.

“…한 번만 더 말해 주지. 대계는 이미 완성되었네. 자네에게 이를 권하는 것은, 그저 자네의 능력이 아까워서일 뿐이야.”

“주변에 퍽 사람이 없는가 봅니다. 청가 나부랭이에게 그리 손을 벌리시고 말입니다.”

“권고는 여기까지일세. 세 번은 권하지 않아.”

착각하지 말라는 양 소리치는 녹운룡은 전신에서 독기를 끌어올리며 청유백을 압박했다.

어지간한 고수라도 숨이 막혀오며 고통을 호소할 정도의 독기.

사실상 죽기 싫으면 똑바로 대답해라, 정도의 협박이었지만, 청유백은 너무나도 태연하게 대꾸했다.

“한중왕도 와룡을 천거하기 위해 세 번을 찾았는데, 어찌 세 번을 묻지 않으십니까?”

“허! 세 번 물으면 대답을 달리할 셈인가?”

“물론 아니지요.”

청유백은 조용히 웃었다.

계속 전해져 오는 천화의 분노는 둘째치더라도, 역겹기 그지없는 저놈의 개소리를 들어주는 것도 슬슬 지겨운 참이었다.

지론 자체는 들어줄 만했다만─

결론이 틀려먹었으니까.

“살아도 뱀의 머리로 살지, 누군가의 뒤꽁무니를 쫓으며 살아 본 적이 없는 인간인지라.”

청유백은 바닥을 드러낸 찻잔을 조용히 탁자에 내려놓았다.

함께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표표하게 찔러오는 독기가 방 안을 가득 메웠고, 청유백과 녹운룡의 시선이 사납게 교차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녹운룡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쉽군. 아쉬워. 젊은 치기에 현명하지 못한 판단. 내가 자네를 과대평가한 모양이야.”

“당신이 저를 평가할 그릇이 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요.”

“…오만하기까지. 내가 인복은 참 없는 모양이군그래.”

─덜컥.

녹운룡은 푹 한숨을 내쉬며 의자를 밀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공허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청유백을 쏘아보았다.

분노보다는 실망에 가까운 감정이 담긴 눈으로, 옅게 읊조렸다.

“어쩔 수 없군.”

찢어질 것 같은 살기.

최대로 해방된 독기가 청유백의 사지를 좀먹어 왔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손가락 끝부터 썩어들어갈 독기였으리라.

하지만, 청유백은 태연하게 이죽거렸다.

“죽일 생각이십니까?”

그 조소에 가까운 웃음에 녹운룡은 한순간 흠칫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상관없다는 양 코웃음 쳤다.

“대단하군. 독에 내성이 있는가?”

“미력하나마, 보시는 대로.”

“뭐, 상관없는 일이지. 보다 확실한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네.”

―콰앙!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정없이 사방의 문과 벽이 박살나며 서슬 퍼런 녹가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각자의 병장기를 꼬나쥐고, 너나 할 것 없이 청유백을 향해 검극을 들이밀고 있었다.

“아, 그리고… 죽일 생각이냐 물었던가?”

“…….”

녹운룡은 너무나도 쉬이 말했다.

그가 가볍게 한마디만 내뱉더라도, 저 십수 개의 무기 중 무언가가 청유백의 심장을 꿰뚫을 수 있을 듯이 보였다.

그들 모두가 준비되어 있었다.

단 한 순간, 허락이 떨어지기만 한다면, 그들 중 누구라도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달려들 수 있을 듯 보였다.

그러나, 글쎄.

녹운룡은 섬뜩하게 웃었다.

“당연히 아니지! 내가 자네를 죽인다니! 끔찍한 말을 하는군.”

옅게 너털웃음을 짓는 그의 말과 동시에, 청유백의 목을 향하던 십수 개의 무기가 거두어졌다.

그리고 그곳을 가득 채우던 녹운룡의 독기 또한, 방금까지의 압박이 마치 거짓말이라는 양 순식간에 사라졌다.

“질 나쁜 농담이야. 암, 농담이고말고… 내가 어찌 자네를 죽이겠나?”

