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92화 (92/200)

제92화. 이건 또 의외의 정체로군 (2)

“한산하군….”

적우각은 팔짱을 낀 채, 어제에 비해 눈에 띄게 한산해진 객석을 돌아보았다.

대충 보아하니, 대부분 외부에서 온 듯한 인물들이었다.

마교의 정세에 눈 어둡기도 하거니와, 이왕 예를 표하러 온 것 끝까지 제대로 하려는 것일 테다.

‘…소문에 밝은 놈들은 오지 않은 것일 테지.’

마교를 잘 알고, 천마지회에 참여한 후계자들을 잘 아는 자들.

특히나 각 가문의 장로나, 각 병대를 이끄는 대주급의 인원이 다수 불참한 것이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유? 그야 단순하다.

어제의 싸움에서 청유백이 시시할 정도로 가벼이 기권을 선언하고, 가장 중요한 결투라 할 수 있었던 적철진과 청명휘의 싸움 또한 이미 어제 끝나버렸으니 말이다.

결과는, 청명휘의 아이들이 갑작스런 복통을 호소하며 제 실력을 내지도 못한 채 패배.

뭐, 그렇다 보니….

적영 대 적철진.

이라는, 퍽 재미없는 결말이 완성되어 버린 것이었다.

적가의 내전인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결말이 너무나도 뻔한 승부였으니.

당장 적가의 사람들조차도 무의미하다 생각하여 다수가 참관하지 않게 되었다.

당장 이곳에 있는 자신, 적우각조차도 거진 의무감 탓에 참석해 있는 것이었으니, 굳이 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마지막까지 봐 주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닐진대, 어르신들도 참.’

적우각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다른 배에서 났다고는 하나, 엄연히 피가 이어진 혈육.

더 훌륭한 이가 있다 하여, 걸었던기대를 쉽게 거두어서야 되겠는가.

헌데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뒤편에서 들려왔다.

“한가한가 보네요? 이런 걸 다 보러 오고 말이죠.”

“흠.”

적우각은 자연스레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만남을 예상하고 온 것은 아니었으나, 갑작스러운 우연이 손을 들어 인사한다면, 응해주는 것이 도리이리라.

“하하! 내가 뭐 할 일이 있겠나. 어차피 이 시험이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한가할 텐데 말이야!”

“으음, 글쎄요…. 다음 시험의 준비라든가?”

“녹 소저. 세상은 걱정거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즐길 거리 또한 충분히 많다네. 세상 모든 사람이 그대처럼 매일매일 걱정거리를 달고 살지는 않아!”

뭐, 좋게 말하면 철두철미하다고 이를 수도 있을 테지만, 적우각은 녹지연이 사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의 삶이니만큼 그것에 대해 겉으로 왈가왈부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지나치게 매일매일이 팍팍해 보인단 말이지.’

천마의 자리를 노리려고 무리하는 것이면 납득이라도 하겠다만, 그녀는 천마지회에는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지 않던가.

흠.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난다던가!

분명, 무언가 모종의 문제가 있음이 분명할 테다.

그리고 그렇다면, 해야 할 말은 당연히 정해져 있으리라!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면 내게 말하게. 부족하나마, 이 불초 적우각이 돕겠다고 약조하지.”

“…후후, 필요해지면요.”

적우각의 말에 녹지연은 피식 미소를 보였다.

그렇게 잠시간 침묵이 이어지다가, 문득 녹지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쨌든 축하해요. 적가는 이걸로 당면한 큰 문제는 해결하게 되겠군요.”

“뭐, 그리 되겠지.”

적영과 적철진의 싸움.

즉, 적가와 적가의 내전이다.

이 싸움의 승자가 만에 하나 적영이 된다 할지라도, 어쨌든 세 번째 시험의 선점권은 적가에게 돌아가는 셈이다.

적영이 가문의 뜻을 거스를 리는 없으니, 적철진은 결국 가고 싶은 곳을 자유로이 선정할 수 있게 될 터.

그리 된다면, 적가는 근래 있었던 가장 큰 고민거리를 해결하게 되는 셈이었다.

“합밀에서 나오는 중원의 정보와 군자금은 꽤나….”

…어라?

아무 생각 없이 말을 잇던 적우각은, 어느덧 제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아니, 이야기 자체는 큰 문제가 없다. 가문의 사람과라면 말이다.

대외비인 이야기지만, 가문 내에서는 꽤 중대한 사안이니 그에 관한 논의는 자연스러울 테다.

