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93화 (93/200)

제93화. 이건 또 의외의 정체로군 (3)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청유백이 이겼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녹 소저?”

“…….”

귓가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다시금,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아니, 아니다. 고요했다.

귓구멍을 때려야 했을 우레와도 같은 함성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당혹과 불안이 차지했다.

동시에, 감정이 흘러들어왔다.

그것은 혼란.

그리고, 기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이 거론되고,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 혹은 알지 못했던 새로운 국면인지─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 찰나에 스쳐가는 감정이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일 테다.

─잘못 말한 것 아냐?

─승자가 청유백이라고? 어째서?

─뭔가 착오가 있는 것이겠지.

그것이 근본적인 생각일 테다.

허나, 그 생각의 한켠에는.

─설마 진짜?

─허! 청가의 아이가….

─그게 진짜라면, 이번 투자는….

만에 하나라도 있을법한, 다른 미래를 그려내게 하는 기대가 그 기척을 드러내고 있었다.

녹지연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느꼈고, 그것과 동일하게 생각했다.

“…….”

녹지연은 흑색 반지를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여전히 벌레의 고동과 몸에 흐르는 독기가 느껴졌지만, 이 이상 나아갈 필요는 없었다.

이 혼란을 보라.

‘생각지도 못한 전개지만….’

녹가주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적가는 첫 번째 선택권을 얻지 못했고, 청유백은 합밀로 가는 권리를 빼앗을 수 있으리라.

그리고 적철진이 합밀로 가지 못한다면, 그의 계획은 완성되지 않는다.

‘청유백…. 전부 알고 계획한 건가?’

결과적으로 그는 녹가주의 계획을 막을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그것이 우연인지, 아니면 계획된 필연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런 형태로 끼어들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알고 있다면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

제 아이들에게 고독이 심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니, 고독이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는 알고 있는가?

그것들이 어떻게 사용되며, 나아가 녹가주는 무엇을 획책하고 있는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 이 모든 것이 우연일 가능성도 있다.

‘그 수수께끼로 온 몸을 치장한 사람인만큼, 분명 뭔가 있겠지만….’

아직 녹가주의 계획을 막아낸 것은 아니다.

그 기회를 얻었을 뿐이다.

‘청유백을 만나야만 해.’

시간이 없다.

이 소식이 가주에게 닿기 전에, 청유백에게 언질해야만 했다.

“노, 녹 소저? 어딜 가는가!”

녹지연은 순식간에 몸을 날려 그 장소를 빠져나갔다.

적우각이 식겁하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지만, 미처 손을 뻗을 새도 없이 그녀는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허 참. 대체 어인 일인지.”

적우각은 그녀가 방금까지 기대어 있었던 장소를 바라보며, 허탈하게 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 * *

─탁.

─탁.

다시, 탁.

고요 속에서, 일정한 주기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대략 한 자 크기나 될 법한 나무 판 위에서, 상아로 만들어진 장기짝이 이리저리 오갔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것을 두는 사람은 둘이 아닌 한 사람.

혼자서 이리저리 말을 움직이던 청유백은 문득 말을 하나 옮기고 입을 열었다.

“장군.”

[상(象)을 좌하단으로. 멍군.]

“흐음….”

아, 이런 묘수가.

청유백은 인상을 찌푸리며 장기판을 뚫어지듯 노려보았다.

슬슬 전적이 14전 14패에 접어들 무렵, 남이 보기에는 자기 자신에게 열네 번이나 패배한 청유백은 어느덧 혼자 놀기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슬슬 한 번쯤 이길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만, 방금 딱 회심의 수가 막혔다.

“흐으으음….”

청유백은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근심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문득 입을 열었다.

“슬슬 연통이 올 때가 되었는데….”

[헛소리 하지 말고 고개나 돌리거라. 장기 두는 사람 어디 갔느냐?]

“한 수만 물리자.”

아, 방금 거 진짜 아쉬웠는데.

이번엔 분명히 이길 수 있었는데.

청유백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천화는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살풋 웃으며 대답했다.

[친애하고 경애하는 위대하신 선대 교주께 다시는 장기로 깝치지 않겠습니다. 세 번 복창.]

“시부럴, 그냥 때려치워!”

[15전 15승이로구나! 아아, 지능이 빈약한 아이로고….]