녹운룡은 청유백에게 다가섰다.

청유백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데굴, 눈동자를 굴려 그와 마주 보았다.

녹운룡은 손을 들어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고는―

“자네가, 나를 죽여야지.”

그렇게 작게 읊조렸다.

그리고, 순간.

─서걱!

섬찟한 소리, 살을 가르는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동시에, 붉은 선혈이 온 사방에 난자했다.

그러나, 그것이 청유백의 것은 아니었다.

“……!”

그것은 오히려, 청유백과 녹운룡을 감쌌던 무인들의 피.

청유백이 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저들 스스로가, 서로에게 검을 겨누며 인정사정없이 서로의 몸을 난자했다.

찰나가 지나고, 그 주위에 두 발로 서 있는 무인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본 인물 또한 없었다.

녹운룡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런, 갑자기 녹가의 장원에 쳐들어와 칼부림이라니…. 이게 다 불구대천심공의 부작용 탓인가? 몹쓸 마공이구먼. 못 써먹을 마공이야…….”

“뿌리부터 썩어먹은 종자로군.”

“아아! 잔혹하지 않은가. 어찌 사람의 정신을 저 정도로 버려 놓는단 말인가?”

서로 대화할 의지는 없었다.

이미 합의는 결렬되었고, 남은 것은 책임의 전가뿐.

한순간, 두 사람의 신형이 교차했다.

* * *

“빌어먹을, 달은 벌써 저리 밝은데 일감은 줄어들지를 않는군.”

문득, 바깥의 달빛을 바라본 백소하는 한탄하며 붓을 내려놓았다.

두 번째 시험이 끝났으니, 이제 휴식 없이 바로 세 번째 시험이 시작될 것이다.

며칠 후일지, 아니면 당장 내일일지는 모른다.

아마도 내일일 확률이 높겠지만, 뭐든 간에 절대라는 것은 없는 법이니 말이다.

하지만 뭐… 아무튼 간에.

시험이 이렇게나 다가온다면 평소에는 알아낼 수 없었던 정보들에도 손을 뻗을 수 있게 된다.

소문과 정보가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게 되고, 그들 중 하나에는 백소하의 밀정도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백소하도 간밤을 새며 한창 바빠지는 시간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정보들이 전부 진실은 아니며, 허위를 가려내고 진실 중에서도 어떤 것이 일목요연한지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본래였다면 이것으로 다른 후계자들과 이권이 오가는 모종의 거래를 텄을 수도 있겠으나─

‘청유백, 그 인간도 나를 닦달할 테니…….’

어찌 되었든 간에, 오늘 밤 내로 전부 끝마쳐야 하는 일일 테다.

백소하는 한숨을 내쉬며 창가로 걸어갔다. 조금 정도는 숨을 돌려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니까…….

“너희도 이만 가서 자지 않겠냐?”

백소하는 고개를 돌려 때아닌 불청객들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청유백이 ‘네가 직접 지켜봐라’며 떠맡기고 간, 세 명의 불청객들을 말이다.

“배움의 기회는 소중한 것이지 않겠습니까.”

“저도 글을 읽고 싶어서…….”

“삼아가 갈 때까진 안 가.”

아이들이 주경야독(晝耕夜讀)한다면야 누구든 간에 칭찬해 마땅할 일이겠다마는, 그것에 자신이 관련되는 것은 썩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서 좀 보내 버리려고 해도…….

“네놈들 친구는 아파서 힘들걸?”

“걱정은 감사합니다만, 전 괜찮습니다.”

“…….”

…씨알도 안 먹히는 태도였다.

누가 가르쳤는지, 말귀 한 번 죽여주게 안 들어 처먹는 놈들이다.

심지어 저 일귀라는 녀석은 낮까지만 해도 사경을 헤매고 있는 것 같더니만, 지금은 이러고 있지 않은가.

그러다가, 문득.

“……?”

일귀가 갑자기 코를 몇 번 찡그리더니, 갑작스레 고개를 돌려 창 바깥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별? 아니… 구름인가?’