헌데….

“…어, 어찌 알고 있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당신처럼 오늘만 살지는 않는답니다.”

“헛, 한 방 먹었구만 그래.”

저와 똑같은 말로 쏘아붙이는 녹지연에게, 적우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서투른 거짓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테다. 적우각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뭐, 그대의 말이 맞아. 형님이 이기든, 영아가 이기든…. 아마 형님을 합밀로 보내어 그곳을 정리하라 하겠지.”

마교의 영향력이 줄어 멀리 떨어진 곳의 세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졌다고는 하지만, 어려워도 해야만 하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는 법이다.

그곳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확고한 무력을 보이면서도 마교 본산에서 그곳을 주시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낼 필요가 있었고, 그 역에 가장 알맞은 것은 단연 적철진이었다.

“헌데 그것은 왜? 적가를 염려해 봤자 나올 것은 없을 텐데.”

“아뇨, 그냥… 글쎄요. 별 이유 없어요. 문득 떠올랐을 뿐이에요.”

녹지연은 고개를 돌려 결투장의 아래를 쳐다보았다.

그저 그렇게 말을 돌렸을 뿐이지만, 적우각은 추궁하지 않았다.

그런 요령은 없을뿐더러─

그녀가, 이대로 대화를 끝내지는 않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이 대치하며 병장기를 뽑아드는 것이 보일 때 즈음.

녹지연이 입을 열었다.

“…질문이 있어요, 적 공자.”

“흠?”

“당신이 지난 석 달…. 그리 길러낸 아이들이 하루아침에 죽는다면, 원인도 알 수 없고, 흉수조차 알 수 없는 죽음을 당한다면….”

“거, 말이 좀 무섭구만.”

적우각은 너스레를 떨며 장난스레 넘기려 했지만, 녹지연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적우각을 바라보며, 사뭇 진지한 눈으로 질문했다.

“그러면, 당신은 어떨 것 같나요?”

“무슨 질문이 그런가? 끔찍하잖나!”

“대답해 주시면 고맙겠는데요.”

으음.

으으음!

적우각은 눈을 감고 골똘히 고개를 기울였지만, 고민에 찬 신음만을 반복할 뿐 이렇다 할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녹지연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고, 한참 후에야 적우각은 콧김을 내뿜으며 답했다.

“으음! 글쎄. 대답할 말이 궁하군.”

그렇게나 긴 시간을 고민한 후에 내놓은 답이 그것이란 말인가.

녹지연은 퍽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다시금 물었다.

“어째서죠?”

“너무도 당연한 것을 물으니 역으로 마땅히 대답할 것이 없음이야.”

“말인즉슨….”

“모든 일에 눈에는 눈이라며 반응할 수는 없는 법 아니겠나. 주체가 명확하다면 모를까, 원인조차 알 수 없는 범인을 쫓을 정도로 나는 다식하지 않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명확히 구분한다.

그리고 할 수 없다면, 처음부터 안 하는 것 또한 하나의 방법이다.

그 과정에서, 다른 것에 시간을 소모하면 이룰 수 있는 것을 이루지 못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적우각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대가 원하는 답은 이것이 아니겠지? 아마 아닐 걸세. 때문에 다른 것을 생각해 보았지만….”

녹지연은 침묵했다.

그 표정에는 무언가 많은 저의가 담겨 있는 듯 보였지만, 적우각으로서는 그것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저, 긍정으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답지 않게 고민 좀 해 봐도, 역시 전혀 모르겠군. 미안허이.”

적우각은 정치가가 아니었다.

마교라는 거대한 단체에서, 그에게 주어진 책무는 그저 무력뿐이었다.

물론 그저 멍청하게 수련만 반복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밑에서 꾸며지는 술수나 공작, 협잡질 따위를 막아내는 방법은 얼마든지 안다.

지금껏 헤쳐온 수라장이 있고, 보아온 지옥도가 있으니, 당연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것을 안다 한들, 그 협잡질의 효용과 공포를 안다 한들, 자신이 그 수를 택하는 쪽의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아집이라면 아집이겠다만….’

지금껏 그리 살아 왔고, 앞으로도 그리 살아갈 테다.

그렇기에, 자신은 다른 방법을 내놓을 수가 없다.

이 정도면 대답이 되었을까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만족하지 못한 성 싶었다.

“좋아요. 그러면….”

녹지연은 팔을 뻗어, 저 아래를 가리켰다.