기억이 없다면서 장기는 대체 뭘로 두는 거지 싶다만, 그리 구차하게 굴어 봤자 없는 승리가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청유백은 구태여 비굴하게 패배 횟수를 늘리고 싶은 취미는 없었으므로─엄밀히 말하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방금 깨달았다─청유백은 장기판을 옆으로 밀어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품에서 서책 몇 권을 꺼내어 번갈아 표지를 살폈다.

하나는 몹시 낡은, 금방이라도 뜯어져 나갈 것만 같은 표지를 지닌 서책이었다.

불구대천심공.

더 이상 아이들을 가르칠 이유도 없고, 애초에 그저 구색 맞추기 용으로 찾았던 물건이었다.

곧 만마서고에 돌려놓으러 갈 필요가 있으리라.

‘아이들은 지금쯤 뭘 할는지.’

[적당히 휴식을 취하고 있지 않겠느냐. 아니면 뭐, 일귀의 곁에 있을 수도 있겠지.]

시험이 끝난 이상, 갑작스레 그 녀석들의 고독이 발동할 일은 없을 것이다.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다만, 최소한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곧 청유백 자신이 두 번째 시험의 우승을 차지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그것이 범인의 귀에 들어가면 화풀이로 괜한 짓을 벌일 수도 있겠다만….

[괜찮을 게다. 불필요한 이목을 끌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게야.]

만약의 의심조차 피하기 위해, 고작 귀아대의 아이에게 귀하디귀한 개인실을 내준 실정 아니던가.

이제와 굳이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는 않을 터였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니 결국에는 범인을 찾아내야겠지만 말이다.

‘어차피 곧 반응이 올 테지.’

청유백은 그리 말하며 나머지 두 권의 서책을 나란히 꺼내었다.

생김새도, 제조 시기도 전혀 달라 보이는 두 책.

하지만 새것으로 보이는 한 권에는 제목이 없었으며, 몹시 낡은 나머지 한 권에는 용사비등(龍蛇飛騰)한 필체로 간결한 제목이 쓰여 있었다.

예기(禮器).

오늘로부터 보름쯤 전에, 만마서고에서 아이들이 간추린 책들 중에서 찾아낸 한 권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예기의 31편.

옛 성리학자의 말에 따라 다르게 이르면─

이런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중용(中庸).

생긴 것은 전혀 다르게 생긴 두 책이었지만, 어찌 서책을 외견으로 판단하겠는가.

청유백은 그 두 개의 책을 동시에 펼쳤고, 놀랍게도 그 책의 내용은 동일했다.

제목이 비어 있는 책 쪽에는 몇몇 문자가 대놓고 빠져 있었지만, 그 자간과 행렬까지 완벽하게 들어맞아 의심할 여지도 없이 같은 서책임을 알 수 있었다.

‘설마 적철진도 책을 찾아낸 것은 아니겠지?’

[글쎄다. 최소한… 우리가 만마서고에 있을 때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하지 않았더냐.]

‘분명 그랬다만.’

지금의 심경이 백이십 할 확신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을 긍정하는 것은 거짓말이 되리라.

솔직히 말하면, 반쯤은 도박이었다.

시험에서 제시하는 문제는 둘.

하나는 책의 제목을 찾아내는 것.

둘은 대리전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첫 문제의 승점이 오십이고, 대리전의 승리는 일 승에 이십.

모든 전투에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팔십 점에 그치는 것이다.

첫 문제의 승점이 높은 것이야, 무력의 가르침으로만 판단하면 무가인 청가와 적가가 너무 유리하리라 생각되니 당연한 것이었겠지만.

애초에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만든 문제에서 둘 전부를 성취했으니, 승리는 자연히 따라오는 게 당연하리라.

‘결국 내 승점은 총합 구십. 일단 적철진 놈이 책을 찾지 못했다면 놈보다는 높겠지.’

그것에서 창안하여 아이들을 기권시키기는 했다.

하지만 말했듯, 반쯤 도박이었다.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적철진 놈이 책을 찾지 못했다고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으니까.

천화는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그때에는 다른 방법을 강구하면 될 일이 아니더냐. …지금도 다섯 가지 생각을 동시에 견주고 있으면서, 뭘 더 고민하려 하느냐?]

‘단순한 노파심으로 그치면 좋겠다만….’