백소하는 일귀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았지만, 창밖에 이렇다 할 무언가는 보이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밤하늘에 수놓인 별이 반짝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일귀가 백소하의 곁으로 다가오자, 백소하는 기꺼이 옆의 자리를 만들어 주며 피식 웃어 보였다.

“왜, 드디어 피곤함이 밀려오나?”

“아뇨, 잠시만…….”

일귀는 백소하를 뒤로하고 창틀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상체만 쑤욱 내밀어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모습이 퍽 귀엽기도 했다만, 백소하는 녀석이 뭘 하고 싶은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차가운 밤바람이 창틀 너머로 흘러들었다.

그다지 춥지는 않다.

하지만…….

“……!”

찰나, 바람에 실려온 혈향.

“물러서라!”

그것을 맡은 백소하는 순간적으로 일귀를 끌어안고 창틀에서 떨어져, 품속의 철필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곧바로 무언가가 들이닥치지는 않았다.

벽을 깨부수고 무언가가 돌입하지도, 알 수 없는 무형의 검기가 날아들지도 않았다.

그저, 누군가의 손이 갑작스레 창틀을 붙잡고는.

“흐읍……!”

그대로, 머리를 들이밀어 백소하의 방으로 들어왔을 뿐이었다.

백소하의 방은 삼 층.

실수로 들어왔다는 변명이 통할 위치도 아니었고, 멋모르고 방문한 밤손님이 찾을 만한 장소도 아니었다.

삼 층을 기세 좋게 기어 올라온 사람치고는 힘겹게 발을 디뎠고, 그마저도 발이 땅에 닿자마자 무너지듯 쓰러졌다.

얼굴 전체에 복면을 두르고 삿갓을 깊게 눌러써 정체를 가리고자 한 듯 보였지만, 눈이 마주치자마자 백소하는 그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녹 소저? 당신이 여길 왜?”

“……죄송해요. 당장 생각나는 곳이 여기밖에 없었거든요.”

녹지연은 복면과 삿갓을 풀어헤치며 힘겹게 대답했다.

“천하의 녹 소저의 인맥 중에 제가 제일 먼저라니, 그거 참 영광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이 그나마 가장 청유백과 가까운 사람이지 않나요?”

백소하가 기겁하며 무슨 그딴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냐, 라고 쏘아붙이려는 찰나.

“가장 가까운 건 저희죠!”

때 좋게도 당찬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삼아가 의기양양하게 책을 품에 끼고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녹지연은 그제야 아이들이 시야에 들어왔는지, 초점 없는 눈으로 아이들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너희는…….”

열 명 전부는 아니지만, 청유백이 유독 아꼈던 세 명.

사실상, 그가 직접 가르쳤던 세 명이리라.

‘저 아이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청유백이 모종의 안전 수단을 안배해 놓았다는 뜻…….’

녹지연은 작게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벽에 몸을 기대었다.

“……그렇군요. 청유백, 그 사람…제가 피할 곳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나요. 끝까지 알 수 없는 사람이네요.”

“나도 뭔지 모르겠으니 설명이나 진득이 듣고 싶습니다만, 위급한 것 같으니 이유는 나중에 묻겠습니다. 필요한 것 있습니까?”

백소하는 의학의 지식 따위 없었다.

나아가 이 상황이 대체 무슨 상황인지, 그녀는 또 뭣 때문에 저 꼴이 되었는지도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니.

그러니, 그저 물어보는 것이 최선이었다.

어차피 녹지연 그녀의 몸이 아프다면, 그녀 스스로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알 것이다.

녹지연은 힘겹게 입술을 떼며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물을.”

하인을 불렀다가 괜한 일이 생기는 것도 곤란한 일이고, 이곳 사정도 모를 아이들을 보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백소하는 밀려오는 짜증과 피곤함을 억지로 버텨내고는, 탄식과 함께 방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콰아앙!

어마어마한 소리와 함께, 문의 모서리가 백소하의 미간을 강타하며 열어젖혀졌다.

“야! 백소하!! 안에 있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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