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이건 또 의외의 정체로군 (4)
어둡다.
지독하다.
그리고, 강렬하다.
이 장소, 이 침침한 비동에 대한 가장 명확한 첫인상이리라.
그 어떤 이가 들어와도 그 인상에서 크게 벗어난 평가를 늘어놓지는 못하겠지만, 사내는 이곳에 퍽 익숙해질 만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이곳의 출입이 꺼려졌다.
“가주님, 연통이 도착했습니다.”
녹종건은 녹운룡의 심부름꾼이었다.
워낙 주변에 사람을 두지 않는 녹가주였으니, 그를 제외하면 이 공간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태생이 서출인 그는 처음에는 마냥 출세라고 생각하며 뭐든 따랐지만….
“…가주님?”
몇 달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이 끔찍한 마굴의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부귀영화고 권력이고 나발이고 간에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몇 번이고 일었다.
녹가의 장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곳.
버려진 옛 녹가의 충굴을 개조하여 만들어낸 가주의 연구실은 허락받은 몇 명이 아니면 접근조차 금지된 장소였다.
‘어디 계신 거지?’
발끝에서부터 느껴지는, 벌레들의 시체를 부수는 감각.
결코 산뜻하지는 않은 걸음걸이로 녹종건은 어둠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어둠의 중심에서.
……!!
무언가가, 뒤틀린 안광을 뿜어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히, 히익…!”
그것은 어느 정도는 인간의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팔, 다리, 그리고 흉측하게 꿈틀거리지만 형태는 알아볼 수 있는 머리.
전신의 피부 아래에서 기묘한 생명체가 꿈틀거리고 있음이 눈에 보였다.
사지 육신은 전부 멀쩡하지만, 그 인간의 거죽 아래에 있는 것이 사람의 것이냐고 묻는다면.
“가, 가주님…?”
녹종건은 결코 긍정할 자신이 없었다.
인간?
저것을 인간이라고 불러도 될까?
그러던 찰나, 그의 피부 아래에서 기어 다니던 무언가가 점차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흉측하게 꿈틀거리던 피부는 점차 잦아들어 고요해졌고, 얼굴도 평범하게 돌아와 사람의 형태를 취했다.
방금까지는, 그를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일견 공포에 질릴 법한 모습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녹가주, 녹운룡이었다.
“대답이 없을 때는 밖에서 기다리라. 몇 번이고 말했을 텐데.”
“소, 송구합니다! 허나, 급히 전해야 할 사안인 것 같아….”
“말해라. 네가 그리 말할 정도라면 퍽 들을 만한 이야기겠지.”
목소리에 서린 위압.
녹종건은 당장이라도 혼절하고픈 마음을 억지로 붙잡고 있었지만, 후들거리는 다리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방금 훈의 시험이 끝났습니다. 헌데, 그것이….”
“그것이?”
녹종건은 침을 꿀꺽 삼켰다.
녹운룡이 안광을 빛내며 재촉하듯 압박했지만, 쉬이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야, 솔직히 말한다고 해도 당장에 제 목이 날아갈 것 같았으니까.
허나 어쩌겠는가.
이대로 뜸이나 들여 봐야 가주의 화만 돋울 뿐일 테다.
“우승을, 청유백이 취했다 합니다.”
“…….”
흐음.
녹운룡은 말없이 어둠 속으로 다시 나아가, 벽 끝에 위치한 탁상에 손을 올렸다.
그곳에 있는 것은 지도.
어지럽게, 의미를 알 수 없는 수십 개의 선이 이어져 표시된 지도였다.
녹운룡은 아무 말이 없었으나, 그것이 계속 말해 보라는 암묵적인 신호임을 녹종건은 알았다.
그는 가쁘게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청유백이 만마서고의 책을 찾았었다고 합니다. 불가능할 것이라 사료되었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해내었다.
그리 말해야만 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임을 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두 가지 중 하나만을 이룰 수 있게 짜 놓았거늘, 아무렇지 않게 두 가지를 전부 취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코 그것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기실, 청유백의 기이한 행보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청유백이 그리 비밀스럽게 움직인 것도 아니고, 고작 그 정도 움직임을 알아채지 못하는 가문이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 누구도 그것을 따라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비효율적이니까.
‘일부만 가르치고, 일부는 밖으로 돌려 책을 찾아내게 한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입으로 뱉는다고 다 그럴싸한 계획이 아니란 말이다.