손가락의 끝, 그 끝에 가리키고 있는 것은 무대 위의 아이들이었다.

특정한 누구를 가리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적영이든, 적철진이든, 그저 저 위에 서 있는 아이들을 가리켰다.

“갑자기 저 위에 서 있는 아이들이 쓰러져 죽는다면, 적가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내가 아니라, 우리 가문이 말인가?”

끄덕.

녹지연은 아무렇지 않게 긍정했다.

적우각은 허, 하고 헛숨을 몇 번이고 들이쉬며 허탈하게 웃었다.

“…허, 정말이지. 그대는 언제나 알기 힘든 여인이었네만, 오늘은 한 층 더 모르겠군. 실로 모르겠어.”

무슨 질문이 이렇단 말인가.

질문 하나하나가 끔찍하기 그지없다.

결코 일어나서도 안 될 테고,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도, 일어나는 것을 상상하는 것조차도 끔찍하다 미루어질 일 아니던가.

적우각은 아파오는 미간을 주무르며 머리를 쥐어짜 대답했다.

“글쎄, 그것은 덮지 못하겠지. 내 의지와는 무관할 것이야. 이 장소에서 모종의 사건이 일어난다면, 마교는 총력을 다해 그 주체를 쫓을 것임이 분명할 걸세.”

그것은 더 말 할 여지도 없으리라.

지금의 이 결투장, 지난날에 비해 사람이 많이 불참했다고는 한들 여전히 수천의 눈이 지켜보고 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이 결투, 이 천마지회의 공증인이나 다름없는 바─

이곳에서 무언가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마교 전체에 대한 도발과도 다름이 없었다.

이곳에서 일어난 사고를 묻어버린다는 것은 곧, 마교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에 대해 눈을 감는 것과 마찬가지인 일이니까.

헌데.

대관절 그것을, 왜 지금 자신에게 묻는단 말인가.

“녹 소저, 도대체 뭣 때문에 이런 것을 묻는가? 내 눈치 없단 말은 많이도 듣네만, 이건 신경을 쓰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군! 대체 무슨 생각인 건가!”

“글쎄요….”

녹지연은 말끝을 끌며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어느덧, 결투는 막바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채 반 시진도 되지 않아 모든 과정이 끝나고, 이 시험의 승자를 발표하게 되리라.

그러면 승자의 권리와 영예가 마땅한 자에게 돌아가고, 내일부터는 다시 또 다른 시험의 준비로 분주해질 테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의 뜻대로….’

녹지연은 눈을 감았다.

적우각이 옆에서 외쳐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고함을 계속 반복하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다.

그는 결국에는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적우각에게는 적철진과 같은 완고함도, 적영과 같은 철저함도 없으니.

그저 눈앞에 있는 것을 좇을 뿐인 남자지 않던가.

애초에, 이곳에서 만나 문답을 나눈 것이 예정에 있던 일도 아니었다.

그저 일종의 변덕.

한 번쯤, 누군가의 생각으로 자신의 계획을 점검해 보려던 얄팍한 생각에 불과했다.

─달칵.

녹지연은 품에서 작은 목함을 꺼내어 그 입을 벌렸다.

그 안에 있던 것은 작은 반지였다.

놀랍도록 불길하고, 경이로울 정도로 독한 기운을 품은, 검은색 반지.

그것을 본 적우각의 시선이 경악으로 물들었고, 녹지연은 그것을 자연스레 빼들어 한 번 손에 쥐었다.

“…당신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 녹운룡.”

결코, 이 시험이 정상적인 형태로 끝나서는 아니 되었다.

승자가 적가여서는 아니 된다.

적철진을 합밀로 보내서는 안 된다.

녹가의 늙은 뱀이 준비한 벌레의 소굴이 그곳에 있었다.

‘적철진이 그곳에 간다면, 정말로 모든 게 그 자의 손아귀에 떨어질 거야.’

결코 그 사람의 계획대로 되는 것을, 녹지연은 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준비했다.

오래도록 준비했다.

하지만 늦고 말았고, 이제서 정당한 방법으로 적가의 승리를 막을 방법은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대국에서 패배했다 한들, 결과를 돌이킬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아무리 비참하게 졌든, 이길 방법이 도저히 없든 간에 상관없다.

보는 눈은 없다.

이것은 공정한 경쟁도, 시시비비를 가리는 결투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저, 판을 엎으면 그만.’

녹지연은 검은 반지를 중지에 끼우고는, 오른손을 가슴팍에 가져다 대었다.

