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95화 (95/200)

제95화. 이건 또 의외의 정체로군 (5)

“청 공자?”

“…….”

대답이 없자, 바깥에서는 반복적으로 그를 부르는 녹지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한 점은 없었다.

누군가에게 겁박당하는 것처럼 목소리가 떨려오지도 않았고, 목소리의 어조에서 느껴지는 흔들림도 없었다.

그저 평범했다.

…헌데.

그녀가 그리 떠나고 지난 시간이 고작 한 시진이다.

평범하다면, 도리어 그것이야말로 기이한 일이 아니던가.

청유백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천화에게 신호했다.

‘어떻지?’

[연기는 아니니라. 감정은… 더없이 평온하구나.]

감정은 말이지.

서로의 단순한 대답에 복잡한 뜻은 없었다.

그저 단순한 대답이었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청유백은 알았다.

청유백은 녹지연에게로의 대답 대신, 말없이 일어서 문을 열었다.

─끼이익.

“아, 안에 있었군요?”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녹지연 본인의 얼굴.

문을 두드리려는 듯 손을 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녹지연은 청유백을 탓하려는 듯 미묘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이내 표정을 바꾸며 웃었다.

“공자, 왜 이렇게 늦은 거예요?”

“미안하군. 준비가 길었어.”

청유백은 그녀에게 호응하며 웃었다.

누군가에게 웃음이 헤프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 그였지만, 찾아오는 미소를 굳이 정색으로 받을 필요는 없을 테다.

미녀의 눈웃음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아, 그러면….”

청유백의 대답이 퍽 호의적이라고 느꼈던 것일까, 녹지연은 화색이 되어 목소리를 높였다.

감정을 숨길 기색도 없다.

상쾌하다는 듯 본론을 꺼내었다.

“잠시 당신을 뵙고자 하는 분이 계세요. 멀지 않은 곳인데…. 조금만 시간을 내어 주시겠어요?”

“…그건 어렵지 않지.”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미인을 위한 잠깐의 시간 정도는 만들 수 있는 법이라고 말이다.

지금도 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 그다지 바쁘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어렵지 않지만 말이야….”

“네?”

하지만, 글쎄.

청유백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미녀도 좋고, 음주가무도 좋고, 저를 만나고 싶다는 사람에게도 관심이 있으나─

“안내하는 데에 피차 비밀은 필요 없지 않겠나?”

“그게 무슨….”

─콰득!

녹지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녹지연의 얼굴을 한 그것은, 차마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구멍 난 자신의 복부를 내려다보았다.

한순간, 반응할 새도 없이 내질러진 청유백의 손이 복부를 꿰뚫고 있었다.

“컥, 커헉…!”

“어지간하면 속아주려 했다만, 무시도 적당히여야지….”

청유백은 한숨을 내쉬며 그것을 밀쳐냈다.

녹지연의 얼굴로 무슨 말까지 하나 듣는 것도 꽤 재밌는 일이었겠지만, 가짜 따위보다는 진짜의 입으로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이 훨씬 즐거운 일일 테다.

뭐, 어떤 이야기든 말이다.

“하다못해, 그녀가 나를 어찌 부르는지라도 알아보는 노력이라도 들였어야지 않나?”

공자?

공자라니.

너무 예의 바른 표현 아닌가?

호칭이 되었든, 말투가 되었든 간에 하나도 들어맞는 것이 없었다.

‘그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세상에서 저 혼자만 잘난 것 같은 여자가?’

허 참! 그럴 리 없지!

청유백은 코웃음 치며 근처의 그늘로 고개를 돌렸다.

그 와중에도 천화는 무어라 구시렁대며 청유백의 귓가에 병신이니 고자니 하는 말을 속삭여댔지만, 아무튼 깔쌈하게 무시하고는.

“엄살 부리지 마라. 죽을 정도로 찌르지는 않았어. 죽기 직전까지는 아프겠다만.”

그것의 머리칼을 잡아 뜯듯 당기며, 억지로 무릎을 펴 눈높이까지 끌어올렸다.

녹지연의 얼굴을 한 그것.

아니, 상처를 입어 집중이 흐트러진 탓일까.

꽤 닮은꼴이기는 했지만, 방금까지에 비하면 확연하게 생김새가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고통에 신음하며 억지로 입을 열었다.

“미, 미친놈….”

“흐음?”

“그딴 이유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인단 말이냐?”

“그딴 이유라니?”

뭐, 호칭의 문제를 말하는 건가?

청유백은 코웃음 쳤다.

그것도 주효한 이유이기는 했으나, 물론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천화가 넌지시 단서를 주기도 했으며,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기척 자체도 미묘하게 달랐으니까.