훈의 시험의 구조는 단순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
안전한 길이냐, 위험한 길이냐를 선택하는 시험과도 같았다.
책을 찾아내거나.
대리전을 승리하거나.
당연히 후자가 더 높은 곳에 오르겠지만, 어중간한 결과를 낸다면 전자를 이루는 것만도 못한 위치로 전락하게 된다.
즉, 결과는 성공 혹은 실패 뿐.
만마서고를 마지막 한 권만 남기고 전부 뒤졌다고 부분점수가 주어지는 일도 없고, 아깝게 패배했다고 부분점수가 주어지는 일도 없다.
무조건 성취.
그것만이 유일한 조건이었다.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는 한 마리도 잡기 힘든 것이 당연한 실정이었을 테지.’
헌데, 청유백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 둘을 전부 이루었다.
책을 찾아낸 것은 둘째치더라도, 그가 길러낸 아이들은 분명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도 빼어난 실력을 지니지 않았던가.
그것은 운이 아니었다.
반드시 할 수 있다는 정확한 판단.
그리고, 확신.
“청유백. 청유백이라….”
녹운룡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불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그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분노도, 좌절도 아니었다.
분명 당장에라도 제 목을 날릴 것이라고 생각한 녹종건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지옥과도 같은 침묵이 얼마나 흘렀을까.
“…은 어디 있나.”
“예?”
녹운룡은 낮게 읊조렸다.
두 번은 다시 말하지 않는다는 듯이, 고요하게 목소리를 내리깔며.
짙게, 명령했다.
“내 딸을 불러라.”
* * *
“흐음….”
청유백은 녹지연이 쥐여 주고 사라진 종잇조각을 몇 번이고 접고 펴기를 반복하며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무렇게나 찢어진 모양의 종잇조각은 한눈에 봐도 급하게 종이를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었음이 보였고, 그것에 적힌 글자의 필체 또한 몹시 급박했다.
쪽지에 적힌 글자는 단 두 글자.
합밀(哈密).
의도가 너무나도 명확하여,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글자였다.
설령 청유백이 그것에 대해 몰랐다고 하더라도, 조금만 조사한다면─
아니, 그럴 필요도 없이 백소하에게 이것을 건네기만 하더라도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정도의 정보 아니었던가.
뜻은 명확할 테다.
곧, 아마도 당장 내일이라도 있을 다음 시험의 선택에서 합밀을 택하라.
그 말일 터인데.
“…최소한, 녹지연이 고독의 주인은 아니겠군.”
[하지만 모종의 연관은 있을 게다. 본인은 아닐지언정, 저리 쫓길 정도라면 관계자이긴 할 테지.]
미치지 않고서야,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를 이리 쥐여 줄 리도 없고.
그녀가 범인이라면, 지금까지의 행적이 이해가 안 되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저 감정은 진짜로구나.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어. 고통, 인내, 그리고….]
천화가 속삭였다.
말끝을 끌며, 그녀에게서 느끼고 포착해낸 것을 말이다.
[…공포.]
그것은 영혼의 냄새다.
그저 영(靈)으로서 존재하는 천화이기에 느낄 수 있는 것.
청유백은 그저 직감할 뿐이지만, 천화는 더욱 명확한 감정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천화가 속삭인 녹지연의 감정은 결코 기만이 아니었다.
청유백 또한 같은 의견이었다.
저것이 연기라면 무림인이 아니라 당장 어디의 가극단에라도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청유백은 허탈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가, 인데.”
썩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증거들은 늘어가지만, 하나같이 전부 심증뿐.
무언가 확신을 줄 만한 확증이 없었다.
도대체 범인의 목적이 무엇인지, 녹지연은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무엇 하나, 알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은가.
문득, 천화가 말했다.
[그 아이도 고독이 심어져 부려진다는 가능성은 없겠느냐?]
‘설마. 무슨 말도 안 되는….’
고독은 청유백의 대에도 있었다.
즉, 자신이라고 그것을 기용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청유백 또한 그것을 써 봤으니 알고, 장점도 단점도 어떠한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고독은 버림말한테나 쓰는 수다.’
그야말로 언제 죽든 상관없고, 끝끝내 이용한 마지막에는 그저 죽여버리기 위한 수단.