청유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천화가 새파랗게 어린노무 새끼가 무슨 말을 하느냐고 타박했지만, 알 게 뭔가.

청유백은 가볍게 무시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손님이 오는군.”

청유백은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분명 곧 소식을 전할 전령이 오리라고는 생각하고 있기는 했으나, 그보다도 빨리 다른 손님이 먼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기척은 옅었다.

집중해서 찾고 있지 않는다면 순식간에 감각의 바깥으로 도망쳐 버릴 듯이 흐릿했다.

하지만 청유백은 이 기척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다름 아닌, 만마서고의 칠 층.

그곳에 있던, 결국에는 놓쳐버린 불청객의 기척이다.

아마도 녹가의 사람.

그리고 지금 그 고독의 주인과도 연관이 있는 사람일 테다.

천화는 우습다는 듯 말했다.

[네가 우승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겠구나. 전언을 기다릴 필요도 없겠어.]

‘그건 그렇겠군.’

청유백이 기다리고 있던 것은 자신이 승리했노라고 알리는 전령이었다.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고 있던 것은, 적철진 또한 책을 찾았을 것이라는 만약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독의 관계자가 이리도 뻔히 접근한다는 것은.

도박이 들어맞았다.

그리 생각해도 무리가 아닐 테다.

‘하지만 저게 범인과 관계된 인물이라면…. 너무 빠르지 않나?’

곧 반응이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기는 했다.

어떤 방법으로든 말이다.

물리적인 습격 형태의 복수일 수도 있겠고, 마교의 높은 자리를 차지한 놈이라면 어떻게든 정치적 압박을 가해 올 공산도 크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간에, 지금 이것은….

지나치게 빠르다.

방금 결과가 나왔다고 하더라도, 계획을 온전히 수립할 시간조차 아직 지나지 않았다.

그래, 지금 이리 접근한다는 것은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은….’

그때.

─파박!

담장 가까운 곳의 그림자에서 하나의 인영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검은 외투와 죽립으로 전신을 감춘 왜소한 체격의 그림자.

크다 못해 전신을 두르는 외투와, 얼굴 전체를 가리는 죽립을 쓰고 부단히도 자신을 감추려 노력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청유백.”

그 숨으려는 대상이 청유백은 아닌 듯 보였다.

흐릿한 목소리를 드러내자마자, 청유백은 그가─아니,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으므로.

“이건 또 의외의 정체로군.”

일순간 청유백의 머리에 수십 가지 가능성이 교차했다.

기실, 칠 층에 있던 자가 녹가의 사람임은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고독의 존재를 확인한 시점에서, 칠 층에서 열람되었던 책들의 단서는 너무나도 명확하게 고독의 관계자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녹지연이라.’

청유백은 당혹을 숨긴 채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고려는 했던 가능성이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가능성이 없어 사실상 제외했던 가능성이다.

그녀가 고독의 관계자라면 왜 굳이 지금껏 저를 도와줬으며─

만일 자신을 적대하지 않는다면, 왜 제게서 도망갔단 말인가?

청유백이 그 의문을 입에 올리기도 전에, 녹지연은 주변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오래 대화할 수도 없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어요.”

녹지연은 온몸을 감싼 외투 너머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로 무언가에 쫓기는 것일까.

혹은, 저것이 공포 이외의 것.

가령─통증을 참고 있는 것일까.

청유백은 알 수 없었다.

그저 손을 내뻗어 녹지연의 손을 맞잡고는, 차가운 살결의 온도 너머로 작은 종잇조각을 억지로 건네받을 뿐이었다.

녹지연은 이를 악물며 숨을 삼키고는, 가까스로 청유백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조심해요. 그 누구의 부름에도 응하지 말아요. 설령 제가 다시 온다고 해도, 저를 따라 나서서는 안 돼요.”

“그건 명령인가?”

“……….”

녹지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청유백의 심술궂은 대답에 당황한 것일까, 혹은 실제로 자신이 그런 식으로 말했음을 돌이킨 것일까.

청유백은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녹지연은 청유백을 올려다보며, 옅은 숨을 내쉬었다.

“…부탁이에요.”

찰나의 시간.

청유백이 다시 한번 눈을 감고, 다시금 떠 그녀를 바라볼 정도의 순간.

이미 그녀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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