그것뿐이랴?

그녀는 녹가의 사람이다.

그리고, 녹가 사람은 전부 각기의 체취가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놈은 아니었지.’

이것은 최근에 안 사실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선천진기를 마기로 물들이고 난 이후, 녹가 사람들을 여럿 만나면서 알았다.

몸이 독기와 마기에 민감해지고, 그것들을 직감적으로 구분할 수 있게 된 이후에 말이다.

녹가의 체취.

청유백은 그것이 녹가의 비전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다름 아닌, 녹가의 독인(毒人)을 만드는 비전.

어릴 적부터 몸에 독을 주입하여, 점차 그 주입량을 늘려가는 방식으로 독의 내성을 기르는 것이다.

뭐, 어려운 방법은 아니다.

이 천하에서 독으로 한 끗발 하는 가문이나 단체들은 대부분 후계를 그리 가르칠 것이다.

독을 배우려면, 독에 강해지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테니까.

허나, 녹가의 독인은 그 방식이 특이했다.

어릴 적에는 가문의 어른들이 검증된 방법으로 독의 내성을 키워 주지만, 열다섯의 나이가 차면 그 이후로는 직접 몸을 바꾸어 나간다.

더 강한 독을 만들면 더 강하게.

재능이 미치지 못한다면, 그저 낮은 곳에서 그치게.

직접 만든 독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높은 경지의 독인까지 이를 수 있다.

그리고 그보다 약한 독은 그 몸에 듣지 않게 되는 것이다.

즉, 자신의 재능과 경쟁으로 자신의 몸을 단련하는 것.

그것이 녹가의 독인이었다.

‘각자의 노력만큼 강해지고, 그 흔적이 몸에 새겨진다.’

그렇기에 청유백이 느끼는 녹가 사람들의 체취는 각자 그 특색이 강렬했다.

그리고 방금의 그 가짜에게서는, 녹지연의 체취가 나지 않았다.

[체취라 하니 조금 미묘한 면이 없잖아 있는 것 같다만….]

청유백은 천화의 말을 대충 흘려 넘기며 웃었다.

알게 뭔가?

입 밖으로 꺼낼 일도 없을 텐데.

그딴 이유냐고 묻는 저놈에게도 굳이 설명해 줄 필요는 없으리라.

청유백은 말을 이었다.

그딴 이유가 아니다.

“그만큼씩이나 되는 이유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혹은 살인귀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청유백을 노려보았다.

찰나에 느껴지는 것은 흐릿한 살기.

청유백은 가당찮다는 듯 내팽개치며 물었다.

“녹가주가 보냈나?”

“…….”

“별로 상관없을 텐데. 마지막 충의를 보일 신념조차 없는 건가?”

딱히 배신도 뭣도 아닐 테다.

녹지연의 모습을 하고 저를 찾아왔고, 여럿도 아니고 혼자만을 보냈다.

그렇다면─그 방식은 가소롭기 짝이 없어도 목적 자체는 진실일 공산이 크다.

누군가가 저를 만나고자 한다.

그리고 녹가의 장녀인 그녀가 ‘그분’이라고 이를 만한 사람.

당연히, 녹가주밖에 없으리라.

이 여자의 목적이 청유백을 녹가주에게로 인도하는 것이라면, 닥치고 죽는 것보다는 그 사실만이라도 말하는 것이 충의의 증명일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통을 씹어내듯 이를 악물며 말을 토해냈다.

“…그렇다. 그분께서… 너를 보고자 하신다.”

“녹가의 장원에서?”

“그래….”

흐음.

가쁘게 숨을 내쉬는 그녀를 버려두고, 청유백은 뒤돌아 머리를 굴렸다.

천화가 문득 물어왔다.

[어찌 할 테냐?]

‘글쎄, 어찌되었든 가 봐야겠지.’

[함정일 가능성은?]

‘감안해야지.’

저쪽에서 반응하는 것을 기다렸고, 이리도 대놓고 와 주지 않았는가.

이 초대를 거절하는 것이야말로 실례일 테다.

설마, 대놓고 저들의 집안에서 청가의 후계를 묻어버릴 정도로 대담하지도 않을 것이고 말이다.

‘가주쯤 되면 평판과 명분에 신경이 쓰일 테지. 나 이상으로.’

지금껏 저들이 보인 비밀스러운 행보와 청유백의 평판을 생각하면, 그저 단순한 대화를 위한 것이라는 경우도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결론을 내린 청유백은 제 방의 근처를 향해 목청을 높였다.

“소혜야!”