그것이 바로 고독이었다.
그 생산과 관리의 가성비가 워낙에 나빠 청유백은 선호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결코 중요 요인에게는 사용하지 않았다.
고독이라는 것이 결국에는 생물인지라 목적과는 다르게 발작할 때도 간혹 있었고,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중요 요인이 급사해 버리면 안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백 년이나 지났다. 지금의 고독이 네가 알던 것과 같으리라 장담할 수 있느냐?]
‘…없지.’
지금의 고독이 월등히 발전했을 수도 있고, 실제로 배후자가 녹지연의 가치를 그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고.
하지만 만약에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모든 일의 배후에 있는 존재는 한 사람으로 특정할 수 있게 된다.
몹시도, 비현실적인 추측이다만.
그녀를 통제할 수 있고, 그녀가 거부할 수 없는 위치의 인간이라면─
당연히 한 명밖에 없으므로.
‘녹가주…라.’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믿기지 않는 경우였다.
말이 되지 않으니까.
그가 굳이 고독이라는 수를 이용해가면서까지 이 시험의 결과를 조작하고, 적철진의 우승을 바랄 이유가 무어 있겠는가.
‘굳이 조작을 한다면야 제 가문의 자식들을 우승시키려 하겠지.’
뭐, 적가에 이어 보장되는 2인자의 자리를 노리기라도 하겠는가?
하, 헛소리!
고독을 심어 승부를 조작할 정도의 뒷공작을 펼치고, 심지어 그 사실이 새어나가지도 못하게 할 정도의 통제력이 있는 인간이?
‘그만한 수고를 들이고서 2인자로 만족할 리가 없지.’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인간이라는 종은 생각보다도 욕망에 충실하여, 제 능력에 걸맞은 지위를 누리고, 호사를 부리고 싶어 한다.
청유백은 장담할 수 있었다.
지난 수십 번의 생에서, 몇 번이고 새기듯이 되뇐 사실이니까.
아무튼 그렇게나 답이 없는 와중, 천화가 문득 말했다.
[…적가의 후계에게, 적철진이라는 아이에게 고독을 심었다는 가능성은 없겠느냐?]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만.’
뭐, 아귀는 맞는다.
그렇다면 녹가가 직접적인 승리를 취하지 않는 이유가 어느 정도 설명이 되기는 하리라.
하지만.
‘그걸 어떻게 할 수 있겠나? 귀아대의 어린아이 따위도 아니고, 이미 일류 고수에… 뒷배로는 적가 전체가 있는데.’
고독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발각되기 쉬운 방법이다.
은밀하게 쓰기보다는 겁박에 그 용도가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언제든 네 목숨을 끊을 수 있고, 뒤지고 싶지 않으면 처신 잘 해라’의 용도인 셈이다.
애시당초, 고수가 될수록 제 몸의 변화에 민감한 법인데.
대놓고 이질적인 벌레가 몸에 들어왔거늘, 어찌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겠는가.
헌데 적철진이 고독을 눈치챈다면, 그것은 당연히 적가 전체와의 전쟁이 될 테고.
자연히, 그 위험 부담이 과할 정도로 거대해지게 된다.
‘백 번 양보해서 들키지 않을 정도로 기술이 발전해서, 고독이 들키지 않는다고 쳐도….’
그런 기술이 있다면, 제 자식을 우승시키지 왜 적철진을 밀어주겠는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어떻게 생각해도 녹가주가 그러할 이유가 없었다.
[으음….]
천화는 저도 모르겠다는 듯 신음했다.
두 사람 모두 누군가와의 수 싸움이라면 기쁘게 받을 정도로 정통이 나 있었음에도, 이번의 경우에는 이해 못할 일로 가득했다.
‘조금 더 기다리는 것이 좋겠지.’
어차피 곧이다.
범인은 어떻게든 모종의 접근을 해올 것이다.
오늘이 넘어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따로 알아볼 방법을 강구해야 하겠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이미 청유백은 한 수를 던졌고, 다음은 저 쪽의 차례.
어떤 방법으로든 응수하리라.
그리고, 그때.
─똑똑똑.
작은 인기척이 문을 두드렸다.
빠르게, 하지만 다급하지는 않게.
“청 공자?”
그리고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청유백을 불렀다.
“잠시… 저와 함께 가주시겠어요?”
녹지연의 목소리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