심장이 맥동하고, 반지가 내뿜는 독기가 기맥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심장에 자리한 벌레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몸 안에 새로이 들어온 기운을 감지한 탓이었다.

이미 십 년이 넘게 제 몸에서 생명을 갉아먹은 이 고독의 이름을, 녹지연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헌원고(軒轅蠱).’

이 벌레는 특수했다.

보통의 고독은 모고(母蠱)와 자고(子蠱)로 나뉘어, 한 쌍으로 이루어져 운용하는 것이 기본이다.

즉, 누군가의 몸에 심은 자고의 숫자만큼 모고가 필요한 것이다.

아들은 어미에 말에 복종하여 숙주에게 고통을 주지만, 제 어미가 아닌 다른 어미의 말을 들을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헌원고는 달랐다.

녹가의 끔찍한 천재는, 수십 년 동안 그 독고를 개량하여 분류를 세 가지로 나누기에 이르렀다.

헌고와 원고, 그리고 자고.

먼저─헌고는 어미다.

그저, 낳아 주는 어미.

통솔과 출산을 동시에 쥐고 있던 모고에게서 출산의 특성만을 비대시켜 놓았다.

그 결과, 통솔 능력이 거진 사라지게끔 퇴화한 대신 출산하는 숫자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자고들 중, 가장 빼어나게 우수한 한 마리.

그것이 원고가 된다.

원고는 아비다.

아니, 맏형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출산의 능력은 전혀 없지만, 자신 과 같은 배에서 난 모든 자고를 동시에 통솔한다.

가장 강력하고, 가장 독한 신호를 내뿜는 한 개체가 모든 자고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출산과 통솔, 그 두 가지를 완벽하게 양분함으로서 그 능력을 놀랍도록 특화시킨 것이다.

그것들을, 수십 년의 개발에 이어 완성된 그것들의 이름을 녹가주는 헌원이라 이름 붙였다.

‘…괴물 같은 인간.’

그러나 녹가주는 만족하지 않았다.

분명 이것으로 고독을 운용하는 것의 편의성은 크게 증대되었다.

허나.

그가 바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보다 은밀성을 띌 필요가 있었다.

마교의 이면에 숨어들어, 그 계획이 완벽하게 준비될 때까지 들키지 않고 그림자 속에 잠겨 있을 필요가 있었다.

고수일수록 자신의 몸에 대해 민감히 반응하고, 이물질이 침입한 것을 필히 알아낼 테니, 그에 대한 대책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그는 더 연구했다.

십 년.

그 이후에, 그것들에게 한 가지 특성을 더 각인시켜 주었다.

‘남국에서 들여온… 칠면석척(七面蜥蜴=카멜레온)이었던가.’

그 몸의 색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특이한 동물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빗대어, 헌원고에게도 비슷한 특성을 주었다.

다름 아닌, 주변에 ‘적응’하는 특성.

몸 안에 침입한 헌원고는 그 몸의 기운을 파악하고 흡수하여, 그것을 몸에 둘러 위장했다.

설령 절정에 이른 고수라 할지라도, 제 몸에 잠입한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말이다.

녹지연조차도 때때로 악의적으로 제 심장을 조여오는 고통과, 어릴 적 심어졌던 기억이 아니었다면─

심장의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을 숨기랴.

지난 수십 년, 무언가에 미쳐 살던 자신의 아비가 인생을 다해 만들어낸 역작이 바로 이것이었다.

수십 년 간 준비한 고독, 그리고 수십 년 간 준비한 계획.

‘당신의 장기짝으로 사는 건 지긋지긋해.’

그 계획을 파괴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를 치르는 개의치 않겠다.

그리 다짐했던 것이 언제였던가.

녹지연은 무언가를 준비했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검은 반지가 흉흉한 기를 뽐내며 더욱 그녀의 몸을 잠식해 들어갔다.

“크윽….”

그리고 그렇게, 조금을 더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체감할 수 없었다.

그저, 결과는 변함없이 적철진의 아이들이 승리를 차지했고, 이제 이 시험의 마지막 결과를 단상에 올라 발표하는 시간이 되었다.

이제 곧 때다.

적철진의 아이들이 승리를 차지하고, 그의 이름 석 자가 내뱉어지는, 모든 이목이 집중되는 그 순간에.

이 천산의 모든 관심을 이 고독으로 돌리리라.

“─장원!”

허나─

“청가의 청유백!”

녹지연은, 제 귀를 의심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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