청유백이 외치고 몇 초 지나지 않아, 근처에서 빗자루를 두 손에 꼭 쥔 채 고개를 들이미는 소혜가 보였다.

“네, 네! 도련님, 부르셨어요?”

“잠시 외출하마. 녹가에 볼일이 있다. 저녁은 준비할 필요 없으니, 일찍 쉬도록 해라.”

괜한 말은 할 필요 없을 것이다.

총명한 아이니, 만에 하나라도 오래간 돌아오지 않으면 누구에게라도 말을 전할 테다.

소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선을 옮겨 바닥에 쓰러진 여인을 향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 분은….”

상처를 손바닥으로 틀어막고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이미 바닥을 적신 피의 양이 심상치 않았다.

청유백은 대충 대꾸했다.

“적당히 청가 무인들한테 넘기든가 해라. 알아서들 하겠지.”

* * *

녹가의 장원은 육대가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교 본산에서 멀리 떨어진 곳, 첩첩산중의 한가운데.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화전민의 마을인 듯 보이는 장소였다.

아침이 되면 사람들이 나와 밭을 일구고, 새참을 먹고, 아이들은 개구쟁이처럼 산길을 달리는.

그런 평범한 마을.

녹가의 장원은 그런 마을의 한가운데에 위치했다.

물론, 겉으로의 생활만 평범하지 실제로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재배하는 것은 벼가 아닌 온갖 종류의 약초와 독초.

개중에는 들길에 나 있는 흔한 것도, 심마니에게서도 구할 수 없는 귀한 것도 몇몇 있었지만, 결국은 전부 같았다.

그 마을 전체가 녹가의 약초밭인 셈이니, 녹가 사람의 손에 돌아간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봐! 오늘은 이만 하자고!”

청유백이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해가 기울어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고, 아이들은 어머니의 부름에 작은 발로 길을 내달리는 광경.

모르긴 몰라도, 이곳의 농민들은 마교의 비호를 받는 사람들 중에서도 퍽 유복한 생활을 하는 편이었다.

녹가의 직접적인 비호 아래 있으니 배곯을 일도 없고, 외부의 분쟁에 얽혀들 일도 없으니까.

표면상으로는, 이 녹의 마을은 어떠한 문제도 없었다.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시지요. 곧 가주님을 모셔올 겝니다.”

백발이 성성한 수염의 노인이 청유백을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청유백은 별다른 의심 없이 녹가의 장원에 발을 디뎠다.

오히려, 청유백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자연스러운 환대를 받았다.

청유백은 안내받은 자리에 앉아 주변을 돌아보았다.

‘함정은 없는가.’

방은 꽤 작은 편이었다.

녹가는 그 마을의 크기 탓에 정작 장원이 작은 편이었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작았다.

분명 고급지지만, 딱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응대하기 위한 방.

그 이외의 목적이 보이지 않는 장소였다.

의외라고 한다면, 어떤 진법이나 장치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일까.

천화는 덤덤하게 말했다.

[잠복의 기척도 없구나. 진실로 대화만을 위한 것일는지.]

‘뭐, 곧 알 수 있지 않겠나.’

청유백은 고개를 들어 이곳으로 자신을 안내한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청유백은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그는 제 주인을 기다리는지 문 옆에 서서 그저 맑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청유백은 문득 입을 열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그리 길지는 않을 겝니다. 만남을 기다리고 계시는 듯 했으니까요.”

“흐음.”

“혹여, 심심하시다면….”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끌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일까.

청유백이 고개를 까딱이자, 노인은 그제야 말을 이었다.

“기다리시는 동안, 이 노대와 대화라도 나누지 않으시겠습니까?”

대화?

다소 생소한 제안이었다.

본디 사용인은 손님의 질문에만 대답할 뿐, 먼저 무언가를 제안하는 것은 결코 미덕이라 부를 수 없는 행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행동은 곧, 이 노인이 녹가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게 했다.

시종이라면, 아마 내총관 정도나 될까.

그 정도는 되어야 손님에게 멋대로 말을 건네고서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위치일 테다.

청유백이 흥미롭다는 듯 목을 울리자, 노인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무언가 의문이 있으시다면 뭐든 물어보시지요.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좋습니다. 거짓 없이 답해 드릴 터이니….”

“무엇이든 상관없습니까?”

“끌끌, 물론이지요.”

노인은 당연하다는 듯 웃었다.

뭐 그리 대단한 질문을 하겠느냐고 비웃는 듯한 웃음으로도 보였다.

하지만 청유백은 화내지 않았다.

도리어, 눈빛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모시는 신께 본교의 율법을 걸고, 무엇이든?”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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